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괴물의 사유
이찬웅 지음 / 이학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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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들뢰즈 하면 고개부터 절래절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난해한 철학자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의 책을 한 권만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난이도 넘치는 그의 문장과 현란한 철학적 개념에 책장을 덮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설령 철학적 개념이 별로 없는 쉬운 문장이라 할지라도 그의 말은 은유와 상징이 넘쳐난다. (첫번째 인용문을 보라! ‘괴물스러운 아이는 무엇일까?)

이 난해한 들뢰즈를 프랑스 본토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이찬웅의 논문집 모음인 들롸즈, 괴물의 사유(이학사, 2020)을 일주일에 걸쳐서 차분히 읽었다. 이 책은 교양서나 입문서가 아니라 전문연구서(논문모음)이기에 읽기에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사람(!)이 한글(!)로 쓴 것이기에 전문번역서보다는 쉽게 읽힌다. 게다가 이 책은 들뢰즈에 대해서 단편적이고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들을 다양하고 풍부한 관점에서 소개했다는 점, 들뢰즈가 참고하고 지지했거나 비판했던 철학()에 대해서도 압축적이고도 친철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 철학 전반에 대해서 지적 지도를 그리고 싶은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자신한다.

나 역시 들뢰즈의 중기(과타리와의 공동작업기, 정치적 격변기)의 저작에 관심이 있었을 뿐 초기(철학적 사유의 형성기)와 후기(소설, 회화와 영화 등 예술적 작품들에 대한 미학정립기)에 대해서는 초보적이거나 무뇌한에 가까웠기에, 이 글을 통해 나 자신이 계발되는 지점이 많았다. 저자는 들뢰즈를 전공하고 돌아와 이러저런 학술지에 들뢰즈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10여 년의 연구를 일단락 지으면 이 책을 낸 것이니, 이 책의 품질에 대해서는 보장할만 하다.

편법이기는 하지만 이 책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이 책을 설명하는 출판사 제공 책소개는 읽어보기를 권한다.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통해 들뢰즈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더 해보자면, 나는 장자철학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 장자철학에 어울리는 서양사상가를 찾던 중 들뢰즈가 딱이라는 잠정결론에 도달했다. 들뢰즈는 20세기의 장자다. 기존의 신, 실체, 이데아 중심의 형이상학 체계와는 다른 형이상학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우주적 스케일의 동물행동주의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혼돈을 만물의 생동하는 조건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특히 괴물들과 괴물적 사유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에서 장자와 앙상블을 이룬다. 나중에 장자와 들뢰즈를 같이 다루는 책을 꼭 써보고 싶다.

 

<추신> 이 책을 읽다가 들뢰즈가 격찬한 윅스퀼의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혹시 번역되어 있는지 찾아보았다. 있었다. 도서출판b에서 2012년에 진작 번역해놓았다. 당장 주문하였다. 우리나라 출판계도 썩 괜찮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한다. 이 책에 대한 독서노트도 조만간 쓰고 싶다.


나는 내 자신이 어떤 저자의 등에 붙어서는 그로 하여금 아이를 낳게 하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의 아이지만 동시에 괴물스러운 어떤 것 말이죠. 아이가 그의 것이라는 것,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저자는 실질적으로 제가 그에게 말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말해야 헸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괴물 같다는 점 또한 필연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가 즐거워하는 모든 종류의 은밀한 탈중심화, 미끄러짐, 부수기, 방출을 겪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14쪽 주석)

들뢰즈에게 철학은 진리의 사유가 아니라 생명/삶Vie이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는 베르그손과 스피노자의 교차점 위에서 생명을 "차이를 만들어내는 힘"이라고 간명하게 정의한다. 들뢰즈에게 생명의 도약은 창조의 최전선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일어난다. 기존에 확립된 법칙 바깥에서 역사적 진행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 독특한 사건으로서 도래한다. 들뢰즈의 사유는 생명의 혼돈chaos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경계면에 집중한다.(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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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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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에 혹은 미래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예측 속에 있다. 우리는 영원불멸을 갈망하고 시간의 흐름에 고통스러워한다. 시간은 고통이다. (...)우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라는 소중한 존재를 선물하고, 모든 고통의 근원인 영원에 대한 허무한 환상을 만들게 한다.(196~7쪽)


내가 보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진화의 오류다. 수많은 동물들이 포식자가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드러워하며 도망친다. 그것이 건강한 반응이고 그래야 위험에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두려움일 뿐 계속되지 않는다. 이 두려움 덕분에 미래를 예상하는 능력이 지나친, 전두엽이 비대한 털 없는 유인원이 탄생했다. 미래를 예상하는 능력은 분명 도움이 되는 특권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 유인원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해야 한다. 물론 두려움의 본능을 일깨워 포식자로부터 도망치게 해주기는 한다. 나는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두 가지 진화의 압박에 의한 우발적이고 어리석은 간섭이자, 우리 뇌 속에서 발생한 잘못된 자동 회로 연결의 산물일 뿐 특별히 유용하다거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일정한 기한이 있다. 인류도 마찬가지다.(211쪽)    

 

인문학을 공부하는 나로서는 과학저술을 읽을 때 일종의 불안감이 든다. 그것은 마치 외국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이 외국여행을 떠날 때의 불안감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해외 여행을 떠날 때에 갖게 되는 설렘 같은 것도 있는 것처럼, 과학책은 그런 설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 읽은 책은 수학인문학을 개척한 후배가 반드시 읽어야 한다며 강추한 책이라 구입하게 되었다. 양자중력이론의 선구자인 카를로 로벨리가 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쌤엔파커스, 2019)이다. ‘시간’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친숙하지만 막상 그에 대해 말하라면 할 말이 별로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시간에 대해서 한 권씩이나 설명한 책이라고 하니, 호기심이 가득하다. 게다가 제목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이니 우리네 상식과 충돌한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이정도면 충분하다. 


이 책은 우리가 경험하는 통상적인 시간관념인 유일성, 방향성, 독립성, 현재성, 영속성의 특성을 하나하나 친절하고 자세히 비판하면서 이러한 관념은 지각 오류의 산물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의 특수성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말한다. 양자이론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유한한 크기를 지닌 매우 작은 양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런 양자들의 불연속적이고 불확정적인 요동이다. 또한 중력이론(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물질 분포에 따라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흐르고 공간도 다르게 휘게 되어 우주에는 유일한 시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시공간들이 존재한다. 


지은이는 이 두 이론을 결합한 양자중력이론의 대가이다. 그는 양자론과 중력이론을 종합하여 시간은 유일하지도, 특정한 방향성을 띄지도, 독립적이지도, 현재라고 할만한 것도, 영속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통상적 시간의 개념이 모두 뒤집힌다. 과학의 눈으로 우리의 상식은 파괴된다.) 심지어는 우리가 통상 사물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105)라고 말한다. 

카를로 로벨리는 이전의 저서인 《모든 순간의 물리학》(2016), 《보이는 세상은 실제가 아니다》(2018)에서 이미 우리가 통상 물질, 에너지,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그러나 과학계에서는 상식에 속하는 시선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는 특히 ‘시간’ 개념을 과학사적으로 추적하여 비교분석함으로써 “우주 본래의 원초적 시간에는 순서나 질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흐름이 없”으며 “시간은 단지 물질들이 만들어 사건들의 관계이며, 이 관계들의 동적인 구조를 나타내는 양상”임을 과학적 수식을 동원하지 않고, 인문학적 언어로 설득력있게 논증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을 하나하나 공략하여 부수고, 그렇게 부숴놓은 페허에 새로운 과학이론을 선보이고, 마지막으로 이 과학이론과 우리의 상식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그럼에도 우리는 왜 우리의 상식을 고집하게 되었는지, 그것의 유용성과 한계는 무엇인지 서술한다. 이 순서를 따라서 책을 읽다보면 과학의 세계와 상식의 세계를 둘 다 이해하면서, 묘하게 결합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시간을 비롯한 삶에 대하여 우주적 시선과 더불어 지구적 시선, 그리고 인간의 시선을 동시에 갖게 된다. 이른바 ‘겹눈’을 갖게 되는 것인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외눈박이 괴물로 살았는지 깨달음과 동시에 거대한 시선이 주는 장쾌함에 감탄하게 된다. 나의 인문학적 표현으로 말해보자면, ‘참새’의 시선으로만 살다가, 우주로 도약하는 ‘붕새’의 시선을 갖게된 과학계의 장자(莊子)를 만난 기분이다.     


<추신> 위에 인용한 부분은 그러한 시선을 갖게 된 저자가 인생을 어떻게 보는지를 보여주는 일단을 옮긴 것이다. 인용구는 관조적이고 부정적인 어조로 느껴지지만, 책 후반부에 들어나는 인생관은 부드럽고 아름답다. 말인즉, 읽어봐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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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임의 윤리학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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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올 때마다 빠짐없이 구입하는 작가들이 있다. 일본의 지성 우치다 타츠루는 그 중에 하나다. 이번에 망설임의 윤리학(서커스, 2020)이라는 신간이 나온다는 소문에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지역서점에 주문하여 어제 손에 쥐었다. 책 소개를 보니 2001년에 저자가 쓴 첫 번째 책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책이 이제야 번역이 되어 나온 것이다. 저자는 1950년에 태어나 40대 초반인 1990년에 고베여학원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 첫 책을 쓴 것이다. (50의 나이에 첫 책이라……) 물론 이 첫 책은 단행본을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이라는 블로그에 쓴 다양한 글들을 눈밝은 출판사 편집자가 보고 출간하자는 의뢰를 해서 성(페미니즘), 전쟁, 이야기라는 큰 주제로 관련 글들을 엮은 것. 이 책을 쓰고 나서 저자의 운명은 급속하게 변화하여 지금은 50여권의 단독 저서와 60여권의 공동 저서와 대담집을 발표했으니, 이 책이야말로 저자에게는 행운의 책인 셈이다.

책의 내용을 보니 1990년대를 배경으로 쓴 책이라 격세지감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웬 걸. 지금 읽어도 전혀 시대감각이 떨어지지 않는 글들이다. 오히려 70이 넘은 지금의 저자보다 날이 서 있어 청년(?)의 기세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요즘 나온 책들과 비교해볼 때 공통된 것이 있으니, 이는 이 책을 번역한 박동성의 옮긴이의 글에 잘 표현되어 있다. 살짝 옮겨 보면 우치다 선생님의 책을 읽어본 분들은 다들 느꼈겠지만 선생님은 남들이 결코 사용하지 않을 어휘 꾸러미남들이 구사하지 않을 것 같은 논리그리고 남들이 문제로 여기지 않을 것 같은 것에 문제라고 생명력을 부여하여글을 쓰는 분” (389)이다. 그러니까 우치다 타츠루의 글은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우치다 타츠루의 글쓰기는 과연 남들과 뭔가 달라도 다르다. 나는 다른 사상가와의 차이점을 실감(實感)’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여기서 실감이란 어려운 말로 꼬아놓은 철학적, 정치적, 문학적 글쓰기를 생활상의 언어로 너무도 간단하다 싶을 정도로 명료하게 다시 표현하는 그의 능력이다. 읽다보면 뭔 말인지 헛갈릴 때, 우치다 선생은 그 말은 이런 말이지요? 라고 물으면서 본질에 육박해 들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우치다 선생의 글쓰기가 단순하다는 말은 아니다. 단순하기는커녕, 너무도 단순한 이분법적, 권력적, 지배적 언술에 이렇게 보면 참으로 곤란하지요.”라고 문제제기를 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실감나는 현실은 그렇게 일도양단으로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며, 흑과 백 사이에 간격을 벌여놓고, 그 간격에 놓인 풍부한 이야기들을 제시함으로써, 사유를 더욱 깊게 만드는 놀라운 필력을 가지고 있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박사학위 논문 정도의 난해한 문제점을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어휘수준에서 다시 진술하고, 그 진술을 고도화함으로써 일상어로도 이해할 수 있는 철학적 지평으로 다시 전개할 수 있는 드물고 귀한 사상가이다.

책에는 페미니즘이나 마르크시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인 글들이 다수 실려 있는데, 평소에 이러한 사상에 친화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내가 그의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친화성 속에 숨어있는 사상과 생활 사이의 빈틈, 난점, 애매모호함, 찝찝함을 탐색하여, 그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편하기도 하지만, 요렇게 불편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렇게 원래 품었던 선의의 의도와는 다르게 반대되는 생각으로 이끌어지기도 한답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러냐고? 읽어보면 알게 된다.)

우치다 타츠루는 사상을 사상 그 자체로 다루지 않고, 사상이 생활 상에 끼치는 영향에 더욱 주목한다. 교단의 인문학이 아니라, 거리의 인문학이라 할만한 태도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사상가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무엇을 읽던지 실감’ - 추상감이나 정의감과는 다른 이 났던 것이다.

제목으로 선택된 망설임의 운리학은 저자가 카뮈의 사상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카뮈가 지적인 파트너였던 사르트르와 왜 결별할 수밖에 없었는지, 사르트르의 선명한 사상과는 달리 카뮈는 왜 망설임을 택했는지, 그 망설임의 선택이 당시에 얼마나 비난과 잘못된 평가를 받았는지를 새롭게 따져보면서, 사상가로서의 카뮈를 복원하는 제법 긴 글에서 따온 것이다. 망설임의 윤리학은 우유부단함이나 비겁함과는 다른,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탐구와 이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주목한다.

쓰고 싶은 것에 반도 못 썼는데, , 부질없다. 차라리 한 번 읽어보는 것만 못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적 명철보다도 윤리적 결백보다도 종교적 열광보다도 무엇보다도 먼저 ‘언어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생각과 ‘나’의 감각에 격하게 저항하는 것을 ‘나의 말’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나’의 언어적 용량을 확대해나가는 것, ‘나’의 것이 아닌 문법과 ‘나’의 것이 아닌 어휘를 이용해서 그럼에도 ‘나의 말’을 말할 수 있는 것, 그러한 언어의 연마를 통해서 끊임없이 ‘나’를 세우고 무너뜨리고 변화시키고 파괴하고 창조하는 것.(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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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창비시선 254
권혁웅 지음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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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생 시인 권혁웅. 시집에 있는 사진을 보니 환하게 웃고 있다. 선하게 생겼다. 젊어서 그런가? 궁금증에 인터넷을 뒤져 최근 사진들을 검색한다. 살이 조금 올랐지만 선한 기운은 여전하다. 장난기가 살아있다. 그가 2005년도에 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쓴, 마징가 계보학(창비시선 254)를 읽었다. 은유가 쓴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기도 했고, 제목도 나와 동시대인임을 분명히 알리는 것이었기에 기꺼이 9000원을 투자했다. 잘했다.

시집에는 내 어릴 적 즐겨 보았던 (만화) 영화 주인공으로 가득하다. 저절로 웃음을 머금게 하는 제목(주인공). 마징가, 애마부인, 미키마우스, 요괴인간, 투명인간, 가위손, 스파이더맨, 드래곤, 드라큘라, 독수리 오형제, 나폴레옹, 슈퍼맨, 배트맨, 엑스맨, 아톰, 원더우먼과 악당들, 돌아온 외팔이, 황금박쥐! 모두들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었던 주인공들이다. 만화영화의 경우 주제곡도 막 떠오른다. 추억 소환용으로 이만한 책이 따로 없다. 그런데 제목만 (만화) 영화 주인공이지, 내용은 모두 작가의 어린 시절 동네와 주변에서 같이 지내고 겪었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이야기이다. 시들은 적절한 비유와 유머와 위트에 깊은 페이소스를 곁들였다. 웃으며 읽었다가 찔끔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피식 웃었다가 깊은 한숨으로 마무리된다. 이런 장난꾸러기 시인 같으니라고, 울다가 웃으면 000에 털이 나온다는데. 오늘 아주 나를 싸스콰치(설인괴물)로 만드는구먼.

그의 시에는 높은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차라리 사라졌거나 잊혀진 존재들, 기억에 조차 머물지 않을 것 같은 존재들이 소환되어 시에 주인공으로 떡하니 등장한다. 그는 비루한 일상생활이나, 초라한 과거에서 만났을 법한 인물들을 빛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떠오르고, 그가 시에 등장시킨 인물들과 유사한 골목의 친구들과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래 이들도 충분히 시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빠져들게 한다. 기억 바깥에 있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 내 앞에서 웅얼거린다.

요즘에는 무슨 시집을 내었을까 궁금해졌다. 뒤져보니 요즘은 아니지만 2013년에 쓴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창비시선 369)가 검색된다. 아이고, 여전하구나. 제목을 훑어보니 이번에는 인물이 아니라 장소다. 도봉근린공원, 금영노래방, 불가마, CGV, 의정부부대찌개집, 춘천닭갈비집, 조마루감자탕집, 김밥천국, 오징어 나라, 24시 양평해장국, 포장마차, 조개구이집, 고려삼계탕집, 이발소까지. 나라도 한 번쯤은 가봤을 곳에서 무진장의 시를 길러내고 있었다. 일단 찜하자.

쭉 훓어내려가보니 평론집도 여러 권 냈구나. 평론집은 일단 패스! 어랍쇼, 사전류도 냈네. 꼬리 치는 당신시인의 동물감성사전(마음산책, 2013), 생각하는 연필-시인의 사물감성사전(난다, 2014), 미주알 고주알-시인의 몸감성사전(난다, 2014), 외롭지 않은 말-시인의 일상어사전(마음산책, 2016) 등 범상치 않은 제목의 사전도 여러 권. , 모두가 감성사전이로군. 지름신의 강림하시려 한다. 이를 어쩐다. 일단 외롭지 않은 말-시인의 일상어사전만 찜해두자. 이 정도쯤 되면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직업인지, 책을 사는 것이 직업인지 헛갈린다. 아무렴 어떠랴. 시 한 번 찰지게 읽었다. 그럼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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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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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시인들은 낮에 빚어진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줄 수 있는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고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성 그 자체를 불신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성을 빙자하여 말과 이론과 법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와 제도의 횡포에 있다. 낮에 잃은 것을 밤에 찾기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선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이다.(220~221)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로 활동하셨던 황현산 선생이 1918년 세상을 뜨셨다. 1945년에 태어나셨으니 74세까지 사신 셈이다. 별세하시기 5년 전인 1913년에 첫 에세이집 밤이 선생이다가 출간되었다. 진작에 사야지 생각하다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사게 되었다. 사놓고도 귀히 여겨 천천히 읽어야지 미루다가 이제야 읽었다. 제목의 영향인지 밤에 읽어야 제격일 것 같아, 밤을 패어 읽었다.

, 한숨이 나왔다. 잔잔히 흐르는 글을 따라가다 보면 선생과 내가 살았던 강산이 보이고, 다른 곳에서 살았으나 어린 시절이 보이고, 신산했던 우리의 역사가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올곧은 정신으로 세월을 관통하며 살았던 한 학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의 융숭하고 강골 있는 문체가 보인다. 그의 메시지는 강변하지 않지만 강하고, 웅변하지 않지만 깊다. 이런 류의 글쓰기는 나로서는 언감생심이다. 나의 한숨의 이유다.

내가 책 줄이나 읽으며 평생을 살아왔으나, 나의 마음을 뒤흔드는 에세이는 (물론 시절 시절마다 많았겠지만) 나이 들어 두 권이 오롯이 기억난다. 하나가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고 다른 하나가 이 책이다. 앞의 책을 1988년에 읽었고, 황현산 선생의 책을 2020년에 읽었으니 32년 만에 마음이 다시 흔들린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나이에 다시 마음이 흔들리다니.

마음을 다잡고 다시 용기내어 글쓸 일이다. 인스턴트식의 글에 신물 나고, 포장만 근사한 택배식의 글에 실망했다면 황현산 선생의 에세이를 읽어보시라. 거나하게 차려진 진수성찬이 아니라 정성들여 소박하게 마련된 조촐한 밥상의 깊은 맛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0년 동안 쓴 80편의 에세이에는 일관된 무엇인가가 있다.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 생각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이 그리움 속에서 나는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다.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천년 전에도, 수수만년 전에도, 사람들이 어두운 밤마다 꾸고 있었을 이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안타깝게 꾸고 있다. 나는 내 글에 탁월한 경륜이나 심오한 철학을 담을 형편이 아니었지만, 오직 저 꿈이 잊히거나 군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작은 재주를 바쳤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서문에 나오는 글을 그대로 옮겼다. 자연, 자유, 평등, 건강, 행복 등 낡아보이는 말들이 어떻게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하는 지 글을 찬찬히 읽어보시라. 에세이를 쓰고자 하는 이는 기꺼이 따를 수 있는 경전 한 권을 얻은 셈이다.

 

<추신> 책에는 밤이 선생이다라는 제목의 글이 없다. 문장 전체를 뒤져봐도 그러한 문장조차 없다. 그러나 그가 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밤의 시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처음에 인용한 구절이 그 증거다.

 

<추신2> 표지에 나오는 검은색을 배경으로 노인의 글쓰는 뒷모습과 작가 소개에 나오는 촛불을 배경으로 한 황현산 선생의 모습은 묘하게 어울린다. 표지그림의 작가는 팀 에이텔(Tim Eitel)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더 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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