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일의 끝이 아니라 일의 시작이다.
1
불행한 시대다. 불행에 물드는 시대다. 그 불행이 제대로 발효된다면 불행의 시대를 고발하고 나아가 거스르는 힘으로 분출할 수 있겠으나, 이 시대의 불행은 대체로 안에서 고이고 부패하여 기억력과 사고력 그리고 정치적 능력을 좀 먹는 쪽으로 작용한다. 그 불행에 익숙해져 버렸다. 불행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자보다 불행에 익숙해진 자는 더욱 불행하다. 107
2
과거에 진실은 폭로를 통해 세상으로 뛰쳐나오곤 했다. 진실은 갑작스럽게 베일을 찢고 나와 세상을 전율케 했다. 그러나 오늘날 진실의 정치학은 검열의 논리에서 포화의 논리로 넘어갔다. 대중매체는 쉴 새 없이 이것저것을 뒤섞어 진열한다. 과다노출되어 음영을 잃은 사진처럼 모든 것이 엇비슷해 보인다....검열의 논리에서 포화의 논리로 이행한 후에는 영사막에 자주 올라와야 현실에서 발생한 일이 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음화적인 죽음의 상태로 내밀린다. 어제 짤막한 기사로 등장한 희생의 사건은 오늘 세상에서 없던 일인양 다른 소식들에 파묻혔다. 침묵 속에 잠겨 버렸다. 108
정치평론가들은 정치를 평론- 행동이 아닌 수다의 영역으로 바꿔가고 있다....그들의 발언은 대부분 현실추수적 분석이자 상식적인 처방에 그친다. 대신 그들은 청와대 자리를 두고 벌이는 대권경합에 맞춰 모든 정치적 이슈를 해석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그들은 정치를 좌우 엘리트가 벌이는 대중 획득 게임으로 중계한다. 정치에 대한 과정의 철학이 되어야 할 민주주의는 권력을 둘러싼 이전투구의 극장으로 변질되고 있다. '정치적 세계'는 '정계'로 축소되고 '정치권력'은 '정권'으로 물신화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정치와 민주주의의 느린 자살을 목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109
3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혀 우리가 돌아올 곳은 우리 자신이다. 그렇게 상대와 맞붙어보지도 못한 채 뒷걸음질쳐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여 거기서 무기의 재료를 구해야 한다. 상대를 향해 뻗어가지 못한 까닭에 퇴행증세를 보이는 분노를, 번져가는 체념을 활용하는 것이다. 점착성 물질처럼 끈적하고 석회질 침전물처럼 남아 자신을 침묵으로 가라앉히는 무력감을 분석하여 침묵하는 무게를 표현하는 무게로 바꿔내는 것이다. 112
불행한 시대에는 결국 불행이 시대의 자원이지 않겠는가.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유일한 자원은 아니겠지만, 불행의 감정은 개체의 내면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바깥으로 분출되면 사회적 감염의 힘을 지닐테니 유용한 자원임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행의 감정이 내면세계에서 응고되지 않고 사회적 용법을 지니도록 끄집어내는 데 오늘날 사상의 한 가지 역할이 있지 않겠는가 113
4
사상은 내면 세계에서 쌓이는 감정, 이미지의 자기누적에 따른 고정화를 무너뜨리며 거기에 공유가능한 언어를 입힌다. 아울러 사상은 그 작업에 나서기 위한 자원을 바깥에서 구하지 않는다. 바깥에서 자명한 틀을 빌려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의미를 정리하는 게 아니라 안에서 공동의 표현을 발효시킨다. 그렇게 안을 통해서 안을 넘어서는 전망을 추구하는 것이 사상일 것이다. 113
개체의 감정이 개체의 감정인 채로는 곧바로 공동의 무기로 삼을 수 없을 것이다. 감정은 부조리하다. 그 부조리에 리를 채워가야 하며, 그것이 무력한 위치에서 거머쥘 수 있는 사상의 역할이자 가능성일 것이다. 무력한 자에게는 무력함을 철저히 파고드는 것이 능력이며, 병든 자에게는 병의 무거움을 철저히 의식하는 것이 일종의 건강함의 표시이지 않겠는가 114
볕뉘. 제목이 '한국, 2014년 4월 16일이후'이다. 책갈피를 한 곳을 옮겨적다. 그리고 번호를 매기고 밑줄을 그어본다. 굵은 글씨로 입혀본다. 덧붙일 마음을 쓰고 다시 지운다. 발효라는 익숙한 말을 입에 공굴려본다. 꾹 삼킨다. 할말은 많지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