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엑스쿨투라 5
알랭 바디우 &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현성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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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바디우와 엘리자베스 루네데스코의 라깡과 정치에 관한 대담을 읽었다. 일반적으로 정신분석을 개인적 영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신분석의 사유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우리세계의 담화는 대타자의 담화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대타자는 언어의 장소로서 우리는 언어의 토양에서 태어나 상징계(언어시스템) 속에 철저히 지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정신분석에서 치료란 하나의 형식을 전제하는 동시에 그것을 가로지르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바디우는 그 하나의 형식은 무의식의 객관적인 구조이며, ‘치료란 그 구조들의 연관되면서 그것을 재단하고 조각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무의식에는 객관적인 구조가 전제되어 있으며, 이 구조들을 분석하고, 해체하는 작업, 즉 시니피앙과 주체사이의 관계 분석을 통하여 환상의 횡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것 같다. 분석이 전혀 일반적인 치료의 목표인 회복은 아닌 것이다. 바디우는 분석은 주체가 다시 스스로를 일으켜서 새로이 살 수 있는 실재의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굴복했었던 운명을 격파하여 새로운 운명, 인생을 살 수 있는 주체의 능력의 회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상징계와 상상계의 직조된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 역시 언어의 산물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자신의 한계를 또 무한한 가능성으로 언어로 표현한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자신의 유한성에 구멍을 내는 일, 그리하여 자신을 한계지었던 언어의 둑을 유실시키면, 새로운 유류가 흐르게 될 것이다.

바디우는 말한다. “ 그것은 운명으로 보이는 것을 굴절시키고, 주체의 능력을 다시 열어젖히는 행위라고 말이다.

라깡은 치료의 목적이 무능을 불가능한 것으로까지 들어올리는 일이라는 말에서 무능, 분석수행자의 무기력을 실재로 들어올리는 일이다. 바디우는 상상계라는 함정 속에서 질척대는 주체를 자신의 상징화 능력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는 실재의 지점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그 무능이 타개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철학적 측면에서도 이점은 주목할 만하다. 바디우는 치료행위는 무의식의 구조(형식)을 가로지르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이 형식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재와의 조우를 이론화 하려면 그 형식적 문맥에 연결시켜야 한다. 바디우가 형식적 문맥이라고 일컫는 것은 정신분석이 언어를 기반으로 한 무의식의 구조를 파악하는 일이므로 이를 이론화하기 위한 문맥은 내담자의 구성한 자신의 무의식의 논리구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라깡은 과학주의, 몽매주의라는 두 가지 암초를 피해가며 치료에서 하나의 단절을 상정한다. 이 단절은 무의식의 합리적 형식들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바디우는 있는 것의 형식과 이 형식과 결별하는 것이 병존하는 지점, 즉 형식들의 문맥 속에서 실질적 단절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데 알맞은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를 한다. 그것은 결정론이나 새로운 종교적 지평이 아닌 예측할 수 없는 실재- 사건-을 인정하는 하나의 철저한 유물론이다.

 

있는 것의 형식과 결별이란 무엇인가. 이 것은 비존재, 우리가 대상으로 현시화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상징화할 수 없는 실재를 조우하는 지점이 바디우가 이 형식과 결별이 병존하는 지점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지점, 형식들의 포함될 수 없는 지점을 사유할 수 있는 형식주의를 그는 연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자신을 철저한 유물론자라고 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 모든 사람이 정신분석을 받을 필요는 없다.

 

바디우는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 그는 정치적 행동과 사랑을 통한 발견, 연극적이고 소설적인 글쓰기, 수학적 형식주의 취향을 경유가 결국 철학 안으로 모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분석으로 이 경험들을 중복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석이 바디우가 말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가? 전이를 통한 자신의 반복적인 사랑의 발견, 그리고 연극적 글쓰기, 시니피앙의 발견 속에서 형식(구조)에 대한 사유 그리고 개인분석이 정치적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 등은 바디우가 언명한 실천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바디우는 어쨌든 일관된 정치적 논리에 참여하고, 다양한 철학적 상징화를 활성화하며, 실존 속에서 특히 행복했던 저는 치료없이 온전히 지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반면 루디네스코는 교육분석으써 정신분석을 받았으며, ‘자기 횡단을 통한 정치적 참여의 명석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정신분석을 경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각자의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스스로 창안할 수 있다면 정신분석이 굳이 필요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아니에르노의 소설을 몇 권을 읽었다. 최근 노벨상으로 더욱 유명한 작품 단순한 열정을 보고 그녀는 정신분석이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스테리의 극단이 그녀를 독창적 글쓰기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고통이라 쓰고 주이상스라 읽혀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두가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신분석적 담화, 즉 상징계의 노후성을 각자가 깨닫는다면, 어쩌면 언어의 의한 우리사회의 많은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않겠는가?

 

 

라깡과 정치

 

라깡은 정치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않는 것으로 정치활동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실제 라깡은 자신의 가르침이 어떤 형태로든 이데올로기적으로 또는 당파적으로 재활용되는 일을 금했다고 한다. 그러나 텍스트에 따르면 라깡의 사유는 정치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바디우는 라깡의 정신분석은 의미심장한 정치적 문맥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주체의 애초의 무능력한 상태와 관련하여 주체의 어떤 확충을 겨냥하는 치료의 깊은 의미를 재발견 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것은 집단적 차원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바디우는 보았다. 바디우는 정치의 장이란 어떤 결정된 상황이 불가능하게 막고 있는 삶은 가능성들을 해방시키는 일에 상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깡의 치료는 그 본래의 실행에서는 탈정치적이지만, 사유에 있어서는 일종의 정치적 모태를 제안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바디우는 라깡의 사유와 혁명적 유형의 행동방식 사이에서 어떤 연속성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는 혁명적 유형의 행동방식이란 국가적 억압에 의해 봉쇄된 집단의 개방성을 다시 가동시키는 것이라 본 것이다. 정신분석이 억압에 의한 개인의 유한성을 무의식에 개방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

 

라깡은 프로이트를 마르크스에 견주고, 자신은 레닌에 견주었다. 라깡을 정신분석학의 레닌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레닌은 어떤 인물인가? 프로이트는 의학의 치유논리, 마르크스는 코뮌주의를 약속하는 입장에 있으나, 레닌은 코뮌주의에 대한 약속이 아닌 결단하고, 행동하고, 조직하는 입장에 있다.

라깡은 정신분석을 사회적응의 시각으로 보는 것에 완강히 반대한다. 라깡에게 정신분석의 관건은 더욱 근원적인데, 그것은 정치와 상관없이 주장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해방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라깡의 사유는 68혁명과 1980년대 사이에 젊은이들을 총궐기하게 만들었던 추동적 요인들 중 하나였다.

바디우는 68혁명에서 급진좌파가 나타나는데 라깡의 사유가 주요하였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루디네스코는 라깡에게 68혁명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운동이였다고 보았다. 그녀는 그것은 일반화된 해방 의지가 아니라, 반대로 좀 더 잔인한 노예상태에 대한 저항자들의 무의식적 욕망을 표현한 것이었죠.” 말한다.

라깡은 혁명은 항상 자기가 제거한 지배자보다 더 포악한 지배자를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루디네스코는 이는 학생들의 시위가 대학에서 과거의 스승(주인)의 기능을 제거하고 이를 의사소통과 교육관계라는 이상에 기초한 폭군적 체계로 대체되는 것과 같이, 폭력적 혁명이 대학에서 테크노크라트들이 지식인들을 대체하게 된 핵심적인 단계 중 하나 였다는 것이 오늘 날에 더욱 분명해 보인다고 말한다.

 

 

라깡의 정치적 입장

 

1969년 파리8대학에서 라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가로서 여러분들의 갈망하는 것은 바로 주인입니다.”

 

라깡의 이같은 선언은 바디우에게도 삼키기 힘든 쓴잔 이였다.

혁명가로서 여러분들이 열망하는 것은 스승(주인)입니다. 여러분은 스승(주인)을 얻게 될 것입니다. ... 나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반진보주의자인 한에서만 자유주의자입니다. 다소 예외적인 것은 내가 진보적이라 불리운 운동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라깡은 정신분석적 담론이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지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도록 한다고 보았으며, 정신분석의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진보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라깡은 태도는 정신분석담론이야 말로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담론을 제공한다고 본 것이다. 비록 라깡이 투쟁적 사회참여를 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시사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였다. 라깡의 행보는 프랑스의 문화적 삶에 나타난 본질적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했다. “그는 오로지 정신분석 실천에만 투신함으로써, 또 실제로 그것이 정치적으로 재활용되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함으로써, 그러한 열망을 무화시켰다.” 라깡은 극단주의로 빠져드는 것을 막았으며, 그는 테러리즘의 진정한 방어막이자, 상징적 울타리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 마오주의자들이 라깡을 내세우기도 했다. 1960년대 라깡주의에 경도되었던 젊은 지식인들이 왜 1970년대 마오주의자가 되었는가? 바디우는 라깡의 주체개념 때문이라고 보았다.

자기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라깡으로부터 반항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하는 마오로의 이행은 당연한 일이였던 것이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이 혁명적 지도자가 아니라 영국의 정치모델과 비슷한 입헌 군주와 같다고 보았다. 라깡은 학생들에게 어떤 전이적 지배를 행사하였으나, 라깡은 그의 추종자보다 자신에게 매혹되지 않는 이들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녀는 라깡이 급진적인 점은 인간들 사이의 교환에 대해 어두운 전망을 가졌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깡의 치료라는 토대 위에 어떻게 혁명적 정치를 세울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그녀는 말한다. 라깡은 전통적 의미의 진보주의자가 아니며, 그렇다고 반동적인 사상가도 아니다.

 

라깡은 정치적활동에 투신한 것은 아니만, 정신분석의 담론이 정치적으로 재활용되기를 거부하였으나, 많은 이들은 라깡의 담론을 혁명의 추동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의 오해

 

루디네스코는 라깡은 오해한 사례를 들면서, 라깡의 입장을 설명한다. 몇몇 정신분석가들은 라깡에 기대면서 동성애들의 결혼과 그들의 아이 입양에 반대했다. 그러한 조치들이 아버지의 상징적 기능을 뒤흔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라깡은 동성애자 성향을 바꾸려 하지 않았고, 또 동성애자가 정신분석가가 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그들을 정신분석계에 받아들였다. 라깡은 성적차이를 생물학적 결정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늘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라깡이 1938년에 쓴 글인 가족 콤플렉스에서 라깡은 정신분석의 탄생을 아버지의 권위의 쇠퇴와 연결시킨다. 여기서 그는 아버지의 추락한 형상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가부장적 전능의 복원을 호소한 것은 아니다. 루디네스코는 정치적 측면에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라깡을 계몽적 보수주의로 보았다.

 

라깡은 진보주의자 인가, 보수주의자 인가? ; 아버지의 기능

 

바디우는 라깡의 타고난 재능 중 하나는 그 사유의 구성적 모호함에 있다고 보았다. 그 모호함이란 보수적인 측명과 극단적 급진성들의 요소들의 공존이기도 하다. 바디우는 인간동물의 변하지 않는 토양인 언어라는 토대는 태고의 법처럼 시니피앙이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조직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이러한 토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안할 수 있다고 보았다.

라깡에게서 법은 항상 언어와 욕망의 관계 안에서 이해된다. 인간의 욕망은 무제한적일 수 없는데, 항상 타자의 욕망과 부딪히기 때문이다. 법이 이 충돌에서 생겨난다면 그것은 성서의 십계처럼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언어적 분절이 규정하는 금지에 따라 우리의 욕망이 조직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언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관통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에서 상징계 진입 이전 유아의 욕망은 어머니의 욕망에 함입되어 있다가 아버지가 상징하는 타자의 욕망에 진입함으로써 어머니의 욕망을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조직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렇듯 주체는 시작도 끝도 모를, 언어와 욕망의 태곳적 부터의 얽힘에 내던져짐으로써 탄생한다. 라깡은 아버지가 영속적으로 법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죽음을 통해서뿐이라고 생각했다. 법에 시니피앙을 부여하는 것은 살아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바디우는 우리가 법과 아버지의 상징적 규정만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라깡을 반동주의자로 만드는 셈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우리가 무의식의 구조들에 사로잡혀 있긴 해도 자신의 욕망에서 물러서지 않는 지점을 도달한 주체의 경험에 방점을 찍는다며, 라깡은 해방의 사상가로서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디우는 이어 말한다. “ 사회 전체의 느닷없는 혁명이라는 관념은 의미가 없어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깡이 총체적 혁명이나 위대한 저녁(기존 권력이 전복되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수립되는 혁명의 날을 가리킨다) 을 믿지 않는 보수주의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옳은 일이죠. 그렇지만 그는 주체의 실천적 해방을 독단적으로 폐기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비판합니다. 우리는 라깡이 'Le nom-du-pere'’les non-dupes errent(속지 않는 자들은 헤맨다)‘라는 경구로 다시 표현했다는 것을 압니다. 속지 않는 자들이란 사태의 부정적 핵심을 안다고 주장하면서 해방의 가능성을 냉소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죠.”

 

바디우의 속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해석은 백상현 선샌님의 속지않은 자들과 다른 해석으로 보인다.

바디우에게 속지 않는 자들 해방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이에 대한 속지 않은 자들에 대한 맹정현의 해석은 정신분석의 목표는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극복은 단순히 욕망에 불과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욕망이 이미 죽어 있는 아버지에게 계속해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있다. 이러한 작업은 아버지를 경유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며 따라서 오이디푸스를 넘어서는 것은 오이디푸스를 비켜가는 문제가 아니라 거쳐가는 문제라 할 수있다. 속지 않는 자들은 방황한다는 라깡의 말은 속아주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백상현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말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의 마음의 방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보았다. 개인의 차원에서건 공동체의 차원에서건 상실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 주체는 고정관념에 의존하여 상처의 봉합을 시도한다. 이때 봉합에 참여하는 고정관념의 권위는 애도작업의 핵심이다. 라깡 정신분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말하는 상징계의 권력은 말의 세계에 속한 인간을 굴복시키고, 말의 질서에 동의 하도록 만들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힘이다. 만일 이 같은 아버지의 이름에 속지 않는자들이 출현한다면 그들에게 방황은 필연적이다.

 

아버지의 이름에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혁명에 속는자 만이 헤맨다둘 중에 어떤 해석이 맞는지는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듯 하다.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지.. 같이 논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듯 싶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이 이성과 현대성의 이면을 끊임없이 폭로하는 음울한 계몽의 사상가라고 표현한다. “그는 무한한 진보와 모두를 위한 행복이라는 이념을 믿지 않아요...그 변형인 공동체주의, 광적 개인주의, 그리고 특히 선동에 좌우되는 대중의 어리석음, 여론의 지배 말입니다.”

라깡은 현재에 좌파와 우파 이 진영 간의 싸움속에 숨겨진 우리의 마음 속에 또 다른 주인을 열망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예견한 것이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의 토크빌적 측면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 노쇠한 유럽, 빈의 유대인인 프로이트와 달리 라깡은 그의 전거들은 18세기 프랑스와 바로크적 가톨릭 문화, 독일철학, 20세기의 문학적 현대성, 형식 논리, 구조주의와 말라르메의 시에서 가져오고 있다고 말한다 


바디우 역시 그가 예언자임을 오늘 날의 이 일그러진 세계 이전의 인물이라고 평한다. 현재의 자본주의와 야만적 세계화, 한계를 모르는 금융화, 보편화된 신보수주의의 세계로 변화하는 시점인 1980년대 초에 사망하였다는 것은 상징적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라깡의 사유가 가장 긴요한 영역과 주제는 무엇일까?

 

루디네스코는 21세기는 이제부터 라깡의 세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서 보이는 일탈들은 이미 라깡이 예견한 것들이고, 우리는 라깡의 사유를 통해 그것들과 투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깡은 물론 자신의 쾌락을 쫓는 사람이였지만, 욕망의 진리에 대한 추구를 환상으로 대체하는 맹목적 쾌락주의를 권하지는 않았으며, 타자성을 부인하면서 자기정체성을 추구하는 정신적 퇴행의 모든 형태에 맞섰다고 보았다. 또한 인간을 자연성으로, 생물학적 존재로, 신체와 뇌로 환원하는 행동주의와 인지주의에도 반대했다고 한다. ‘주체와 시니피앙(언어, )이론을 통해서 라깡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있는 필연적 간극을 유지했다고 보았다. 그녀는 인간에게서 언어와 심리적 주체성이라는 특성을 은폐한다면, 우리가 언제든 파시즘적 과학주의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본다. 신경세포(뉴런)를 면밀히 조사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약을 처방하여 고통을 다룰 수 있다는 믿는 세계에서 주체는 어디있는지 묻는다. 주체는 조롱당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뿐이라는 것이다.

 

바디우 역시 라깡이 인지행동요법을 비난했을 것이라 말한다. 증상을 의학으로 해결하고 주체를 심리학으로 다루는 현재에 대해 라깡은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에 전능 역시 비난 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바디우는 우리시대의 의미의 평준화, 겉치레의 만연, 물신화우리를 엄습하는 비통한 어리석음에 대해 라깡이 중요한 치유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코뮌주의의 가동에 대해

 

바디우는 코뮌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속지 않는 자들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코뮌주의는 유토피아의 정반대이고,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실재가 갖는 진정한 이름입니다. 코뮌주의를 또는 해방적 예외들이 지닐 수 있는 다른 모든 이름을 양보하는 일은 진정한 정치적 욕망의 모든 형태를 양보하는 겁니다.” 바디우는 실제로 계몽적 보수주의자 였던 라깡은 양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거라 말하지만, 그렇더라도 라깡은 현 세계의 비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으로 보았다.

 

바디우와 루디네스코의 대담을 통해 라깡의 정치적 입장과 그의 사유가 미친영향과 21세기에 왜 라깡이 필요한가에 대한 의견들을 살펴보았다. 라깡 자신이 정치적 입장은 진보나 보수가 아니였고, 어떤 정치활동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이 아버지의 쇠퇴라는 입장에서 그가 계몽적 보수주의의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바디우는 그는 진보와 혁명이라는 운동 속에 숨어있는 대중의 바람인 새로운 주인에 대한 열망을 읽어낸 측면에서 그의 급진성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한다. 라깡이 우리시대에 다시 프로이트가 부활한 것 처럼 다시 부활한다면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일까. 그것은 우리가 철저히, 여전히 타자성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그의 담론이 사회적 담론으로서 작용함으로써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의 발명이 모든 이들에게 담지되어 주어진 유한성에 벗어나게 되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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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부터 꾸기 시작해서 1시간 정도 꾼 것 같다. 

요즘은 거의 꿈이 기억나지 않지만, 간만에 길고, 좀 괴이한 꿈을 꿨다. 거의 기억이 날아가긴 했지만, 몇몇 장면은 선명하다. 

나의 집에 벽지들이 들떠있다. (실제로 그렇다) 

집에 온 가족이 있는데, 나의 아이는 다시 10살의 아이다. 

나는 책상에서 피자를 먹는다. 피자는 하루가 지났는데도 뜨거웠고, 피자 포장자체에 히팅 기능이 있어 거의 피자는 타고 말았다. 

나의 침대위에 아주 작은 사람, 큰 사람이 축소되어 누워있다. 흡사 조로증이 걸린 아기의 모습이다. 

또 다른 손님은 한 10년 마다 보는 작가인데, 그는 내 옷을 입고 있다. 

집안 곳곳이 낡아있고, 나는 갑자기 이 집에 동굴이 있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동굴로 들어갔더니, 큰 책장과 책상들이 있었다. 

전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정돈된 책장은 다 차 있지 않았다.   

내년부터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다. 

공부에 대한 준비로, 이 꿈을 꾼 것 같다. 

그밖에 다른 세부내용들은 현실의 잔재, 욕망의 찌꺼기 같은 것들일 것이다. 

요 몇일간, 매일 사람들 만나고 바쁘게 지냈다. 다시 공부의 시간을 가져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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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신체와 언어사이의 간극

아니 에르노의 글은 현학적이지 않으며 단순 명료한 문체로 빠르게 읽힌다. 그러나 왠지 평범한 문장들이 서늘하다. 뜨거운 욕망을 서늘하게 적어 내려가는 것은 어떤 삶의 태도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글은‘욕망의 정확함’과‘무서운 솔직함’을 드러낸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의 문체는 은유나 비유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통에 대한 수사, 연민 같은 감정이 넘치지 않는다. 그녀의 페르소나였던 글은 그녀 자신과 섞여버렸다. 그녀의 소설 속 내용이 충격적이라기 보다 그 내용을 말하는 말투가 특별하게 여겨진다. 고통스럽다고 말하지만, 너무나 덤덤하게 얘기한 나머지 먼 과거에 있던 일처럼 느껴지는데, 소설 속의 그녀에게는 그 일은 바로 오늘 일어난, 방금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단순한 열정』보다 나는 『탐닉』이 더 좋았다.

 나 자신의 인류학자

 그녀가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유명해진 말은 “그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이다. 아니 에르노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모든 경험속에서 '의미'를 추구하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주시한다. 자신이 S를 얼마나 욕망하는지, 사랑의 진실 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그녀는 의미를 찾지 않고, 그를 욕망하고 사랑하고 기다리고 두려워하는 그녀의 '시간'을 그린다. 시간 속에남겨진 것은 '글쓰기에 용해된 욕망'이다. 단순히 고통을 씀으로써 고통을 완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욕망을, 고통을, 쾌락을 정확하게 포착함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소유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언어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분열이 존재한다. 인간은 언어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적확하게 표현하고자 하지만, 언제나, 어쩐지 우리는 글과 동떨어져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분열이 계속 쓰게 만든다. 그녀의 경험들은 그녀가 글을 씀으로해서 '거리'를 생산한 것이다. 그 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자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거리이다.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며, 내 육체와 감각과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 『사건』

 우리는 자신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면, 타자의 생각, 관념 그대로 자신의 경험이 복기 될 뿐이다. 어제의 나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읽어주는 대로의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언어로 복기하면서 자신에게 붙어있는 세상의 고정관념들을 파괴하고 자신의 문체로 말하기를 시도함으로써 그녀는 다시 ‘아니에르노라는 새로운 보편’을 만든다.

 “현실을 추적하는 대신 현실을 생산하고자 하는 옛날이야기는 꾸며내지 말 것. 추억 속의 이미지를 거론하여 번역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이미지를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해 스스로 속살을 드러내는 자료로 취급할 것. 다시 말해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 - 『부끄러움』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깡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한다. 이 타자는 실제적인 눈앞의 타자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의 방향성이다. 모두가 원하는 그것, 이데올로기, 자본, 성공 등 우리의 욕망은 타자들의 욕망과 같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 욕망들을 기술함으로써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빠져나가 자신의 욕망을 발명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굶주린 여인

 『탐닉』은 13세 연하의 유부남과의 사랑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세계적 주목을 받는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로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면서 전과 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였다면, 그리고 끔찍하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완전히 넋을 잃고 사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입 속에서 저절로 생겨난 듯 했다. " -탐닉 11P-

 우리는 책을 읽으며 그녀의 광기를 체험한다. 고통과 쾌락의 혼종인 주이상스를 탐닉하는 그녀는 많은 시간을 그를 기다리거나, 그와의 격정의 경험을 떠올리거나, 그를 상실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들로 채운다. 그녀는 욕망의 시작되면 곧 빠져들 고통에 대해서도 마치 즐기는 듯하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충격적인 것은 그녀의 글 어디에서도 수치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연하를 만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 연하를 짝사랑하고 있다면 묘한 수치감이 들 것 같다. 그녀는 그녀가 작가이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점이 어쩌면 수치스러울 수 있는 사실을 적는다. 그녀는 수치심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욕망과 관계되어 있음을, 그리고 그 욕망의 가치, 즉 자기에서 어떤 지고의 쾌락을 가져다 주는지 그녀는 정확히 알고, 그것을 누렸다. 스스로 매몰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에 패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사랑하기를 멈추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탐닉』에서는 프루스트가 많이 등장한다. 아마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듯 싶다. 프루스트의 '갇힌 여인'이 아닌 아니 에르노는 자신을 '굶주린 여인'이라고 표현한다. 그녀의 허기는 그녀의 삶의 원인이다.

 글쓰기 욕망

 "나는 모든 생을 남자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 그 자체였다”

그녀가 S를 추앙한 이유는 그가 어리고 잘생겼으며, 러시아인이라는 알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 때문은 아닌 듯하다. 그녀의 남자에 대한 욕망은‘결여’때문이다. 욕망의 원인은 결여이고, 우리는 자신의 결여를 보충해줄 것만 같은 그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대상을 바꾸면서 욕망한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과 우리의 결여가 일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라깡과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 것은 근원적 상실과 관련이 있다. 인간존재는 태어나면서 대타자(부모)와 관계 속에서 발생된 주이상스(쾌락)가 언어를 배우면서 상실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각자의 욕망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그러한 욕망의 구조 속에서 평생을 반복하면서 산다. 작가의‘남자에 대한 욕망’은 다시 말해 근원적 상실을 보상하려는 무의식 속에서 발생한다. 작가는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그 새로운 욕망은 글쓰기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글쓰는 행위는‘자신의 발명’이다.

작가의 책을 보면 쉽게 읽혀 쉽게 쓴 것 같지만 이 소설에 대해 말하기를,

“지금 나는 내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삭제와 교정으로 뒤덮인 원고를 앞에 놓고 있다. 나는 이것이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않는, 철저히 개인적인 유치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고백이나 수업시간에 비밀노트 한쪽에 갈겨쓴 외설스러운 낙서처럼. 혹은 아무도 보지 않으리라 확신하면서 조용히 아무 탈 없이 써내려간 일기처럼. 그러나 이 원고를 타자로 치기 시작하고, 마침내 원고가 출판물의 형태로 내 앞에 나타나게 되면 내 순진한 생각도 끝장나고 말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서 이 소설에 몰입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녀의 수많은 퇴고 속에서‘잉여가 없는 문장’을 추구했던 작가의‘정확함’에 대한 강박적 노력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면 글을 쓰기 위해 사랑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느껴질 만큼 글쓰기의 욕망이 사랑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남자를 욕망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글쓰기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 남자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글쓰기의 효과로 주체의 현실을 창조했다.

한 남자를 사랑 혹은 욕망한다는 것. 거기엔 저울이 필요없다. 이론도 필요없다. 오직 열정과 고통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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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책이 텀블벅을 통해 출간되어 소개한다. 간호사였던 그녀는 철학과 정신분석을 공부하며 또 다른 길을 모색하며 살고있다. 그녀가 몸담았던 간호사의 세계의 관심과 애정으로 이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우리의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구축되어 왔는지를 그녀의 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며, 현재의 간호사라는 직업의 새로운 담화가 구성되기를 기대해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우리는 원래 간호사가 아닌 마녀였다>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와 디어드러 잉글리쉬의 초기 저작, Witches, Midwives & Nurses의 번역서 입니다. 🙂

서구 의학의 역사 속 여성 치료사의 흔적을 추적한 책으로, 간호사의 기원을 마녀로 보고 있습니다.

아래 링크로 들어가시면 텀블벅 통해 펀딩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tumblbug.com/74108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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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간호사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이팅게일 또는 백의의 천사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 섬세함과 따뜻함으로 등불을 든 채 침상 곁에서 환자를 지키는 여인들. 어쩌면 나이팅게일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간호사의 모습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간호사의 시작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와 디어드러 잉글리쉬는 남성 중심적인 의학의 역사 속에서 간호사 이전 여성의 흔적을 찾아 나서기 시작합니다. 연구의 시작점에는 다어드러 잉글리쉬는 남성 중심적인 의학의 역사 속에서 간호사 이전 여성의 흔적을 찾아 나서기 시작합니다. 연구의 시작점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과연 여성이 치료의 역사 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적이 없었을까?"


엄밀히 말해 이 책은 간호사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 아니라 서구 의학의 역사 속에서 여성 치료사의 역사를 찾아내고 추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여성이 간호사라는 형태로 의료 체계에 뛰어들기 전, "마녀"의 존재가 있었음을 찾아냅니다.


중세란, 질병을 신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성직자의 도움 없이 병을 치료했던 여성들은 마녀로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은 악마의 도움 없이는 똑똑할 수 없다는 당대의 믿음이 이러한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사정은 과학혁명이 빛을 발하던 르네상스 시대 역시에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과학이 발전해도 여성들은 마녀로 몰렸고 계속해서 죽어 나갔지요.


주도적으로 치료술을 행하던 여성들은 마녀로 몰려 살해 당하고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을 지켜내지 못한 채 점차 밀려나게 됩니다. 여성은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고 교육의 기회가 차단되었으며, 그 결과 의료 체계 내에서 여성에게는 간호사라는 보조적인 직업 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문헌학적으로 추적해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sjamWxwuH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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