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피앙의 행렬 속에서의 성욕(발제문)


성욕의 담지자 시니피앙


무의식의 현실은 성적이다. 

라깡은 다음과 같은 경구로 세미나를 시작한다.

 '전이는 무의식의 현실을 현행화하는 것이다' 


1

라깡은 전이에 대한 분석에서 사람들이 가장 회피하는 경향의 어떤 것이 이 경구에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가장 회피하는 어떤 것은 바로 섹슈얼리티일 것이다. 섹슈얼리티, 성, 성적현실은 동물과 같이 ‘번식이라는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인간에게는 동물의 성과 다른 의미가 생기게 된 것인가? 라깡은 무의식이 어째서 성적 현실이고, 이 성적 현실이 시니피앙의 도입과 동시에 욕망이 생성된다는 논점이 세미나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전이가 무의식을 현행화한다는 입장, 즉 사람들이 회피하는 성과 관련된 이 문구가 자신이 그동안 가르쳐왔던 입장과 다소 애매한 것은 아닌지 라깡은 묻는다. 먼저 무의식에 대해 라깡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무의식은 주체에 대한 말의 효과이고 이 말의 효과들에 의해 주체가 결정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정식으로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은 언어이고, 주체가 결정되는 차원이다.

이와 같은 차원은 현실의 관점이 아닌 주체의 구성에 맞춰진 규정이였으며, 현실의 관점에서 무의식은 성적 현실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핵심으로 들어가 봅시다. 무의식의 현실, 그것은 성적 현실입니다. ”

무의식의 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앞서 주체가 결정되는 차원의 무의식, 언어구조로서의 무의식의 ‘형식’이라면 그 ‘내용’에 해당하는 것이 무의식의 현실, 바로 성적 현실로 간주할 수 있지 않을까. 앞서 라깡이 언급한 경우 '전이는 무의식을 현행화하는 것'이라는 경구에서 전이는 성적 현실이 분석 속에서 현행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욕과 시니피앙

 

라깡은 과학의 진보와 성적 현실의 통합에 대해 말한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한 1900년대는 과학적 진보가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이전에 성적분화는 종족보존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도 상식이 아니였던 시기였다. 플라톤에게는 ‘종’이 이데아 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은 개체들의 형태로 존속된다고 보았다. 말馬이 종으로 종속된다는 것의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죽음과 성의 연관이 근본적이라는 사실이다.

하나의 종이 종속되는 것은 죽음과 탄생의 연속이다. 탄생은 성적 분화에서 다시 교미행위를 통해 삶을 유지하게 된다. 생식이라는 과정 속에 교미행위가 조화를 이루어 종이 종속된다. 성적 분극화와 결합하는 무엇. 즉 인간은 2차 성징을 통해 성기능을 갖게된다. 성기능들의 분배가 종의 존속에 기본이 된다.

라깡은 현대의 구조주의가 분명하게 해명하는 것은 생물학적 혈통이나 자연적 출산과 대립되는 결연結緣의 수준, 즉 시니피앙의 수준에서 근본적 교환이 행해진다고 보았다. 생물학적인 것과 대립되는 결연의 수준이라면 인위적인 것을 말할 것이다. 이어 라깡은 “사회적 작용의 가장 기초적인 구조들, 즉 어떤 조합의 항들로 기록될 수 있는 구조들이 재발견되는 것 또한 바로 그러한 수준에서라는 것을 그것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작용의 가장 기초적인 구조들, 즉 어떤 조합의 항들의 구조란 무엇일까? 필자의 해석이기는 하지만,남녀의 만남, 결혼, 가족과 같은 구조와 같이 개체의 조합의 항들은 구조는 남과 여라는 구조의 합이고, 남과 여라는 구조는 사실 시니피앙에 불과하다. 라깡이 “이러한 조합이 성적 현실 속에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바로 “시니피앙의 도입”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어 유전자학에서 감수분열을 통해 일부 염색체는 잃게된다는 사실과 함께 유기체를 결정하는 몇 가지 요소들이 조합하는 기능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로부터 라깡은 ‘성욕의 수수께끼와 시니피앙의 유희’ 사이에는 일종의 친화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라깡은 성욕과 시니피앙을 어떻게 일종의 친화성이 있다고 본 것일까? 라깡의 설명은 원시과학과 중국천문학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원시 과학은 어떤 조합 음과 양, 물과 불과 같이 대립항을 활용해 춤을 리드하도록 하는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라깡이 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사회적 성별 분류에 촉발된 춤의식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남녀라는 것은 대립항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는 사회문화 속에서 남과 여로 분류하고, 남녀의 조합을 하나의 춤으로 의식한다.

이어 라깡은 중국천문학을 시니피앙의 유희로 설명한다.

중국천문학은 과학이라기 보다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거대한 시니피앙의 별자리이다. 중국천문학은 시니피앙의 춤이라고도 말한다. 정치, 사회구조, 윤리, 시니피앙의 유희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만세력’이나 ‘사주오행’등의 중국천문학에 기반한 사주를 풀이할 때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나의 사주에는 木이 많고, 金이 적다. 이 시니피앙들의 조합에 어떻게 의미를 책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시니피앙이 추는 춤이다.

그런데, 라깡은 궁극적으로 원시과학을 성적 테크닉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다소 도약한다. 성적테크닉으로서의 원시 과학도 분명 하나의 과학이기 때문에 경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며, 원시과학이 춤과 결합된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라깡은 이 경계선, 매듭이 결절점이 있는데, 시니피앙이 더 암묵적이고 눈이 띄지 않을 경우 그 결렬은 더 늦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무슨 뜻 일까. 라깡에 이어지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모호하다.

라깡은 별이라는 시니피앙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콩트의 말을 빌려 “별들은 제 자리에서, 다시 말해 순수한 시니피앙 기능으로 붙박여 있을 것”이라는 것이라는 말에 반해 우리는 이제 그 별들의 화학적 구성 등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천문학과 점성술이 완전히 분리되기 이르렀다고 말한다.

라깡이 원시과학을 성적 테크닉으로 보는 관점은 천문학에서 점성술이 분리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말한 조합, 교미행위는 시니피앙으로 인해 인간에게 다른 의미로 분리되었다고 의미로 생각된다.

 

2


라깡은 이 모든 논의는 무의식을 사유와 성적 현실 사이의 시원적 접합의 잔류효과로 간주해야 하는가의 물음을 향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은 언어이고, 언어가 사유라면 우리의 사유는 성적 현실을 반영한다. 최초의 접합의 잔류효과에 대해 라깡은 역사적 고찰을 시도한다.

라깡의 설명에 따르면 먼저 융은 주체와 심리의 현실 사이의 관계를 원형이라는 이름으로 구현한다. 융 사상은 세계가 분절되는 원시적인 방식들을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로 간주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리비도를 거부하게 되고, 리비도를 심적 에너지로 중화시키게 된다. 반면에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욕망의 현존으로 보았다. 라깡은 “리비도는 욕망을 통해 현재에도 계속 겨냥되어야 하는 무엇”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욕망은 실체로서의 욕망이 아니라 1차 과정 수준에 존재하며, 우리의 접근 방식 자체를 조종하는 것으로서의 욕망’이다. [1차 과정 수준에 속하는 욕망이 무엇인가?]

이어 라깡은 리쾨르의 해석학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리쾨르는 무의식의 실재론에 도달하고자 한다. 무의식은 행위의 모호성,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결여 속에 기입되어 있는 공백, 단절, 결렬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에서 리쾨르는 정신분석이 매 순간 다루고 있는 것을 순전히 우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며, 이에 대해 라깡은 비판한다. “소위 해석학이란 인간의 연속적인 흥망성쇠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역사를 구성하는 데 사용한 기호들의 진보, 그 인간 역사의 진보를 읽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때 역사는 그 가장자리에 있어서는 무한정한 시간으로까지 연장될 수도 있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리쾨를는 역사가 아니라 분석가들의 작업을 우발적인 것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라깡은 분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의식의 박동을 성적 현실과 결합시키는 결절점(매듭)이 무엇”인지 분석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라깡의 그 매듭은 바로 욕망이다. 라깡은 욕망은 요구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요구는 시니피앙들 속에서 분절됨으로써 환유적 잔여물을 남겨놓는다. 앞서 말한 인간의 사유와 성적현실의 접합 속에서는 환유적 잔유물이 남는다, 매듭은 환유적 잔유물로서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봉착할 수 밖에 없고, 충족되지 못하며, 실현불가능하고 몰인식 되는 요소“이다.

무의식의 박동은 주체의 드러남의 순간이다. 성적 현실과 결합되는 지점이 ’말실수‘로 드러난다면, ’말‘에 의해 드러난 것은 무의식적 주체의 욕망, 성적현실이다. 라깡에 따르면 프로이트가 1차 과정의 수준에서 성욕의 심급이라 정의했던 장과 접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욕망이다.

’욕망의 기능은 주체에게 시니피앙이 낳은 효과의 최종적인 잔여물‘이라고 라깡은 말한다. 그리고 이것(Desidero 나는 욕망한다)이 프로이트의 ’코키토‘라고 말한다. 욕망은 시니피앙이 낳은 괴물이다!

무의식은 말의 효과들이 전개됨에 주체가 결정되는 차원이라는 앞선 언급으로 볼 때 주체의 욕망은 시니피앙의 효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라깡은 욕동이 본질적으로 환각에 의해 만족되는 장에 대해 프로이트는 뭐라고 했는지 주목해보자고 한다.

감각중추를 통해 들어온 것은 운동중추를 통해 나가야 하는데 이것이 막혔을 때는 뒤로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뒤로 돌아간 것은 어떻게 지각되는 것인가? 정지된 전류의 전구가 에너지의 역류를 통해 램프가 켜진다면 그 램프는 누구를 위해 켜진 것인가? 이런식의 퇴행에서 제3자의 차원은 본질적이다... 이러한 라깡의 설명은 이해가 난감한데, 억압된 충동의 메커니즘 속에서 제3자의 차원, 즉 시니피앙의 차원의 도입에 의해 욕망이 생성되는 차원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 라깡은 언표의 주체와 언표 행위의 주체라는 이중 구조 형태와 지각의 동일성이 결정되도록 하는 그 자연적인 은유의 차원은 오로지 욕망하는 주체, 그것도 성적으로 욕망하는 주체의 현존뿐이라고 말한다. 지각된 것을 은유의 차원으로 인식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 이기도 하다.

라깡은 이어 프로이트는 리비도가 1차과정의 핵심요소라고 주장하지만, 단순한 환각에서 조차 욕구의 대상들은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안나의 꿈에서 나타난 ’파이‘, ’딸기‘와 같은 군것질거리들이 꿈에 나타난 것은 이 대상들이 성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고, 성적인 대상이 환각의 대상으로 삼는 오로지 금지된 대상이다.

욕동이 본질적으로 환각에 의해 만족되는 장이라는 의미는 욕망의 만족은 환상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쾌락원칙에 문제가 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환각 속에서 의미효과의 차원을 확인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환각에 현실성이라는 함의가 주어지는 것은 주체가 욕망하는 시점부터입니다.“

주체가 욕망하는 시점이란 무엇인가? 바로 요구에 의해 현실이 탈성욕화 되는 시점이다. 환각의 현실성 즉, 성적 현실이라는 함의는 주체가 욕망하는 시점부터이고, 주체의 욕망은 시니피앙의 도입에 의해 개시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개시되지만 환각은 성적 현실을 군것질거리로 대체 할 뿐이다.

”프로이트가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을 대립시킨다면, 이는 정확히 거기서 현실이 탈성욕화된 것으로 규정되는 한에서입니다. “ 현실이 탈성욕화된 것으로 규정된다면, 자아이상은 탈성욕화된 리비도의 투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탈성욕화된 리비도란 무엇인가? 요구는 욕망의 가면을 쓴 담화가 아닐까. 라깡은 성적 현실이 분석담화의 수준아래 요구의 담화의 수준으로 흐른다고 보았다. 전이는 무의식의 현실을 현행화한다는 의미는 내담자의 무의식이 요구의 담화를 통하여 성적 현실이 흐른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분석 경험 전체가 성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좌절과 만족이라는 용어로 기울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분석에서의 상상계적 만족과 좌절이 나타나는 것은 무의식의 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의식이 성적 현실이라는 규정을 제3의 차원 즉 시니피앙의 도입과 욕망으로 라깡이 풀어냈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를 향해 흐른다. 타자의 욕망이 역류하여 주체를 구성하는 차원인 것이다. 타자의 욕망, 시니피앙은 욕망의 담지자이다. 교미행위와 접합한 시니피앙, 혹은 언어는 인간에게 무의식이라는 성적현실을 구현하게 만든다. 요구의 난맥을 넘고자 욕망은 환상을 사용하지만 이마저도 욕망의 구멍을 봉합할 수 없자, 우리는 새로운 잉여향락을 찾아 떠나는 방구석 여행을 계속한다. 그러나, 결여는 결코 메울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창조한 결여가 아닌 이상 말이다.

분석가와 마지막 상담에서 남긴 메모를 발견했다. 그는 나에게 냉철해지라는 조언을 했던 것이다. 분석의 시간이 물러나고, 나는 물러지고, 나태해졌다. 냉철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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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과 철학자들
구도 겐타 지음, 이정민 옮김 / 에디투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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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생각의 구멍들을 메꿀 수 있었다. 라캉과 데카르트, 칸트, 헤겔, 소크라테스... 라캉은 고정된 해석에서 정신분석적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오랜만에 한권의 책을 완독했다. 다시 이는 독서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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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백상현 지음 / 뮈톨로기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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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나이가 은유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욕망의 유래와 무의식에 관하여 쓴 정신분석가의 소설. ‘새로운 인생‘은 ‘새로운 글쓰기‘에서 촉발되었다. 새로운 은유는 우리의 무의식마저 감염시킨다. ‘새로운 인생‘이 나에게도 사건이 되길.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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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과 무의식의 형성물

참고문헌:  조엘도르 에크리독해 1부 8.9.장                             

 조엘 도르가 에크리독해 1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언어학과 무의식의 형성물'이다. 라깡은 소쉬르의 언어학의 구조를 참조하여 무의식을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의식 이전에 언어가 선행함을 전제한다. 언어구조 속에서 의미는 효과이다. 이러한 아이디어와 함께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꿈이 언어의 구조(압축과 전치와 은유와 환유와의 관계)와 같다고 본 라깡은 우리의 무의식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었다는 언명을 한다.

우리는 꿈을 꾸면 해몽을 한다. 해몽은 일대일 대응의 상징으로 파악하는 일종의 신화적 해석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 꿈을 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탐사다. 무의식은 은유와 환유의 수사를 사용하여 꿈을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 꿈의 정확한 해석은 어렵다. 사후적으로 꿈을 기억하고 해석하는 것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의식이 ‘타자의 담화’이고 우리는 ‘타자의 담화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게 된다. 한편 꿈의 담화에서 누락된 것을 예상함으로써 우리의 실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명백한 무의미

 “라깡은 우리로 하여금 환유가 의미에 저항하는 것은 항상 그것이 명백한 무의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데.... ”(99P)

환유가 의미에 저항하는 것은 그것이 명백한 무의미라는 것은 꿈내용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꿈을 해석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일까? 이번 발제문을 쓰면서 나는 ‘명백한 무의미’에서 앞 뒤 문장의 문맥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직관적으로 생각했을때 ‘명백한 무의미’라는 것은 ‘nonsense’ ‘말이 안된다’라는 의미다. 꿈은 말도 안되는 일이 굉장히 합리적인 일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일전 꿈에 나는 물속에서 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도 물에서 숨을 쉴수가 있지.” 마치 내가 깜박 잊은 것처럼 말했다. 이렇게 꿈의 비합리적인 사태는 환유적 구성에 의해 일어난다. 환유는 대상과 유사성이 아니라 인접성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꿈이 은유한 것인지 환유를 한 것인지 분석을 통해 할 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텍스트에서 환유에 관해 다룬 것은 꿈에 드러난 내용이 숨겨진 것의 대리표상이라는 점과 동시에 가치의 전도가 있다는 것이다. 가치의 전도는 중요한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부차적인 것은 중요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도출된 무의식의 형성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꿈은 무의식이 해석한 심리적 현실이다. 그런데 무의식이 의미화에 저항하기 위하여 변장하는 것은 왜일까? 무의식의 형성물들은 은유와 환유과정을 통해 왜 은폐하고자 하는 것일까? 무의식의 논리가 숨겨놓은 비밀, 진실, 진리의 차원이 아니지 않은가? 그 무의식의 담화는 대타자의 담화를 우회시켜 타자의 담화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거세된 주체라는 것을 은폐하기 위함일까? 성충동을 억압하려는 유치한 시도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만약 무의식의 형성물이 중요하다면 ‘환상의 횡단’의 자료로서 중요할 뿐이지 않을까.

 기표의 우위

 은유는 '기표의 대체'라고 말한다. 기표를 대체한다는 것과 기표의 전치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조엘 도르가 예를 들고 있는 '정신분석'이라는 기표를 살펴보자.

만약 '정신분석은 페스트다.' 라는 문장에서 페스트라는 기표는 정신분석이라는 기의와 결합하면서 페스트라는 개념(기의)는 사라진다. 그러나 정신분석과 페스트는 유사성으로 묶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 정신분석은 감염될 수 있고, 이질적이라는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이는 기표와 기의의 임의성, 자의성의 증거이자 기표의 우위의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럼 환유의 경우를 살펴보자. '정신분석을 한다' 라는 문장은 '쇼파를 갖는다'(정신분석으로 한다는 비유 인 듯하다)라는 문장으로 쓰인다면, 쇼파는 정신분석상담실에서 일부분이지만 정신분석 행위를 대리하여 쓰일 수 있다. 그렇지만 페스트처럼 페스트라는 개념이 삭제되는 것도 아니고, 정신분석이라는 기표에 새로운 기의도 아닌 단지 대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유는 인접하다는 이유로 기표를 명칭을 대리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기표의 우위가 증명된다.

라깡의 『도둑맞은 편지』역시 기표의 우위를 의미하는데, 편지는 곧 기표다. 편지의 위치에 따라 주체는 맡은 역할이 달라진다. 편지의 내용보다 그 편지가 누구에게 있는가에 따라 인물들의 행동의 범위는 제한된다. 여왕과 대신, 그리고 셜록 편지의 주인은 바뀌면서 여왕의 역할은 이제 대신이 맡게 된다. 주체는 무의식과의 관계에서 언어행위의 기표에 의해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라깡은 비유다.

또 다른 은유의 예를 살펴보자.

프로이트의 꿈에 나왔던 ‘논문’이라는 기표의 숨겨진 내용은 ‘프로이트 자신의 연구에 대한 일방적 성격’과 ‘프로이트 자신의 공상의 높은 가치’에서 연상된 기표로 은유에 해당한다.

또 다른 사례도 제시되는데, 프로필레 + 아밀렌 (재료가 서로 유사한 관계 때문에 발생하는 기표의 대체) = 프로필렌 (명백한 내용) / 유사성의 결합(숨겨진내용)이다.

 환유는 반복이다

 이와 달리 환유의 과정은 명칭이 단순히 바뀐 것, 이름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의 예시는 ‘오케스트라의 구리는 금관악기’와 같은 것이다. 전체에 대한 부분의 관계에 의해 두 용어가 결합된 것이고, 그 인접관계 때문에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이 환유적 구성 속에는 두 개의 기표가 계속 존재하므로 쫓겨난 기표의 의미는 없어지지 않고 계속 위에 존재함으로써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새로운 기호의 가능성은 차단된다. 따라서 환유 역시 ‘기표가 지배하는 기의 그물에 대한 기표의 자율성, 기표의 우위 증명’ 한다. 환유는 기표와 기의 분리선을 제거할 수 없으므로 ‘명백한 무의미’이다. 은유가 정신분석이란 기표를 페스트라는 기표로 대체했을 때 페스트는 정신분석이라는 기의를 가지지만, ‘쇼파를 갖는다’라는 환유에서 쇼파는 정신분석이라는 기의가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쇼파 그 자체의 기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있다. 부분으로 전체를 표상할 뿐이지, 쇼파와 정신분석의 개념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언어수사법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환유이다. 환유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하여 이 텍스트에서도 계속 환유하여 설명하지 않는가? 꿈에서 전치현상이 환유인 것은 꿈의 재료들이 인접관계에 있는 기표사슬에 의해 전개되고, 그 인접 관계는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교환될 수 있는 기표들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달리 꿈에서 환유가 어려운 이유는 숨겨진 인접성에 의한 연결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꿈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재료의 사슬 때문에 의미의 저항성이 나타나고, 꿈 작업은 이 사슬들을 검토하고 분해하는 환유적 과정 전체를 검토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욕망의 수준에서 환유는 끊임없이 대상을 갈아 치우는 것을 뜻한다. 잉여향유의 끝없는 나열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증상은 은유인가 환유인가? 존재의 증상은 개별적이라는 점에 은유이지만 증상의 전개 양상은 환유가 아닌가? 잉여향유로서의 증상의 환유는 반복일 수 밖에 없다. 다시 앞의 꿈으로 돌아가면, 꿈 속에서 짧은 시간에 대상은 바뀌었지만 증상은 반복되었다. 그런 무의식의 형성물들을 전의식을 끌고 와서는 ‘증상의 반복’이라는 기표를 사용하여 증상을 무력화 시키려는 시도 속에 놓여있다. ‘이제 나만의 forta’를 놔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의식적 고통이 행복이나 기쁨보다는 존재의 실감이 커서인가? 증상(향락)을 놓지를 못한다.

아니에르노는 자신의 증상을 이용하여 글을 썼다. 나는 증상을 이용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실패한 것일까? 무엇에 대하여???

 기표사슬의 주인되기

 조엘 도르는 은유적 과정이 의미의 생산자로 보았다. 기표와 기의가 임의적 결합, 기표의 자율성에 의해 기의가 발생하는 한 의미의 생산자라는 것이다. 기표는 무의미 속에 홀로 놓여있다가 다른 기표가 연쇄되면서 의미가 발생하는데, 이는 무의미 속에서 의미가 생산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표의 그물망을 지배하는 것은 기표사슬이고, 기표사슬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타자, 상징계일 것이다. 기표사슬은 구성원리는 은유이며, 의미는 기표사슬 속에서 일관성을 이끌어 내며 생긴다. 기표사슬의 일관성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팔루스에 따라 그 방향이 결정된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주체가 은유되었다고 해도 주체는 자유로운 기표의 연쇄로 새로운 은유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장이 바로 정신분석이다.

 농담

 농담은 의미의 세계를 무화시키면서 팔루스를 비튼다. 거기서 쾌락이 발생한다. 프로이트는 재담은 은유적 압축과 환유적 전치를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압축은 생략을 이끌면서 유사한 특성을 가진 대체 형성물을 창조한다. 예를 들어, ‘가족장자’는 ‘백만장자’와 ‘친근한 가족적인’을 결합하였다. 전치의 예는 ‘아주 재미있었던 결혼 베일’이라는 내담자의 말실수이다. 신혼여행을 이렇게 표현했던 내담자는 숨겨진 사고는 신혼여행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베일은 북아프리카 여자들의 베일을 뜻하는데, 신혼여행대상에 인접한 베일을 사용하였으나, 베일은 성적굴욕을 의미하고 있어, 신혼의 베일은 신혼여행의 유감스러운 경험을 나타낸다. 재담의 기술은 전치를 사용하여 “사고 과정의 우회, 원초적 주제에 대한 심리적 강조를 다른 주제로 전치하는 것”으로 환유적 방법으로 무의식의 형성물, 말실수 등을 만든다. 즉 말실수를 통해 무의식적 형성물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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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넘어선 현실계 - 자크 알랭 밀레와 라캉 오리엔테이션
니콜라 플루리 지음, 임창석 옮김 / 에디투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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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락(jouissance) 

쾌락과 고통을 넘는 것. 인간의 각각 개별적이고 특이적 형태.  존재 방식의 규정. 인간은 향락하는 양태임 

말하는 존재의 향락 

인간은 말을 함으로써 향락한다. 기표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언표행위를 통해 향락하는 것. 그러므로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셍톰(sinthome) 

신체라는 사건으로서 향락 

환상의 횡단 이후 잔여물. 무의식의 실재화. 분석이 종료되어도 남는 것. 

증상은 향락의 측면이 있다. 

시니피앙적 증상에서 셍톰으로 

"셍톰은 무의식의 생성물이 아니라" " 분석 최후의 시점에서 생겨난 증상의 잔여물"이다. 

"셍톰은 암호화된 의미 작용이 아니라 머리없이 욕동[향락]하는 양태이다. " 

증상은 욕망을 대상을 목표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욕망하기를 욕망하기" "욕망에 개방"되어야 한다.  

"분석은 주체가 치유 불능이라는 점과 그의 셍톰을 이끌어 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상당히 치명적인 반복을 되풀이하는 사이에 파손된 리비도의 일부가 또다시 회복되고, 혹은 또다시 욕망(대타자의욕망)에 동일화하게 되면, 우리는 그저 할 일을 하며 일상에 몰두할 것이다." 

현실계(실재계) 

현실계는 말해질 수 도 이해될 수도 없는 것이다. 

 후기라깡의 이론을 접할 수 있는 책이다. 

라깡은 후기에 들어 실재계를 강조했는데, 실재계는 의미를 넘어선 '신체가 향락하는 지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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