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은 오랫동안 내린 비로 범람한 큰 강물과 닮았다. 지상의 표지판이나 방향판 같은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그 탁류 속에 모습을 감추고, 이미 어딘가 어두운 장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비는 강 위로 계속 억수같이 퍼붓고 있다. 그런 장마 광경을 뉴스 같은 데서 볼 때마다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지, 꼭 그대로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라고. - P-1

..지금부터 백 년 뒤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나를 포함해서) 지상에서 사라져, 먼지나 재가 돼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여기 있는 모든 사물이 허무한 환영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바람에 당장이라도 흩날려 없어질 것처럼 보인다. 나는 두 손을 펼치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악착같이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 P-1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무명無明의 세계는, 그 무거운 침묵과 혼돈은, 오래된 그리운 친구이자 지금은 자신의 일부이기도 했다. 나카타 씨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세계에는 글씨도 없고, 요일도 없고, 무서운 지사님도 없고, 오페라도 없고, BMW도 없다. 가위도 없고, 길쭉한 모양의 모자도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장어도 없고, 팥빵도 없다. 거기에는 전부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 부분은 없다. 부분이 없으니까 이것과 저것을 바꿀 필요도 없다. 떼어 내거나 덧붙이거나 할 필요도 없다. 어려운 일은 생각하지 않고, 전부의 속으로 몸을 담그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나카타 씨에겐 무엇보다도 고마운 일이었다. - P-1

..정오가 조금 지나자 검은 구름이 갑자기 머리 위를 뒤덮는다. 공기가 신비스러운 색깔로 물들어 간다. 곧이어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고 통나무집의 지붕과 유리창이 애처로운 비명을 지른다. 나는 즉시 옷을 벗고 알몸이 되어 빗속으로 뛰어든다. 비누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다. 멋진 기분이다. 나는 큰 소리로 의미도 없는 말을 외쳐 본다. 크고 단단한 빗방울이 작은 돌멩이처럼 온몸을 때린다. 온몸에 따끔하게 느껴지는 통증은 종교적인 의식의 일부 같다. 그것은 내 뺨을 때리고, 눈꺼풀을 때리고, 가슴을 때리고, 배를 때리고, 페니스를 때리고, 고환을 때리고, 등을 때리고, 다리를 때리고, 엉덩이를 때린다.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아픔에는 분명히 아픔보다는 친밀한 정감이 깃들어 있다. 이 세계에서 내가 한없이 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것이 기쁘다. 갑자기 해방감을 느낀다. 나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 흘러 들어오는 물을 마신다. - P-1

.."자네는 이미 자네가 아니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혀 위에서 천천히 음미했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일세, 나카타 씨.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것은 말이야."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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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3p.
..그러나 그렇게 설명한들 과연 너는 얼마나 이해해줄 수 있을까? 움직임이 없고 말수 적은 이 도시에서 너는 태어나 자랐다. 간소하고 정밀한, 그리고 완결된 장소다. 전기도 가스도 없고, 시계탑에는 바늘이 없고, 도서관에는 단 한 권의 책도 없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본래의 의미만을 지니고, 모든 것이 각자 고유의 장소에, 혹은 눈길이 닿는 그 주변에 흔들림 없이 머물러 있다. - P-1

186p.
..오래된 꿈—그것은 내 그림자가 추측하듯 긁어내어져 밀폐 보존된 사람들 마음의 잔재일까? 나로서는 그 가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내가 보는 한 눈앞에 있는 건 병조림처럼 가둬진 ‘혼돈의 소우주‘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란 이토록 불명료하고 일관성이 결여된 것인가? 혹은 오래된 꿈이 이처럼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메시지밖에 내보낼 수 없는 건, 그것이 결속된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남은 부스러기‘를 모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까? - P-1

336~337p.
..그 정경은 어릴 적 읽었던 그림책의 한 장면 같았다. 무언가가 지금부터 바뀌려 한다—그런 예감이 들었다. 길모퉁이를 돌면 그곳에서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소년 시절 내가 종종 느꼈던 감각이다. 그 무언가는 내게 중요한 사실을 알리고, 그 사실은 또 내게 응분의 변용을 재촉하리라. - P-1

637p.
..카운터 위에 놓인 내 손에 그녀가 손을 포갰다. 매끄러운 다섯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조용히 얽혔다. 종류가 다른 시간이 그곳에서 하나로 포개져 뒤섞였다. 가슴 밑바닥에서 슬픔 비슷한, 그러나 슬픔과는 성분이 다른 감정이 무성한 식물처럼 촉수를 뻗어왔다. 나는 그 감촉을 그립게 생각했다. 내 마음에는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영역이 아직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다. 시간도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 - P-1

694p.
..나는 손을 뻗어 옆에 있는 너의 손에 닿는다. 그리고 그 손을 잡는다. 너도 내 손을 잡는다. 우리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나의 젊은 심장이 가슴속에서 메마른 소리를 낸다. 나의 기억이 선명한 예각을 지닌 쐐기가 되고, 나무망치가 그것을 올바른 틈새에 정확히 박아넣는다. - P-1

737~738p.
.."시간이 없으면, 축적이란 개념도 없는 건가?"
.."네, 시간이 없는 곳에는 축적도 없습니다. 축적처럼 보이는 현상은 현재가 던져주는 잠깐의 환영일 뿐이에요. 책장을 한장씩 넘기는 광경을 상상해보세요. 책장이 넘어가는데 쪽 번호는 변하지 않는 겁니다. 뒷장과 앞장이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주위 풍경이 바뀌어도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늘 현재밖에 없다?"
.."그래요. 이 도시에는 현재뿐입니다. 축적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덮어쓰이고 갱신됩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계입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는 사이, 촛불이 크게 한 번 흔들리며 이윽고 꺼졌다. 방에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시간도 사라졌다. - P-1

761p.
..나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 몇 초 동안 수많은 정경이 차례로 뇌리에 떠올랐다. 가지각색의 정경이다. 내가 소중하게 지켜온 모든 정경이다. 그중에는 비가 쏟아지는 드넓은 바다의 광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임은 없다. 아마도.
..나는 눈을 감고 몸속의 힘을 한데 모아, 단숨에 촛불을 불어 껐다. - P-1

766~767p. 작가 후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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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p.
...나는 성큼성큼 걸었다. 갑자기 훌쩍 자란 느낌이었다. 내가 하나의 개체가 된 만큼 주변 사물도 하나하나 개체로 보였다. 이제 우리는 같은 눈높이로 마주보았다.... - P-1

39p.
..한번은 내가 버린 스웨터를 입은 남자아이를 본 적이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았다. 낡고 해져 더는 나에게 필요 없는 무언가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물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P-1

80p.
..굵직굵직한 사건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바람에, 기억의 그물코가 점점 좁아져 결국엔 망각의 운명에 빠져야 할 사소한 일들까지 함께 기억되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엔 사소한 일들도 마치 기생충처럼 인상적인 사건들에 깊이 스며들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 P-1

126p.
..바람은 아버지에게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람 중에는 스웨덴 바람, 영국 바람, 러시아 바람, 그리고 희귀한 사막 바람이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바람의 세기였다. 바람이 강할수록 바다를 지나온 시간은 짧았다. 아버지가 다시 방에 들어와 내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면 우리는 방금 전 집 밖의 키 큰 피나무에서 소리를 낸 돌풍의 이동 시간을 계산했다. 폭풍이 불면 바람이 해안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데는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면 공기에서 소금 냄새가 났고, 피나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 P-1

134p.
...나는 누워 비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방문도 완전히 닫는 법이 없었고, 복도 조명도 계속 켜져 있어야 했다. 길쭉한 빛줄기가 정확히 내 침대 끝을 지나갔다. 나는 빛줄기 속으로 발을 넣었다. 내 몸의 어딘가는 환한 세계에 남아 있어야 했다. 맨발은 깨어 있고 나를 보호해야 했다. 복도의 조명, 살짝 열린 문틈, 빛의 절단면, 다림질하는 어머니, 새로 깐 침대 시트, 비스듬히 열린 창문, 환자들의 지옥 같은 연주로 가득 찬 저녁의 온화함. 이 모든 게 완벽했다.... - P-1

138~139p.
..당시 내가 했던 대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내 대답을 좋아해서 자주 반복했기 때문이다.
.."신발이 너무 잘 맞으면 신발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잊어버려요.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사면 아빠는 그걸 신고 있다고 항상 떠올리고 싶어 해요. 발이 조이는 신발을 신으면 그걸 신고 있다는 걸 잊을 수가 없어요."
.."오, 영리한 대답이다! 내 생각도 그래. 편안함과 망각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 P-1

192~193p.
...사실 선물이라는 건 그렇게 다루어달라고, 그렇게 파괴해달라고 외치기 마련이다. 만일 내가 잘 부서지는 선물, 예를 들어 완벽하게 깎아놓은 색연필 상자를 받아들면 뭔가 알 수 없는 전율이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선물의 원래 성질을 통해 증폭된 일종의 과민 상태였다. 나는 색연필을 받은 것이 기뻤지만 동시에 연필을 부러뜨리는 상상을 했다. 연분홍색부터 검은색까지 서른여섯 자루 모두를. 그렇다면 가족 행사에서 무언가를 망가뜨리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내게 큰 성취였고, 선물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나만의 경건한 헌신이었다. - P-1

261~262p.
...이상하게도 나는 분노 발작 때와 마찬가지로 기쁨의 눈물에도 적절한 대처 방법을 찾지 못했다. 무언가 나를 화나게 해서 미쳐 날뛰면 그건 항상 분노 유발자에 대한 단순한 반응 이상이었다. 분노는 원인을 넘어 나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갔다. 이 상태에 빠지면 나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소멸시키고 싶었고, 룸펠슈틸츠헨처럼 나 자신을 두 동강 내버리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평화롭게 연기를 내뿜는 숯가마를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행복함과 절망감을 동시에 느끼며 하염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모든 것에 눈물이 터졌고, 내 마음속 깊이 자리한 고통을 울음으로 쏟아냈다.... - P-1

295p.
...지금 돌아보니 어쩌면 우리 가족도 아버지에게는 항상 하나의 관념이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정신병원장으로서의 삶과 요트 선장으로서의 삶, 자급자족하는 농부로서의 삶은 물론이고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의 삶, 그리고 우리 가족조차 아버지가 안락의자에 앉아 책에 몰두하거나 우리와 멀리 떨어져서 만들어낸 하나의 이론일 수 있었다. - P-1

362~363p.
.."네가 하는 일 중에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있고, 내가 하는 일 중에도 너와 상관없는 일이 있어."
..아버지는 고개를 숙여 계속 책을 읽었다.
..나는 몇 달 동안 이 말을 마음의 상처로 안고 다녔는데, 나중에야 아버지의 그 말이 내게도 도움이 되는 큰 자유를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1

478~479p.
..점점 더 그런 느낌이 든다. 과거란 사실 미래보다 훨씬 더 불확실하고 확정되지 않은 곳이 아닐까 하고. 흔히 우리는 내 뒤에 놓인 것이야말로 확정된 것이자 완료된 것이자, 이야기되기만 기다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것은 이른바 아직 만들어가야 할 미래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만일 과거 또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면? 철저히 파고들어 재구성한 과거로부터만 열린 미래 같은 것이 생겨난다면? 이런 생각이 나를 짓누른다. 그럼에도 가끔은 아직 내 앞에 놓인 삶이 내게 맞게 재단된, 피할 수 없이 끝까지 걸어가야 할 구간처럼 느껴진다. 끝까지 조심조심 균형을 잡으며 걸어가야 할 하나의 선처럼.
..그래, 나는 이제 믿는다. 내가 기억의 꾸러미를 다시 하나하나 풀어 꺼내놓을 때, 겉으로 확실해 보이는 과거에 대한 믿음을 접고 과거를 혼돈으로 받아들이고 형상화하고 꾸미고 기념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나의 죽은 이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 친숙하면서도 내가 지금껏 인정한 것보다 더 낯설고 자율적인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나는 현재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미래는 그 영원한 약속을 이행하고 불확실해지고, 하나의 선이 하나의 면으로 넓어질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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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p. «최애의 아이»
...그러나 우미의 지론에 따르면 애초에 젊음이란 해지기 위해 발명된 것이므로 젊은 아도니스에게 어울리는 건 명품이 아닌 싸구려 천이었다. 만약 우미가 유리의 사진을 찍었다면 폐공장을 섭외하고 청바지를 입혔을 거다. 입안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페인트 사탕을 빨아 파랗게 물든 혓바닥, 아무하고나 주고받는, 고양이 같은 혓바닥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더러운 매트리스에 깔린 보푸라기 인 담요 위에서 까슬까슬한 음모를 내보일 것이다. 젊음은 거기 존재하니까.... - P-1

111p. «마유미»
.."남자들도 그런 거겠지? 내가 남자가 된다고 상상하면 곧장 수컷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 사람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거겠지? 간장 같은 여자가 진짜 여자라는 걸 말야."
.."글쎄."
.."그런 남자들도 나를 보면 역겨운 마음이 들까? 내가 남자 아닌 남자들이 역겹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 P-1

216~217p. «해변 지도로부터의 탈출»
...푸른 어둠 속을 걸으며 미도는 가장 넓은 땅을 가진 독재자도 그가 가진 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다리에 느껴지는 피로가 어제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걸은 탓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난 일은 전부 과거가 된다고 해도 어제의 몸은 오늘의 몸에 영향을 준다. 오늘의 몸은 내일의 몸을, 내일의 몸은 그다음날의 몸을 변화시킬 것이다.... - P-1

369~370p.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
...실제 싸움에는 확실한 박력이 있었고, 그건 자주 레퍼런스 삼던 소년만화와는 달랐다. 말하자면 각오는 없는데 잔인하달까. 왜 그럴까, 생각하다 때리는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아서라는 걸 깨달았다. 맞을 걸 예상하면 웅크리게 될 텐데, 일방적으로 치기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드니 잔혹한 호쾌함이 나오는 거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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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p. «어느 <고쿠라 일기>전»
...가을밤 히비키나다의 파도 소리에 섞여 바깥을 지나는 방울 소리가 들려오면 희미한 서글픔을 느꼈다. - P-1

61p. «어느 <고쿠라 일기>전»
..그 밤이 물러가기 전에 혼수상태에 빠진 그는 열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눈발과 볕이 갈마드는, 오가이가 ‘겨울 소나기‘라고 말했던 그런 날이었다. - P-1

91p. «공갈자»
...그녀에게 그렇게 믿게 하고 그 가설의 약점을 찔러서 돈을 우려내는 것 말고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인연도 없다. 두 사람의 관계를 잇는 유일한 끈은 그녀에게 돈을 우려내러 찾아가는 행위뿐이다. 그럴 때만 잡부인 그가 소장 사모님과 대등해진다. 아니, 우월한 사람이 된다. - P-1

192p. «이외지리»
.."현재 요쓰야 초소에서 해자 옆길을 따라 아카사카 초소로 가다 보면 중간에 구이치가이 초소가 보이는데, 그곳에서 기오이초를 향해 좁은 토성 길을 건너가면 구이치가이 문이 있습니다. 지금도 예전 문의 돌담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호텔 뉴오타니로 가는 근방이죠. 호텔이 서 있는 근방이 이이 가의 저택, 그 옆이 기슈 가의 저택, 이이 가 앞에 오와리 가의 저택, 그렇게 세 개의 저택이 나란히 있으므로 그 세 가문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기오이자카라는 지명이 생긴 겁니다. 구이치가이 문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성문을 만들지 않고 건乾 방위(북서쪽)를 지키기 위하여 목책만 설치했었지요. 토성 사이의 초입과 대문의 위치가 조금 어긋나 있어서 구이치가이 문(‘구이치가이‘는 ‘어긋남‘을 뜻한다)이란 이름이 생겼겠지요. 지금은 그 책문 터에 쌓아 올린 돌담이 남아 있어요." - P-1

254p. «삭제의 복원»
..전기傳記에서 한 인간의 삶의 역사는 극도로 긴장된 결정적 순간만이 중시되며, 바로 그 순간만,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서 바라보아야만 전기가 바르게 쓰인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힘을 걸 때만 자기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이다. 내면에서 영혼이 불타오를 때만, 활활 타오를 순간에만 그는 외면적으로도 형상을 얻는 것이다. (『메리 스튜어트』에서) - P-1

275p. «수사권 외의 조건»
.."때려?"
..나는 기가 막혀서 그를 쳐다보았다. 보복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서로 한참 달랐다. - P-1

289p. «수사권 외의 조건»
..택시는 속도를 내며 ‘현장‘에서 멀어졌다. 지금쯤 가사오카 유이치의 호흡이 멎었을 것이다. 칠 년을 공들인 성과에 대한 감정은 너무나 가볍고 충실한 느낌도 없었다. 이것이 양감量感이 되어 밀착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리라. 나는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멍하니 생각했다. - P-1

306p. «진위의 숲»
..도로로 나서자 시원한 밤공기가 얼굴과 가슴을 쳤다. 별들도 훨씬 많아졌다. 그러자 방금 전의 허탈한 심정이 조금씩 채로 걸러지는 기분이었다. 늘어졌던 무엇이 찬바람에 금방 응고되어 가는 것과 비슷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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