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1)
이윤기 / 웅진지식하우스 / 352쪽

(2013. 06. 29.)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어릴적에 보았던 세계문학전집의 시작은 그리스로마신화로 부터 시작했다. 아마도 서양의 인간시대 이야기의 시작이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부터 시작되서 그렇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고전읽기의 시작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으려고 했는데 그리스신화에 대한 기본적인 사전 지식이 없어서 시작하기가 벅찼다. 그래서 일단 그리스로마 신화로부터 시작한다.

 

 


  미궁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화도 그 의미를 읽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신화는 미궁과 같다. 신화라는 미궁속에서 신화의 상징적인 의미를 알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 독자에게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상상력이다. 열두 고지의 글을 신화 이해의 열쇠로 삼은 이 책은 필자가 신화의 상징적인 의미를 해석한 책이 아니다. 열두 꼭지의 글에는 신화 이해와 해석에 필요한 열두 개의 열쇠가 숨겨져 있다 각각의 열쇠에는 무수한 꼬마 열쇠들이 매달려 있다. 큰 열쇠, 작은 열쇠로 독자들이 나름대오 열기 바란다. 필자의 해석은 필자의 실타래이지 독자를 위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아니다.
(p. 10)

 


  대지와 우리 육신 사이에는 신발이 있다. 신발의 고무 밑창 하나가 우리와 대지 사이를 갈라 놓고 있다. 대지는 무엇인가? 인간이 장차 돌아가야 할 곳이다.
  그러면 신화는 무엇인가? 옛 이야기는 또 무엇인가? 신화는, 옛 이야기는 언제 발생한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시대와 아득한 선사 시대,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미지의 시대 사이에 신화가 있다는 사실이다.
  신화는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인지도 모른다.
(p. 40)

 

 

  크로노스는 왜 낫을 가지고 다녔던 것일까? 크로노스는 왜 아내가 낳은 족족 자식을 삼켜 버렸던 것일까? 크로노스는 '시간', 즉 세월이라는 뜻이다. 크로노스의 모습이 종종 모래시계와 함께 그려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신의 이름은 크로노스는 시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단어 '크로니클(chronicle, 연대기)', '크로노미터(chronometer, 시계)', '크로노메트리(chronometry, 시간 측정법)' 등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크로노스가 자식을 심킨다는 것은, 세월은 이 땅에 태어나도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는 잔혹한 자연의 진리를 상징한다. 크로노스가 큰 낫을 들고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크로느스는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을 끝나게 한다. 크로노스가 들고 다니는 거대한 낫은 크로노스가 지닌,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을 끝나게 하는 자연의 법칙을 상징한다.
(p. 60)

 

 

  올륌포스 산에는 신들의 궁전이 무수히 있다. 무수한 궁전 한가운데엔 큰길이 하나 툭 터져 있는데, 이 길은 밤중이면 당에 사는 인간의 눈에도 보인다. 이 길의 이름이 바로 '비아 락테아(Via Lactea)', 즉 '젖의 길' 이라는 뜻이다. 비아 락테아는 영어 '밀키웨이(Milky Way)'이며, 우리말로는 '은하수'가 된다. 신들의 궁전은 바로이 비아 락테아 좌우로 좍 펼쳐져 있다.
(p. 77)

 

 

  제우스는 여성이나 여신의 몸을 빌리지 않고 딸은 낳은 일이 있다. 그런 일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싶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면 불가능하다 싶은 일도 곧잘 일어나는 데가 신화의 무대다. 제우스는 자기 일에 사사건건 간섭해서 나무라기도 하고 충고하기도 하는 여신 메티스를 삼켜 버린 적이 있다. 메티스는 '지혜로운 충고'라는 뜻이다. 제우스가 이렇게 한 것은 성가신 메티스를 제거하는 동시에 메티스의 지혜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제우스가 갑자기 머리르 싸쥐고 방바닥을 뒹굴었다. 제우스가 머리를 싸쥐고 뒹구는 까닭을 제일 먼저 짐작한 신은 올륌포스의 꾀주머니 헤르메스였다. 헤르메스는 대장장이를 불러 창으로 제우스 두개골을 조금 까내게 했다. 그러자 투구를 쑤고 창과 방패를 무장한 여신이 함성을 지르면서 튀어나왔다. 이 여신이 바로 지혜와 정의로운 전쟁의 여신 아테나다.
(p. 96)

 

 

  신화는 프로메테우스가 흙에다 물을 부어 이기고 신들의 형상과 비슷한 인간을 빚어 이를 이레 동안 볕에다 말리고 여기에다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 한 꼭지가 따라붙는다. 그가 흙으로 빚은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놓으려고 하는 찰나,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지나가다가 나비 한 마리를 날려 보냈다는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이 나비는 프로메테우스가 흙으로 빚은 인간의 콧구멍속으로 들어갔다.
  그리스어로 나비는 '프쉬케(psyche)'다. 그러면 진흙 인간의 콧구멍 속으로 들어간 프쉬케는 무엇인가? 영어 '사이크(psyche)'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말은 '정신' 또는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p. 119)

 

 

  사람들은 흔히 유럽 문화의 두 기둥을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고 한다. 헬레니즘이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헬라스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서 일어나 로마로 이어진 문화를 말한다. 그렇다면 헤브라이즘은 무엇인가? 구약 성서에 잘 그려져 있는 히브리인들, 즉 유대인들의 문화를 말한다. '천국'과 '지옥'과 '부활'은 유대인드링 일군 헤브라이즘의 저 세상에나 등장하는 말들이다.
(p. 200)

 

 

  신화 시대 의술의 신인 아폴론에게는 아스클레이피오스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아스클레에피오스는 트라카라는 도시에다 요즈음의 의과 대학교 겸 부속 병원 비슷한 것을 세우고 의술을 가르치는 한편 환자를 치료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의술 학교는 뒷날 수많은 명의를 배출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명의가 바로 오늘날 '의성', 즉 의술의 성인으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다. 모든 의과 대학생들은 의사가 될 때 히포크라테스를 본받자는 뜻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는 것을 한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은 고대의 의과 대학 및 그 부속 병원 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신전을 지키던 신관은 이 신전에다 흙빛 뱀을 기른 것으로 전해진다. 신관들은 독이 없는 흙빛 뱀을 아스클레오피오스의 사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의술을 상징하는 휘장의 지팡이는 아스클레오피오스의 지팡이이며, 뱀은 바로 아스클레오피오스의 사자인 독 없는 흙빛 뱀인 것이다. 의술을 상징하는 오늘날의 휘장에까지 지팡이와 뱀이 그려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p.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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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6)
빅토르 위고 / 송면 / 동서문화사 /315쪽

(2013. 06. 22.)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그의 영혼에 나타났다 . 즉,  기꺼이 받고 다시 돌려 준 친절,  헌신 , 자비,  관용 , 연민에서 나온 준엄의 훼손 , 개인성의 승인,  단호하게 사람을 벌하는 일도 죄를 짓게 할 수도 없다는 것 , 법의 눈에도 눈물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인간에게 의존하는 정의와는 반대방향을 택하는 일종의 신에 의존하는 정의 . 그는 여태껏 알지 못했던 도덕의 태양이 암흑 속에서 무섭게 뜨는 아침을 보았다 . 그 아침은 그를 겁나게 했다.  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 독수리의 눈을 가질 것을 강요당한 부엉이였다.
(p. 2087(17))

 

 

 그들은 빛났다. 그들은 다시 불러올 수도, 다시 찾아낼 수도 없는 순간에, 모든 청춘과 온갖 기쁨의 눈부신 교차점에 있는 것이었다. 장 프루베르의 시구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를 합쳐도 마흔 살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승화된 결혼이었고 젊은 두 사람은 두 송이의 백합꽃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지 않고도 서로 황홀해하고 있었다. 꼬제뜨는 마리우스를 영광 속에 바라보고 마리우스는 꼬제뜨를 제단 위로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위에, 그 영광 속에 신이 되어 결합한 두 사람은 그 깊숙한 속에서, 꼬제뜨에게는 안개 저쪽에, 마리우스에게는 불꽃 속에서, 하나의 이상이, 현실이, 입맞춤과 꿈의 만남이, 원앙침이 보이는 것이었다.
(p. 2161(91))

 

 

  장 발장은 생각하고 있었다. 회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겨울이었다. 몹시 추운 12월에 그녀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거의 헐벗은 몸으로 떨고 있었다. 가련하고 조그마한 발이 나막신 속에서 새빨개져 있었다. 장 발장은 누더기 옷을 벗기고 이 상복을 입혀 주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자기를 위해 상복을 입는 것을 보고, 아니, 무엇보다도 따뜻한 옷을 입는 것을 보고 무덤 속에서 기뻐했을 것이다. 장 발장은 또 몽페르메이유의 숲을 생각했다. 둘이서 그 숲을 지났었다. 꼬제뜨와 둘이서. 그때의 날씨며, 낙엽진 나무들이며, 새들이 떠나버린 나무들, 햇빛이 비치지 않는 하늘을 그는 생각했다. 그래도 그때는 즐거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장 발장은 조그만 옷가지들을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목도리를 속치마 옆에, 긴 양말을
구두 옆에, 소매 달린 짧은 윗옷을 긴옷 옆에,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씩 눈여겨 바라보았다. 그때의 그녀는 이것들과 똑같이 조그마했다. 커다란 인형을 팔에 안고 루이 금화를 이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웃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걸었다. 그녀에게는 이 세상에 그밖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의 숭엄한 백발 머리가 맥없이 침대 위로 떨어지고, 그 불요불굴의 늙은 가슴은 날카롭게 찢어지고 얼굴은 꼬제뜨의 옷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만약 그때 계단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면 무섭게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으리라.
(p. 2175(105))

 

 

 숙명이 늘 곧기만 한 것은 아니다 . 사람들 앞에 놓인 저마다의 숙명이 언제나 곧고 넓게 뻗어 있지는 않다 . 거기에는 막바지도 있고 , 막다른 골목도 있으며, 어두운 모퉁이도 있고 ,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불안한 십자로가 있다. 지금 장 발장은 가장 위태로운 그러한 기로에 부딪쳐서 걸음을 멈추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선악의 마지막 갈림길에 도달해 있었다 . 그는 그 캄캄한 분기점을 눈앞에 보고 있었다. 몇 번의 괴로운 전환이 있을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의 앞에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 하나는 그를 유혹했고, 또 하나는 그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어느 것을 택하여야 하나?
 그를 두렵게 하는 길은 , 인간이 어둠을 똑똑하게 확인하려 할 때마다 언뜻 보이는,  저 신비로운 집게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다 .
   장 발장은 이번에도 다시 무서운 항구와 미소짓는 함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 영혼은 회복할 수 있지만 숙명은 되돌릴 수 없다는것은 과연 진실일까? 불치의 숙명! 무서운 일이다 .
(p. 2178(108))

 

 

  행복하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들은 행복한 것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가! 얼마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인생의 그릇된 목적인 행복을 소유함으로써 참다운 목적인 의무를 얼마나 잊고 있는지!
(p. 2248(178))

 

 

  너희들 , 너희들은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어디라도 좋으니까 한쪽 구석에 장소를 표시할 만한 돌 밑에다 나를 묻어 다오.  이건 내 뜻이다 . 돌에는 이름을 새기지 말도록 해라 . 만약 꼬제뜨가 이따금이라도 와 주기만 한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기쁘겠다.  당신도 와 주오 , 뽕메르씨 군. 내가 늘 당신을 사랑했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고백해야겠소. 제발 그 점을 용서해 주시오 .
   그러나 지금은 이 아이와 당신 , 두 사람이 내게는 한 사람이오 . 나는 당신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소. 당신이 꼬제뜨를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소.
(p. 2300(230))

 

 

그가 잠들었네. 운명은 그에게 몹시 가혹했어도
그는 살았네. 천사를 잃어버리자 그는 죽었네 .
올 일은 찾아왔네
낮이 가면 밤이 오듯이.
(p. 230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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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3)
빅토르 위고 / 송면 / 동서문화사 / 415쪽

(2013.06.08.)

 

 

 

  어떤 사물이든 반사되는 빛은 엷어지는 법이다. 그러나 남에게 주는 기쁨이란 기묘한 것이어서, 없어지기는 커녕 한층 더 밝은 빛이 되어 자기에게 되돌아오고 더욱 더 아름답게 작용한다.
(p. 917)

 

 

  빠리의 지붕 위로 올라오는 연기는 세계의 사상이다. 빠리를 진흙과돌더미라고 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 빠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정신적인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빠리는 위대한 것 이상으로 무한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빠리가 용감하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p. 959)

 

 

  인류가 전진하기 위해서는 용기라는 숭고한 교훈이 산꼭대기 위에 영원히 걸려 있어야만 한다. 대담무쌍한 행동이 역사를 눈부시게 해준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빛이다. 여명의 빛은 돋아오를 때는 단호하다. 용감하게 시도하고, 도전하고, 고집하고, 노력하고 자기에게 충실하고, 운명과 맞붙어 싸우고, 비극적인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파국을 막고, 때로는 부정한 힘에 대항하고, 때로는 승리의 도취를 경멸하고,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며, 저항을 계속할 것. 그들을 분발케 하는 빛이다.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빛이 프로메테우스의 횃불에서 깡브론느 장군의 도자기 파이프에까지 전달되어 가는 것이다.
(p. 960)

 

 

  꽁브페르는 역사가 자연히 진보해 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기를 바랐다. 꽁브페르가 말하는 좋은 진보란 싸늘할지는 모르지만 순수한 진보, 도식적일지는 몰라도 나무랄 데 없는 진보, 조용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진보였다. 미래가 전혀 손때 묻지 않고 찾아온다면, 그리고 민중의 덕의의 끝없는 진화가 아무것에도 방해되지 않고 실현된다면 꽁브페르는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기도라도 앴을 것이다.
  '선은 결백해야 한다'고 꽁브페르는 언제나 입러릇처럼 말했다. 혁명이 실로 위대한 것은 눈부신 이상을 응시하며 무서운 우레 속을 뚫고 피의 바다며 불의 바다를 넘어 그 이상을 향하여 한결같이 갈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진보가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오점이 없기 때문이다. 워싱턴을 한쪽의 대표, 당똥을 다른 쪽의 화신으로 본다면 둘 사이에는 백조의 날개를 가진 천사의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천사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p. 1055)

 

 

  자네들이 아무리 완전하고 뛰어나고 유능하다 해도 그런 건 내겐 상관 없어. 모든 장점은 단점과 통하네. 검약가는 인색한 사람과 가깝고 관대한 사람은 낭비하는 사람과 별 차이 없고, 용기는 허세와 같은 그릇이지. 매우믿음 깊게 말을 하는 자도 조금은 위선이 있는 법일세. 디오게네스의 외투에 구멍이 있듯이 미덕 속에도 악덕은 있어.
(p. 1079)

 

 

  마음이 약한 자를 비굴하게 만드는 무서운 시련, 그것은 또 마음이 강한 자를 탁월한 인간으로 만드는 바람직한 시련이다. 그것은 비열한 인간이나 신과 같은 인간을 만들려고 할 때면 반드시 운명이 인간을 던지는 도가니이다.
  왜냐하면 하찮고 작은 싸움 속에서야말로 많은 위대한 행위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빈궁과 치욕이 여지없이 달려드는 생활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끈덕지고 강한 남다른 용기를 떨쳐 한 걸음 또 한 걸음 저항해 마지않는다. 이윽고 그 누구의 눈도 미치지 않고, 어떤 명성도 없으며, 어떤 갈채의 나팔도 불지 않는 곳에서 숭고하고 신비로운 승리를 획득한다.
  인생, 불행, 고독, 빈곤이라고 불리는 것들 모두가 싸움터이며 거기에는 영웅이 있다. 그리고 이름도 없는 이 영웅들은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영웅들보다도 더 위대할 수도 있다.
(p. 1100)

 

 

  아직 자기를 잘 알지 못하는 영혼의 그런 첫 눈길은 여명의 하늘과 같은 것이다.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찬란한 것의 눈뜸이다. 장엄한 어둠을 어렴풋이 비추는 뜻하지 않은 번쩍임, 현재의 때묻지 않은 모든 것과 미래의 모든 정열로 이루어진 그 번쩍임의 위험한 매력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리라. 그것은 우연히 나타나서 기다리는 목적 없는 애정이다. 순수한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쳐놓은, 스스로 바라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느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올가미인 것이다. 그것은 한 여자로서 남자를 바라보는 눈길인 것이다.
(p. 1141)

 

 

  인류는 동등하다. 모든 인간이 다 같은 흙으로 빚어졌다. 적어도 이 세상에는 하늘이 정해 준 운명에 있어서는 하등 차별이 없다. 전세에서는 다 같은 어두움, 현세에서는 다 같은 육체, 내세에서는 다같은 한줌의 재, 그러나 인간을 만드는 원료에 무지라는 것이 섞이게 되면 그 원료는 시커멓게 변질한다. 그 지울 수 없는 검은 빛은 인간 내부 깊숙이 침투하여 거기서 악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p. 1167)

 

 

  생활이 어려워지고도 여전히 품위를 잃지 않는 인간이란 그리 흔치 않다. 게다가 어느 경지에 까지 이르면 불운과 파렴치는 서로 혼합돼 구별할 수조차 없이 되고, 또 한 마디의 말, 즉 비참한 사람들, 레 미제라블이라는 숙명적인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대체 누구의 죄인가? 그들이 구렁텅이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한층 커다란 자비의 손을 베풀어야 하지 않는가?
(p.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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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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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 김영하 / 문학동네 / 252쪽

(2013. 05. 31.)

 


  디카프리오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가 개봉하면서 영화 덕분에 인터넷 서점들에선 여러 출판사에 출간된 개츠비들이 사은품을 덧붙여 50% 할인된 가격에 판매되고 있어서 이 책을 구매하기에 요즘이 아주 절호의 찬스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이유는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주인공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상실의 시대>에서 아래 내용을 읽고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싶어 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싶다.

 

  "열여덟 살의 나에게 최고의 책은 존 업다이크의 <켄타우로스>였는데, 몇 번 되풀이해 읽는 사이에 그것은 처음의 광채를 약간씩 잃게 되었고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게 베스트 원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는 그 후 줄곧 내게는 최고의 소설로 남아 있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책꽂이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그 부분을 오랫동안 읽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는데, 단 한번도 실망을 맛본 적이 없었을 만큼 단 한 페이지도 시시한 페이지는 없었다. 이렇게 멋진 소설이 또 있을까 싶었다."


   내가 처음 읽은 <위대한 개츠비>는 "민음사'에서 나온 책이 이었는데, 생각보다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만큼 많은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역시 나의 문학적 감수성은 아직 미약한 것일까 잠깐 자괴감에 빠졌다가 바로 잊고 있었는데…….
   어느날 소설가 김영하님의 팟케스트를 듣다가 김영하님께서 직접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했다는 얘기를 듣고 언젠가는 꼭 사서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요즘처럼 아주 저렴하게 개츠비가 판매되는 절호의 찬스에 그동안 눈으로 찍어 놓았던 문학동네 "위대한 개츠비"를 구매하고 단숨에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번역이란 창작과도 같아서 번역가에 따라 그 느낌이 다 달라질 수 있고, 어느 번역이 틀린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개성이 반영된 또 다른 하나의 문학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소설을 쓰시는 분이 번역한 것이라 그런건가, 민음사 본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느낌들이 나를 뒤엎어 버렸다. 비록 번역본이긴 하지만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문장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감동 그 자체였다…….
   아직 3/2밖에 읽지를 못했는데도 좋아하는 구절을 표시하는 포스트잇이 책 옆면에 가득 차 넘쳐다고 있다. 드디어 상실의 시대 주인공의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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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아버지가 충고를 한마디 했는데 아직도 그 말이 기억난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서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버지의 말이 훨씬 더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따. 그런 식으로 우리부자는 말 한 마디 없이도 서로의 뜻을 이상하리만치 잘 알아차리곤 했다.
(p. 11)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결국 일련의 성공적인 제스처라고 한다면, 그에겐 정말 대단한 것이 있었다. 1만 마일 밖의 흔들림까지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그는 인생에서 희망을 감지하는 고도로 발달된 촉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미명하에 흔히 미화되고 하는 진부한 감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희망, 그 낭만적 인생관이야말로 그가 가진 탁월한 천부적 재능이었으며, 지금껏 그 누구도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성질의 것이었다. 아니,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인간들의 설익은 슬픔과 조급한 기고만장에 대해 내가 잠시나마 관심을 일게 되었던 것은 개츠비를 삼킨 것들, 그리고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부유하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
(p. 13)



 "너무 행복해서 몸이 마, 마비돼버렸어."
그녀는 대단히 재치 있는 말을 했다는 듯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귓속말로, 턱으로 균형을 잡고 있는 여자의 이름이 베이커라고 속삭였다(데이지가 귓속말을 하는 건 사람들을 자기 쪽으로 가까이 오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말도 안 되는 험담이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 귓속말의 매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p. 20)


 

   그가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그것은 변치 않을 확신이 담긴, 일생에 네다섯 번쯤밖에 마주치지 못할 특별한 성질의 것이었다. 잠깐 전 우주를 직면(혹은 직면한 듯)한 뒤, 이제는 불가항력적으로 편애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노라는 그런 미소였다. 당신이 이해받고 싶은 바로 그만큼을 이해하고 있고,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만큼 당신을 받고 있으며, 당신이 전달하고 싶어하는 호의적 인상의 최대치를 분명히 전닯다았노라 확신시켜주는 미소였다. 그리고 바로 그순간, 그 미소는 홀연 사라져버렸다.
(p. 65)

 


   빵빵대는 클랙슨 소리는 크레셴도로 커져만 가고, 나는 몸을 돌려 잔디밭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나는 뒤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웨이퍼 과자 같은 달이 개츠비 저택을 비추고 있었다. 달빛은 아직 훤한 개치비네 정원의 소음과 웃음소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밤을 밝히고 있었다. 갑자기 창문과 커다란 문으로부터 공허함이 넘쳐나, 포치에 선 채 정중히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집주인의 실루엣에 완벽한 고독을 더했다.
(p. 74)



   거대한 다리를 통과하는 동안, 대들보 사이를 통과한 햇빛이 지나가는 자동차들 위에서 쉴 새 없이 번쩍거렸고, 다리 건너로는 흰 각설탕 더미처럼 생긴 도시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냄새 없는 돈으로 지어 올리려는 소망으로 빚어진 도시가. 퀸스버러 다리 위에서 보이는 뉴욕은 처음 보는 이에게는 언제나 세상의모든 신비와 아름다움, 그것에 대한 최초의 담대한 예언처럼 느껴진다.
(p. 88)

 


   그곳에 앉아 그 옛날 미지의 세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개츠비가 데이지네 집의 잔교 끝에서 빛나는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의 놀라움에 생각이 이르렀다. 바로 이 파란 잔디밭까지 오기까지 그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그의 꿈은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그는 몰랐다. 자신의 꿈이 어느새 자기 등 뒤에, 저 뉴욕 너머의 혜량할 수조차 없는 불확실성 너머,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미국의 어두운 들판 위에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에게서 멀어지기만 하는 황홀한 미래를. 이제 그것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뭐가 문제겠는가.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리고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어느 찬란한 아침...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p.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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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사) 중에서


   열여덟 살의 나에게 최고의 책은 존 업다이크의 <켄타우로스>였는데, 몇 번 되풀이해 읽는 중에 그것은 처음의 광채를 약간씩 잃게 되었고,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게 베스트 원의 자리를 양보하게끔 되었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는 그 후 줄곧 내게 있어서는 최고의 소설로 지속되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책꽂이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그 부분을 한바탕 읽는 것이 습관처럼 돼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실망을 맛본 적이 없었을 만큼 단 한 페이지도 시시한 페이지는 없었다. 이렇게 멋진 소설이 또 있을까 싶었다.


   어느 날 내가 식당의 양지쪽에서 볕을 쬐며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있자니까, 옆에 와 앉아서 무엇을 읽느냐고 물어 왔다. <위대한 개츠비>라고 말했더니 재미있냐고 물었다. 훑어 읽는 건 세 번째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가 있다고 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나 같은 건 따라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굉장한 독서가였는데, 죽어서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에는 원칙적으로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다.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을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지. 인생은 짧아."
"나가사와 선배는 어떤 작가를 좋아하지요?"
"발자크, 단테, 조셉 콘래드, 디킨스"하고 그는 막힘없이 잘도 대답했다.
(p.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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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1
빅토르 위고 / 방곤 / 범우사 / 434쪽

(2013. 05. 09.)

 

 

 

※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불쌍한, 비참한 사람들

 

 

  사실 여부는 예외로 치더라도 어떤 사람에 관한 세상 소문은 흔히 그 사람의 생애나 특히 운명에 있어서 그 사람의 실제 행위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p. 22)

 

 

  도둑이나 살인자를 결코 무서워해서는 안돼. 그건 외부의 위험일 뿐이며, 조그마한 위험이야. 우리들이 두려워할 건 우리 자신이야. 편견이야말로 도둑이야. 악덕이야말로 살인자야. 큰 위험은 우리들 내부에 있지. 우리들의 머리나 지갑을 위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실로 우리들의 영혼을 위협하는 것이야.
(p. 56)

 

 

  성공이란 참 끔찍스러운 것이다. 진실한 가치로 오해하기 쉬운 그 유사성은 사람을 현혹시킨다. 군중에게 성공은 우월과 거의 똑같은 면목을 가지고 있다. 재능과 쌍둥이같은 닮은 성공은 거기에 속아넘어가는 자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거의 공식적인 철학이 성공의 집에 봉사하러 들어와서, 성공의 제복을 입고 응접실에서 시중을 들고 있다. 성공하라, 하는 것이 학설이다. ‘영달’은 ‘능력’을 가정한다. 투기에서 부를 얻으면 그 사람은 곧 수완 좋은 사람이 된다. 승리한 자는 존경을 받는자. 팔자는 타고나라, 거기에 모든 것이 있다. 운이 좋아야 한다. 그러면 그대는 모든 것을 얻으리라. 행복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대를 위대하다고 믿으리라. 일세기의 광명을 만드는 5, 6명의 위대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동시대의 칭찬은 근시에 불과하다. 도금은 순금이 된다. 누가 되었든 벼락부자가 되기만 하면 상관 없다. 속인은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 속인이게 갈채를 보내는 늙은 나르시스다.
(p. 90)

 

 

  절망한 사람들은 자기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다. 그들은 모진 운명이 뒤에 다라오고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p. 107)

 

 

  인간의 성질은 이처럼 근본적으로 완전히 변하는 것일까? 신에 의해서 착하게 만들어진 인간이 사람에 의해서 악해질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영혼이 운명에 의하여 완전히 개조되고, 운명이 나빴기 때문에 영혼도 나빠지는 수가 있을까? 너무 낮은 천장 밑에 있어서 등뼈가 구부러지듯이, 사람의 마음도 고르지 못한 불행의 압박 밑에서 비틀어져 불치의 추악과 불구로 변화할 수가 있을까? 어떤 본래의 빛이, 이승에 있어서 부패할 수 없고 저승에 있어서 사멸할 수 없는 어떤 거룩한 요소가, 선에 의하여 발전하고, 북돋워지고, 불붙어 타올라 찬연히 빛나되, 악에 의해서도 결코 완전히 꺼지지 않는 그 어떤 거룩한 빛이,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없는 것일까? 특히 장 발장의 영혼 속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을까?
(p. 145)

 

 

  우리의 인생을 형성하고 있는 그 신비로운 바윗덩어리를 아무리 잘 깎으려고 해도 소용 없는 일이다. 운명의 검은 광맥은 늘 거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p. 307)

 

 

  인간의 양심의 시를 만드는 것은, 설령 그것이 일개인에 관한 것이든, 가장 비천한 사람에 관한 것이든 간에, 모든 서사시를 한데 녹여 하나의 한층 더 훌륭하고 결정적인 서사시를 만드는 것이다.
(p. 331)

 

 

  생각이 한 관념으로 되돌아옴을 막을 수 없음은 바닷물이 해변으로 되돌아오을 막을 수 없음과 같다. 사공에게는 그것이 밀물이라 하는 것이고, 죄인에게는 그것이 가책이라 하는 것이다. 신은 바라를 추켜올리듯이 영혼도 추켜올린다.
(p. 338)

 

 

  사람의 마음은 때로는 거의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니 바깥만을 바라보고도 만족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삼라만상을 처음 봄과 동시에 마지막으로 본다는 것은, 얼마나 서글프고 심각한 일이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태어났다 죽었다 하는 것이다. 아마 그는 자기 정신의 가장 어슴푸레한 한쪽 구석에서 이 변화하는 외계와 인간 존재를 견주고 있었으리라. 인생의 온갖 사물은 끊임없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어둠과 빛은 교차된다. 눈부신 광휘도 다음 순간에는 자취를 감춘다. 사람은 바라보며, 급히 서둘며, 손을 내밀어, 지나가는 것을 잡으려 한다. 매순간이 행로의 모퉁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람은 늙는다. 어떤 동요 같은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
(p. 368)

 

 

  성실과 진지와 솔직과 확신과 의무감 같은 것은 악용될 때에는 끔찍스러운 것이 되지만, 그래도 숭고함을 잃지는 않는다. 인간의 양심에 고유한 그러한 것들의 위엄은 사람을 두렵게 하는 가운데에도 의연히 존재한다. 그러한 것들은 착오라는 하나의 흠밖에 없는 미덕이다. 잔학하기 짝이 없는 광신자의 정직하고도 무자비한 희열 속에는 비통하고도 존경할 만한 그 어떤 광휘가 있다. 엄청난 행복 속에 싸인 자베르는 자기도 모르게, 모든 무지한 승리자처럼 불쌍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선의 해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나 있는 그런 얼굴처럼 처량하고 가공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p.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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