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이면
이승우 / 문이당/ 300쪽
(2017. 10. 16.)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힌다. 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 독지들 또한 그 마취제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뿐이다.
 (P.23)


  그의 소설 속의 주인공이 그런 것처럼 그 역시 법을 범한다. 범죄는 달콤하다. 그 달콤함은 범죄 행위의 결과로서의 급부(給付) 때문이 아니라, 금지된 법을 범하고 있다는 순간의 팽만한 정신의 오락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원죄는 재물의 획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야훼가 진노한 것은 사람이 먹어치운 과일 하나의 손실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을 했다는 것이 참된 이유였다. 세상의 모든 형벌도 태초의 야훼를 닮는다. 어떤 법도 재물의 손실 때문에 극형에 처하지는 않는다. 모든 극형의 대상은 고래로 정신적인 것이다. 요컨대 금지된 법을 범함으로써 누리는 정신의 오락성이 언제나 법집행자의 큰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P.33)


  사람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다. 반영이라면 왜곡의 반영이다. 개별적인 무의식의 꿈을 공식화함으로써 현실을 넘어가려는 욕망, 그것이 신화를 탄생시키고, 신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한 박부길이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이런 점에서 이해하면 모순되지 않는다. 요컨대 현 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했기 때문에 그는 무극사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는 무극사행에 나섬으로써 신화 속의 아버지를 완성하려고 한다. 신화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있다. 여기서는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
(P.85)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에게 나는 가장 서툴다. 서툰 것을 사람은 용납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빈번하게 상처를 입는다. 궁색한 선택이지만, 그래서 유일한 나의 대안은 사람 곁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참혹하고 질긴 생래적인 외로움은 어쩔 것인가. 하여 나는 나의 물색없는 외로우을 가장 위험한 것으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P.109)
 

  예감은 열람이 금지된 숙명의 세계를 부지불식간에 엿보고 만 자의 머리 위에 그 부정에 대한 징벌로 떨어지는 벼락, 그 벼락 같은 천재지변의 떨림이다. 그래서 숙명은 예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모든 숙명은 비극의 광배(光背)를 두르고 있게 마련이다. 숙명적이라는 말이 비극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P.112)


  자, 내가 취사선택되고 검열된 기억 속의 과거를 들고 나온다고 하자. 그것들은 거짓이거나 꾸며진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내 자아의 어느 층에선가 충동질을 받고 튀어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층에서는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층의 진실이 모든 층의 진실을 담당할 수 있을까. 그것이 층들을 관통 하는 '작살'의 진실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 대답을 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 여러 개의 층들은 왜 있는가.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그 수많은 층들이 맡은 역(役)은 무엇인가. 대답은 너무 뻔해서 싱겁다. 그것은 왜곡하기 위해서이다. 감추기 위해서이다. 19의 층은 18의 층을 감춘다. 20의 층은 19의 층을 왜곡한다. 그것들은 서로를 감추고 왜곡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복잡한 기계이다.
  나는 내 취사선택되고 검열된 기억 속의 과거로 들어가는 것의 무의미함을 안다. 과거란 희미한 밑그림, 그 위에 어떤 색칠을 하고 어떤 형태를 그려내는 것은 현재의 나이다. 과거란 결국 인상(印象)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상은 실체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체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용납되기도 한다.
​(P.115)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대로, 그 어두운 방은, 말하자면 내 자아의 투시에 다름아니었다. 내가 웅크리고 앉아 지낸 그 어두운 공간은 실상 나의 자폐적인 내부였던 것이다. 병적인 자의식의 과잉, 세상과의 불화, 그리고 그 결과로서, 또는 원인으로서 자아의 지하굴 속에 거하는 행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곳을 (지하의 세계)라고 불렀다. 여기서 지하는, 그곳이 지상이 아니라는 뜻이므로 하늘이라고 해도 무 방하다. 아, 적은 아무데도 없는데 고통은 도처에 널려 있다. 나는 그 책을 내 방에 깔린 어둠의 눈을 빌려 이주 조금씩 읽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 조그만 문고판 책의 행간에 무수히 그어진 붉은 줄들은 공감의 표시였을 것이다. 공감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받은 인상은 그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예컨대 동지의식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로부터도 지지받지 못하는 이단의 내가 여기에 또 있구나, 하는 그런 느낌.
(P.123)


  막스 데미안을 만다는 젊은 시절의 에밀 싱클레어가 내 꿈속으로 자주 나타나곤 했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참으로 원했던 것은 나와 같은 세계에 사는 동질의 원형질을 가진 단 한 사람의 동료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를 만나 이 껍데기의, 그림자만의 세계를 성토하는 것이었다. 내가 발견하고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내밀한 지하의 세계를 대화로, 마음으로 누리는 것이었다.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아,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P.127)


  어떤 책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우리가 빠져나오려고 발버등 치는 악몽이라고 비유한 글을 읽었다. 제임스 조이스였을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고, 그일지라도, 본래의 뜻에 상당한 왜곡이 가해졌을 지 모른다. 기억은 사실의 편이 아니라 편들고 싶은 자의 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편들고 싶은 자를 편들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여서는 안된다.
(P.140)


  어떤 일의 시작에는 책임질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뻥 뚫린 동굴과 같은 캄캄한 영역이 있다.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는 사람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또는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운명적인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는 식이다. 운명적이라고 발음하는 순간처럼 운명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또 있을까. 문제는 그것이 운명이 아니라, 운명적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운명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운명적인 것은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운명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발음하는 그 자리에 있다. 운명으로 인식하는 자리에, 그 순간에 그 사람이 운며ㅇ이 깃들이는 것이다. 삶은 인식과 해석의 장인 까닭이다.
​(P.153)


  그녀의 이름이 종단임을 알게 되었다는 걸 그날의 소득으로 쳐야 할지. 떠밀려나오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이름은 내게 중요하기 않았다. 이름은, 어떤 사물에 대한 가장 제한적인 정의이다.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편의적으로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쓰는 것이 인식의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은 최악의 방법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이지 인식하기 위해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구별을 통하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이름을 사용한다. 그러면 구별할 필요가 없을 때는 어떤가. 구별함 없이도 이미 총체적인 인식에 이르러 있을 경우에 이름을 알고 부른다고 하는 것은 무슨 유익이 있을까. 오히려 그 새로운 이름이 참된 인식을 방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경우가 그랬다.
(P.163)


​  한 작가의 각품은 어떤 식으로든 그 작가인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삶의 의식, 무의식의 다양한 파편들을 선택과 배제, 굴절과 왜곡이라는 방법을 동원하여 교묘하게 조작함으로써 소설들을 만든다. 삶의 파편들은 때로 소설의 겉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고, 더 자주는 눈에 잘 띄지 않게 숨어 있기도 한다. 삶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 따라서 소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파편들 속에 감추어둔 작가의 내밀한 음성이지 파편들을 꿰맞춘 사실의 복원이 아니다. 그러나 독자는 책 밖에 있고, 작가가 쓴 글들은 책 속에 갇혀 있다. 독자는 작가를 만나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독자는 한 작가가 써 놓은 소설들을 읽음으로써, 그 각각의 소설들에 드러나 있거나 감취져 있는 파편들을 찾아내어 자기의 경험과 상상력에 의존하여 조합함으로써 나름대로 한 작가를 만든다. 그런 뜻에서 소설이 없으면 삶도 없다.
(P.192)

​​
  사랑도 배워야 하는가. 일찍이 에리히 프롬이 그런 질문을 무색하게 만드는 발언을 했다. 인간은 삶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하려고 한다. 예컨대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거나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랑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거나 사랑은 자연발생적인 것이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편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그렇게 이해하는 한 배우려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들린 생각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 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한다.
​(P.260)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는 감취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 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P.3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영성 / 스마트부스 / 304쪽
(2017. 10. 6.)


좋았던 점
- 저자의 생각들 중에서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다시 느끼게(확인하게) 해준 내용들이 많았다
-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내용의 글을 쓸것인가를 먼저 정하고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거나 지금까지 정리 해놓은 자료 들 중에서 수집하여 글을 쓴다는 것
- 이 작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얘기 해온 책읽은 후의 생각하기에 대해서이다 특히 작가는 책읽은 후 산책하며 몽상하는 방법을 자주 쓴다고 한다
- 하나의 독서 법을 추천해주는 책들에 비해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가면 독서법들을 자기 방식으로 정리한 점이 참 좋았다
초보자들이 책을 읽기 시작할때 참고 할수 있는 독서법들이 잘 정리되어 있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독서법을 선택해 실천해 볼수 있는 팁까지 잘 정리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아쉬웠던 점
- 작가 자신의 생각보다 관련된 자료들의 예시들이 나열식으로 계속되서 좀 지루하다고 느껴진다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겠지만 예시와 자신의 생각을 좀 더 믹스 시켜 독자들이 읽을때 거부감(자신의 생각과 예시들의 거리감?) 좀 더 느껴지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풀어 나가는 노하우가 좀 부족했던게 아닐까 생각든다
작가는 모든것을 새롭게 창조 할수는 없다 새롭게 느껴지는 지식도 결국 기존의 지식들의 틀 안에서 비집고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긴 하지만 가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을 어떻게 엮어 내 이야기를 풀어내느냐 하는 기술이 글쓰는 사람들의 능력의 차이이며 이것이 스토리텔링의 기술인것 같다
- 마지막으로 1년 300권의 책을 읽은 작가의 콘텐츠가 이 책만 볼때는 왠지 부실해 보이게 느껴진다 

그래도 작가 추천한 책들은 시간이 되면 한번 읽어 볼 책 목록에 포함시켜 놔야 겠다
======================================


나는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독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 독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 이떠한독서법들이 있는가?
• 모두에게 효과적인 독서법이 있을끼? 있니편 그것은 무엇일까?
• 어떻게 하면 전정한 독서가가 될 수 있을까?
(P.7)
​ 

  내가 인간의 보편성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앞서 내가 품었던 독서와 관련된 의문을 풀기 위해서이다. '독서는 우리 모두에게 어떠한 의미이며',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그리고 '내 독서법이 보편적으 로 이롭게 적용할 만한지' 궁금해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런 내붙 명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기[독서] 전에 인간이라는 나 자신을 읽어야[독아. 讀我]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나에게 좋은 것이 당신에게도 좋을 확률이 높다.'
  이제부터 니는 우리 모두가 하나씩 들고 다니는 '뇌를 중심으로 독서에 대해서 논할 것이다. 독서라는 판도라 상자를 최신 뇌과학, 심리학, 행동경제학이리는 재료로 떠받치고, 스토리와 인문학이라는 날개를 달아 독자의 품으로 날려 보내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P.20)


​   정체성은 바닥에 검게 굳어 딱 달리붙은 껌딱지 같은 것이 아니다. 조지 버나드 쇼가 “삶은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장조 하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정체성이라는 불변하는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인식하고 있는 정체성이 바로 본질이다. 인식이 변하면 본질도 바뀐다. 자기 자신을 고정적으로 보고 있다면, 이는 여자아이가 원래 분홍색 옷을 좋아하며 남지보다 경쟁심이 부족하게 태어났다고 믿는 것과 같다.
(P.44)

​ 
   1980년대에 밀린 위트록 박사는 독서를 이렇게 설명 했다.
  “우리는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의 사전적 의미로 읽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 텍스트를 위해 새로운 의미를 장조해 낸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자신의 지식, 경험에 얽힌 기억, 글로 씌어진 문장, 절과 단락 사이의 관계를 구축해 나감으로써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독서는 뇌의 다양한 정보원, 특히 시각과 청각, 언어와 개념 영역을 기억과 감정의 부분들과 연결하고 통합하는 매우 복잡한 과정 이다.
(P.52)

​ ​
​  스티브 잡스는 “창의력이란 여러 가지를 연결하는 능력이다'라고 했다. 창의성은 연결이다. 하지만 잡스가 말한 '여러가지'가 '아무거나'를 뜻하지는 않으며, 서로 다른 낯선 것들을 연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창의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창의성은 낯선 것들의 연결이다”
(P.108)​​
​​

  독서를 많이 하는 부모의 집은 책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신영복 선생은 명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사람은 그 부모보다 그 시대를 닮는다"고 했다. 사회과학서를 읽다 보면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시대보다 부모를 닮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독서이다. 결국 부모 본인은 독서가가 아니면서 아이들에게 독서를 강요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P.127)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부모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 주는가보다, 아빠나 엄마 품에 안겨 책 속의 새로운 세상에 동참하는 그 자체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왜 부모의 품에서 책을 읽었던 아이들이 후에 훌륭한 독ㅎ서가가 되었을까? 나는 독서가 자연스레 부모의 사랑을 연상시키는 정서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독서를 통해 사랑을 느낄 때, 독서를 사랑하게 된다.
​(P.1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독한 산책자의 명상, 말제브르에게 보내는 편지 외 
  장자크루소 /진인혜 / 책세상 / 237쪽
(2017. 10. 1.)
​ ​


​​ 
   나는 나 자신을 탐구하고 나에 대한 보고서를 서둘러 미리 준비하는 데에 내 마지막 날들을 바치고자 한다. 내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달콤한 즐거움에 온전히 몰두하자. 그것만이 사람들이 내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니까. 내 내면의 성향을 성찰함으로써 그것을 더 바람직하게 정돈하고 거기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악을 바로잡게 된다면, 내 명상이 완전히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비록 이 땅에서는 내가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내 마지막 날들을 완전히 낭비한 것은 아니리라. 날마다 산책하며 보내던 여가 시간은 종종 매력적인 명상으로 가 득 차곤 했는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내게 다시 찾아을 수도 있을 그런 명상들을 이제부터 글로 남겨놓으려 한다. 그러면 그것을 다시 읽을 때마다 큰 즐거움이 되돌아오리라. 나는 내 마음 의 참된 가치를 생각하면서 내 불행과 박해자들과 치욕을 잊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 글은 내 몽상에 관한, 일정한 형식이 없는 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나 자신에게 던지는 많은 질문들이 있을 것인 데, 고독하게 성찰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깊이 몰두하게 되기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산책하면서 내 머리를 스쳐가는 낯선 생각들 역시 모두 이 글 속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나는 생각한 것을 마음 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할 것이다. 보통 전날의 생각은 다음날의 생각과 잘 연결되지 않는데, 그런 식으로 전후 맥락 없이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지 금과 같은 기이한 상황에서 내 정신에 매일의 양식이 되는 감정과 사고 가 무엇인지 알아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내 본성과 기질을 새로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고백》의 부록으로 간주될 수 있다.
​(P.21)
​​

  나는 진정한 행복의 원천은 자기 안에 있고, 행복해지기를 원할 줄 이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비참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사오 년 전부터 나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영혼이라면 명상 중에 발견하게 되는 그런 내적 환희를 습관적으로 맛보아 왔다. 이렇게 홀로 산책하면서 이따금 느끼던 그 황홀과 도취는 나를 박해하던 자들 덕분에 알게 된 즐거움이 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나 자신 속에 지니고 있던 보물을 결코 발견하지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보물이 그토록 즐비한데, 어떻게 다 정확하게 기록하겠는가? 그 많은 달콤한 몽상들을 회상하려하면서, 나는 그것을 묘사하기는커녕 다시 몽상에 빠져들었다. 몽상에 대한 기억 때문에 어떤 상황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인데, 기억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면 곧 그런 상황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P.26)


  우리는 태어나면서 경기장에 들어가고, 죽어서야 거기서 나온다. 경주가 다 끝나가는 마당에 마차를 잘 모는 법을 배운들 무슨 소용이랴? 그때는 오직 어떻게 그 경기장에서 나올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늙은이의 공부는, 아직도 해야 할 공부가 남아 있다면, 오직 죽는 법을 배우는 것뿐이다. 그런데 내 나이의 사람들이 가장 공부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그것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생각한다. 노인들은 아이들보다 더 삶에 집착하고, 젊은 사람들보다 더 마지못해 생을 마감한 다. 그들의 모든 노고는 이생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삶의 종착지에서 자신들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생 기울인 모든 정성, 평생 모은 전 재산, 밤잠을 설치며 이룩한 모든 결실...... 떠날 때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한다. 그들은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을 얻으려는 생각은 살아 있는 동안 전혀 해보지 않았다.
​(P.37)


​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홀로 품고 있는 의견에서 오류와 편견밖에 보지 못한다. 그들은 나와 정반대되는 체계 속에서 진리와 명증성을 찾는다. 심지어 내가 성실하게 체계를 확립한다는 것도 믿지 못하는 듯하다. 그리고 나 자신은 꿋꿋하게 그 체계에 몰두해보지만, 거기서 극복할 수 없는 난제만을 발견 할 뿐이다. 나는 그 난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체계에 대한 주장을 굽힐 수도 없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현명하고 견식 있는 인간은 나뿐이란 말인가? 무언가를 그대로 믿기 위해서는 그것이 내 마음에 든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조금도 견고해 보이지 않고 내 마음이 내 이성을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나 자신에게도 헛되게 보일 현상에 대해 내가 명백하게 신뢰를 가질 수 있을까? 나를 박해하는 자들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 한 채 그들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나 자신의 실천 원칙이라는 망상 속에 머물러 있느니, 차라리 그들의 실천 원칙을 채택해 똑같은 무기로 싸우 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나는 나 자신을 현명하다고 여기지만 사실 나는 쉽게 속는 사람이고, 헛된 오류의 희생자이자 순교자일 뿐이다.​
(P.48)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진실은 모든 선(善)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은 장님이다. 그것은 이성의 눈과도 같다. 그 진실을 통해 인간은 행동하는 법, 인간으로서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는 법, 해야 할 일을 하는 법, 진정한 목적을 지향하는 법을 배운다.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진실은 늘 선하기만 하지는 않다. 그것은 때때로 악하기도 하며, 하찮은 것일 때가 많다. 인간이 알아야 할 것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꼭 알 필요가 있는 것들은 어쩌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가 많건 적건 그것은 인간에게 속한 자산이며, 어디서 그 자산을 발견 하든 인간에게는 그것을 당당히 요구할 권리가 있다. 또한 그것은 가장 부당한 방식으로 도둑질하지 않고는 빼앗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공통된 자산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고 해서 빼앗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55)


  사람들의 말을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의해 판단하면 종종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그 결과라는 것이 항상 뚜렷하고 파악하기 쉬운 것은 아닐 뿐더러, 말해진 상황에 따라 무한히 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말을 평가하고 그 말의 악의나 선의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의도다. 거짓을 말하더라도 속이려는 의도가 있어야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되며, 속이려는 의도도 항상 해를 끼치려는 의도와 결부되어 있지는 않으므로 때로는 정반대의 목적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거짓말이 결백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명백하지 않은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을 오류에 빠트리더라도, 그 오류가 그들 자신을 비롯해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해를 끼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런 확신을 갖기란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어떤 거짓말이 완전히 결백하기란 어렵고 드문 일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기이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기만이다 해를 끼치기 위해 거짓말올 하는 것은 중상인데, 이것이야말로 거짓말 중에서도 가장 나쁜 거짓말이다.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이익도 피해도 주지 않는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허구이다.
(P.58)


   이러한 모든 성찰을 통해 결론을 내려보건대, 내가 스스로 내세운 진실성은 사실이 정확히 그러했느냐보다는 올바름과 공정함이라는 감정에 더 근거를 두고 있으며, 실제로 생활할 때 나는 진실과 거짓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 양심의 도덕적 지시를 따랐다. 나는 종종 많은 이야기를 지어냈지만 거짓말을 한 적은 거의 없다. 그런 원칙을 따르다 보니 다른사람들에게 흠 잡힐 거리도 적잖이 제공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땅히 취해야 할 이득보다 더 많은 이득을 누리지도 않았다. 진실이 하나의 미덕이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런 이유에서인 듯하다.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에게 진실이란 선도 악도 초래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라고 믿을 만큼 그런 구별에 대해 만족스럽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내 의무는 그토록 세심하게 숙고하면서도, 과연 나 자신에 대한 의무는 충분히 검토해보았는가? 타인에 대해 정당해야 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진실해야 한다. 그것은 정직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품위에 바쳐야 하는 경의이다. 내 대화가 빈곤하다고 어쩔 수 없이 악의 없는 허구로 보충한 것은 잘못이었다. 타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 쓰는 재미에 이끌려 실제 사실에 인위적인 장식을 덧붙인 것은 더욱 큰 잘못이었다. 꾸며낸 이야기로 진실을 장식 하는 것은 결국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70)


  나는 긴 생애의 변천 속에서 가장 달콤한 즐거움과 가장 강렬한 쾌락의 시기가 가장 매력적이고 감동적인 시기로 기억되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흥분과 열정의 짧은 순간은 아무리 강렬해도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보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점에 불과하다. 그런 순간들은 너무 드물고 빨리 지나가 버리므로 하나의 상태를 구성할 수 없다. 내 마음이 아쉬워하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영구적인 어떤 상태이다. 그 자체에는 강렬함이 전혀 없지만, 그 상태가 지속되면 매력이 증가하여 마침내 거기서 지고의 행복을 발견하게되는 것이다.
(P.79)


  영혼이 아주 견고한 자리를 발견하고 거기서 완전히 휴식을 취하면서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기웃거릴 필요도 없이 전 존재를 집중 할 수 있는 상태, 영혼에게 시간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상태, 영원히 현재만이 계속되지만 그 지속을 강조하지도 않고 연속의 흔적도 전혀 남기지 않고 상실이나 즐거움, 쾌락이나 고통, 욕망이나 두려움에 대한 감정도 전혀 없이 오로지 우리 존재에 대한 감정만이 존재하는 상태, 그리하여 그 감정만으로 온 영혼을 채울 수 있는 상태, 그런 상태가 있다면 그것이 지속되는 한 거기에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 것은 인생의 쾌락에서 찾을 수 있는 불완전하고 빈곤하고 상대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혼에 공허한 부분을 남기지 않아 영혼으로 하여금 채울 필요를 느끼게 하지 않는 그런 만족스럽고 완전하고 충만한 행복이다. 나는 생피에르 섬에서 종종 그런 상태로 지냈다. 물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 가는 배 안에누워, 또는 물결치는 호수가에 앉아, 또는 아름다운 냇가나 자갈 위를 졸졸 흐르는 개울 가에 앉아 고독한 몽상에 잠길 때가 그런 때 였다.
(P.80)


  사실 휴식이란 별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볍고 달콤한 생각들이 영혼의 밑바닥을 동요 시키지 않고 그 표면만 스쳐 지나갈 때, 휴식은 훨씬 더 기분 좋은 것이된다. 자신의 불행을 모두 잊고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기 위해서는 충분 한 휴식만 있으면 된다. 그런 종류의 몽상은 조용한 장소만 있으면 어디서나 맛볼 수 있다.그런 까닭에 나는 바스티유 감옥이나 아무것도 보이 지않는 지하 감옥 안에서라도 기분 좋게 몽상에 잠길 수있을 거라고 종종 생각했다.
(P.82)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권 력을 지닌 사람은 인간의 나약함을 초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과다한 힘은 그를 다른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으로 만들거나, 설령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다 하더라도 진정한 자기 자신보다 못한 인간으로 만드는 데만 사용될 것이다.
(P.96)​

​​
  역경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한다.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경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실수이외에는 자책할 것이 없으므로 그 실수에 대한 내 나약함을 책망하고 위안을 얻는다. 계획적인 죄악을 결코 내 마음과 가까이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둔한 사람이 아니고야 어떻게 단 한 순간이라도 내 상황을 응시하면서 그들이 초래한 상황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모를 수가 있으며,어떻게 고통과 절망으로 죽을 지경이 되지 않을 수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는 내 상황을 응시 하고도 거기에동요되지 않는다. 아마 다른이라면 공포감 없이바라보지 못할 그런 상태에서, 나는 자신을 위해 투쟁하지도 노력하지도 않고 거의 무관심하게 지내고 있다.
(P.117)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에서 우리는 결과보다는 의도에 더 신경을 쓴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기왓장은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악의를 가진 사람이 고의로 던지는 돌멩이만큼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공격 행위는 때때로 빗나가는 수도 있지만, 그 의도는 결코 목표 달성에 실패하지 않는다. 운명이 주는 타격 중에서사람들이 가장 가볍게 느끼는 것은 물리적 고통이다. 불운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행에 대해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모를 때 운명을 탓한다. 그들은 운명을 인격화하고 그것에 눈과 지능을 빌려주어, 그 운명이 고의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잃고 분해하는 노름꾼은 그런 식으로 누구를 향한것인지도 알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린다. 그는 운명이 고의로 자신을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괴롭힌다고 상상한다. 그리고 화낼거리를 발견하고는, 자신이 만들어낸 적에 대해 흥분하고 격노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이 맹목적인 필연성의 소행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현명한 사람은 그렇게 무분별하게 흥분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기는 해도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며, 자신을 집어삼킨 불행에서 물리적인 상처밖에 느끼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가 받는 타격은 일신에 상처를 줄 뿐, 마음에까지 이르지는못한다.
(P.120)

​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이 줄곧 불행한 것은 오직 이기심 때문이다. 이기심이 침묵하고 이성이 입을 열 때 ,마침내 이성은 우리 힘으로 피할 수 없었던 모든 불행을 위로해준다. 심지어 불행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 그것을 소멸시켜주기도 한다. 그럴 땐 불행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만 하면 가장 끔찍한 타격을 확실하게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행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P.122)

​​​​​​​​​​​​​​​​​​​​​​​​​​​  
​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머지를 강조하는 것,전체적으로 조화를 부여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얼굴의 특징들은 모든 특징이 함께 해야만 온전한 결과를 나타낸다. 하나의 특징이라도 빠지면 얼굴이 왜곡되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내가 아는 것을 말하는 것 뿐이다. 바로 그것을 통해 전체가 도출되고, 모든 것이 실제와 닮게 되는 것이다.
(P.154)


현대인은 자신의 크기에 맞추어 그들을 작게 만들지만, 나는 그들의 크기에 맞추어 나 자신을 크게 만든다.​
​(P.1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팬지 폴리틱스
프란스 드 발 / 황상익 / 바다출판사 / 1982 / 302쪽
(2017. 9. 12.)




  침팬지를 보며 한편으로 매료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동물원을 찾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유인원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 인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깊어진다. 인간과 침팬지 사이의 비슷한 점은 겉모습만이 아니다. 침팬지의 눈을 주의 깊게 똑바로 들여다보면, 지적이고 자신만만한 인격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만약 그들이 동물이라면 우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P.17)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이를 메울 수 있는 일련의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고든 갤럽은 유인원이 거울 속의 자신을 인식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이런 형태의 자기인식이 결여되어 있어, 거울 속에 비친 대상을 그저 누군가 다른 개체라고 치부해버린다. 볼프강 쾰러는 독창적인 지능실험을 통해 침팬지가 원인과 결과를 어느 순간 갑자기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제인 구달은 야생 침팬지가 자기 스스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야생 침팬지는 수렵을 해서 고기를 섭취하고, '전쟁'을 일으켜 자신들의 세력범위를 확장시키며 서로를 잡아먹기도 하였다. 게다가 수화 형태로 많은 기호들을 가리친 가드너 부부의 시도가 성공함으로써 침팬지들은 놀랍게도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너무나도 비슷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이 연구는 유인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 많은 사실을 확실하게 밝혀냈다. 인간이 유인원의 마음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17)


  침팬지들 사이에서 놀라운 사회적 조작이 사례를 많이 목격한 나는 침팬지에게 단순히 '고도로 지능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팬지가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목적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능력이다. 
(P.60)
​​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을 새롭게 조합시키는 능력을 표현하는 데 '추리력' 혹은 '사고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달리 적합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시행착오를 통해 특별한 행동을 시험해보지 않고서도 침팬지들은 그들 머릿속에서 선택의 결과를 가름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신중하고 합리적인 행동을 보인다. 영장류들은 수많은 사회적 정보를 고려하며 상대방의 의도와 기분에 민감하게 잘 조율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진 높은 지능이 복잡한 집단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진화되어 있다고 추측한다. '사회적 지능 가설'로 알려진 이 개념은 우리 자신의 계통에서 벌어진 막대한 뇌 용량의 팽창에도 적용될지 모른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기술적인 창의성은 부차적인 발전이다. 영장류 지능의 진화는 꾀로 상대방을 이기고, 속임수 전략을 감지하고, 상호 이익이 되는 타협을 이루며, 자신의 삶에 이득이 되는 사회적 연대를 증지시키기 위한 필요성에서 출발하였다. 침팬지들은 이런 영역에서 분명히 뛰어나다. 그들이 가진 기술적인 재주는 인간보다 떨어지는 것이 확실하지만, 그들의 사회적은 능력도 그렇다고는 쉽게 단정하지 못하겠다.
(P.61)
​​​

  동물들의 야망은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매슬로는 1936년에 '지배 충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대부분의 동물 행동학자들은 그 용어를 꺼려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마카크 원숭이와 침팬지를 연구해온 나는 이 용어에 대해서 아무런 꺼리낌이 없다. 내가 관찰해온 동물들은 분명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고 애썼다. 제인 구달의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해보자. "아주 분명하게도, 다수의 수놈 침팬지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는데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며, 심지어 중상을 입을 위험마저 무릅쓴다." 권력욕이 동물원의 동물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P.240)
​​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한 행동의 목적을 나중에야 발견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사춘기 시절에 우리는 부모에게 반항하고 도전한다. 한참 뒤에야 우리는 그러한 행동을 '독립하기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를 분명히 의식하고서 부모와 갈등을 벌인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정체도 분명치 않은 무의식적 동기였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남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하고 그걸 위한 전술도 개발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조차 회피할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자 마우크 멀더는 '인간은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만족을 얻으며 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일련의 실험을 통해 밝혔다. 그러나 동시에 '권력'이라는 단어의 주변에는 일종의 터부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우리가 권력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할 때는 '책임을 지고 있다.' '권위 있는 지위에 있다'거나 혹은 '힘겨운 결단을 통해 남을 돕고 있다'는 따위의 표현을 즐겨 쓴다.
(P.246)


  인간은 말하는 영장류이지만 행동은 침팬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말다툼도, 도발적인 언어폭력, 항의와 간섭, 화해의 언사 등 여러 형태로 언어를 활용하지만, 침팬지는 그것들을 언어가 아닌 형태로 표현하는 것뿐이다. 인간이 말 대신 행동으로 무언가를 표현할 경우에는 침팬지와 더욱더 유사해진다. 침팬지는 비명과 큰소리를 지르고, 문을 두드리고, 물건을 던지고, 도움을 청하고, 나중에는 우호적인 접촉이나 포옹으로 무마하려 한다. 우리 인간들도 보통 의식적인 결정 없이 그러한 형태의 행동을 모두 연출한다. 이러한 행동들의 동기를 볼 때 인간과 침팬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P.247)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칭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 잘 몰랐을 것이다. 우리의 정치적 활동은 인간과 가까운 친척과 공유하는 진화적 유산의 일부처럼 여겨진다. 만일 내가 아넴에서 연구하기 전에 누군가 이와 동일한 이야기를 했다면 너무 교묘한 유추라며 그런 발상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넴에서의 연구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의 기원이 인류의 역사보다 더 오래됐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내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의 행동 패턴을 침팬지에게 투영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옳지 않은 것이며,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에 가깝다. 침팬지들의 행동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인간을 또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P.272)​


  대략 5세기 전에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군주나 교황, 또는 메디치나 보르기아 같은 세도 가문의 정치적 술수를 묘사했다. 불행하게도 칭찬받아 마땅한 그의 실감나는 분석은 종종 그들의 정치적 음모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한 것으로 오해받았다. 한 가지 이유는 그가 경쟁과 갈등을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건설적인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을 둘러싼 동기를 부정하거나 은폐하려는 태도를 최초로 거부한 사람이었다. 기존의 집단적 허위에 대한 폭로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도리어 인간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됐다.
  인간을 침팬지와 비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모욕적이거나, 혹은 그 이상의 죄악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동기를 더욱 동물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팬지들 사이에서 권력 정치는 단지 '나쁘다'거나 '더럽다'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넴 집단에 사는 침팬지들에게 논리적 정합성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민주적 구조도 안겨주었다. 모든 파벌들은 일시적인 권력 균형을 이를 때까지 영향력을 계속해서 찾는다. 그리고 이런 균형은 서열상의 지위를 새롭게 결정한다. 다소 유동적인 지위가 '고정'될 때까지 관계는 계속해서 변한다. 이 같은 서열의 공식화가 어떻게 화해 가운데 일어나는지를 보게 되면, 집단 내의 서열이 공식화가 어떻게 화해 가운데 일어나는지를 보게되면, 집단 내의 서열이 경쟁과 충돌을 제한하는 '응집적' 요소임을 이해할 수 있다. 육아, 놀이, 협력 등은 그로인해 찾아오는 안정 상태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수면 아래의 상황은 늘 유동적인 상태이다. 권력의 균형은 매일매일 시험되며, 만일 그것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도전이 일어나고 새로운 균형이 찾아올 것이다. 결국 침팬지들의 정치도 건설적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 분류되는 것을 명예롭게 여겨야만 한다.
​(P.2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인 1기
김경록 / 더난출판사 / 272쪽​
​(2017. 9. 7.)



​​
  과거 우리는 퇴직 후 여명이 짧다 보니 별다른 생각 없이 지냈다 그러나 우리가 맞을 세상은 퇴직 후에 적어도 20년~30년은 일을 해야 하는 세상이다. 길게 보아야 한다. 전문성과 기술로 대변되는 자신의 인적자본을 키울 필요가 있다. 베이비부머는 앞 세대를 보지 말고 우리 세대의 미래를 그리면서 행동해야 한다. 과거에는 퇴직 후 인적자본에 3년을 투자해봐야 금방 세상을 떠나기 대문에 효율성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3년을 투자하면 20년 이상을 써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전문성과 기술로 무장된 1인 1기는 고령화를 헤쳐갈 안전벨트가 된다. 전문서과 기술이 뒷받침되어 있으면 우리는 노후를 다양한 방식으로 살 수 있다. 노후 삶의 자유도가 높아진다.
(P.12)


  누구든 자기 앞에 데려오면 원하는 대로 그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신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키너는 <스키너의 마지막 강의>라는 노후에 관한 책을 쓴 바 있다. 그는 노년이란 '낯선 타국'과 같다면서 무엇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년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점이 문제라고 말했다. 노년에 대해 공부하고 충분히 대비를 한다면 노년도 즐길 수 있음을 말해준다.
(P.29)



  은퇴 전과 은퇴 후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은퇴 전에는 시간은 부족하고 돈은 많은 데 반해 은퇴 후에는 시간은 남아돌고 돈이 부족하다. 100세 시대는 노후가 길어지기 때문에 이 둘의 낙차를 줄이는 것이 좋다. 이를 위해선 후자의 'time Rich, Money Poor'를 바꿔 남는 시간은 인적자본에 투자하고 이를 통해 부족한 돈을 벌충해야 한다.
(P.39)


  은퇴 전후 5년은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우선 은퇴 직적은 은퇴 후의 부존자원을 만들 수 있는 거의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시기다. 그리고 은퇴 후 초기는 자신의 부존자원을 가지고 노후생활을 위해 출발하는 때이므로 이 자원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면 노후룰 평안히 보낼 수 있다.
(P.56)
​​
​​​
  시간을 상대로 하는 싸움에서 기술은 우위에 있다. 시간이 내 편이다. 실제로 좋은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생존율은 거의 평생이다.
  기술창업은 고정자보이 들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부가가치가 높아지고, 미래의 환경변화에 오히려 우호적이다. 반면에 소자본창업은 발 빠르게 업종을 전환해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업종을 예측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소자본창업으로 들어가는 문은 넓으나 문 뒤에 있는 길은 험난하다. 출구를 찾기 어렵다. 반면에 기술창업은 들어가는 문은 좁고 어려우나 문 뒤에 있는 길은 넓다. 기술창업이라는 좁은 문이 답이다. 한 사람이 하나의기술로 1인 1기, 한 사람이 하나의 기업(1인 1기)을 만들어 보자
(P.122)

​​
  조직의 가치와 나의 가치를 혼동하다 보니 자신을 과대평가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현직에 있을 때는 강의 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강의를 잘한다고 인기가 많아서 퇴직 후 강사를 하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퇴직을 하고 나니 강의 요청이 싹 사라졌다고 한다. 회사의 네트워크와 브랜드를 자신의 것으로 혼동했기 때문이다.
(P.2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