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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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시인들은 낮에 빚어진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줄 수 있는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고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성 그 자체를 불신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성을 빙자하여 말과 이론과 법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와 제도의 횡포에 있다. 낮에 잃은 것을 밤에 찾기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선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이다.(220~221)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로 활동하셨던 황현산 선생이 1918년 세상을 뜨셨다. 1945년에 태어나셨으니 74세까지 사신 셈이다. 별세하시기 5년 전인 1913년에 첫 에세이집 밤이 선생이다가 출간되었다. 진작에 사야지 생각하다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사게 되었다. 사놓고도 귀히 여겨 천천히 읽어야지 미루다가 이제야 읽었다. 제목의 영향인지 밤에 읽어야 제격일 것 같아, 밤을 패어 읽었다.

, 한숨이 나왔다. 잔잔히 흐르는 글을 따라가다 보면 선생과 내가 살았던 강산이 보이고, 다른 곳에서 살았으나 어린 시절이 보이고, 신산했던 우리의 역사가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올곧은 정신으로 세월을 관통하며 살았던 한 학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의 융숭하고 강골 있는 문체가 보인다. 그의 메시지는 강변하지 않지만 강하고, 웅변하지 않지만 깊다. 이런 류의 글쓰기는 나로서는 언감생심이다. 나의 한숨의 이유다.

내가 책 줄이나 읽으며 평생을 살아왔으나, 나의 마음을 뒤흔드는 에세이는 (물론 시절 시절마다 많았겠지만) 나이 들어 두 권이 오롯이 기억난다. 하나가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고 다른 하나가 이 책이다. 앞의 책을 1988년에 읽었고, 황현산 선생의 책을 2020년에 읽었으니 32년 만에 마음이 다시 흔들린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나이에 다시 마음이 흔들리다니.

마음을 다잡고 다시 용기내어 글쓸 일이다. 인스턴트식의 글에 신물 나고, 포장만 근사한 택배식의 글에 실망했다면 황현산 선생의 에세이를 읽어보시라. 거나하게 차려진 진수성찬이 아니라 정성들여 소박하게 마련된 조촐한 밥상의 깊은 맛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0년 동안 쓴 80편의 에세이에는 일관된 무엇인가가 있다.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 생각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이 그리움 속에서 나는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다.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천년 전에도, 수수만년 전에도, 사람들이 어두운 밤마다 꾸고 있었을 이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안타깝게 꾸고 있다. 나는 내 글에 탁월한 경륜이나 심오한 철학을 담을 형편이 아니었지만, 오직 저 꿈이 잊히거나 군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작은 재주를 바쳤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서문에 나오는 글을 그대로 옮겼다. 자연, 자유, 평등, 건강, 행복 등 낡아보이는 말들이 어떻게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하는 지 글을 찬찬히 읽어보시라. 에세이를 쓰고자 하는 이는 기꺼이 따를 수 있는 경전 한 권을 얻은 셈이다.

 

<추신> 책에는 밤이 선생이다라는 제목의 글이 없다. 문장 전체를 뒤져봐도 그러한 문장조차 없다. 그러나 그가 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밤의 시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처음에 인용한 구절이 그 증거다.

 

<추신2> 표지에 나오는 검은색을 배경으로 노인의 글쓰는 뒷모습과 작가 소개에 나오는 촛불을 배경으로 한 황현산 선생의 모습은 묘하게 어울린다. 표지그림의 작가는 팀 에이텔(Tim Eitel)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더 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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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을 용기 - 우치다 타츠루의 교육론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 에듀니티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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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젬베를 다시 배우고 있다. 초급과정을 한 3개월쯤 배우고 일이 바빠지면서 손을 떼고 있었는데, 코로나 19가 준 축복(?)으로 일이 없어지자 다시 배우게 된 것이다. 초급이 품세(品勢)를 익히는 일이라면, 중급부터는 적용과 응용과정이다. 초급 품세가 박자와 규칙을 암기하는 것에 가깝다면, 중급부터는 박자를 가로질러, 엇나가다가 돌아오고, 박자를 쪼개고, 강약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규칙을 넘어 즐거움을 만끽하는 과정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초급에서는 시키는 대로 해야 하지만, 중급부터는 개인의 능력과 역량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허용된다.

하지만 중급과 초급이 같은 지점이 있다. 모두가 유연함을 길러 언제든지 기본형태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으려면 본래의 박자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본래의 박자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엄청난 기교와 표현은 소음에 불과하게 된다. 자유에 제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자유의 조건이며 자유를 펼칠 수 있는 토대이다.

 

중급의 젬베를 배우면 가장 먼저 떠오른 사상가가 바로 우치다 타츠루다. 그는 합기도 고수인 무도인이자, 능악이라는 전통일본무용을 몸으로 익히는 무용인이며, 스키의 즐거움을 느끼는 스포츠인이기도 하다. “무도도, 능악도, 스키도, 전하고 있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가장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곳, 다음 선택지가 최대화되는 곳에 서라는 가르침입니다.”(215) 어떠한 동작도 가능한 그 지점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 칼을 피하고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켜낼 수 있는 움직임을 훈련하는 것, 그것이 자유다.

그래서 그는 자유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습득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번에 읽은 책은 완벽하지 않을 용기-우치다 타츠루의 교육론(에듀니티, 2020)이다. 2013년부터 매 해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한국의 교사들과 나눈 강연과 대화록을 묶은 이 책은 한국과 일본사회와 교육의 사정, 미래교육의 방향, 교사의 역할, 교육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우치다 특유의 근본적이고 독창적 강의를 맛볼 수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우치다 타츠루를 초정한 에듀니티에서 이를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무료로 공개해서 당시의 생생한 현장과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교육에 관심이 많은 모든 분들에게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추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일본이 한국을 혐오하는지에 대한 일본지성의 새로운 통찰을 배울 수 있었다. 그에 대해서 쓰려면 또한 엄청난 지면이 필요함으로 반드시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내가 여태까지 들어본 설명 중에 최고다. 통쾌, 상쾌, 유쾌했다.


우리의 생명력이 가장 떨어지는, 가장 위험한 장소는 다음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위치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동선도, 취할 행동도, 움직일 수 있는 타이밍도 하나로 정해진 것이 가장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있어야 할 장소, 순간, 해야 할 일, 모두 ‘해야 한다’는 표현 때문에 유일한 정답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만, 사실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곳이야말로 정답이 됩니다.(215~6쪽)

자유는 학습하는 것입니다. 상당히 집중적이고 장기적인 노력을 들여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올바른 위치에서 올바른 순간에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하려면 아이들에게 선택지가 가장 많은, 선택할 수 있는 동선이 가장 많을 때 살아 있음을, 생명력이 넘쳐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실감나게 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라는 것은 자연 상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교육이나 가정교육, 수행을 통해 비로소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점을 여러분이 꼭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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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감소 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 - 저출산, 저성장 시대를 맞이하는 미래 세대를 위한 처방전
우치다 타츠루 외 지음, 김영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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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관심을 갖게 되는 분야가 미래사회다. 물론 이러한 관심을 드높였던 사건은 코로나19였다. 코로나19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모든 문제를 검토하게 만들었다. 생태, 환경, 건강, 인간, 노동, 자본, 경제, 국제, 사회조직 등 다양한 차원의 담론들이 향후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만이 미래사회를 염려하게 된 원인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른 생산인구감소를 포함한 인구감소, 자동화와 기계화에 따른 노동환경 변화와 대량실업,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핵가족의 붕괴와 개인화, 국제적 분쟁에 따른 자국우선정책과 봉쇄주의, 전쟁에 따른 대량난민 발생, 기후변화에 따른 생태계의 위기 등 미래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위험한 징후들은 얼마든지 손꼽을 수 있다. 내 인생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치고, 우리의 아이들과 후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몰락을 바라보며 비관주의에 빠질 것인가? 전혀 다른 뉴딜(new deal)’ 즉 새로운 전환을 모색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가슴에 품고 이번에 읽은 책은 우치다 타츠루 포함 10여명이나 되는 일본지성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은 인구 감소 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 저출산, 저성장 시대를 맞이하는 미래 세대를 위한 처방전(위즈덤하우스, 2019)이다. 제목에서 짐작하다시피 이 책은 인구감소의 근본적인 원인과 이러한 경향을 조건으로 우리가 모색할 수 있는 미래적 삶에 대한 일본지성의 발언들이다. 저자들은 물론 일본적 상황에 주목하면서 분석과 대안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일본과 유사한 사회현상에 놓여있는 우리의 삶에 비추어보는 데 격차가 크게 벌어지진 않는다.

인구감소 현상이 외면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경향이 아니라면 이러한 조건을 기본값으로 놓고,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생활문화적 차원에서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시도와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내가 특히 재밌게 읽었던 부분은 전인류의 역사를 조망하면서 환경수용력과 인구동태를 살핀 1장과 인구감소에 따라 무연(無緣)의 세계에 유연(有緣)의 장소를 만들자고 윤리적 대안을 제시한 4, 근대의 건축학을 사무라이의 미학과 연관시킨 6장이다. 위에 인용한 구절은 4장에 나오는 문장이다. 마지막에 인용한 부분은 혼자 쌀아가는 1인 가족이 증가하고 있는 시점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부분인데, 기억해두고 싶어서 인용한다.

 

지역과 관계를 맺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1억 총관객사회는 고비용 사회이기도 하다. 고립이 진행될수록 1인당 생활유지 비용이 증가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시 경제와 과학 기술의 힘에만 의존한다면, 좀더 심각한 위험사회의 수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활과 사회에서 관계의 힘을 되살려야 한다. 자연과 타인,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되살리는 것은 우리가 관객석에서 무대로 내려와 각자 생활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힘으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쪽으로 돌아간다.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편이 훨씬 즐겁기 때문에 내려가는 것이다. (240)


저출생을 둘러싼 상황을 저출산이 개선되지 않는 일본과 한국, 어느 정도 제어에 성공한 유럽을 비교해 살펴보면 현저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혼외자녀의 비율이다. 프랑스와 스웨덴의 혼외자녀 비율은 50퍼센트가 넘는다. 유럽 국가들 중에서 일본과 비슷한 가족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독일의 경우도 35퍼센트다. 이에 비해 일본의 혼외자녀 비율은 아예 자릿수가 다르다. 겨우 2.3퍼센트에 불과하다. 한국은 더 낮은 1.9퍼센트다. 다시 말해 유교적 윤리에 사로잡힌 아시아에서는 법률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일이 거의 금기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오히려 인권확대와 생활권 확보 쪽에 있는 것이다.(148~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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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혹된 사상들 - 인류를 사로잡은 32가지 이즘, 개정증보판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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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다. 코로나19가 진정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인문학놀이터 참새방앗간에 들렀다. 소모임이 가능하도록 깨끗하게 치워져 있다. 10명 이내의 사람에게 적합한 공간이다. 공간 한 쪽 벽은 책장으로 장식했다. 물론 책장에는 책들을 가득 채워 놓았다. 반은 읽었고, 반은 아직 채 읽지 못한 책들. 내가 사 놓은 책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책들을 보는 것만으로 나의 과거가 반추된다. 책 장에 책을 한 권 뽑았다. 안광복의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사계절, 2018)이다. 사실 이 책은 2013년에 나온 교과서에서 만나는 사상(사계절)의 증보판이다. 살펴보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항목이 증보되었다. (아이쿠, 가장 핵심적인 사상을 빼놓았구먼!)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책을 훑어본다. (과거에 읽은 책이라 훑어본다는 말이 맞지 싶다. 그렇다고 대충 읽은 것은 아니다.) 340쪽 정도 되는 책에 32가지 사상을 소개했으니, 대략 한 사상 당 10쪽 안팎의 내용으로 정리해놓은 책이다. 사상의 축도 같은 책이라 깊이는 보장할 수 없지만, 친숙한 사례와 대중적 글쓰기로 쉽게 사상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책은 크게 정치, 철학 예술, 국가, 경제, 사회 등 5장으로 나눠져 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사상의 이름만 소개하자면, 공화주의, 계몽주의, 민주주의, 보수주의, 자유 민주주의, 사회 민주주의, 아나키즘, 포퓰리즘, 낭만주의, 니힐리즘, 실존주의, 구조주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주의 리얼리즘, 제국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프런티어 정신, 대동아 공영권, 마오이즘, 주체사상, 자본주의, 공산주의, 개발 독재, 신유교 윤리, 신자유주의, 기업가 정신, 오리엔탈리즘, 페미니즘, 생태주의, 관료주의 등이 소개된다. 자신이 궁금하거나 읽고 싶은 부분을 찾아 읽어도 아무 문제없다.

소개되고 있는 사상의 높낮이가 차이가 있어서 왜 이런 식으로 항목을 설정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학생들이 교과서에서 접했을 개념들을 친절하게 풀어주려는 교사의 친절함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학술적 엄격함이나 항목의 치밀함보다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그러나 막상 설명하려면 쉽지 않은 사상을 이 만큼 쉽게 설명한 책은 쉽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의 실정을 고려한 자유민주주의항목은(위의 인용구에도 소개된) 학생들에게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가 형성된 지점과 그것이 오늘날 어떤 식으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는 지 소개하고 있어 현실감을 더한다.

이 책으로 배경을 깔았다면, 유시민이 쓴 국가란 무엇인가(돌베개, 2017)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안광복의 책이 사상을 평면적으로 쉽게 소개했다면, 유시민의 책은 입체적이면서 역사적으로 조금은 깊이 있게 소개한 책이다. 안광복의 책이 교사의 친절함으로 잘 포장된 책이라면, 유시민의 책은 정치가의 고민이 잘 녹여진 책이다. 독자층으로 말하자면 안광복의 책은 중학교 이상을 독자층으로 한다면, 유시민의 책은 고등학교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현실을 탐구하고 미래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상에 대한 깊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이자,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태도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 사회를 읽고 싶다면 좀더 폭넓은 시선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안광복의 책은 그러한 시선확보에 첫걸음에 해당하는 책이고, 유시민의 책은 단단하게 지식을 다지는 책이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로서는 자유 민주주의는 아픈 독재의 기억을 담고 있는 단어다. 그러나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보수 세력의 생각은 다르다. 민주주의를 앞세우는 진보 측 생각이야말로 시장 경제를 무너뜨리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생각과 닮은꼴 아닌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유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어느덧 자유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보수 세력을 나타내는 꼬리표가 되었다. 그래서 진보 쪽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주로 쓴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이제 보수인지 진보인지를 가리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어 버렸다. (60~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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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없이 당분간 짧아도 괜찮아 1
김금희 외 지음 / 걷는사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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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얼마나 짧아질 수 있을까? 장편소설, 중편소설, 단편소설에 이어 손바닥 장() 자를 쓴 장편(掌篇)소설이 등장했다. 우리말로는 손바닥 소설로도 알려진 아주 짧은 소설들. 일찍이 보르헤스의 아주 짧은 소설들을 읽으며, 아 이렇게 소설을 쓸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이제는 그렇게 짧은 소설들을 우리 문단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손바닥 소설은 시대적 징후인가? 메리언 울프가 쓴 다시, 책으로-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에 소개된 가장 짧은 소설은 헤밍웨이의 것이다. 불과 6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굳이 번역하면, “팝니다. 한 번도 신겨보지 못한 아이의 신발을.” 이렇게 짧은 문장도 소설이라 할 수 있으려나? 임홍택은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에서 90년대 생의 특징으로 간단재미를 들었다. 90년대에 태어난 청년들은 앱 네이티브 세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비선형적 사고와 촌철살인의 드립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경향의 문학적 방식이 초간편소설의 등장이라고. 일면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다. 긴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학생들을 접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손바닥 소설의 등장을 그렇게만 해석한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독서능력과 인내력을 바닥으로 치달릴 것이고, 그것은 소설의 몰락을 예고하는 표지 아닐까? 나는 손바닥 소설의 등장을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싶다. 대중적 글쓰기의 예비단계라고. 글쓰기가 글쓰기 전문가의 몫으로 권위를 유지했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누구나 글쓰기가 가능해졌다. 글의 수준의 문제도 일방적인 잣대로만 설정할 수는 없는 시대가 온 것 아닌가 한다.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글로 쓸 수 있는 장은 점점 넓어지고 있고, 그러한 배경에서 새로운 작가의 등장은 어재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요즘은 기성 작가들이 이러한 경향에 맞추어 다시금 자신의 글쓰기를 실험하고 있는 듯한데, 이 시도 중 하나가 오늘 읽은 이해 없이 당분간(걷는사람, 2017)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22명의 기성작가들의 손바닥 소설을 모은 책이다. ‘짧아도 괜찮아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데, 이미 이 시리즈로 5권이나 나온 것을 보면 앞으로도 이러한 실험은 계속될 것이다. 시대적 상황에 대한 소설적 접근, 새로운 상상력, 일상의 이면 등을 짧게 소설로 썼는데, 글자가 작다는 단점 외에는 이모로 저모로 다양한 읽기를 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책에 나오는 소설을 소개하는데 출판사가 소개하고 글을 인용하는 게 나을 듯싶다.

 

빛의 온도에서 조해진 소설가는 집회를 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또 각각의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놀랄 만큼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또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마님(백민석, 눈과 귀), 섬마을 아이 동식이와의 대화를 통해 세태를 꼬집는 블랙리스트 작가(한창훈, 동식이), 각자의 이유로 따로 또 함께 울고 있는 버스기사와 승객(임현, 이해 없이 당분간), 그리고 투표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투표권을 사고팔 수 있는투표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김덕희, 배를 팔아먹는 나라), 취업을 미끼로 청년들에게 사기를 치는 국가 권력의 모습(백가흠, 취업을 시켜드립니다), 지금 이곳에서 한 치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일상의 모습(김금희, 그의 에그머핀 2분의 1), 헤어진 애인을 추억하며 현대인들이 가진 무관심과 신성함이 사라진 세계의 모습(손보미,계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자의 방황과 상실감(조수경, 외선순환선) 등을 통해 작가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또 어떤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

 

개인적으로는 백민석, 한창훈, 김덕희, 백가흠의 손바닥 소설이 재밌었는데, 특히 김덕희의 소설은 투표율이 점점 낮아지자, 이럴 바에는 투표권을 판매할 수 있도록 법을 고치자고 제안하며 국민투표에 붙이는데 80%가 투표했다는 상황설정이 씁쓸하면서도 기발했다.

 

 

<추신>

나는 이러한 기성작가보다는 장주원의 《ㅋㅋㅋ》(문학세계사, 2014)나 김동식의 회색인간(요다, 2017)에서 손바닥소설의 미래를 본다. 둘 다 전문작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둘의 작품은 새로운 베스트셀러의 영역에 돌입했다. 기이한(?) 현상이다. 영어로는 미니 픽션(Mini-Fiction), 마이크로 픽션(Micro-Fiction)로 표현되거나 영미권에서 통용되는 플래시 스토리(Flash Story)라는 용어를 가지고 있는 손바닥 소설은 A4용지 한 장 분량에 해당하는 것도 있다. 이 흐름은 이미 보르헤스로 대변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널리 쓰이는 소설 쓰기 방식이다. 간결성, 다양성, 파편성, 신속성, 가상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 소설쓰기 방식은 SNS의 대중화와 함께 21세기적 글쓰기의 커다란 흐름으로 전개될 것 같은 예감이다.


세상의 어떤 일에는 단 하나의 진실이 아니라 여러 개의 진실이 있음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도 정말로 그렇게 믿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믿는 척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할 뿐인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내가 그렇게 때문에 안다. 하나뿐인 진실은 얼마나 쾌적하며 거기에 이끌리는 나를 막아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 바로 그럴 때 여러 작가들의 짧은 소설을 한꺼번에 읽어보는 일은 도움이 된다. 이 책이 단 하나의 진실에 힘차게 복무하는 엔솔로지였다면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안에는 현실의 이슈에 밀착해 이루어진 고발과 풍자가 있고, 미래로 먼저가 현실을 돌아보며 시도된 비판적 성찰이 있으며, 언론 속 큰 현실 옆을 흘러가는 개인의 고요한 고통과의 통행과 공감도 있다.
- 신형철의 표 4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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