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과 무의식의 형성물

참고문헌:  조엘도르 에크리독해 1부 8.9.장                             

 조엘 도르가 에크리독해 1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언어학과 무의식의 형성물'이다. 라깡은 소쉬르의 언어학의 구조를 참조하여 무의식을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의식 이전에 언어가 선행함을 전제한다. 언어구조 속에서 의미는 효과이다. 이러한 아이디어와 함께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꿈이 언어의 구조(압축과 전치와 은유와 환유와의 관계)와 같다고 본 라깡은 우리의 무의식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었다는 언명을 한다.

우리는 꿈을 꾸면 해몽을 한다. 해몽은 일대일 대응의 상징으로 파악하는 일종의 신화적 해석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 꿈을 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탐사다. 무의식은 은유와 환유의 수사를 사용하여 꿈을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 꿈의 정확한 해석은 어렵다. 사후적으로 꿈을 기억하고 해석하는 것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의식이 ‘타자의 담화’이고 우리는 ‘타자의 담화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게 된다. 한편 꿈의 담화에서 누락된 것을 예상함으로써 우리의 실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명백한 무의미

 “라깡은 우리로 하여금 환유가 의미에 저항하는 것은 항상 그것이 명백한 무의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데.... ”(99P)

환유가 의미에 저항하는 것은 그것이 명백한 무의미라는 것은 꿈내용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꿈을 해석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일까? 이번 발제문을 쓰면서 나는 ‘명백한 무의미’에서 앞 뒤 문장의 문맥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직관적으로 생각했을때 ‘명백한 무의미’라는 것은 ‘nonsense’ ‘말이 안된다’라는 의미다. 꿈은 말도 안되는 일이 굉장히 합리적인 일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일전 꿈에 나는 물속에서 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도 물에서 숨을 쉴수가 있지.” 마치 내가 깜박 잊은 것처럼 말했다. 이렇게 꿈의 비합리적인 사태는 환유적 구성에 의해 일어난다. 환유는 대상과 유사성이 아니라 인접성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꿈이 은유한 것인지 환유를 한 것인지 분석을 통해 할 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텍스트에서 환유에 관해 다룬 것은 꿈에 드러난 내용이 숨겨진 것의 대리표상이라는 점과 동시에 가치의 전도가 있다는 것이다. 가치의 전도는 중요한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부차적인 것은 중요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도출된 무의식의 형성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꿈은 무의식이 해석한 심리적 현실이다. 그런데 무의식이 의미화에 저항하기 위하여 변장하는 것은 왜일까? 무의식의 형성물들은 은유와 환유과정을 통해 왜 은폐하고자 하는 것일까? 무의식의 논리가 숨겨놓은 비밀, 진실, 진리의 차원이 아니지 않은가? 그 무의식의 담화는 대타자의 담화를 우회시켜 타자의 담화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거세된 주체라는 것을 은폐하기 위함일까? 성충동을 억압하려는 유치한 시도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만약 무의식의 형성물이 중요하다면 ‘환상의 횡단’의 자료로서 중요할 뿐이지 않을까.

 기표의 우위

 은유는 '기표의 대체'라고 말한다. 기표를 대체한다는 것과 기표의 전치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조엘 도르가 예를 들고 있는 '정신분석'이라는 기표를 살펴보자.

만약 '정신분석은 페스트다.' 라는 문장에서 페스트라는 기표는 정신분석이라는 기의와 결합하면서 페스트라는 개념(기의)는 사라진다. 그러나 정신분석과 페스트는 유사성으로 묶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 정신분석은 감염될 수 있고, 이질적이라는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이는 기표와 기의의 임의성, 자의성의 증거이자 기표의 우위의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럼 환유의 경우를 살펴보자. '정신분석을 한다' 라는 문장은 '쇼파를 갖는다'(정신분석으로 한다는 비유 인 듯하다)라는 문장으로 쓰인다면, 쇼파는 정신분석상담실에서 일부분이지만 정신분석 행위를 대리하여 쓰일 수 있다. 그렇지만 페스트처럼 페스트라는 개념이 삭제되는 것도 아니고, 정신분석이라는 기표에 새로운 기의도 아닌 단지 대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유는 인접하다는 이유로 기표를 명칭을 대리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기표의 우위가 증명된다.

라깡의 『도둑맞은 편지』역시 기표의 우위를 의미하는데, 편지는 곧 기표다. 편지의 위치에 따라 주체는 맡은 역할이 달라진다. 편지의 내용보다 그 편지가 누구에게 있는가에 따라 인물들의 행동의 범위는 제한된다. 여왕과 대신, 그리고 셜록 편지의 주인은 바뀌면서 여왕의 역할은 이제 대신이 맡게 된다. 주체는 무의식과의 관계에서 언어행위의 기표에 의해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라깡은 비유다.

또 다른 은유의 예를 살펴보자.

프로이트의 꿈에 나왔던 ‘논문’이라는 기표의 숨겨진 내용은 ‘프로이트 자신의 연구에 대한 일방적 성격’과 ‘프로이트 자신의 공상의 높은 가치’에서 연상된 기표로 은유에 해당한다.

또 다른 사례도 제시되는데, 프로필레 + 아밀렌 (재료가 서로 유사한 관계 때문에 발생하는 기표의 대체) = 프로필렌 (명백한 내용) / 유사성의 결합(숨겨진내용)이다.

 환유는 반복이다

 이와 달리 환유의 과정은 명칭이 단순히 바뀐 것, 이름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의 예시는 ‘오케스트라의 구리는 금관악기’와 같은 것이다. 전체에 대한 부분의 관계에 의해 두 용어가 결합된 것이고, 그 인접관계 때문에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이 환유적 구성 속에는 두 개의 기표가 계속 존재하므로 쫓겨난 기표의 의미는 없어지지 않고 계속 위에 존재함으로써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새로운 기호의 가능성은 차단된다. 따라서 환유 역시 ‘기표가 지배하는 기의 그물에 대한 기표의 자율성, 기표의 우위 증명’ 한다. 환유는 기표와 기의 분리선을 제거할 수 없으므로 ‘명백한 무의미’이다. 은유가 정신분석이란 기표를 페스트라는 기표로 대체했을 때 페스트는 정신분석이라는 기의를 가지지만, ‘쇼파를 갖는다’라는 환유에서 쇼파는 정신분석이라는 기의가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쇼파 그 자체의 기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있다. 부분으로 전체를 표상할 뿐이지, 쇼파와 정신분석의 개념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언어수사법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환유이다. 환유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하여 이 텍스트에서도 계속 환유하여 설명하지 않는가? 꿈에서 전치현상이 환유인 것은 꿈의 재료들이 인접관계에 있는 기표사슬에 의해 전개되고, 그 인접 관계는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교환될 수 있는 기표들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달리 꿈에서 환유가 어려운 이유는 숨겨진 인접성에 의한 연결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꿈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재료의 사슬 때문에 의미의 저항성이 나타나고, 꿈 작업은 이 사슬들을 검토하고 분해하는 환유적 과정 전체를 검토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욕망의 수준에서 환유는 끊임없이 대상을 갈아 치우는 것을 뜻한다. 잉여향유의 끝없는 나열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증상은 은유인가 환유인가? 존재의 증상은 개별적이라는 점에 은유이지만 증상의 전개 양상은 환유가 아닌가? 잉여향유로서의 증상의 환유는 반복일 수 밖에 없다. 다시 앞의 꿈으로 돌아가면, 꿈 속에서 짧은 시간에 대상은 바뀌었지만 증상은 반복되었다. 그런 무의식의 형성물들을 전의식을 끌고 와서는 ‘증상의 반복’이라는 기표를 사용하여 증상을 무력화 시키려는 시도 속에 놓여있다. ‘이제 나만의 forta’를 놔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의식적 고통이 행복이나 기쁨보다는 존재의 실감이 커서인가? 증상(향락)을 놓지를 못한다.

아니에르노는 자신의 증상을 이용하여 글을 썼다. 나는 증상을 이용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실패한 것일까? 무엇에 대하여???

 기표사슬의 주인되기

 조엘 도르는 은유적 과정이 의미의 생산자로 보았다. 기표와 기의가 임의적 결합, 기표의 자율성에 의해 기의가 발생하는 한 의미의 생산자라는 것이다. 기표는 무의미 속에 홀로 놓여있다가 다른 기표가 연쇄되면서 의미가 발생하는데, 이는 무의미 속에서 의미가 생산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표의 그물망을 지배하는 것은 기표사슬이고, 기표사슬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타자, 상징계일 것이다. 기표사슬은 구성원리는 은유이며, 의미는 기표사슬 속에서 일관성을 이끌어 내며 생긴다. 기표사슬의 일관성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팔루스에 따라 그 방향이 결정된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주체가 은유되었다고 해도 주체는 자유로운 기표의 연쇄로 새로운 은유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장이 바로 정신분석이다.

 농담

 농담은 의미의 세계를 무화시키면서 팔루스를 비튼다. 거기서 쾌락이 발생한다. 프로이트는 재담은 은유적 압축과 환유적 전치를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압축은 생략을 이끌면서 유사한 특성을 가진 대체 형성물을 창조한다. 예를 들어, ‘가족장자’는 ‘백만장자’와 ‘친근한 가족적인’을 결합하였다. 전치의 예는 ‘아주 재미있었던 결혼 베일’이라는 내담자의 말실수이다. 신혼여행을 이렇게 표현했던 내담자는 숨겨진 사고는 신혼여행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베일은 북아프리카 여자들의 베일을 뜻하는데, 신혼여행대상에 인접한 베일을 사용하였으나, 베일은 성적굴욕을 의미하고 있어, 신혼의 베일은 신혼여행의 유감스러운 경험을 나타낸다. 재담의 기술은 전치를 사용하여 “사고 과정의 우회, 원초적 주제에 대한 심리적 강조를 다른 주제로 전치하는 것”으로 환유적 방법으로 무의식의 형성물, 말실수 등을 만든다. 즉 말실수를 통해 무의식적 형성물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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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넘어선 현실계 - 자크 알랭 밀레와 라캉 오리엔테이션
니콜라 플루리 지음, 임창석 옮김 / 에디투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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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락(jouissance) 

쾌락과 고통을 넘는 것. 인간의 각각 개별적이고 특이적 형태.  존재 방식의 규정. 인간은 향락하는 양태임 

말하는 존재의 향락 

인간은 말을 함으로써 향락한다. 기표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언표행위를 통해 향락하는 것. 그러므로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셍톰(sinthome) 

신체라는 사건으로서 향락 

환상의 횡단 이후 잔여물. 무의식의 실재화. 분석이 종료되어도 남는 것. 

증상은 향락의 측면이 있다. 

시니피앙적 증상에서 셍톰으로 

"셍톰은 무의식의 생성물이 아니라" " 분석 최후의 시점에서 생겨난 증상의 잔여물"이다. 

"셍톰은 암호화된 의미 작용이 아니라 머리없이 욕동[향락]하는 양태이다. " 

증상은 욕망을 대상을 목표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욕망하기를 욕망하기" "욕망에 개방"되어야 한다.  

"분석은 주체가 치유 불능이라는 점과 그의 셍톰을 이끌어 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상당히 치명적인 반복을 되풀이하는 사이에 파손된 리비도의 일부가 또다시 회복되고, 혹은 또다시 욕망(대타자의욕망)에 동일화하게 되면, 우리는 그저 할 일을 하며 일상에 몰두할 것이다." 

현실계(실재계) 

현실계는 말해질 수 도 이해될 수도 없는 것이다. 

 후기라깡의 이론을 접할 수 있는 책이다. 

라깡은 후기에 들어 실재계를 강조했는데, 실재계는 의미를 넘어선 '신체가 향락하는 지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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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가 서까래아래서 날개짓을 한다. 다른 형체와 싸우는 듯 했다. 

참새는 날아가고, 참새는 뱀에게 물리려다 날아간 것이다. 

천장에서 꺼꾸로 매달린 백사를 보았다. 백사는 웃는 듯 보였다. 하얀색의 뱀을 보고 엄마와 나는 집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오자 푸른 들판이 있는 도로였다. 

우리는 도로옆으로 가다가 어떤 차와 부딪힐 뻔했다. 차안을 자세히 보니 엄마와 엄마친구 그리고 엄마친구 남편이 있었고 엄마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나는 빨리 앉으라고 말하고 나서 나를 나도 역시 벌거벗고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꿈에서 깼다. 

여기는 교토다. 

교토에서 백사를 만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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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라깡과 정신분석의 이면 SIC 시리즈 6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김종주 외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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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담화의 현대적 변화

 2022.9.23

 

   이번 발제를 끝으로 SiC 6 『자끄라깡과 정신분석의 이면』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라깡세미나17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채 읽어나가면서, 나의 한계와 욕심이 쟁투하는 시간이였지만, 다른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번역의 난해함으로 영어공부에 불을 지피게 만들었던 책이기도 하다. 발제까지 채 17시간도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더듬거려보자면, 저자 마리-엘렌 부르스는 이번 논문에서 현 시대에서 주인담론이 상상적, 상징적, 실재적 변화를 겪고 있다고 보고, 이에 따라 새로운 실재가 도입된다고 보았다. 임상치료 역시 구조적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현대사회는 ‘아버지의 이름’의 증발로 보편주의라는 주인이 들어섰다. 자끄 알랭밀레는 보편적인 주인이 나타남에 따라 분리(차별)된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보았으며, 한 가지 요소는 자폐적이고 격리된 주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은 쓰레기로 분류되는 대상들이다. 부르스는 이와 같은 상황이 현대의 임상진료의 구조적 좌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 부르스의 주장을 따라가 보자. 

라깡은 1953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난해한 번역으로 영어 원서를 참조하여 다시 써보았다.

  “자기가 사는 시대의 주체성을 그 지평에서 대면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분석실천을 포기하게 내버려둬도 됩니다. 상징계의 운동 속에서 자신을 그토록 많은 삶과 연결해주는 변증법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의 존재를 다른 삶들의 축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바벨의 활동이 끊임없는 시대이고, 그는 그 혼란상을 잘 알아야 합니다. 언어들의 투쟁 속에서 그의 임무가 해석자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 역시 명확하게 다가 오지 않지만, 대략 라깡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분석가)가 사는 시대의 주체성의 지평과 대면하지 않고, 분석실천을 할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라깡이 분석가를 위한 프로그램이 필수적이라고 보는데는 정신분석이 다른 사회적 관계들과 다를 지라도 우리시대의 모든 좌표들을 작동시키는 것이 분석가담화를 통해서라고 보기 때문인 듯 하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와서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독해를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회의 변화 속에서 정신분석의 좌표들은 상상적, 상징적, 실재적”이기 때문에 분석가담화를 통해 한시대의 모든 좌표를 작동시키는 것이 사실이라고 본것이다. 시대에 대한 해석의 임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기술, 경제, 정치적 변화들의 양적이고 질적인 결과들은 새로운 실재적인 것을 가지고 오는데, 이에 따라 임상진료는 구조적으로 변경되고 있으며, 만일 이러한 변화의 방향으로 정신분석이 계속 발전되어 간다면 주체의 원인은 그 변화의 기제들과 성패에 대한 하나의 분명한 시각이 필요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수정된 실재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2차대전 이후 인간에 대한 새로운 치료가 등장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고취된 정치체제는 몰락했고, 경제체제의 전체주의적 지배는 신성시 되었다. 테러리즘으로 전쟁 개념의 수정과 종교적 원리주의 부상으로 정치적 영역이 수정되었다. 한편 기술분야는 과학담론의 헤게모니의 결과이다. 

실재는 명확하게 수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학주의는 권력의 한 형태가 되었고, 과학이 그 자체의 영역밖에서는 신앙체계가 되었다.

경제, 정치, 기술적 변화들의 공통방향은 보편성이며, 그것은 자본주의와   단일시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기술적 혁명 역시 보편성의 전파를 목표로 한다. 특히 과학에서 그러하다. 현재는 더 이상 지역주의를 위하는 시기도 아니고 작은 집단을 위한 시기도 아니며 전제정치를 위한 시기도 아니다. 이 세계는 실재적인 것으로서 모두에게 동일한 진실을 강요하는 경향을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에 라깡은 「영국의 정신의학과 전쟁」이란 글에서 그 시대에 대해 기술했다.

첫째로 그는 정신분석가가 자신의 학문영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정치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라깡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신분을 지지해주고 있던 영국에 경의를 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미래에 있어서 인간성에 대한 위험들이 개인들의 지나친 방종때문에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 전쟁이 충분히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최소한의 인정이란 원인 때문에 받아들이게 되는 죽음으로 인간들을 몰아가는 양심의 가장 무기력한 포기와 초자아의 어두운 힘이 합쳐진다는 것은 분명해지고, 또한 희생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반드시 영웅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전쟁이 인간의 방종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최소한의 인정 때문에 받아들인 죽음은 양심의 포기와 초자아의 어두운 힘이 합쳐진 결과라는 것이다. 희생은 개인의 영웅심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본것이다. 테러리스트의 희생에는 그 어떤 영웅주의도 포함되지 않고 오히려 하늘에서 향락에 대한 내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깡은 동일한 텍스트에서  “금세기 정신에 작용하는 수단의 점진적인 발달로서 우리 자신의 판단과 우리의 해결책 및 우리의 도덕적 통일성에 반대하여 이미 성공적으로 작용해왔던 이미지들과 열정들의 합의된 조작은 권력의 새로운 남용을 초래하게 될 것” 이라고 썼다.  

권력남용의 새로운 형태란 무엇인가?

모든 보편자들의 부상은 윤리의 영역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정신분석영역에서 새로운 권력의 남용이란 자끄알랭 밀레르와 에릭로랑이 분석했던 과학의 진보에 연결된 윤리위원회의 급작스런 출현과, 법에 대한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의 의존은 그 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의 특이성은 윤리와 판단의 영역에 위치해 있지 법과 제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윤리에 대한 포기를 암시의 포기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정신분석가는 모든 사회적 판단과 도덕의 판단을 포기했다. 또한 주체의 증상이 자신의 말에 의한 치료 중에 구성된다는 사실에 의해 그것을 스스로 증상을 규정한다면, 분석가는 환자의 삶의 선택이 아닌 치료를 지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깡이 보여줬던 것처럼 정신분석 그 자체는 과학담론의 결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다시말해, 생물학에 의해 히스테리 환자들에게 날조자란 딱지를 붙였던 과학적 의학의 발전 없이는 프로이트는 무의식적인 현상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신분석은 과학의 발전에 의해 태어났지만, 과학이 포기했던 것을 치료한다. 정신분석은 보편에서 제외된 사람들을 윤리를 통해 합리적인 방식으로 치료하고 있고, 무의식적 욕망을 통해 초자아의 어두운 힘과 양심의 포기를 전복시키는 일을 한다.

 치료적인 것, 현대의 보편자The Therapeutic, a Contemporary Universal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임상적인 실재를 결정하는 보편자로부터 무엇이 제외되고 있을까? 그 이름을 붙여 보면 그것은 치료적인 것이다. 사실상 가장 예외적인 것으로부터 가장 보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인간적인 현상들도 치료적인 돌봄의 잠재적 목표가 되어왔다. 프로이트는 『문명과 그 불만』에서 이렇게 썼다. “ [윤리는] 사실상 모든 문명에서 가장 아픈 곳으로 쉽게 인식될 수 있는 그런 주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윤리는 치료적인 시도로 간주되는 것이고 그 어떤 다른 문화 활동들에 의해서도 성취된 적이 없다. .”

 

   법적이고 국가적 수준의 발전은 서양사회에서 치료적인 시각이 프로이트가 말했던 “가장 아픈 곳(트라우마)”의 관리에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시각을 대체해버린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으로부터 정신질환의 범주가 붕괴되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만일 주체가 언제나 자신의 욕망에 내기를 걸고, 만일 주체의 충족방식이 언제나 흔들린다면, 그녀는 치료가 필요할 텐데, 그렇다면 사람들은 질환의 영역, 특히 정신질환의 영역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잘-클로드 말발은 『정신질환의 진단과 통계편람 DSM』 의 여러 판본에서 정신적인 문제들의 범주가 급증하는 것을 지적했다.

 두가지를 주목해야한다.

 첫째, 과학적인 의학의 성공은 치료와 돌봄과 치유를 보편적 가치의 수준으로까지 진척시켜주었다. 우리는 알약과 외과수술을 통해 행복을 믿기 시작했다.

 둘째로 의학이 과학적일 때 그 개입 영역의 윤곽을 정확히 그려내게 된다. 따라서 꽤나 많은 인간의 행위들이 엄격한 과학적 개입영역으로부터 제외되었다. 그러나 치료적인 것을 보편적 가치로 변형시키면, 치료적 행위들이 전통적으로 그것들을 관리하고 통제했던 영역들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된다.  이런 이중적인 움직임의 결과는 치료적인 것이 의학과 질환의 영역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자끄 알렝밀레는 우리 사회가 안전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동정심의 쿠션을 정신치료들이 만들어 준다고 지적했다. 달리 말해서 치료적인 시각은 현대적인 주임담론을 제공한다.

 담론 수학소의 저주 The Fulcrum of the Matheme of Discourses

  주인담론은 행위자의 위치에서 명령하는 시니피앙을 내놓는다. 주인기표는 S1로 쓴다. 그것이 시간에 따라 변하고 사회적 구성의 형태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사회의 경제적인 모델로서 자본주의 헤게모니가 출현한 이래로 우리의 가설은 이 S1이 “시장”, 더욱 정확히 “공동시장”이라고 생각했다. 세계는 미래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시장, 세계화라는 현실이 되었다. 생산물의 이윤과 순환을 중단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인 시니피앙에 상응하는 것으로 라깡이 S2라고 썼던 지식은 무엇인가? 하나의 가설로서 그것이 전문적인 문헌에서 “절차”나 “프로토콜”이라 부르는 것이란 사실을 들어보자. 석기시대 도구가 정밀기기에 비교되는 것처럼, 그 기법은 절차와 프로토콜에 비유된다. 질적인 조사 프로토콜과 양적인 조사 프로토콜을 통하여 예상된 기능방식은 그 행위자로부터 분리되고 보편적 절차의 형태로 재투입되어 무료로 획득한 지식을 생성하게 된다. 이런 보편적 절차는 시장관리, 즉 이 세계의 관리를 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모든 인간 활동은 최소비용과 최대수익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 그에 따라 S2는 시장관리에 상응하는 지식이 된다.

 S1과 S2는 현대적인 주인의 구조 전체를 구성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현대적인 주인은 보편적으로 됨으로써 위계를 버렸다. 그는 과학 지식의 보편성을 믿게 되는데, 그는 실재계와 맺는 관계와는 다르다.

전체주의적 주인은 최고의 아버지 모델 된다. 즉 그는 권력의 수직구조에 기초하고 제재에 기초하는 가부장적 주인이 된다. 현대의 주인은 세계화된 시장의 논리와 절차로부터 나오고 따라서 그 구조는 수평적이다. 그 결과 초래된 통제는 공산사회적이거나 협동조합적인 상호간의 기능에서 나온다

현대적인 주인은 이런 조건하에서 어떻게 권력을 행사할까? 현대적 주인의 통제는 '공산사회적이거나 협동조합적인 상호간의 기능'에서 나온다. 이라크에서의 전쟁이 시대에 뒤져 있음을 보여줬던 기록과 사찰을 대신하여, 자끄알랭밀레가 최근에 언급했던 것처럼, 협동조합과 같은 주인이라는 평가는 그 어떤 상위의 위계질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마치 진단이 이상적으로 DSM을 사용하여 내려질 수 있었던 것처럼 이상적으로 기계에 의해 행해질 수있었다. 평가를 위한 적절한 편람의 도움으로 개인들은 동료들의 지도 아래 그들 자신의 진단을 내릴 수 있다.

밀레가 지적했듯이 이런 상황은 현대적인 임상진료를 완전히 바꿔 놓는다.

  한 시대의 임상은 그 시대의 주인담론에 상응한다. 주인 담론의 변화는 부명이 시장으로 옮겨가는 통로를 거쳐 말하는 존재들의 향락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변화하는데 , 그 변화는 전이의 양상을 변경 시킬 뿐만 아니라 주체의 증상도 변경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S1로서 부명에 상응하는 감시와 처벌의 기능은 이제 평가와 절차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며, 이젠 더 이상 금지와 분류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 수학소의 가로줄 아래에 무엇이 위차하게 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주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의 가설은 현대성의 주체에게 모델이 되는 것은 어떤 유통형태들에 의해 위치가 배정되는 어떤 시스템 속의 주체라는 것이다. 다만 그는 모든 사람과 각각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기술적인 것 외에는 한계가 없다. 따라서 그는 쓸데없는 잡담과 지식의 즉각적으로 접근 가능한 특수한 상징적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더욱 적어진다. 이렇게 해서 빗금친 주체는 향락의 새로운 방식에 상응한다.

라깡은 1968년 파리프로이트학파 학술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대에서 아버지의 증발로 남겨진 흔적, 상흔은 우리가 분리라는 일반적인 표지 아래 둘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편주의라는 우리 문명의 그 소통이 인간들 간의 관계를 균질화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반대로 나는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것이 모든 수준에서 교차점을 만들어내고 장벽들을 크게 증가시키는 분파되고 강화되니 분할이 있다고 믿습니다. "
그의 충족 체제가 되는 분할은 어떤 체계 내의 주체와 상응한다.
한편으로 <연결된> 주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론 생산물로 환원된 말하는 존재가 있다.
  라깡은 1967년 10월 9일 동일한 생각을 또 표명한다.   “우리가 경악스럽게도 출현함을 봤던 것은 과학에 의해 사회집단의 재구성의 결과 출현함을 봤던 것은 과학에 의해 사회집단의 재구성의 결과로서 또한 그것이 소개하는 보편성의 결과로서 발전해가고 있는 것에 대한 선도자의 반응을 나타낸다는 말로서 요약하려고 합니다.
공동시장으로서 우리의 미래는 분리과정들의 더욱 가혹한 확장에서 그것의 평형상태를 찾으려고 합니다. ”

이제 더 이상 S1이 부명과 관련되지 않는 주인담론의 새로운 양상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향락은 분리와 관련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의 주인에게 공식의 적용을 우리가 제안하는 가설은 다음과 같다. 위에는 과학에 의해 인간적인 현상들의 재구성에 틀림없이 관련되기 마련인 두가지 요소들이 있다.

 아래에는 분리에 틀림없이 관련되는 두 가지 요소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밀레르의 공식 가운데 하나를 취하는 자폐적 주체, 또한 가상적이고 격리된 주체와 그에게 향락의 존재를 부여해주는 대상들인데, 그 대상이란 쓰레기가 될 것으로 예정된 대상들이다. 그 결과는 공동체들의 증식으로서, 게이와 레즈비언, 흑인,라틴계 사람들, 와스프, AA, NA 기타 등등인데, 그들 각자는 그 나름의 대상들과 함께 한다. 그와 같은 것들이 현대의 임상진료의 구조적 좌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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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과 타자성 - 철학적으로 읽은 자크 라캉
로렌초 키에자 지음, 이성민 옮김 / 난장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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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들에게 9-10P 

2.

 주체성과 타자성은 여전히 내가 라깡과 그 너머에 대해 행하고 있는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따. 돌이켜 보면 애초 해석적 차원에서 전개한 이 책의 세 가지 상호연관된 쟁점이 내게는 특히 주목할만한 것으로 다가온다. 욕망의 변즈업을 통한 초월론적인 것의 사후 발생, 기표의 물질성, 빗금쳐진 실재로서의 죽지는-않은 것. 

 당연히  이책은 이 모든 물음이 수렴되는 교차점인 듯한 욕망과 충동의 분리불가능성을 주장한다. 라깡, 그리고 라깡에게 고무된 사유로부터 '초월론적 유물론'을 끌어내려한 용감한 시도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틀거렸다. 이른바 욕망에 대한 충동이 그 어떤 우선성도 유물론적인 의제를 손상시킬 수 밖에 없다. 셸링에 대한 반-관념론적 독해에 기반한 이론으로는 라깡의 진정한 유물론을 정당하게 대우할 수 없다. 언젠가 본인 스스로도 언급했듯이 라깡만이 철학에 공헌한 혁신이 있다면,

 

"기표, 그것은 언어안에서 스스로를 초월하는 물질이다. "

라는 언어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이다. 달리 말해서 이른바 죽지는-않은 자연 자체( 그 불균형한 무근거성에서 실재의 원초적 근거를 구성할 셸링 식의 절대자)의 잠재성에서 곧바로 충동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이런 입장은 후자가 인간의 로고스가 지닌 잠재성의 사후 효과를 통해서만 하나의 잠재성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욕망과 (궁극적으로 언제나 죽음충동인) 충동은 서로 관계하는가?

 이 책은 욕망이란 상징적 질서 속의 실재적 결여인 "무에 대한 욕망"이라는 관념, 즉 욕망이란 상징적 가능성과 그 외연이 똑같은 무에 대한 욕망이라는 관념에 자주 기댄다. 죽음충동도 이와 똑같은 실재적 결여를 마주한다. 스스로 되돌아가려고 열망 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죽지는- 않은 실재의 잔여물로서 말이다. 이런 조건은 환상 속에서 욕망을 지탱하는 끈질긴 반복과 등가적이다. 

세미나5권에서 라깡이 말했듯이 충동은 욕망에 주어지는 전문용어이다.... 말이 욕망을 고립, 파편화시키며, 욕망으로 하여금 그 목적과 비절합적 문제적 관계를 맺도록 하는 한 말이다. 
  이 책에는 이질적이만 그 이론적 틀을 충실히 보존한는 용어법을 채택해 본다면 욕망과 충동의 정확한 중첩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방법으로도 정식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욕망이 일관적인 '상징의 세계'(인간의 유사-환경으로서의 언어)에 내속적인 존재론적 비일관성의  둘레를 선회한다면, 충동은 선-상징적 실재(즉, 죽지는 -않은 자연)의 선-존재론적인 순수 비일관성과 연계된다고 말이다. 그것도 단, 존재론적 비일관성을 통해서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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