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3p.
..생활은 나를 돌보는 자리가 분명했지만, 동시에 내게서 사라져가거나 무너지는 것도 공평하게 볼 수 있는 전망대이기도 했다. 이 작고 낮은 전망대에 올라서 혼자서 흔들리고 혼자서 균형을 잡았다. 중간은 없고, 언제나 모자라거나 넘치는 저울질 위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물건을 사려고 할 때 헛헛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는지 금세 눈치를 챌 수 있다. 물건이 집에 도착하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다루는지 상상해본다. 잠깐 기뻤다가 또다시 새로운 것에 밀려나 잊게 되는 상상을 하면,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며 순간을 모면하곤 한다.

51p.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희미해져 갈 때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내가 많이 묻어나는 것들, 내 시간의 범주 안에서 빈티지가 되어가는 것들.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너무 많은 새것들 혹은 새로운 것들만 남겨진다면 익숙함에 기대어 서 있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새로움이 주는그 잠깐의 기쁨 대신에 고리타분한 내 것을 더 고쳐주고 돌보며 내게서 지속되는 오래된 마음과 닮은 것들을 갖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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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지, 네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이제 알았겠지. 이게 바로 평범한 작가와 문학가의 차이야. 문학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건 최고의 경지야. 그 경지에 다다르면 소설 속 인물이 문학가의 사상 속에서 생명을 얻지. 문학가는 그 인물들을 통제할 수 없어. 그들이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지도 예측할 수 없어. 그저 호기심을 가지고 그들을 따라다니지. 관음증 환자처럼 그들의 생활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거야."
.."문학 창작이란 변태적인 일이구나."
.."적어도 셰익스피어, 발자크, 톨스토이는 그랬어. 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모두 이런 식으로 그들이 상상한 자궁에서 태어난 것들이야. 하지만 요즘 작가들은 이런 창조 능력이 없어. 그들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하나같이 지리멸렬한 조각과 괴물들뿐이지. 그 짧은 생명으로 비이성적이고 난해한 경련을 일으킬 뿐이야. 작가들은 그 조각들을 자루 속에 쓸어 담아서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상징주의 같은 라벨을 달아서 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순간 고등학교 물리 선생님이 냈던 사고력 문제가 떠올랐다. 어떻게 하면 대리석 침대 위에 누워서 시몬스 침대에 누운 것처럼 푹신함을 느낄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대리석 표면을 사람의 뒷모습과 똑같은 형태로 파낸 뒤 그 안에 눕는 것이다. 그러면 몸의 각 부위에 균일한 압력이 전해지기 때문에 푹신함을 느낄 수 있다. 뤄지는 두 눈을 감고 자신의 체온이 철광석을 녹여 자기 몸에 딱 맞는 요철을 만들어내는 상상을 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천천히 냉정함을 되찾았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뜨고 특별할 것 없이 수수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삼체인들이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존할까요? 그들은 인류의 문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들이 우리를 벌레라고 칭하기 때문에요? 그건 달라요. 다른 민족이나 문명을 존중하는 최고의 방식이 뭔 줄 알아요?"
.."그게 뭐죠?"
.."바로 멸종시키는 거예요. 그건 문명에 대한 최고의 존중이에요."

..‘문명이 시간을 위해 흐르게 하고, 시간이 삶을 위해 존재하게 하라.’

..어젯밤 강연에서 당신이 말했다. 우주가 암흑의 숲이라는 사실을 인류가 오랫동안 깨닫지 못한 것은 문명이 성숙하지 못해 우주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에게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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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추론이 그녀를 두렵게 했고 공포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했다. 아마도 인간과 악의 관계는 대양과 그 위에 떠 있는 빙산의 관계로, 둘은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빙산이 눈에 잘 띄는 이유는 그저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고, 그것의 실체는 거대한 물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인간 스스로 도덕적 자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 이외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
..이 생각이 예원제의 일생을 결정했다.

.."외계 문명 탐사는 매우 특수한 분야야. 연구자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사람 소리도 모두 끊긴 깊은 밤, 이어폰으로 우주에서 전해지는 생명이 없는 소리를 듣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그 별들보다 더 영원한 것 같았어. 때로 그 소리는 다싱안링의 겨울에 끊임없이 몰아치는 바람처럼 차가워. 그 고독은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 때로 야근을 마치고 나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들이 마치 빛나는 사막처럼 느껴졌어. 나는 그 사막에 버려진 불쌍한 아이 같고……. 이런 생각이 들어. 지구의 생명은 정말 우주의 우연 속의 우연이라고. 우주는 텅 빈 큰 궁전이고 인간은 그 궁전에 있는 유일한 하나의 작은 개미지. 이런 생각은 내 후반 생에 모순된 감정을 심어줬어. 때로 생명은 정말 귀해서 태산보다 무겁게 느껴지지만, 또 때로는 인간이 너무나 보잘것없이 미미하게 느껴져. 어쨌든 삶은 이런 이상한 감정 속에 하루하루 지나갔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늙었지……."

..예원제의 기억 속에서 그때 그 시절은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인생 한 토막이 깃털이 되어 자기 삶에 날아들어온 것 같았다. 그때의 기억은 유럽의 고전 유화로 농축되었다. 이상했다. 중국화가 아닌 유화였다. 중국화에는 여백이 너무 많지만 치자툰에서의 생활은 여백이 없었다. 고전 유화처럼 짙은 색채로 충만했다. 모든 것이 강렬하고 뜨거웠다....

.."외계인 함대가 지구를 향해 날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 나는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과거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겁니다. 내가 겪은 전쟁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더군요. 방금 말한 것처럼 그 전쟁들은 하나같이 하찮았어요. 그 일을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정신적으로 새사람이 될 겁니다. 세계도 새로운 세계가 될 것이고요. 만일 2000년 전이나 그보다 더 일찍 사람들이 외계의 침략 함대가 몇천 년 뒤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지금의 인류 문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고 나는 줄곧 생각했습니다. 교수님, 당신은 상상이 됩니까?"

...잘 쓴 과학소설이란 제일 변화무쌍하고 제일 정신 나간 상상을 뉴스 보도처럼 진실하게 쓴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과거의 기억은 언제나 진실하다. 나는 역사학자가 과거를 진실하게 기록하는 것처럼 소설을 쓰고 싶다. 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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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명확한 대답은 없다. 적어도 나는 잘 모른다. 20세기에 탄생한 독자적인, 반지성적이며 본능적인 정치체계라고 풀이해 봤자 결국 그것은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굳이 말하자면 파시즘이란 바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애당초 파시즘의 프랑스어 어원인 ‘faisceau’는 ‘몇 개의 총부리를 다발로 묶어서 세우는 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갖다 붙이자면 이 ‘수박씨의 줄’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생리적으로나 본능적으로나 저항감을 느끼게 하는 이 섬뜩함은 파시즘이 갖는 공포와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 생각해.

..대중이 움직이는 때라는 것은 모두가 미리 약속하고 움직이는 때가 아닌 법이다. 저마다가 저마다의 판단으로 발을 내디뎠는데, 그게 어쩌다 보니 커다란 움직임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식이 아닐까? 무심코 한 동작이 파도를 일으키고 격류를 만들어 낸다. 유능한 선동가란 그렇게 본인들도 깨닫지 못하는 흐름과 조수를, 그리고 세상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에 능란한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그 말은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세상이나 환경 같은 규모가 큰 일을 고민하고 우려하는 사람이란 어지간히도 할 일 없는 사람이라는 거지. 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소설가나 학자 같은 사람은 다들 여유가 있으니까 그런 장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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