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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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시인들은 낮에 빚어진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줄 수 있는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고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성 그 자체를 불신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성을 빙자하여 말과 이론과 법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와 제도의 횡포에 있다. 낮에 잃은 것을 밤에 찾기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선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이다.(220~221)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로 활동하셨던 황현산 선생이 1918년 세상을 뜨셨다. 1945년에 태어나셨으니 74세까지 사신 셈이다. 별세하시기 5년 전인 1913년에 첫 에세이집 밤이 선생이다가 출간되었다. 진작에 사야지 생각하다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사게 되었다. 사놓고도 귀히 여겨 천천히 읽어야지 미루다가 이제야 읽었다. 제목의 영향인지 밤에 읽어야 제격일 것 같아, 밤을 패어 읽었다.

, 한숨이 나왔다. 잔잔히 흐르는 글을 따라가다 보면 선생과 내가 살았던 강산이 보이고, 다른 곳에서 살았으나 어린 시절이 보이고, 신산했던 우리의 역사가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올곧은 정신으로 세월을 관통하며 살았던 한 학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의 융숭하고 강골 있는 문체가 보인다. 그의 메시지는 강변하지 않지만 강하고, 웅변하지 않지만 깊다. 이런 류의 글쓰기는 나로서는 언감생심이다. 나의 한숨의 이유다.

내가 책 줄이나 읽으며 평생을 살아왔으나, 나의 마음을 뒤흔드는 에세이는 (물론 시절 시절마다 많았겠지만) 나이 들어 두 권이 오롯이 기억난다. 하나가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고 다른 하나가 이 책이다. 앞의 책을 1988년에 읽었고, 황현산 선생의 책을 2020년에 읽었으니 32년 만에 마음이 다시 흔들린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나이에 다시 마음이 흔들리다니.

마음을 다잡고 다시 용기내어 글쓸 일이다. 인스턴트식의 글에 신물 나고, 포장만 근사한 택배식의 글에 실망했다면 황현산 선생의 에세이를 읽어보시라. 거나하게 차려진 진수성찬이 아니라 정성들여 소박하게 마련된 조촐한 밥상의 깊은 맛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0년 동안 쓴 80편의 에세이에는 일관된 무엇인가가 있다.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 생각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이 그리움 속에서 나는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다.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천년 전에도, 수수만년 전에도, 사람들이 어두운 밤마다 꾸고 있었을 이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안타깝게 꾸고 있다. 나는 내 글에 탁월한 경륜이나 심오한 철학을 담을 형편이 아니었지만, 오직 저 꿈이 잊히거나 군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작은 재주를 바쳤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서문에 나오는 글을 그대로 옮겼다. 자연, 자유, 평등, 건강, 행복 등 낡아보이는 말들이 어떻게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하는 지 글을 찬찬히 읽어보시라. 에세이를 쓰고자 하는 이는 기꺼이 따를 수 있는 경전 한 권을 얻은 셈이다.

 

<추신> 책에는 밤이 선생이다라는 제목의 글이 없다. 문장 전체를 뒤져봐도 그러한 문장조차 없다. 그러나 그가 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밤의 시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처음에 인용한 구절이 그 증거다.

 

<추신2> 표지에 나오는 검은색을 배경으로 노인의 글쓰는 뒷모습과 작가 소개에 나오는 촛불을 배경으로 한 황현산 선생의 모습은 묘하게 어울린다. 표지그림의 작가는 팀 에이텔(Tim Eitel)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더 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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