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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 전3권 ㅣ 겨레고전문학선집
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 보리 / 2004년 11월
평점 :
1.
한유의 「획린해」 「사설」 「송고상한인서」 「남전현승청벽기」 「송궁문」 「연희정기」 「지등주북기상양양우상공서」 「응과목시여인서」 「송구책서」 「장군묘갈명」 「마설」 「 후자왕승복전」은 1만 3천 번씩 읽었고, 「악어문」은 1만 4천 번 읽었다. 「정상서서」 「송동서남서」는 1만 3천 번 읽었고, 「십구일부상서」도 1만 번 읽었다. (……) 그러나 그 사이에 장자와 사기, 대학과 중용을 많이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읽은 횟수가 만 번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글에 싣지 않는다. 만약 뒤에 자손이 내 「독수기」를 보게 되면, 내가 독서에 게으르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정민이 쓴 책 읽는 소리(마음산책)에 나오는 조선조 학자 김득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득신은 둔재인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기 위하여 읽고 또 읽었다. 김득신의 독서기록 중 최고는 「백이전」을 읽은 것인데, 그 횟수가 무려 1억 1만 3천 번이라 한다. 당시의 1억은 지금의 10만에 해당하니 대강 11만 3천 번을 읽은 것이다. 참으로 놀랄 노자가 아닐 수 없다.
2.
정보화시대에 김득신과 같은 사람은 살아갈 도리가 없다. 매일매일 새로운 정보가 쏟아지는 판에 과거의 정보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손가락질 받는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은 살아진지 오래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태도는 교과서에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자꾸 김득신과 같은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과거를 잊지 않고 되씹는 사람, 새로움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 남들이야 뭐라 하든 자신의 고집을 지키는 사람, 한 번 세운 목표를 끝까지 추구하는 사람, 남들에게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야 마는 사람, 다른 사람이야 변하든 말든 끝까지 남아 조직을 지키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있어 아직 세상은 덜 부패하고 덜 타락한 것이라 믿는다.
3.
고전을 읽는 사람도 이에 속한다. 말초적 향기에 넘어가기보다는 그윽한 향기를 감상할 수 있는 사람, 표피적 즐거움보다는 본질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 새로움을 좇으며 분서갱유(焚書坑儒)하는 자리에서 다시 책을 주어 담고 오래된 지혜를 발굴하는 사람이 바로 고전을 읽는 사람이다.
최근 들어 고전이 새로이 출간되는 모습은 그래서 반갑다. 헬레나 호지의 표현대로 ‘오래된 미래’가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작 생수를 발견하지 못하고 고갈된 영혼을 해갈시키는 힘이 고전에 있다. 최근들어 나온 고전 몇 가지를 소개한다.
4.
우선 북녘학자 리상호가 번역한 열하일기(보리)를 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 열하일기의 발췌본만 읽어온 나로서는 완역본이 나왔다는 그 자체가 반갑기 그지없다. 물론 남한에서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열하일기를 완역하였다. 하지만 민족문화추진회의 열하일기는 현재 품절되었고, 몇몇 학자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한 즈음에 보리출판사에서 겨레고전문학선집 시리즈의 첫 번째 사업으로 열하일기를 출간한 것은 참으로 용감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3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두께와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두고두고 마음의 양식을 쌓는다는 기분으로 산다면 아주 유용한 투자가 될 것이다. 나는 지금도 책상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열하일기 3권을 꽂아놓고 매일 즐거워한다. 우리 역사 속의 최고의 문장가 박지원의 최고의 작품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나를 뽐내고 싶다.
5.
한편 고전을 되씹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책 한 권도 소개하고 싶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유명한 신영복 선생이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돌베개)이라는 책을 썼다. 책의 띠지에는 이러한 말이 써 있다. “미래로 가는 길을 오래된 과거에서 찾다! / 자본주의 체제의 물질낭비와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관계론’을 화두 삼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신영복의 동양고전 강의! /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불교, 신유학, 대학, 중용, 양명학” 한편의 종합선물세트를 대하는 기분이다. 동양고전의 원문과 신영복 선생의 참신한 해석과 해설을 같이 맛볼 수 있다.
6.
더욱 반가운 것은 이제 청소년들도 고전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출판사에서 다양한 고전기획서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타이틀은 청소년용이지만 성인이 읽어도 손색이 없는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청소년용 고전출간은 독서논술과 맞물려있고 대학입시와 독서이력철을 염두에 두고 나오는 상업적 목적을 부분적으로나마 띠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해 책을 내는 출판사를 탓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상업용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고전의 출간은 적극 권장하고프다.
우선 풀빛출판사에서 <청소년 철학창고> 시리즈로 플라톤의 국가와 불교경전 우파니샤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출간했고, 뒤이어 공자의 논어, 이황의 성학십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낼 예정이다. 원문에 대한 충실한 번역과 청소년 눈높이에 맞춘 성실한 해설이 돋보인다. 고등학생을 자녀로 둔 학부모들은 눈여겨 두었다고 아이에게 사주라고 말하고 싶다. 사계절 출판사에서도 <주니어 클래식>이란 이름으로 다윈의 종의 기원과 플라톤의 변명을 출간했는데 칼라풀한 편집과 짜임새 있는 구성이 돋보인다.
7.
청소년 교양서적보다는 전문적이고 더욱 저렴한 책을 원한다면 책세상에서 기획한 <책세상 문고-고전의 세계>를 권하고 싶다. 이미 40여권의 책을 전문가가 해설하여 출간하였고 가격도 저렴하다.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영역을 골라 간편하게 소지하고 읽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나 자신도 한 권 한 권 골라 모으고 본 것이 이미 20여권 가까이 된다.
8.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한다. 이 말은 이렇게 고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전을 읽지 않는 세대는 미래가 없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고전 한 권 쯤은 손에 쥐고 있을 일이다. 아무리 가난한지라도 고전 한 권 쯤은 선사할 일이다.
“오직 책만은 부귀나 빈천, 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한 권을 읽으면 한 권의 보탬이 있고, 하루를 보면 하루의 유익이 있다. 이 인생이 배우지 않음이 한 가지 애석한 일이고, 오늘 하루 등한히 지나보냄이 두 번째 가석한 일이다.”
정민이 소개하는 유계의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