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이표

되돌이표 :ㅣㅣ :  늘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움,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관점을 고정시켜 사물을 보려는 습관은 지적을 한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는다. 맥락이나 삶의 과정 중에 피해로 정착된 시선을 벗기는 것은 주변의 도움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규정짓던 단어였다. 나 또한 다른 이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습관도, 생각도, 행동도 똑같은 패턴으로 움직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경계와 무늬가 달라지는 것은 스스로 이던가 아니면 몸이 겹쳐 무의식중에 다른 길로 접어들 때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원칙을 지킨다는 것, 비판의식을 견지한다는 것. 이 자신의 관점과 무늬로 색칠이 될 때 어쩌면 그 담을 넘지 못하고, 섞이지 못해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모임과 모임이 뒤섞이는 일들 가운데 나름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나름 저 모임은 이러이러하다고 규정짓는 순간, 그 일을 합리화하고 관계를 끊는다는 일……. 또 그것을 어떻게든 합리화시킬지도 모르지만,

 

모임의 합이나 관계의 덧셈을 한 번 더 반추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개인의 자유를 억제하는 모임과 결정과정이 너무도 답답하여, 저 모임은 딱딱하고, 나의 자유를 구속시키는 존재다. 열이 꼭지까지 올라서 그래 끝이다 더 이상 관계는 없다고 행동하는 일. 그것이 최선일까?

 

덧셈 아니, 만든다는 일. 합의 합이 곱셈이 되는 일은 험난하다. 서로 기대고 있기에 관계를 잇고 있기에 좀 더 낫게 만드는 일은 나름 원칙을 지킨다는 것과 냉철한 비판의식을 지닌다는 것의 조금 밖에 무게중심이 있지 않나 싶다. 모임과 모임 사이, 좀 더 원칙이 아니라 세속화가 필요하다. 그 양념이 똥물 뚝뚝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라 모임과 모임의 덧셈이나 관계의 확장을 위해 나를 멈추고 나-너의 입장에서 판단을 유보해보는 일이다. 일단 멈춤.

 

만든다는 일, 짓는다는 일. 정체성도 부여잡을 수 없지만 정체가 있는 모임들. 그 정체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 모임은 좋아하는 일, 하는 이, 하고 싶은 일들로 나름 문화가 있다. 정체가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어디서 시작한 것이 정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색깔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원칙과 비판의식, 세속화. 불쑥 세속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원칙과 비판의식을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 같겠다. 하지만 개인이 갖고 있는 원칙과 비판의식을 개인소유가 아니라 모임의 공유자산으로 갖고 싶기에 중언부언하는 것이다. 모임과 모임을 주관하는 이들(편의상 활동가)간 문화적 차이가 있다. 혼자인 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너-나- 결정이나 논의의 수준 문화적 공감의 형성들이 다르다. 나의 정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너의 정체가 있다. 일과 일의 만남으로는 모임간의 색깔을 건들 수 없다. 나와 나의 만남 정도로는 기존의 모임 색깔은 변하거나 움직일 수 없다. 모임과 모임을 들썩이게 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문화적인 충격이 필요하다.

 

활동가들 사이의 문화적 접속, 이질적인 가치의 접속을 위해서는 단체 간 맞짱이 필요하다. 논의의 수준과 확장을 전제로 절치부심하고 선입견을 감안한 공격을 준비해야 한다. 패거리 의식도 필요하고 패싸움? 도 필요하다. 성원들이 섞일 때 모임의 때가 조금이나마, 결정의 습속도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다. 소수의견으로 몰려있던 안건들이 도드라져 보일 수 있다. 그때서야.

 

우리는 모임의 틀, 암묵적인 길로만 가려는 습속이 있다. 모임의 나침반은 늘 그 방향을 가리킬 수밖에 없고 그 길을 간다. 하지만 모임이 풍요로워지고 또 다른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일은 세속화다. 다른 모임 사절단을 받아들이고 이질적인 문화에 녹아들려고 하는 의식적인 노력들을 욕망해야 한다.

 

다시, 강한 나 홀로 자유, 나 홀로 비판의식을 나-너로 기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임에서 나-너의 자유, 너-나의 비판의식으로 확장하기 위해 세속을 주장하기에 앞서, 모임의 온도를 올리거나 모임과 모임의 영토를 확장하는 주문을 보탠다. 나의 비판의식과 자유의 확장을 위해 호수위의 백조처럼 우아함을 위해 끊임없는 발길질을 청한다. 자유와 비판, 그리고 동시에 추구하여야 하는 것은 만든다(作)는 것이다. 그 지난한 덧셈을 감안한 노력을 병행하자는 이야기다.

 

모임과 모임을 옮겨 다니며 그저 모임의 성원, 만족 받는 모임의 성원들이 아니라, 기대고 있는 너, 그리고 너-너로 만들어진 습속, 정체, 문화적 주장을 감안하여 모임의 울타리에 대한 의식이다. 발라진 나도 없고, 발라진 무한 비판도 없다. 약하거나 강하게 기대어 있는 너-나들. 그리고 일상들, 기대어진 삶들이 있다. 독립된 개인만이 있어서, 로빈슨 크루소 같은 자유인만 있어서 척박해지는 일상과 삶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세속을 이야기하고 좀 더 사고가 자유로운 작은 모임들의 연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해방된 공간들을 좀 더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모임에 나가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모임이 나로 인해 확장되고 커지는 나를 위해서 자기주도적인 나-너가 많아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듦의 끈을 어찌할까? 관계 짓기의 확장은 다음 문제이다.

 

뱀발. 참* 총준위, 그리고 근대사 벙개에 다녀오다. 발품 덕에 속내와 이면의 관계들을 알 수 있고, 생각을 보듬을 수 있어 고맙다. 박**샘, 강**샘의 이야기..서**샘과 발품이 섞여있긴하다. 그동안 일들이 겹친다. 참*를 챙기지 못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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