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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기말고사 기간이다. 낮부터 새벽까지 정신이 없다. 꼭 이렇게까지해서 살아야하나 생각해보다가도 결국 제자리다. 어쩔 수 없다. 구르는 재주밖에 없는 굼벵이인 것을 깨닫는다. 어제는 오늘 아침에 있는 ‘동화 읽는 아빠 모임’의 발제를 맡았기에 준비하느라 밤을 꼴딱 새웠다. 아이들 시험대비 때문에 책을 읽지 못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리고 발제할 책을 만만히 본 것도 잘못이었다. 폴 아자르가 쓴 『책․어린이․어른』(시공주니어)는 그렇게 쉬운 책이 아니었다. 아침에 모임을 끝내고 나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점에 들렀다. 아침에 문자메시지로 ‘주문하신 책이 들어왔습니다’라고 찍혀 있었다. 내가 주문한 책은 김근이 쓴 『욕망하는 천자문』(삼인)이었다. 2만 5천원짜리 73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 사실 나는 『천자문』에 대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다. 3년 전쯤 인휘형과 거의 한 달에 두 세 번씩은 종로에 있는 탑골공원에서 만나곤 했었는데, 그때 우리는 탑골공원 뒤쪽에 있는 1500원짜리 국밥을 먹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놓고 공원 벤치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나는 내가 쓰고 싶은 책을 주저리주저리 인휘형에게 이야기했었는데, 그 중에 제 1위가 바로 『천자문』과 관련된 책이었다. 내딴에는 야심찬 기획이라 할 수 있는 천자문이야기는 천자문 속에 숨어있는 온갖 종류의 동양적 사고를 쉽게 풀이하고, 영역본과 비교하여 학습과 교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것이었는데, 아직도 때를 만나지 못하고 컴퓨터의 디렉토리만 차지하고 있다. 그러던 차, 천자문과 관련된 묵직한 저술이 나왔으니, 반가움이 이만 저만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채취(?)하리라.
하지만 오늘 나를 사로잡은 책은 『욕망하는 천자문』이 아니라, 김훈이 쓴 『밥벌이의 지겨움』(생각의 나무)이다. 김훈에 중독된 나로서는 이 책이 주는 흥분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김훈 世說, 두 번째’라는 부제가 달려있는 이 책은 첫 번째 수필집보다 더 쓸쓸하고 가슴을 울린다. 아, 이를 어쩐다. 오늘 할 일이 무척 많은데, 나는 오늘 김훈에 사로잡혀 아무 일도 못하겠구나. 이 즐거운 안타까움!
명색이 리뷰이니 표제가 된 글의 일부분을 인용하자. [밥벌이의 지겨움]의 한 대목: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나는 오늘 김훈의 친구가 되어, 모반의 동반자가 되어, 밥벌이를 뒤로 제쳐놓고 책을 읽는다. 설령 밥벌이가 나를 호출할지라도 그래서 결국 꾸역꾸역 밥을 벌어야할지라도, 지금 이 시간만은 방해받고 싶지 않다. 나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 김훈을 읽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