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김이듬 지음 / 열림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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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울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내 몸에서 흐르는 것들을 좋아한다. 노래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날은 적어졌지만, 눈물과 땀을 흘리는 날이 곱절 많아졌지만, 아무튼 내 몸에서 배출되는 물기들이 좋다. 피와 냉, 오줌도. 글도 내 몸에서 손가락을 통해 흘러나오는 물질 같다. 흘러나오는 이것들이 이따금 구질구질하고 지저분해 보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일기도 아니고 넋두리도 아니고 시는 더더욱 아닌 이 글을 나는 쓴다. 열심히는 아니고 마치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아이처럼. 뭔가 쓰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다.(80쪽)    

 

책이 나오기도 전에 미리 구매한 책을 며칠 전에 찾아가 받았다. 농가에서는 이러한 구매법을 ‘입도선매(立稻先賣)’라고 하고, 문화계에서는 예매(豫買)라고 한다. 책방을 운영하는 김이듬 시인의 산문집이다. 표지는 하드카버이고 그림도 분위기 있다. 제목이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열림원, 2020)이다. 시인은 산문집을 나에게 주면서 너무 두껍지 않냐고 물었다. 340쪽 되는 분량이니 두꺼워 보이지만, 시원한 편집 덕에 금새 읽힐 것 같다. 게다가 정가가 13,400원. 분량에 비해 겁나(^^) 싸다. 


책방이듬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산 호수공원 근처에 있었는데, 월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대화동으로 이사하여 두 번째 둥지를 틀었다. 월세는 줄었는데, 평수는 넓어졌고 훨씬 쾌적하다. 이 책은 호수공원 근처에서 책방을 운영했던 1천 여일 동안 썼던 시인의 내밀한 기록(?)이다. 시도 있고, 일기도 있고, 산문도 있고, 단상도 있다. 글의 분량도 제각각이다. 한쪽도 못 되는 것도 있고, 서너 쪽을 넘기는 것도 있다. 부러 분량을 늘이거나 줄이지 않은 시인의 글쓰기가 퍽이나 마음에 든다. 딱 필요한 분량만큼만 쓸 수 있었던 것은 발표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시인의 환경과 생각의 리듬에 따라 자유롭게 글을 쓴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김이듬 시인의 이러한 자유로움을 좋아한다.

글에는 호수공원도 종종 등장하는데 – 사실 나도 호수공원이 좋아 일산으로 이사했다 – 시인이 바라보는 호수공원이 신선하다. 너무 좋아 종이 끝을 접어두었던 문장은 이렇다. “관광객들이 보트를 타고 호수에 들어가는 오후에도, 아무도 오지 않는 계절에도, 나는 호숫가에 서 있다. 호수를 좋아하지만 접촉하지 않는다. 내가 몰라도 되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과 비밀이 없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선을 유지하며 증상 없는 사랑을 실험한다.”(113쪽)

‘증상 없는 사랑’이라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은 삶이 무뎌진 결과가 아니라, 삶을 온전히 받아낸 사람이 쓸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들이 치기어린(?) 마음으로 시작했던 많은 공간들이 얼마 못 가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무너져내리는 것을 하도 많이 봐와서 3년 넘게 수익도 거의 나지 않는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이듬시인이 신기했다. 이제는 무너질 만도 한데, 왠 걸, 다시 출발한다. 그것은 고집이 아니라 사랑이다. 시절 지난 인연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인연들이 빚어내는 이 기적과 같은 새출발의 시점에 바로 이 산문집이 나왔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글은? 물론 놀랄 만큼 좋다. 시인이 산문을 쓰면 이렇게 쓰는구나. 이 책을 읽으며 자주 놀란다.

내 주변에 에세이를 쓰고 싶어하는 예비작가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책의 목록에 올려놓았다. 길게 쓰지 않아도, 뭔가 교훈을 주지 않아도, 강제로 끝맺음을 하지 않아도 글 자체로 빛날 수 있다는 것을 김이듬의 산문은 증명하고 있다. 세상을 바꿀 만한 사상이 없어도, 삶을 뒤집을 만한 경험이 없어도, 독자를 깜짝 놀라게할 표현이 없어도, 이처럼 절묘하게 자신의 일상을 그려낼 수 있다는 걸 김이듬 시인은 보여주고 있다.

편편이 좋아서 맛있는 음식을 아껴먹듯 야금야금 책을 읽었다. 줄치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 차라리 안 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살짝 그 매력 – 혹은 마력 –을 소개하기 위해 나는 <『사라진느』를 읽고>를 선택한다. 이 글은 한쪽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변화하는 계절 속에 인생관을 담은 빛나는 글이다. 후하게 3문단 중 뒤의 2문단을 소개한다.     


“지난여름 내내 암울했지만, 삶이 없었다고 말해버리면 안 되겠다. 울고 있었지만 지워지는 건 없었다. 빗물에 씻긴 과일의 단맛은 사라진 게 아니다. 달고 따뜻한 빗물로 풀벌레들을 살찌웠다.

이어서 혹한이 닥칠 것이다. 사람은 예견할 수 있다.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것은 없다. 내가 확인할 수 없을 뿐. 사람이라면 깨닫는다. 사라지면서 찰나적으로나마, 순간적 숭고, 순간적 완성이 반복되다 보면 되고 싶은 존재와 되어가는(becoming) 신비가 발생하리라. 성스러움은 인간의 본질이다.”(216~217쪽)    

지금도 울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내 몸에서 흐르는 것들을 좋아한다. 노래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날은 적어졌지만, 눈물과 땀을 흘리는 날이 곱절 많아졌지만, 아무튼 내 몸에서 배출되는 물기들이 좋다. 피와 냉, 오줌도. 글도 내 몽에서 손가락을 통해 흘러나오는 물질 같다. 흘러나오는 이것들이 이따금 구질구질하고 지저분해 보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일기도 아니고 넋두리도 아니고 시는 더더욱 아닌 이 글을 나는 쓴다. 열심히는 아니고 마치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아이처럼. 뭔가 쓰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다.(80쪽)

"관광객들이 보트를 타고 호수에 들어가는 오후에도, 아무도 오지 않는 계절에도, 나는 호숫가에 서 있다. 호수를 좋아하지만 접촉하지 않는다. 내가 몰라도 되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과 비밀이 없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선을 유지하며 증상 없는 사랑을 실험한다."(113쪽)

"지난여름 내내 암울했지만, 삶이 없었다고 말해버리면 안 되겠다. 울고 있었지만 지워지는 건 없었다. 빗물에 씻긴 과일의 단맛은 사라진 게 아니다. 달고 따뜻한 빗물로 풀벌레들을 살찌웠다.

이어서 혹한이 닥칠 것이다. 사람은 예견할 수 있다.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것은 없다. 내가 확인할 수 없을 뿐. 사람이라면 깨닫는다. 사라지면서 찰나적으로나마, 순간적 숭고, 순간적 완성이 반복되다 보면 되고 싶은 존재와 되어가는(becoming) 신비가 발생하리라. 성스러움은 인간의 본질이다."(216~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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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상의 최전선 - 전 지구적 공존을 위한 사유의 대전환
김환석 외 지음, 이정호 외 그림, 이감문해력연구소 기획 / 이성과감성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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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디어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책이 나왔다. 이감문해력연구소에서 기획하고, <문화일보>20199월부터 20203월까지 연재된 21세기 사상에 대한 소개가 합쳐져 단행본으로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이성과감성, 2020)이 나온 것이다. 2011년에 작고한 프리드리히 키플러를 제외하고 모두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현대철학자들 25명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요약하면서 21세기 철학의 지형을 소개하는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와 진정한 동시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철학이라면 동서양철학을 두루 섭렵했다고 자부하는 나였지만, 이 책에 나오는 21세기 철학자들의 이름을 보았을 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도나 해러웨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름조차 생경한 철학자였다. 역사공부할 때 조선시대에서 끝내고, 근현대사를 전혀 공부하지 않았던 학창시절의 내가 떠올라 참으로 부끄러웠다.

이 책을 가이드북 삼아 큰 그림을 그려놓고, 읽어야 할 책들을 한 권 두 권 섭렵하며 모자란 빈칸을 채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책에서 소개하는 철학자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다양한 철학을 전개 해나가지만, 억지로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다면 인간 중심적 이원론을 넘어 탈인간 중심적 일원론(또는 다원론)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탈인간의 자리에 매체, 자연, 식물, 동물, 미생물,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온갖 물질들(심지어는 타자기)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 모험은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 정치 경제이론, 생태 이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지대를 확장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간 자리의 겸손함을 확인함과 동시에 인식의 지평을 고도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말이다.

 

2.

25명이 이야기를 모두 소개하자면 다시 한 권을 책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한 명만을 맛보기로 소개할까 한다. 제인 베넷이다. 이 철학자를 소개하게 된 동기는 내가 고양시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해보겠다.

 

2019328일 고양시장 이재준은 일산 호수공원 장미원 잔디광장에서 <고양 나무 권리선언문>을 낭송했다. 이 선언은 더 이상 나무가 목재나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같은 한 생명으로서의 존엄성과 미래의 동반자임을 확인하는 선언이었다.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생명의 소중함을 담은 나무 권리선언으로 공공 수목관리에 대한 기본 이념을 바로 세우고 사람과 나무가 공존하는 고양시를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1> 나무는 한 생명으로서 존엄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2> 나무는 오랫동안 살아온 곳에 머무를 주거권이 있습니다.

<3> 나무는 고유한 특성과 성장 방식을 존중받아야 합니다.

<4> 숲은 나무가 모여 만든 가장 고귀한 공동체이며 생명의 모태입니다.

<5> 나무는 인위적인 위협이나 과도한 착취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6> 사람과 나무는 벗이 되어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7> 나무의 권리는 제도로 보호받아야 합니다.

 

 

지차체 역사에 기리 남을 이러한 선언은 평소에 생태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고양시장의 남다른 행보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아마도 제인 베넷이라면 이러한 고양시의 태도에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제인 베넷이라는 이름이 생소하다고? 생태철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제인 베넷(Jane Bennett, 1957~ )은 생기론적 입장에서 생태와 인간과 정치를 새롭게 조망하면서 철학적, 정치적 활동을 정력적으로 펼치고 있다. 2010년에 발표한 생기론적 물질은 환경과 신유물론에 관한 생각을 잘 정리한 대표적 저술이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번역이 안 됐다. 이 책이 어서 번역이 되었으면 좋겠다. 전문가들의 건투를 빈다.)

 

그는 묻는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독립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모든 생명이 서로 관련지어 있고, 서로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인간에게만 주어진 권리를 다른 생명체에게도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인간의 생태파괴가 곧 인간파괴로 이어지는 현대에 이러한 물음은 한가한 철학자들의 고담준론이 아니라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실존적 질문이라 볼 수 있다.

제인 베넷은 자연, 윤리, 정동에 초점을 둔 연구를 통해 자연과 물질도 인간처럼 세계의 변화에 활발하게 반응하는 적극적, 능동적 주체라는 점에 주목한다.”(142)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000년간 이어져 온 인간/사물, 사회/자연, 주체/객체라는 이른바 대분할(Graet Divide)’의 벽을 허물려한다.”(143) 인간의 정치적 특권을 상정하는 정치철학만으로는 변화된 세계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 물질의 능동적 역할을 외면하는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과 물질도 정치적 경로를 바꿀 수 있다. 존재의 행위성은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에 의한 네트워크 안에서 비로소 발휘된다. 인간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작은 벌레 하나도 인간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끼친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이 말의 의미를 선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기론적 접근은 이제 모든 존재를 정치적 주체로 호명한다. 군중은 더 이상 인간의 집합체가 아니라, ‘인간-자연-사물의 집합체이다. “공적 삶이란 매 순간 이간과 사물의 다양한 결합 방식에 따라 다르게 생성되어 효과를 일으킨다.”(145) “정치 생태학은 바로 인간과 사물이 결합된 집합체가 만드는 정치적 행동이다.”(145) 민주주의의 주체 역시 그에 따라 확장된다. 인간과 더불어 자연과 물질이 동등한 정치적, 법적 권리를 갖는 것은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운 접근법임과 동시에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이 될 수 있다.

 

<추신> 기회가 된다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철학자들의 핵심개념과 주요개념만이라도 정리해 다시 한번 글을 쓰고 싶다. 언제 그런 기회가 오려나? 강의로 풀어볼까?


21세기 사상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다양한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21세기 세계에서 기후 변화, 생태 위기, 과학 기술의 획기적 변화 등 하이브리드적 현상들이 점점 확대 및 심화되고 있다면, 인간 중심적 이원론에 기초한 20세기 사상은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해결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인간과 비인간을 동등한 행위자로 보면서 그들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결합을 이해하려는 21세기 사상의 탈인간 중심적 일원론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훨씬 더 필요하고 적절하다.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은 바로 이런 모험적 시도를 보여 주는 새로운 이론들을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들어가며,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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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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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공부하는 나로서는 과학저술을 읽을 때 일종의 불안감이 든다. 그것은 마치 외국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이 외국여행을 떠날 때의 불안감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해외 여행을 떠날 때에 갖게 되는 설렘 같은 것도 있는 것처럼, 과학책은 그런 설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 읽은 책은 수학인문학을 개척한 후배가 반드시 읽어야 한다며 강추한 책이라 구입하게 되었다. 양자중력이론의 선구자인 카를로 로벨리가 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쌤엔파커스, 2019)이다. ‘시간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친숙하지만 막상 그에 대해 말하라면 할 말이 별로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시간에 대해서 한 권씩이나 설명한 책이라고 하니, 호기심이 가득하다. 게다가 제목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이니 우리네 상식과 충돌한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이정도면 충분하다.

 

이 책은 우리가 경험하는 통상적인 시간관념인 유일성, 방향성, 독립성, 현재성, 영속성의 특성을 하나하나 친절하고 자세히 비판하면서 이러한 관념은 지각 오류의 산물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의 특수성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말한다. 양자이론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유한한 크기를 지닌 매우 작은 양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런 양자들의 불연속적이고 불확정적인 요동이다. 또한 중력이론(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물질 분포에 따라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흐르고 공간도 다르게 휘게 되어 우주에는 유일한 시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시공간들이 존재한다.

 

지은이는 이 두 이론을 결합한 양자중력이론의 대가이다. 그는 양자론과 중력이론을 종합하여 시간은 유일하지도, 특정한 방향성을 띄지도, 독립적이지도, 현재라고 할만한 것도, 영속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통상적 시간의 개념이 모두 뒤집힌다. 과학의 눈으로 우리의 상식은 파괴된다.) 심지어는 우리가 통상 사물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105)라고 말한다.

카를로 로벨리는 이전의 저서인 모든 순간의 물리학(2016), 보이는 세상은 실제가 아니다(2018)에서 이미 우리가 통상 물질, 에너지,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그러나 과학계에서는 상식에 속하는 시선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는 특히 시간개념을 과학사적으로 추적하여 비교분석함으로써 우주 본래의 원초적 시간에는 순서나 질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흐름이 없으며 시간은 단지 물질들이 만들어 사건들의 관계이며, 이 관계들의 동적인 구조를 나타내는 양상임을 과학적 수식을 동원하지 않고, 인문학적 언어로 설득력있게 논증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을 하나하나 공략하여 부수고, 그렇게 부숴놓은 페허에 새로운 과학이론을 선보이고, 마지막으로 이 과학이론과 우리의 상식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그럼에도 우리는 왜 우리의 상식을 고집하게 되었는지, 그것의 유용성과 한계는 무엇인지 서술한다. 이 순서를 따라서 책을 읽다보면 과학의 세계와 상식의 세계를 둘 다 이해하면서, 묘하게 결합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시간을 비롯한 삶에 대하여 우주적 시선과 더불어 지구적 시선, 그리고 인간의 시선을 동시에 갖게 된다. 이른바 겹눈을 갖게 되는 것인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외눈박이 괴물로 살았는지 깨달음과 동시에 거대한 시선이 주는 장쾌함에 감탄하게 된다. 나의 인문학적 표현으로 말해보자면, ‘참새의 시선으로만 살다가, 우주로 도약하는 붕새의 시선을 갖게된 과학계의 장자(莊子)를 만난 기분이다.

 

<추신> 아래에 인용한 부분은 그러한 시선을 갖게 된 저자가 인생을 어떻게 보는지를 보여주는 일단을 옮긴 것이다. 인용구는 관조적이고 부정적인 어조로 느껴지지만, 책 후반부에 들어나는 인생관은 부드럽고 아름답다. 말인즉, 읽어봐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에 혹은 미래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예측 속에 있다. 우리는 영원불멸을 갈망하고 시간의 흐름에 고통스러워한다. 시간은 고통이다. (...)우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라는 소중한 존재를 선물하고, 모든 고통의 근원인 영원에 대한 허무한 환상을 만들게 한다.(196~7쪽)

내가 보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진화의 오류다. 수많은 동물들이 포식자가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드러워하며 도망친다. 그것이 건강한 반응이고 그래야 위험에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두려움일 뿐 계속되지 않는다. 이 두려움 덕분에 미래를 예상하는 능력이 지나친, 전두엽이 비대한 털 없는 유인원이 탄생했다. 미래를 예상하는 능력은 분명 도움이 되는 특권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 유인원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해야 한다. 물론 두려움의 본능을 일깨워 포식자로부터 도망치게 해주기는 한다. 나는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두 가지 진화의 압박에 의한 우발적이고 어리석은 간섭이자, 우리 뇌 속에서 발생한 잘못된 자동 회로 연결의 산물일 뿐 특별히 유용하다거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일정한 기한이 있다. 인류도 마찬가지다.(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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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것 - 독서법 전통을 통해서 본 성경 읽기와 묵상
강영안 지음 / IVP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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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은 나에게 무엇보다 레비나스를 알기 쉽게 해설한 철학자이다. 그는 레비나스가 쓴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 1996)을 번역한 학자이자, 그 어렵디 어렵다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쉽게 접근하도록 풀어 설명한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5)의 저자이기도 하다. 나는 우치다 타츠루의 레비나스 해설서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갈라파고스, 2013)을 읽고 레비나스에 대해 급관심이 생기면서, 레비나스의 책들을 읽기 전에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안내자를 찾던 중 강영안을 발견하고, 그의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최근의 나의 관심사는 읽는다는 것과 쓰는다는 것이다. 독서와 집필, 나는 이 두 주제를 올 한해의 주제로 삼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고 있다. 그러던 차 강영안의 신간 읽는다는 것(IVP, 2020)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책도 나오기 전에 선주문해놓고 책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러한 간절한 기다림은, 어렸을 적,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의 다음 권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하루가 멀다하고 만화방을 기웃댔던 경험과 맞먹는다.) 강영안 선생이라면 나에게 읽는다는 것에 대하여 한소식을 전해줄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드디어 책이 입고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단걸음에 뛰어가(사실은 차를 몰고 달려가) 구입하였고, 또 한숨에 읽어버렸다.(사실은 2시간 정도 걸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족 반 그냥 반이었다.

우선 '만족 반'부터 말해야겠다. 그의 이전 책 일상의 철학(세창출판사, 2018)년도에는 우리네의 일상을 현상학’, ‘해석학윤리학으로 크게 구획하여 일상의 삶을 철학적으로 탐구하였다. (이 책은 별도로 독서노트를 마련할 생각이다.) 나는 이번의 신간이 이 책과 연속선상에 놓인 것이라 생각했다. 읽는다는 것의 철학적 탐구를 기대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번의 신간은 그 연속선상에 놓여있기는 하다. 문자와 읽기에 대한 철학사적 탐구와 동서양철학자의 비교, 읽기의 현상학과 해석학, 윤리학은 다시금 이 책에서 재활용되면서 깊이를 더했다. 여기까지가 나의 만족지점이다. (이것만해도 어디인가?)

그냥 반이라고 말한 이유를 굳이 말해보자면, 강영안의 복음주의적 성서관이 내가 떠나온 과거와 연관되어 있었기에 갖게 되는 낯익은 이질감으로 인해 생기는 감정들의 불편함 때문이다. 그는 주희(朱熹)의 경전 독서법과 중세 수도원에서 출판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법)’를 비교하면서 주관과 객관에 매몰되지 않고 신성(神性)에 다가가는 독서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인들이 실천하는 경건의 시간(Quiet Time)’에 대한 인격적 읽기를 독려하고 있었다. (아마도 기복신앙이나 관행적 신앙관에 사로잡혀 있는 정통(?) 교인들에게는 강영안의 독서법이 매우 인상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서에 대해 급진적인(?) 생각을 가진 나로서는 실용성이 떨어지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권장할만한 데, 그것은 읽는다는 것이 읽는 것이나 정보습득에 그치지 않고 삶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는 저자의 일관된 독서관때문이다. 현상학과 해석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윤리학으로까지 확장되는 독서는 비단 성경(혹은 성서)를 읽는 교인들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라, 일반적인 독서인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저자가 부제에서 밝혔듯이 독서법 전통을 통해서 본 성경 읽기와 묵상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목적을 갖지 않은 독자들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독서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독서법을 더욱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추신 1> 나중에 조사해보니, 저자는 철학적 저술뿐만 아니라 종교적 저술도 다량으로 생산하고 있었다. 보수적인 신앙에 사로잡혀 있는 독자라면, 강영안의 종교적(기독교적) 저술로 해독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보수적인 종교관 속에서도 성속의 균형감을 갖고, 신학과 철학의 접점을 찾는 성실하고 독실한 학자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강영안은 그런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다.

<추신 2> 만약에 당신이 교회를 다니는데, 성경읽기를 멈췄거나, 더 이상 성경이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또 아직까지는 교회 다니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강영안의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활력을 잃은 선데이 크리스챤들에게 강추한다.


칸트는 읽기에 관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합니다. "무엇을 읽을 때, 남의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생각하십시오. 언제나 자기 눈으로 보려고 애쓰십시오." 저는 성경을 읽는 사람도 이 충고를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눈으로 읽고 남의 생각으로 받아들인 말씀은 나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나의 눈으로, 나의 지성으로, 나의 생각을 말씀 앞에 내어놓고 씨름하며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5쪽)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능동적으로 다가서고 능동적으로 문장을 읽고 이해하고 파악하려 할지라도,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들을 때 성경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말씀 앞에 발가벗겨, 그야말로 방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그로 인해 심지어 상처를 입을 가능성(vulnerability)이 있는 지점에 까지를 우리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성경을 읽는다고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숨결로 쓰인 성경이 능동적으로 우리를 읽어 내고 말씀 앞에 우리는 세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때 완전한 수동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이 우리를 읽을 때의 읽기 방식은 ‘수동적 읽기’이고 ‘상처 입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읽기’입니다.(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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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피엔스 - 문명의 대전환, 대한민국 대표 석학 6인이 신인류의 미래를 말한다 코로나 사피엔스
최재천 외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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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최재천, 장하준, 최재붕, 홍기빈, 김누리, 김경일 6인의 석학과 진행한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 대한 대담이 책으로 나왔다. 코로나 사피엔스(인플루엔셜, 2020)이다. 6명 모두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이 친숙성은 그들이 이야기하는 담론이 대중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책은 라디오 방송에서 사회자와 대담한 내용과 더불어 못 다한 이야기들을 보강하여 싣고 있다. 시기성에 맞춘 출판물이다.

이 책의 장점은 다양한 관점과 영역에서 코로나 사태를 다루고 있다는 데 있다. 생태적 관점, 경제적 관점, 문명적 관점, 체제적 관점, 세계관적 관점, 심리학적 관점에서 코로나 이전과 현재, 미래를 예측하고, 성숙한 사회를 변화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제시하고 있다. 자칫 전문적인 영역으로 넘어가 말이 어려워질 것 같으면, 사회자의 정리와 섬세한 질문으로 대담을 진행함으로 누구나 쉽게 책을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재미났던 부분은 각 대담자들이 사용하는 개념어들이었는데, 예를 들면 생태과학작 최재천의 경우에는 행동백신이나 생태백신이라는 말을 한다. 이는 우리가 코로나의 치료제로 기다리는 화학적 백신과는 다른 생물학적 사회학적 관점에서 이번 코로나를 바라보게 하는 유용한 용어임과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지침이 될만한 용어라 할 만하다. 최재붕은 기계공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현대인을 포노 사피엔스라 칭하면서, 핸드폰 사용이 일상화되어 있는 현대인의 삶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살핀다. 이는 단순히 과학적 영역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술이 사회경제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 상상하게 하는 재미난 용어이다. 독일에서 유학한 김누리는 야수자본주의라는 헬무드 총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 사회를 진단하고, 자본의 인간화를 촉구한다. 심리학자 김경일은 사회적 원트Want’와 개인적 라이크Like’를 구분하면서 비교와 경쟁이 아닌 나만의 개인적인 적정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이 대담 내용들은 유튜브를 통하여 방송분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책을 구입해야 하냐는 질문도 가능하다. 하지만 방송이 흘러가는 것이라면, 책은 고여있는 것이다. 흘러가는 물에는 자신을 비출 수 없지만, 고요하고 잔잔한 물에 자신을 비출 수 있는 것처럼, 유튜브와 책은 각기 효용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방송을 다 들은 나도, 다시 책을 구입하고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매겨하며 새롭게 깨달은 바가 크다. SNS가 지배하는 사회지만, 종이책의 유용성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숙고와 자기 성찰의 기회를 책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드카버로 되어 있고, 시원한 편집에 읽기도 편한데 가격은 15,000원이니 큰 부담도 없다. 밥 한 번 덜 먹고, 커피 한 잔 덜 마시면 지성의 향연을 맛볼 수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랴!

 

<추신> 코로나 사피엔스라는 용어는 최재천의 이야기에 나온다. 그가 창작한 것인지, 아니면 남의 말을 인용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사피엔스라는 유발 하라리의 역작이 이후의 많은 사피엔스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들뢰즈는 말한다. “개념의 창조, 그것이 철학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백신밖에 답이 없다고 얘기하는데,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백신을 만들려면 적어도 1년은 걸린다면서요. 아마 실질적으로 2~3년 정도 걸리겠죠. 그런데 만일 앞으로 바이러스가 거의 매년 우리를 공격한다면, 백신은 늘 뒷북을 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1년 동안 몇만 명 죽고 난 뒤에야 백신이 개발되고 유통되는 셈이죠. 백신은 독성을 약화시켰거나 죽인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로 만들거나 병원체를 둘러싸고 있는 표면 단백질 혹은 독소를 추출해 만들잖아요? 이런 화학백신보다 더 좋은 백신이 있습니다. 행동백신과 생태백신입니다. (32~33쪽)

자본주의는 그냥 풀어놓으면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이에요. 독일에서는 소위 ‘야수자본주의’라고 불러요. 야수가 된다는 거죠. 그게 지금 한국사회의 현실이에요. 한국사회는 야수자본주의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활개 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자들, 소위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한다는 자들이 너무나 과잉 대표되어 있는 게 한국 의회고요. 그래서 실업과 불평등이 이렇게 심한 겁니다.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실업, 불평등, 사망률, 산업재해율을 자랑하는 건, 바로 자본주의의 야수성이 한국사회에서 관철되고 있다는 뜻입니다.(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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