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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각본 살인 사건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첫 번째 이야기 ㅣ 백탑파 시리즈 1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역사소설을 읽는 것은 재미와 교양의 두 마리 토끼를 좇는다는 의미에서 즐거운 일이다. 특히 김탁환의 소설은 시대적 고증뿐만 아니라 문체의 탁월함을 드러낸다. 내가 처음으로 그의 소설을 접한 것은 [나, 황진이](푸른역사)였다. 이 소설은 일반판과 주석판을 동시에 출간했는데, 주석판에서는 일반판에서는 볼 수 없는 자세한 역주를 쪽마다 빽빽이 달아놓았다. 자칫하면 글의 흐름을 방해할 수도 있는 이 주석판을 사서 읽은 이유는 김탁환의 치밀함을 경탄했기 때문이다. 황진이의 1인칭 독백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가는 이 소설은 그야말로 황진이의 내면사일 뿐만 아니라 당대의 지성사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읽을거리가 풍부하고 다채롭다. 특히 기생이 풍속사라 할 만큼 기생생활 관련 용어들을 철저하게 고증하고 있어 언어학적으로도 매력적인 책이다. 어찌되었든 그 이후로 나는 그의 소설은 의심없이 사서보고 있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이라는 매력적인 제목을 달고 한 소설가 - 당대 용어로는 매설가 - 의 일생을 그린 작품을 통하여 나는 조선 후기의 소설풍속사를 공부했고, [불멸](미래지성)을 통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안팎의 정치, 전쟁사를 생각했으며, [허균, 최후의 19일](푸른숲)을 통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길전동’의 저자 허균의 생각을 더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조선 역사와 관련해서 나는 김탁환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방각본 살인사건-백탑파 그 첫 번째 이야기](황금가지)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소설을 선보였다. 백탑파가 누구인가. 박지원을 비롯하여,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백동수 등 영정조시대에 백탑 근처에 살면서 당대를 고민하고 미래를 준비했던 최고 지성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김탁환은 이들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이들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그물망으로하여 배경을 형성하면서, 의문의 연속살인범을 주인공인 이명방이 추적하는 추리소설의 형태를 취함으로 얼핏보면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닮기도 한 소설을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역사적 인물을 배경으로 하고,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당대의 소설풍속사를 재현한다. '방각본'이라는 말 자체가 이제 소설은 필사단계를 거쳐 인쇄단계에 도달했으며, 그많은 당대의 사람들이 소설을 즐겨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그의 소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과 맥을 같이 한다.
당대 지성인에 대한 생생한 모습과 소설풍속사에 대한 지식, 그리고 추리소설적 흥미진진함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이 소설은 역사소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자신있게 권할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추신 : 그는 소설의 끄트머리에 자신이 참조한 자료를 열거하고 있는데, 나는 이 목록을 보다가 2권의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1. 홍대용,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돌베게)
2. 김영호, [조선의 협객 백동수](푸른 역사)
그리고 그가 참고한 책들과 내가 읽은 책들이 많이 겹침을 알고 묘한 동지애를 느꼈다. 어쩔 수 없는 먹물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