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p.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나는 남자와 여자가 아이를 만드는 행위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습니다. 젊은 동료들은 "저런 남자하고 끌어안는 것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며 싫어하는 남자를 매도하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은 나지도 않습니다. 섹스라고 하는 남자와 여자의 행위에 대한 상상은 건너뛰고, 태어날 아기의 모습밖에는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는 약간 비정상인 인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70p.
..가즈에도 그랬지만, 외부에서 들어와서 내부 학생을 흉내 내는 학생에게는 여유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내부 학생이 발산하는 부의 음탕함이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었거든요. 부富라는 것은 항상 과잉을 낳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고 음탕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부로부터 자연스럽게 줄줄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 음탕함은 설사 겉모습이 평범하더라도 그 학생을 특별한 존재로 꾸밀 수 있는 것입니다. 부유한 학생들은 모두 음탕하고 향락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고에서 부의 본질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116p.
..나는 외할아버지와 생활하면서 절약을 몸에 익혀왔기 때문에 퍼뜩 감이 왔습니다. 그런 집은 빈틈이 없고 꽉 차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절도 없이 문란한淫靡‘ 공기가 감돌게 마련입니다. 절약하는 바지런함, 그 자체가 ‘절도 없는 문란‘ 입니다. 절약하여 무엇인가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 실은, 절도 없이 문란한 것입니다.

135~136p.
..내가 주택가의 모퉁이를 돌 때까지 아저씨는 틀림없이 내 등을 노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4년 후, 가즈에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허망하게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에게는 이때의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즈에네 집은 급속히 무너져 내렸는데, 나는 붕괴 직전에 가즈에네 집의 무상한 행복을 목격한 셈입니다. 내 등에는 아직도 그때의 아저씨의 시선이 총탄처럼 깊이 박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아저씨가 대변하는 사회로부터 저격당한 상처가.

157p.
...나는 카알의 눈빛 속에 있던 경외나 동경이 관계한 뒤에 사라진 것을 느꼈다. 나와 관계한 남자들은 누구나 다 뭔가를 상실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때였다.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새로운 남자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내가 창녀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8p.
..요컨대,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노력이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의 인내 끝에, 일시적인 자기만족을 얻는 것. 나는 노력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

230p.
..그렇습니다. 괴물 같은 미모를 지닌 유리코와 우리는, 여자라는 같은 생명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믿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타고난 모습과 외모가 이 정도로까지 다르다는 것을 실제로 보게 되면 미추美醜라는 상대적인 판단은 아무래도 좋게 되고, 단 하나뿐인 절대적인 미와 평범한 그밖의 것이라는 상황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유리코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하잘것없어,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로만 존재하는 여자 외에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립니다. 괴물은 본인 이외의 인간을 전부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288p.
..나와 미쓰루가 살아남기 위해서 각자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으려고 노력하는 데 반해서, 가즈에는 자신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모르는 여자는 타인의 가치관을 거울로 삼아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세상에 자신을 적응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망가지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598p.
...이면의 인간은 양지 바른 곳에서 사는 인간이 만드는 그림자에는 민감합니다. 누구나 은밀히 숨기고 있는 검은 생각이 나를 공명케 하는 것은 내가 이면에 있어서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는 양지 바른 곳에 있는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를 양식으로 먹고 살아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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