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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ㅣ 정희진의 글쓰기 2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평점 :
코로나19 시기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한 나의 처방은 책읽기와 글쓰기이다. 수입 제로의 극한적 조건을 무시(?)한다면 이만한 호사가 없다. 수입은 내 뜻대로 되지 않지만, 독서와 글쓰기는 내 뜻대로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이 남성중심사회의 혜택(?)일지도 모른다. 여성에게 책읽기와 글쓰기란 호사는 선택지가 아니다. 부끄럽다.)
정희진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학자이며 탐독가(耽讀家)이자 글을 팔아 먹고사는 매문가(賣文家)이다. 그녀의 일상은 집안에서 책을 읽고 꾸준히 글을 쓰는 것이다. 정희진의 글을 정희진의 생각과 삶을 녹여서 쓰는 것이다. 서평 형태의 글쓰기라도 책이 읽히는 것이 아니라 정희진이 읽힌다. 정희진의 서평은 책을 빌미삼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책상은 그의 격전지(激戰地)이다. 그(녀)는 집에 은둔하며 책과 글을 무기로 세상과 싸운다. “은둔의 이유는 세상이 나를 더럽혀서가 아니다. 내가 세상을 더럽히므로 떠나야 한다.”(92쪽)는 문장을 읽으며 정희진의 역전된 결의를 읽는다.
정희진의 문장은 밀도가 높다. 말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생각에 도달하기에 내가 역부족일 때가 많다. 나는 여성이 아니므로! 이 말은 비아냥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남성인 나는 한 번도 내가 식민지에서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성인 정희진은 이 세상이 식민지이다. 남성들이 자행한 폭력과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 이 세상에서 여성은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역시 그녀는 폭력으로 읽는다. “‘나는 누구인가.’는 ‘넌 누구냐.’이고, 그것은 ‘(나는 인간인데) 너는 뭐냐.’라는 폭력이다.”(26쪽) “이러한 상황이 피억압자의 삶을 내내 뒤덮고 있는 신문(訊問)의 정치라는 사실이다. ‘여성’, ‘아줌마’,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 아닌 사람, 식민지 사람은 이중 메시지 상황에서 늘 자기를 설명하려는 요구에 시달린다.”(26쪽)
정희진은 말한다. “글이 나다.” 세상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정희진의 ‘나’는 얼마나 중층적이며 변화하고 있는가. 정희진의 글을 읽으면 빰을 세게 맞은 듯 아프고, 망치로 맞은 듯 멍멍하고, 칼로 베인 듯 욱신욱신하다. 그래도 나는 이 아픔과 고통을 감당하면서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노동을 감행하고 있다. 혹시나 나도 변할 수 있을까 하고. 행여 나도 치열한 식민지 백성의 시각을 갖지 않을까 하고.
남성이라는 기득권이 불편해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글쓰기란 무엇이란 말인가? 책읽기란 무엇인가? 책 읽는 내내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자신을 아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에서 나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어떤 대상과의 동일시인 정체성(正體性, identity), 누구나 지니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거나 부정되는 당파성(partiality, 당파성은 영어 표현 그대로 부분성이다), 끝없이 변화하는 과정적 주체로서 유목성,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위치성(positioning), 글과 글쓴이와 독사 사이의 사회정치적 맥락 상황, 흔히 성찰로 번역되는 재귀성 ……. 이 책을 읽으면서 위의 개념들을 떠올리면 가성비 높은 독서가 될 것이다."(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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