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추론이 그녀를 두렵게 했고 공포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했다. 아마도 인간과 악의 관계는 대양과 그 위에 떠 있는 빙산의 관계로, 둘은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빙산이 눈에 잘 띄는 이유는 그저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고, 그것의 실체는 거대한 물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인간 스스로 도덕적 자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 이외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 ..이 생각이 예원제의 일생을 결정했다.
.."외계 문명 탐사는 매우 특수한 분야야. 연구자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사람 소리도 모두 끊긴 깊은 밤, 이어폰으로 우주에서 전해지는 생명이 없는 소리를 듣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그 별들보다 더 영원한 것 같았어. 때로 그 소리는 다싱안링의 겨울에 끊임없이 몰아치는 바람처럼 차가워. 그 고독은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 때로 야근을 마치고 나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들이 마치 빛나는 사막처럼 느껴졌어. 나는 그 사막에 버려진 불쌍한 아이 같고……. 이런 생각이 들어. 지구의 생명은 정말 우주의 우연 속의 우연이라고. 우주는 텅 빈 큰 궁전이고 인간은 그 궁전에 있는 유일한 하나의 작은 개미지. 이런 생각은 내 후반 생에 모순된 감정을 심어줬어. 때로 생명은 정말 귀해서 태산보다 무겁게 느껴지지만, 또 때로는 인간이 너무나 보잘것없이 미미하게 느껴져. 어쨌든 삶은 이런 이상한 감정 속에 하루하루 지나갔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늙었지……."
..예원제의 기억 속에서 그때 그 시절은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인생 한 토막이 깃털이 되어 자기 삶에 날아들어온 것 같았다. 그때의 기억은 유럽의 고전 유화로 농축되었다. 이상했다. 중국화가 아닌 유화였다. 중국화에는 여백이 너무 많지만 치자툰에서의 생활은 여백이 없었다. 고전 유화처럼 짙은 색채로 충만했다. 모든 것이 강렬하고 뜨거웠다....
.."외계인 함대가 지구를 향해 날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 나는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과거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겁니다. 내가 겪은 전쟁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더군요. 방금 말한 것처럼 그 전쟁들은 하나같이 하찮았어요. 그 일을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정신적으로 새사람이 될 겁니다. 세계도 새로운 세계가 될 것이고요. 만일 2000년 전이나 그보다 더 일찍 사람들이 외계의 침략 함대가 몇천 년 뒤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지금의 인류 문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고 나는 줄곧 생각했습니다. 교수님, 당신은 상상이 됩니까?"
...잘 쓴 과학소설이란 제일 변화무쌍하고 제일 정신 나간 상상을 뉴스 보도처럼 진실하게 쓴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과거의 기억은 언제나 진실하다. 나는 역사학자가 과거를 진실하게 기록하는 것처럼 소설을 쓰고 싶다. 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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