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하루키 - 그만큼 네가 좋아 아무튼 시리즈 26
이지수 지음 / 제철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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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리즈는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세 출판사가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를 말한다. 나는 이미 김한민이 쓴 아무튼, 비건(위고, 2018)을 읽고 좋은 시리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만약에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무튼, 마르크스아무튼, 예수를 쓰면 재밌겠다는 공상을 해본 적도 있다. 이번에 내가 구입한 아무튼 시리즈는 정혜윤이 쓴 아무튼, 메모(위고, 2020)와 이지수가 쓴 아무튼, 하루키(제철소, 2020)이다. 이 시리즈의 좋은 점은 편안하게 읽히는 에세이라는 점과 가격이 9,900원이라는 점이다.

본래는 아무튼, 메모만 구입하려고 했으나, 하루키에 꽂혀 아무튼, 하루키도 구입한 것인데, ‘메모는 내가 글쓰기 수업에 팁이라도 얻으려는 실용적 목적에서 구입한 것이라면, ‘하루키는 왜 사람들은 하루키를 좋아하는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 충족 목적으로 구입한 것이다. , 그러면 어떤 책부터 읽을 것인가? 실용성이냐, 호기심이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호기심을 못 참는 사람이라, 아무튼, 하루키를 손에 쥐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전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소설가이자, 매년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오를 것이라 예상하는 작가라 국내에서도 수많은 하루키 광팬들이 있다. 나는 베스트셀러는 잘 구입하지 않는 편벽된 면도 있고, 일본작가에 대한 묘한 민족주의적 거부감(?)도 있는 편이라 하루키를 멀리했다. 주변에서 하루키 어쩌고저쩌고 시끄러울 때에도 소 닭 보듯이 덤덤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우치다 타츠루라는 인문학적 거장의 작품을 읽으며 민족주의적 거부감을 희미해지고 나스메 소세키라는 작가를 알게 되면서 민족주의적 감정이 소멸할 때쯤, 뒤늦게 하루키의 책을 구입하여 읽어보려고 했었다. 그렇게 구입한 책만 따져 봐도 10권을 족히 넘으리라.

하지만 부끄럽게 고백해보자면, 나는 하루키의 소설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다. 그의 소소하고 서구적이며 기름진 문체가 나와는 너무도 궁합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름 생각한다. 차라리 그의 소설보다는 그의 산문은 읽어볼 만 했는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현대문학, 2016)은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우치다 타츠루의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바다출판사, 2016)를 읽고 나서 이제는 하루키를 읽어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군, 하고 소심하게 하루키 독서를 다짐했었다. 의무로서의 하루키 읽기?!

그래도 아직 5%가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국내의 하루키스트들은 도대체 하루키의 무엇에 열광하는 것일까? 하루키의 위성마냥 주변만 빙빙 돌다가 결국 수명을 다하지 싶어, 나에게 하루키로 돌진할 엔진을 달아줄 책을 찾던 중 아무튼, 하루키를 읽게 되었다. 지은이 이지수씨는 번역가로 하루키의 작품을 번역하는 것을 일생일대의 과제로 삼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하루키스트들이 많아 보인다. 책을 읽어보니 하루키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결혼하고 육아하고 변역일을 하는 소소한 일상을 담은 생활 에세이다. 아뿔싸, 제목에 낚였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술술 끝까지 읽힌다. 읽다가 하루키와 함께 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하루키스트지. 일상에서 하루키를 읽고, 하루키를 생각하고, 하루키의 말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는 삶, 하루키를 만나지는 않았지만,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낚였지만 속지는 않았다.


(아내가 화를 낼 때면 얌전히 샌드백이 되는 수밖에 없다며) "현명한 뱃사공처럼 그저 목을 움츠리고 뭔가 다른 생각을 하며 무지막지한 태풍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고소공포증이 있음에도 멕시코의 피라미드에 올라갔다 내려올 때) "몸 상태가 안 좋은 스파이더맨 같은 꼴로 바위에 매달리듯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어째서인지 답장 쓰기를 잘 미룬다는 이야기를 하며) "나쁜 뜻은 없는데 왠지 답장을 못 쓰겠더군요. 난데없는 뒷산 원숭이 같은 놈이라 여기고 이해해주십시오. 다음에 도토리를 모아서 갖고 오겠습니다." (1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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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 담배의 모든 것 - 18세기 조선의 흡연 문화사 18세기 지식 총서
이옥 지음, 안대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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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한 학생이 강의 끝에 선생님, 학생들이 담배 피워도 되니요?”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뒷자리에는 담임이 앉아서 강의를 같이 듣고 있던 참이라 긴장감이 흘렀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기억한다. “담배에도 예의가 있으니까, 그 예의를 잘 배워서 피우면 되겠죠. 하지만 요즘 담뱃값이 너무 비싸고 구입하기도 어려우니 직접 담배농사를 지어보면 어떻겠습니까? 마침 저와 동료들이 운영하는 주말농장에서 담배를 직접 농사 지어보면 좋을 것 같네요. 농사를 지으면 생산부터 가공, 소비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배울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직접 제배한 담배로 만들어 피울 수 있으니 일거양득입니다. 담배농사를 강추합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담임의 얼굴을 살피니, 담임이 씩 웃는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이옥의 연경(烟經)이다. 이른바 담배경전’! 이옥은 정조 때 선비로 문체반정의 희생자가 되어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이 원하는 글쓰기를 하며 살았다. 그는 벼슬보다는 삶의 구체적인 현장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소품체(小品體)를 즐겼는데, 이러한 문체를 선비의 타락이며 유교적 질서의 혼돈이라 생각한 정조는 법으로 엄금하고 엄하게 다스렸다. 이러한 문체에 대한 통제를 문체반정이라 한다. 문체반정으로 인해 선비들의 자유분방한 글쓰기는 많이 위축되고 탄압되었는데, 이옥뿐만 아니라, 연암 박지원, 간서치 이덕무 등 개방적이고 다양한 문체를 썼던 지식인들 역시 이로 인해 고생하였다.

엄격한 형식을 자랑하는 고품체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실정과 현실을 곡진하게 그려내는 소품체 문장은 당대 실학자들의 실험정신의 산물이었다. 이옥은 이러한 정신에 입각하여 저잣거리의 여인의 모습이나, 자연풍경, 민중의 생활상을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옥에 대한 글을 자세히 읽고 싶은 사람은 완역 이옥전집-5(휴머니스트, 2009)를 읽으면 좋겠다. 간단히 맛을 보고 싶은 사람은 낭송 이옥(북드라망, 2015)를 권하며, 이옥의 시대정신을 체감하고 싶은 사람은 채운이 쓴 글쓰기의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북드라망, 2013)을 권한다.

다시 연경(烟經)으로 돌아가자. 담배 심기로부터 키우기, 보관하기, 좋은 담배 식별법, 담배 도구, 담배 피우는 법 등 담배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은 비흡연자이자 한문학자인 안대회에 의해 연경, 담배의 모든 것(휴머니스트, 2008)으로 완역되어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안대회는 번역과 주석을 달면서 담배와 관련된 다양한 글들도 같이 소개하고 관련 그림자료들을 풍부하게 수록함으로써 조선시대 담배 이야기를 총망라(?)하는 학자적 성실함을 보였다. 부록으로 원문과 영인본까지 수록하였으니 10년 공부라는 말이 거젓이 아니다.

옛 지식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소소한 일상사라도 글로 정리하고 체계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이는 그러한 글이 민중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했던 실학자의 기본적인 태도였던 셈이다. 닭을 키우면 계경(鷄經)을 썼고, 물고기를 관찰하면 어보(漁譜)를 지었으며, 요리를 하면 식헌(食憲), 술을 마시면 주보(酒譜), 차를 마시면 다경(茶經)을 지었다. 요즘으로 치면 백과사전식 실용서인데, 비단 전문가만 그러한 글을 쓴 것이 안니라 그러한 소재를 깊이 즐기고 나누려는 지식인들의 일상사였다. 2020 트렌드에 나오는 업글인간의 모습을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글을 취미(趣味)로 쓰느냐 업()으로 쓰느냐는 글의 깊이와 넓이와 체계의 차이에서 온다. 독자와 작가의 차이는 그리 멀지 않다. 널리 읽고, 깊이 묻고, 체계적으로 글을 써보자. 하나의 소재에 몰두해보자. 이옥의 글쓰기는 우리에게 아름다움 모델이 될 수 있다.

 


2. 담배를 피우기 적절한 때
달빛 아래서 피우기 좋고, 눈이 내릴 때 피우기 좋다.
비가 내릴 때 피우기 좋고, 꽃 아래에서 피우기 좋다.
물 위에서 피우기 좋고, 다락 위에서 피우기 좋다.
길을 가는 중에 피우기 좋고, 배 안에서 피우기 좋다.
베갯머리에서 피우기 좋고, 측간에서 피우기 좋다.
홀로 앉아 있을 때가 좋고, 친구를 마주 대하고 있을 때가 좋다.
책을 볼 때가 좋고, 바둑을 두고 있을 때가 좋다.
붓을 잡고 있을 때가 좋고, 차를 달이고 있을 때가 좋다.(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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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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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에 태어난 일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 미군정기에 태어난 일본 전후세대이다.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해는 1994년이다. 그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천황이 문화훈장을 내리지만 거부함으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1957(22)부터 지금까지 글만 써서 살아왔으니 전업작가로 63년을 살아온 셈이다. 2006년도에는 집필 5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에서 오에 겐자부로상이 제정되기도 했으니, 살아있을 적에 자신의 이름의 문학상을 가지게 된 (내가 알기로는) 유일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그는 집필 활동 외에도 반전평화와 휴머니즘적 가치를 옹호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는 소설가이기에 앞서 치열하게 읽어대는 독서가였다. 그런 그가 50년 넘는 자신의 독서이력과 그 독서가 자신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자상하게 설명한 책이 바로 읽는 인간(위즈덤하우스, 2015)이다. 일본에서는 2007년도에 나왔으니 그로부터 9년 후에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된 것이다. 이 책은 청소년 시기부터 읽었던 자신의 독서이력을 밝히면서. 그러나 독서가 자신의 소설쓰기에 얼마큼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정교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야말로 치열한 글읽기로 이루어진 심리학적이면서 인문학적인 글쓰기의 비밀을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그가 특히 권장하는 독서법은 한 작가에 3년 동안 몰두하는 것이다. (몰두의 방법과 효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책을 읽어보시길)

오에 겐자부로가 책을 읽고 글쓰기에 활용하는 방식을 소개하려면 너무 많은 지면을 요구하므로, 아쉽게도 읽은 책의 목록(작가)만을 소개하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부터 시작하여 시몬느 베유, 랭보, 엘리엇, 에이츠, , 블레이크, 플라톤, 호메로스, 사무엘 베케트, 아마르티아 센 등 서양의 고전작가로부터 근대 작가를 망라하고 있다. 포인트는 책의 소개가 아니라 책에 나오는 특정한 대목에 대한 치열한 독서, 암기, 해석, 소설적 변형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설명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소개되는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와 문학적 절친일 뿐만 아니라 만년의 오에에게 커다란 영감을 준 사람으로 등장한다. 특히 '만년의 글쓰기'란 어떻게 가능한가를 주제로 하는 이야기들은 나같이 나이가 들어가는 작가에게는 많은 위로와 격려와 영감을 주었다(고 고백해야겠다).

단 한 권의 책이 인생의 향방을 결정하고, 그 이후로 한 번도 물러섬 없이 독서와 집필을 했던 오에 겐자부로의 치열한 독서법과 집필법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은 매우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기쁨을 안겨줄 것이다. 거장은 어떻게 읽기를 쓰기와 연결하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오에 겐자부로의 이 책을 권한다.

 


어느 순간부터 독서 방식을 바꾸면서 ‘나의 문체, 문장을 바꾸자’는 쪽으로 흘러갔어요. 그런 생활을 의식적으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졸업을 앞둔 제게 와타나베 선생은 앞으로 이렇게 독학을 하라고 책 읽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는데, 그것은 3년마다 읽고 싶은 대상을 새로 골라서 그 작가, 시인, 사상가를 집중해서 읽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말이죠, 자기가 읽어온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아울러 자신의 새로운 언어 감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작용이 발생하는 거예요. 문체에 변화를 주고자 이제껏 읽지 않던 방향의 책도 고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3년마다 제 문체를 바꿔가는 방법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6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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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시선 442
백무산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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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시인은 나에게는 적어도 예언자였(). 대학시절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시대의 징후를 감지하였다. 1988년에 쓴 만국의 노동자여(청사)1990년에 쓴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를 읽으며 노동운동의 앞길을 상상할 수 있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이후, 당시 전위적 운동권들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에도, 90년대 그 운동권의 몰락기에도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버팀목 중 하나가 백무산의 시집이었다.(1996인간의 시간(창비), 1999길은 광야의 것이다(창비) ) 그후 삶의 나침반 같은 것이 필요할 즈음에 내 손에는 백무산의 시집이 들려있었다.

세월이 물처럼 흘러 어느덧 2020, 백무산의 첫시집으로부터 32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나는 백무산의 시를 신뢰한다. (,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이 시기에 몰락하거나 변절하거나 지지부진해졌던가?) 그의 시는 늘 갱신되며 진화(?)한다. 초기 자본의 폭력성과 노동의 전망을 노래한 시들은 이제 삶의 근원과 생태적 문제로 확장되어 커다란 울림을 준다. 이번에 5년만에 출간된 신간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비, 2020)도 예외는 아니다. 몰락한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아니라 치열하게 탐구하는 생명사상을 예감하게 한다. 백무산은 65세가 된 나이에도 시간의 무게를 감당하며 변방에서 새로운 시간의 축을 구축하고 있다.

시집을 요약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기에 이번 시집에 나와 있는 시간과 관련된 구절만 살짝 언급하자면, 그는 인류 최초의 문자를 외상 장부라고 말한다. “인간이 처음 문자를 만들면서 한 일은/하늘의 음성을 받아 적은 것도/지모신에게 올리는 기도문도/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시도 아니다/곡몰 수확량을 조사한 세금 장부였다시집 처음에 쓰여진 이 시를 읽으며 화들짝 놀란다. 원시의 시간을 지우고 글을 쓰는 문명의 시간으로 돌입하게 된 순간이 바로 우리가 노예가 된 시간이다. 그 시간은 시간과 강요된 망각과 말살의 힘과/역사가 지워버린 허공의 시간이기에 그는 이 시간을 이길 수 있는 늑대의 시간을 기다린다. 이러한 망각과 말살의 시간은 멈추어야 하고, 새로운 축의 시간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 전환을 위해 우선 해야할 일이 멈춤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회개(悔改, 메타노이아)인데, 잘못된 시간의 길을 멈추고 돌아서는 행위가 바로 메타노이아이다. 왜 멈춰야하는가? (해석, 문법, 언어)로는 깨어나게 할 수 없는 알을 품어야 하기 때문이다. 품는 행위는 질주가 아니라 멈춤이고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그리하여 그는 정지의 힘에 도달한다. 새로운 생명을 꿈꾼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 <정지의 힘> 전문.


알은 해석으로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문법으로도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언어로도 깨어나게 할 수 없다
품을 수밖에 없다
<축의 시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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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2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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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기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한 나의 처방은 책읽기와 글쓰기이다. 수입 제로의 극한적 조건을 무시(?)한다면 이만한 호사가 없다. 수입은 내 뜻대로 되지 않지만, 독서와 글쓰기는 내 뜻대로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이 남성중심사회의 혜택(?)일지도 모른다. 여성에게 책읽기와 글쓰기란 호사는 선택지가 아니다. 부끄럽다.)

정희진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학자이며 탐독가(耽讀家)이자 글을 팔아 먹고사는 매문가(賣文家)이다. 그녀의 일상은 집안에서 책을 읽고 꾸준히 글을 쓰는 것이다. 정희진의 글을 정희진의 생각과 삶을 녹여서 쓰는 것이다. 서평 형태의 글쓰기라도 책이 읽히는 것이 아니라 정희진이 읽힌다. 정희진의 서평은 책을 빌미삼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의 책상은 그의 격전지(激戰地)이다. ()는 집에 은둔하며 책과 글을 무기로 세상과 싸운다. “은둔의 이유는 세상이 나를 더럽혀서가 아니다. 내가 세상을 더럽히므로 떠나야 한다.”(92)는 문장을 읽으며 정희진의 역전된 결의를 읽는다.

정희진의 문장은 밀도가 높다. 말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생각에 도달하기에 내가 역부족일 때가 많다. 나는 여성이 아니므로! 이 말은 비아냥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남성인 나는 한 번도 내가 식민지에서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성인 정희진은 이 세상이 식민지이다. 남성들이 자행한 폭력과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 이 세상에서 여성은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역시 그녀는 폭력으로 읽는다. “‘나는 누구인가.’넌 누구냐.’이고, 그것은 ‘(나는 인간인데) 너는 뭐냐.’라는 폭력이다.”(26) “이러한 상황이 피억압자의 삶을 내내 뒤덮고 있는 신문(訊問)의 정치라는 사실이다. ‘여성’, ‘아줌마’,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 아닌 사람, 식민지 사람은 이중 메시지 상황에서 늘 자기를 설명하려는 요구에 시달린다.”(26)

정희진은 말한다. “글이 나다.” 세상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정희진의 는 얼마나 중층적이며 변화하고 있는가. 정희진의 글을 읽으면 빰을 세게 맞은 듯 아프고, 망치로 맞은 듯 멍멍하고, 칼로 베인 듯 욱신욱신하다. 그래도 나는 이 아픔과 고통을 감당하면서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노동을 감행하고 있다. 혹시나 나도 변할 수 있을까 하고. 행여 나도 치열한 식민지 백성의 시각을 갖지 않을까 하고.

남성이라는 기득권이 불편해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글쓰기란 무엇이란 말인가? 책읽기란 무엇인가? 책 읽는 내내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자신을 아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에서 나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어떤 대상과의 동일시인 정체성(正體性, identity), 누구나 지니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거나 부정되는 당파성(partiality, 당파성은 영어 표현 그대로 부분성이다), 끝없이 변화하는 과정적 주체로서 유목성,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위치성(positioning), 글과 글쓴이와 독사 사이의 사회정치적 맥락 상황, 흔히 성찰로 번역되는 재귀성 ……. 이 책을 읽으면서 위의 개념들을 떠올리면 가성비 높은 독서가 될 것이다."(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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