57p.
..아이를 업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이제는 아기가 아닌 딸이 무거워 힘에 부쳤다. 아이를 등에 업은 채 허리를 겨우 펴고 일어서니 순간 눈앞이 핑 돌았지만, ‘지금부터는 아빠가 해줘야 할 일도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아빠 되기 연습이라는 다짐과 함께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밑을 주의하며 언덕을 따라 내려갔다. 딸은 다시 꾸벅꾸벅 잠이 든 건지, 내 등이 뜨듯했다. 무겁고 예쁜 혹이었다.

156p.
..처음부터 오래 탈 생각이었다고 여기고 싶지만 역시 불편한 마음을 지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같은 칸에 타고 있는 누군가에게 지금이라도 곧 내 부정을 들킬 것만 같았다. 내가 먼저 내리려 하지 않는 이상 전철은 언제까지고 계속 달려 나를 더 먼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그런 당연한 일들을 생각하면서도 전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는 나 스스로가 다른 승객들과는 달리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조금 더, 조금만 더 버티며 어느 때보다 피곤하다는 듯이, 난방이 잘 된 좌석에 하릴없이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158p.
..아직 어려 아빠의 죽음에 대한 현실감각이 없었던 시절, 꿈을 꾸었다. 비록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빠가 쓰던 방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인지, 함께 숨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빠가 세상을 떠난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태어난 아이였다. 마치 아빠와 삶을 교환이라도 한 듯.

186p.
...내 주변서 이어지던 연쇄적인 죽음이 내게 고하고 싶은 의미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빛의 뜨거움과 힘. 내 안에도 뜨거움과 힘이 차 있었다. 지난밤, 어떤 죽음도 떠올리지 않고 그저 붉게 빛나는 하늘을 깊이 바라보기만 했던 나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