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종사
왕가위 감독, 송혜교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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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가 함빡 온다.

  

 

  왕가위는 정경을 그려낸다사람들은 빗속에 있다거친 발차기와 함께 엽문은 말한다세상에는 수평과 수직이 있다수평은 무너진 것수직은 꼿꼿이 서있는 것그는 자신의 몸을 단 한 번도 눕히지 않는다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허리를 세우고 직립한 그의 모습은 곧 승리요생존이다.

 

 

  엽문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사람이다그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다정하다그와 아내의 사이 역시 좋다그 둘은 공익 광고처럼 건전하다그들의 삶은 사생활의 영역에 속해 있다엽문은 큰 어려움 없이 가족을 부양하며 아내와 오손도손 자식들도 낳고자신의 무예도 갈고 닦는다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부족함을 알 수 없다그가 설치한 무술 연습용 나무봉은 굳건하고 안정된 그의 사생활을 상징한다그의 짝인 장영성은 자신에게 굴레 씌워진 사대부 여인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다엽문 역시 금루로 출입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그들 둘은 사회와 세상의 시선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그들은 자신들만의 사생활 속에서 안전했고행복했다외부와 딱히 연결되지 않는 삶을 산 것이다부모가 물려준 금전으로만 살아도 풍족한 삶이니 딱히 말도 안 된다 짐작할 순 없다하지만 궁가의 등장으로 그들의 일상에는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엽문은 일생일대의 도전을 받게 된다이 시점이 바로 그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는 최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궁대인은 북방에서 온 사람이다그는 자신의 무예와 남방의 무예를 합치는 것에 관심이 많다그의 관심사는 개인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그가 바라는 것은 진시황이 바란 천하통일과 같다하지만 궁대인은 분서갱유를 지시한 오만한 독재자는 아니다그보다는 오히려 대의와 중생을 바라보고자 한 인물이다그에게 무예란 것은 알려야 하는 소중한 것이며전통과 다름없다그는 중국적 가치를 일구어 내기 위해 분주하게 노력하는 자이다사회와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이다그가 만들어 내고지켜내고자 하는 것은 궁 대인의 삶을 대변하며 동시에 철저히 궁가의 것이다그가 자신의 딸에게 설욕전을 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일은 그의 생각에 당연하다무예는 인간 개인 한 명의 좁은 차원이 아닌 더 넓은 차원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일대종사에서 무예란 무엇을 상징하는가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영화 속 시간이라는 가로의 축 뿐만 아니라 세로의 축으로도 일대종사를 봐야 한다세로의 축이라 함은 왕가위 감독이 제시하는 철학이며 중국의 역사적 맥락을 동시에 의미한다왕가위 감독은 여러 곳에서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속 엽문을 이야기한다중국의 위기 속에서 무예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무예라는 것은 중국민족에게 전통이며 문화 중 하나이다괜히 그들의 삶에서 무협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 아니다무술이란 개인 하나가 소유한 것이 아닌 집단의식에 가깝다공공재다그것은 스승이라는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달된다자식은 새로운 부모가 되어 자식인 제자에게 무예를 전달한다자신과 자연을 뛰어넘어 인간을 바라봐야 가능한 일이다그러한 교육의 형태는 민족적 정체성을 위협받는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삶의 방식이요저항하는 길이다.

 

 

  북방에서 온 자들이 엽문을 비롯한 남방계 사람들까지 자극시키는 이유는 그러한 사고방식으로는 당연한 일이다대의 앞에서 자신의 집단을 대표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능력자의 자질이 아니다그것은 비겁한 일이며 불효자나 할 짓이다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집단을 대표하는 일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병아리는 자신의 둥지 안에서 극치의 편안함만을 느낀다그 이유는 간단하다더 큰 책임감에서 개체가 자유롭기 때문이다엽문의 능력은 개인이 가진 것이 아니라 그를 낳은 스승과 문파에게 있는 것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능력에 책임감을 느낀다하지만 그는 아내의 허락을 받지 않는 한 움직일 수 없다그의 마음이 아내에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그의 가장 내밀한 공간은 장영성에게 내어준 방이나 마찬가지다결국 아내의 허락을 받고서야 엽문은 움직인다그 순간이 바로 병아리가 둥지 밖으로 발을 내딛은 때이다.

 

 

  거울로 자신만을 보는 사람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그러나 타인을 보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분리해서 보지 못한다새가 둥지를 벗어나며 보는 것은 무엇인가하얀 설원과 푸른 산과 파란 바다와 붉은 꽃이다세상은 아름답다단조롭고 평화로우며촛불과 집으로 둘러싸인 사적 공간을 벗어나 밝고 넓은 공적 공간천지대자연이 펼쳐진다엽문은 자연과 인생의 섭리를 체험하게 된다그는 자신의 이웃들한테서 많은 것을 배운다영특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기에 척척 알아듣는다엽문은 이러한 사람도 있고 저러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그렇게 그는 동포들을 대표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에 돌을 하나씩 짊어진다그 돌을 세 개 짊어진 다음엽문은 그 시대의 대인을 만난다궁대인은 적이요 스승이요 동시에 아버지이다먹어 삼켜야 할 우라노스이다자분히 밟고 지나가야 할 철쭉꽃이며 상대 역시 그것을 노린다궁대인은 더 넓은 곳을 본다자신이 끝나야자신의 유전자가 이어질 것을 아는 자이다그는 이타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무엇인지 역설하는 존재이다.

 

 

  궁대인은 사람들 앞에서 의식을 치른다자신의 새 아들에게 궁대인은 묻는다남과 북을 결합하고자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엽문은 남과 북이 다른 것을 억지로 합치면 탈이 나며 다른 것은 다른 것대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답한다전병이 궁대인에게 단순히 무림이라면 자신에게는 세상이라는 엽문의 말까지 고려해서 본다면궁대인이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함은 당연함이다궁대인은 무예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지만엽문은 무예를 뛰어넘은 세상 만상의 중생을 바라보며 답했기 때문이다그 답을 지닌 엽문을궁대인은 축복으로 기원한다.

 

 

  다만 혈기왕성한 장쯔이의 궁이가 순간만큼이라도 양보할 수는 없다며 엽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그렇게 한 데에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은 젊은 후계자에 대한 궁금함이 더 컸을 것이다그러나 기본적으로 궁이는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자신을 보고하늘과 땅을 봤지만 중생을 보지는 못했다그녀에게는 여성이라는 한계가 있었고본인의 기질적 성품이라는 담이 있었다가끔 세상 사람들 중에는 이상하게 어느 지점 위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궁이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과 궁가라는 사적 집단의 자존심만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그녀에게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 해도 중요하지도 않고자신과는 상관도 없다하지만 궁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독의 애정은 지고지순하다북방에서 온 궁이가 화려한 금루의 여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마치 감독 자택의 거실에 조심스레 걸어놓은 한 폭의 서양화를 보는 것 같다중생을 보는 일대종사가 되지 못한 인물우리네 수많은 지고 피는 꽃들 중의 하나가 바로 궁이다궁이는 일대종사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평범한 인물들인 우리네의 자화상이다.

 

 

  궁이는 엽문이라는 새에게 둥지 바깥에서 보게 된 아름다운 꽃 한 떨기이다그가 궁이를 거절할 것은 운명이다당연한 귀결이다궁이의 감정은 그들이 겨루는 무예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보는 자의 시선에서 그들이 겨루는 무예는 화려한 동작이지만당사자들에게는 순간이 영원처럼 흐르고그들의 몸과 몸 사이로는 생각이 주고받아진다신체의 만남은 쉽게 넘어갈 것이 아니다그것은 신경들끼리의 만남이다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것처럼 잠시의 스침이라도 그 영겁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이처럼궁이가 상징하는 것은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한 엽문에게 있어 극복해야 할 높은 무예의 산 중 하나였다궁이와의 경합에서 그가 낸 규칙대로 하여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그는 고산 중 하나로 궁이와 같은 자들을 점찍었을 것이다무술의 세계로 나아간 엽문을 보며 장영성은 눈물짓는다그에게 다른 세계가 열린 것이다사진 속 거리는 그것을 보인다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사람의 변화를 견뎌내야 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엽문이 차차 발을 내딛던 중일제가 엽문의 도시로 들어온다.

 

 

  높은 자존심고고한 사생활의 평화는 깨진다아무리 안온한 둥지라도 거센 폭풍우에는 떠내려가는 법이다그것 역시 사회와 세상으로 나간 엽문이 배운 또 다른 천지의 이치이다대가 하나가 국을 저으며 때를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개인은 바위로 내던져지는 달걀이나 다름없다엽문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가족의 삶이 깨지는 것을 막아보려 하지만새끼 새들이 뱀에게 먹히는 것을 어미 새가 막을 수 있느냐의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엽문이 아무리 잘난 자라 하여도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혼돈 속에서 묵묵히 엽문은 자신의 무술 연습용 나무봉을 해체한다개인의 삶은 사회의 거친 혼란에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사회의 혼란을 벗어나 편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자존심과 자부심을 파는 것이다자부심과 자존심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무예이다중국인의 전통이요윗대로부터 내려온 공통의 무엇이다궁대인에게 궁가 64수의 힘을 물려받은 마삼은 그 길을 택했다아름다움을 물려받지 못한 그의 선택은 바로 변절이었다.

 

 

  마삼은 스승을 죽였다그는 스승이 남긴 초식의 비기를 듣고서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마삼은 피가 끓는 열혈 청년이었다그는 자신의 핏 속에 담긴 혈기왕성함을 주체하지 못하는 힘 그 자체였다그에게 있어 세상이라 함은 그 본연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세상의 이치까지 파고들만한 자는 아니었다그가 거침없이 다른 사람들을 내리꽂는 것을 보라천지만물이 그에게는 자신의 힘을 증명할 수 있는 시험지에 불과했다그런 그에게 궁대인이 끊임없이 자제할 것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가르침이다왜냐하면 세상이란 한낱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천둥벌거숭이에게 기다리라 한들 자제할 수 있다면 동물이 아니리라짐승을 길들이려 하였지만짐승은 곧 아가리를 벌려 아버지를 물어죽이고 표표히 떠나버린다그러나 짐승 마삼은 궁이에게 패배하는 순간 초식의 비기를 이해하게 된다돌아보는 것그것을 진부하고 늙은 자의 굼뜸이라고만 해석했던 그였다그러나 순간 뒤를 바라보는 것은 굼뜸이 아니라 더 높고 멀리 날기 위한 제 1조건이다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자신에서 시선이 떠나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그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 되면서 오히려 수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그에게서는 아예 궁가의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궁이의 말대로 그것은 궁이가 되찾은 것이다마삼은 궁가의 것을 공유해 본 적이 없었다애초에 그에게는 자부심이란 없었다.

 

 

  그러나 궁이를 말린 노인들의 지적처럼궁이는 초라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천지와 중생을 보라고 가르쳤건만 그녀가 선택한 길은 사형과 사제끼리의 혈투였다궁가 64수의 아름다움과 힘이 서로를 헤친 것이다두 개로 나누어 무술을 보존하고자 했건만 하나의 욕심이 탑을 무너뜨렸다하지만 궁이는 말한다궁가 64수가 없어진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없어지는 법이다니힐리즘에 빠진 궁이는 아편을 마셨고 결국 자신의 몸을 파괴한다아름다움만 있고힘은 없는 그녀는 세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그녀는 결혼을 하여 자식도 낳지 못했고자신의 무술을 후세에 남기지도 못했다그러나 왕가위는 가련한 그녀를 비천하게 여기지 않는다배우 장쯔이에게 고고한 자존심과 기품을 선사하여궁이가 내린 선택을 마지막까지 조명한다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는 아버지는 촛불을 하나 켜놓고 딸을 기다린다왕가위 감독은 우리 인간이 그렇게 간단히 감히 개인을 버리고 중생을 바라보는 삶을 선택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궁이가 복수를 한 것은 그녀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필시 그저 그것이 그녀다운 길이었기 때문이다궁이를 보는 것은 그러므로 엽문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엽문이 내린 선택과 정반대의 선택을 한 궁이그녀를 보는 것은 중국 최대의 위기 속에서 한 세상을 살아간 한 여인의 삶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그녀는 남자로 태어날 수도 없었고일가를 이룰 수 없었다자신의 몸과 일가에 갇힌 운명이었던 것이다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쓴 바대로 평범한 인간의 길이다.

 

 

  무술에서 궁이는 수직이었지만삶에서는 수평이었다그렇다면 수직으로 꼿꼿이 살아가고 있는 엽문은 위기 이후 무엇을 하였는가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자신의 핏 속에 남겨진 무술로 재기하는 것뿐이었다그는 자신의 무술로 제자들을 일궈낸다다시 생명의 바람이 분다교육그것은 무엇인가교육을 다른 말로 정의내릴 수 있다면 번식일 것이다자신의 사상을 가진 자식들을 양육하는 것이다그 안에 핏줄이 다르고자 한다 하여도 그들은 같은 정신과 자부심을 소유한다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의 스승에서 나온 이야기이며그의 스승이 말하는 바는 스승을 가르친 스승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엽문은 그러한 중국의 전통에서 자라고 난 사람이다그는 중생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삶에 천착하는 길로 치우치지 않았다영화 속 작은 비중으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일선천은 엽문과 다른 방향의 길을 걸은 것처럼 보이지만사실 엽문과 큰 차이는 없다일선천은 평범한 비극의 삶을 상징하는 한 여인에게서 도움을 받고 살아난 독립투사요자신만의 일파를 이루기 위해 피를 튀기며 조직에서 나온 인물이다그들은 자신의 뜻에 감화된 자들과 사진을 찍는다그들은 어린 자들에게서 희망을 보며다음 세대를 기약한다사생활이 부서진 엽문이 자신의 고향인 불산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아마 아내를 잃은 그로서 지켜야 할 다른 가족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그가 지켜야 할 가족은 요즘의 기업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가식적인 관계가 아니라같은 삶의 방향을 지향하는 동료들과 자식을 의미한다그들은 자신을 믿고 따르며엽문은 그들 중생의 손을 잡고 이끌어가는 존재이다.

 

 

  『일대종사이 영화는 동양적중국적인 의식으로 보지 않으면 힘든 영화이다왕가위 감독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분명히 자신만의 서양적 미학으로 그림들을 그려낸다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서양화적 시각과 색감들이 그러하다그러나 서구 문명의 상징인 기차가 압도적인 속도로 지나치는 그 바로 위태로운 옆에서 두 명의 중국 무술가들이 자신의 가치를 위해 싸운다왕가위는 우리의 현실을 포착한다바로 동양과 서양이 만난 역사의 최근이다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작품에서 서양적 아름다움에만 집착한다면우리는 궁이와 마삼의 장면을 보지 않고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만을 본 것과 같다.

 

 

  왕가위를 읽기 위해서는 그가 홍콩인이라는 맥락을 읽어야 한다그는 촌스럽게 이 영화에 중국이 어떻고상황이 어떻고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그는 돌려서 말한다영상으로무술로물로장쯔이로양조위로 그려낸다하지만 그는 중국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홍콩인으로서중국의 위기에 봉착했던 그 시기 중국인이라면 무엇을 해야 했던 것인가를 엽문으로서 답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무술이 중국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무술은 단순히 경합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체의 수양이었다또한 오랜 전통으로서 지방색 역시 갖고 있다무술은 몸에 대한 이해요하나의 종파를 묶는 같은 움직임이다하나의 공통 기호이다그들은 그 기호를 근육과 움직임에 새기며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인간은 이 세상에 나서 개인으로 살아가는가아니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가보았듯이동양의 정서는 거친 자연과 무한한 사람들 안에서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지 자기 자신만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우리는 연결되어 살아간다잘난 개인이 자기 자신만의 둥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숲 속에 만약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는데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 나무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우리의 정서로 본다면 그 나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한 인간이 부모로부터 태어나 자기 자신만의 삶에서 살지 않고다른 의미의 가족을 일구고더 큰 사회의 어버이가 되는 것번식과 번식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고 만들고 다음 세대로 나아가는 것그것이야말로 바로 왕가위 감독이 의미하는 일대종사’ The Grandmaster의 참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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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Hiroshima Mon Amour (히로시마 내 사랑) (1960)(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Criterion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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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벌거벗은 두 사람이 서로를 애타게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주인공들의 섹스라는 에로틱한 현재인지, 혹은 낙진을 잔뜩 묻은 채 죽어가는 히로시마 원폭 사태라는 과거의 두 사람인지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뜰히 애무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간간히 삽입하며, 영화는 관객에게 히로시마 원폭 사태에 대한 이미지들을 제공한다. 여자주인공은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이 히로시마 원폭 사태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남자주인공은 여자에게 당신이 본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그녀의 말을 부정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국적이 다르다그들은 처음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지만 옛날부터 연인인 사람들 같다그들은 먼저 육체의 결합을 통해 가까워졌다서로 애정을 느끼는 만큼 그들은 서로의 영혼에 가까워지려고 한다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탐색한다여자가 히로시마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공유하려고 했던 것은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남자는 그러한 인위적인 이어짐여자가 시도하려 하는 공통된 과거를 거부한다그들이 그 대화에서 소통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히로시마 원폭이 각자에게 있어 동일한 기억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다른 과거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남자의 요구에 맞추어 자신이 기억하는 것들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그녀가 과거를 이야기할 때, 일본 남자를 ‘당신’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를 느베르에서 만난 첫사랑이자 죽은 독일인 병사처럼 대한다는 것이다. 술집에서의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에게 죽은 군인이 아직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첫사랑이 죽었던 고통스러운 기억은 그녀의 눈에 가끔씩 다른 사람의 이미지 위로 생생히 겹쳐 보인다. 독일병사는 기억이미지로서 현재이자 동시에 과거이다. 그녀가 첫사랑을 서서히 잊어가지만 그래도 잊지 못하는 것은 변하지 않을 사랑의 맹세이며, 동시에 죽은 그를 언제나 마주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다.

 

  그녀의 과거를 들은 남자는 자신만이 여자의 기억을 온전히 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왜냐하면 이때껏 그녀가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았던 사랑의 기억을 알게 된 순간, 자신이 그녀에게 있어 그 독일병사라는 과거와 동일한 위치임을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자신이 그녀의 영원한 첫사랑인 독일인의 현재형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남자는 그러한 사랑의 원리에 익숙하며 그것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듯하다.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시간 이미지를 사랑이라는 소재와 연결시켜 보여주는 명작이다. 과거는 현재의 잠재적인, 또 다른 얼굴이다. 여자에게 있어 자신의 사랑과 죽음으로 이별하게 되었던 그 순간에 그녀가 독일 병사에 대해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의 기억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누어 가진 기억 속에서 죽은 연인은 현존으로써 불멸이 되었고, 과거이면서 현재인 이미지가 되었다. 그 이미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 때가 와야 독일병사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끝날 것이다. 또한 새로운 사랑에 있어서도 그들은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 과거를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서로를 히로시마와 느베르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이 결국 이 사랑을 통해 가질 수 있는 것은 서로에 대한 기억뿐이다. 여자가 독일병사를 느베르로 기억하는 것처럼 이 둘은 서로를 히로시마와 느베르로 기억함으로써 언제나 각자의 추억 속에서 그 기억을 잃지 않는 한 불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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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알랭 레네 감독, 사샤 피토에프 외 출연 / 키노필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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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과거의 성을 가득 채운 무한한 현재들 - 알랭 레네,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를 보고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를 보는 것은 미궁처럼 이어진 부조리한 꿈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수수께끼 같은 특징에도 불구하고 매우 실험적이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우선 아름답고 몽환적인 카메라의 시선이나 움직임이 무척 유려하고, 고풍스러운 대저택과 그 안을 채우는 사물들이 꽤나 감각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매혹적인 것은 영화가 제시하는 독특한 시간이미지이다. 그 시간이미지는 미궁이기도 하며 동시에 부조리한 꿈이기도 하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을 원작으로 삼은 이 작품은 카사레스가 소설 안에서 보인 환상적 이미지와 현실적 이미지의 혼동을 근사한 유럽적 분위기로 재탄생시켰다. 이미지의 혼동이라는 테마를 물려받아 마찬가지로 관객들에게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를 보면서 논리적으로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 영화가 포착하는 시간이미지는 더 강렬해지는데, 전개의 비논리성이 다소 정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움직임과 상당히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시간의 방향성을 종잡을 수 없다. 무엇이 어느 것의 앞에 위치하고, 무엇이 어느 것의 뒤에 위치하는지 알기 위해서 이 영화를 백 번 돌려본다 해도 아마 명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여자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남자 X의 진술 속에 펼쳐지는 많은 이야기들과 여자 A의 끊임없는 부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실로 일어난 일이고 무엇이 단순한 가정 혹은 짐작에 불과한 일인지 파악해 낼 수 없다. 이렇게 관객이 이 영화 안에서 길을 잃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는 이미지들의 묘사적인 성격 때문이다. 이러한 묘사되는 이미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 바로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인 알랭 로브 그리예인데, 그는 남자주인공 X의 내레이션을 통해 진실로 있을지도 모를 사물들조차 무색하게 지워버릴 정도로 세부적인 기억의 묘사를 시도한다. X는 A에게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들을 묘사하는데, 그 묘사는 심지어 가끔 제시되는 이미지와도 불일치한다. 이러한 불일치를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X의 진술과는 달리 열려져 있는 문 앞에 A가 서있는 장면이다. X는 나타나는 이미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호소하기 위해 내레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문은 닫혀 있었다고 애타게 외친다. 그의 간절한 내레이션을 듣는 관객은 그 때쯤이면 도대체 이 엇갈리는 진술 속에 존재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게 되어 영화의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진실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닌 것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끊임없는 불일치와 모호함 속에서 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이지 않느냐는 지표를 상실한지 오래이다. 이 영화의 이미지들은 식별불가능성의 지점에 도달해 있다. 그렇기에 관객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이미지들은 현재에 진행되는 일이며 동시에 과거의 일이기도 하고,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 된다. 이러한 끊임없는 분열이 바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진실에의 갈증을 느끼게 하고, 동시에 헤어 나올 수 없는 미궁에 빠진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영화가 갖는 식별불가능성의 지점을 반짝이듯 보이는 장면은 영화의 맨 처음, 연극 장면에서부터 제시된다. 관객으로서는 놓치기 매우 쉽지만, 작품 안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인공들의 대사는 연극의 대사와 일치하며 주인공들의 밀회의 공간인 대저택의 공원 역시 바로 연극의 배경으로 제시된다. 이 연극 장면은 앞으로의 영화 전체의 줄거리를 압축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이미지이며 동시에 상영되고 있는 연극이라는 점에서는 현실적인 이미지이다. 이렇게 이 영화 안에서 현실적 이미지와 잠재적 이미지는 합착되어 있는데, 그렇기에 이 장면은 결정 이미지로 기능한다. 이 연극 장면은 마치 거울과 같은데, 영화라는 작업 안에 다시 연극이라는 작업이 내포되어 있는 상태로 영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결정이미지를 통해 관객은 단순히 등장인물들끼리의 진술에서만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 속의 사건 그 자체들 속에서도 불일치와 식별불가능성이 발견된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대사의 일치는 기묘하게도 연극과 영화 속의 두 핵심주인공에서만 일치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지나가는 대사 역시 그냥 흘릴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장면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와 닮아있거나 혹은 동일하다.

 

  이렇게 영화 전반에 이미지들의 혼동이 들어가 있는 이유는 로브 그리예와 알랭 레네의 시간을 주제로 한 만남의 특성이 그대로 영화 속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감독인 알랭 레네의 경우 전작인 『내 사랑 히로시마』를 통해 현존하는 과거라는 시간이미지의 테마를 보인 바 있다. 그는 끊임없이 분열하는 현재 혹은 과거의 분기점에서 과거의 실존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로브 그리예는 알랭 레네와는 다른 시간이미지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현재의 첨점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로브 그리예는 현재 혹은 과거의 분기점에서 항상 영원한 현재를 말한다. 그렇기에 그의 현재들에는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고, 순간순간이 항상 다채로운 현재로서 마치 현기증을 일으킬 것만치 등장한다. 과거가 아닌 현재로 존재하게 된 이미지들은 다양한 인물들에게 서로 다른 현재를 분배해주고, 그러한 결과로 서로 다른 현재들이 그대로 존재하는 일종의 다우주적인 상황이 초래된다. 상식적으로 공존이 불가능한 영원한 현재들의 공존은 영화 안에서도 여러 예시적 장면들로 상징된다.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X가 A를 알았다 주장하지만 A는 X를 알지 못한다는 모순적인 현재 역시 그러하다. 또한 총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과 달리 그것을 인물들은 부정하고, X가 밀회의 장소에서 도피하다 사고로 죽었음을 암시하는 장면과는 달리 X가 멀쩡히 살아 A와 어디론가 떠나는 후반의 장면들도 예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모순된 암시들은 서로 상반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그 어떤 것도 부정되지 않은 상태로 현재라는 정체성을 갖는다.

 

  그러나 말했듯이 이 영화는 로브 그리예만의 것이 아니다. 로브 그리예의 다소 산만할 수도 있는 다채롭고 생명력 넘치는 수많은 현재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온 세계를 방랑하지 않는다. 이 순수한 현재들을 대저택이라는 한 공간에 묶어두는 것은 바로 알랭 레네의 시간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레네는 시간을 견고하고 웅장하게 서있는 바로크 성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레네의 영화에서 분명히 굳건하게 존재하는 시간을 느낄 수 있다. 이 바로크적 성 안에서 발생한 모든 일들은 마치 퇴적되듯 성 안에 쌓인다. 그러한 기억의 퇴적, 견고하게 존재하는 기억의 정체는 맨 처음 펼쳐지는 연극 대사로도 제시된다.

 

  “몇 초만 더, 그것은 응고되어 갑니다. 영원히, 대리석의 과거 속으로. 돌에 새겨진 이 정원처럼. 이 건물, 방들은 이제 버려졌고, 움직이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아마도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이 여전히 지키고 있는 그 많은 복도를 따라서 당신을 만나려고. 가면 같은 얼굴의 울타리를 거쳐서 주의 깊고 냉담한 얼굴들을 거쳐 당신 앞에 선다.” 그리고 연극은 여자배우가 “자, 이제 저는 당신의 것이에요.” 라고 말하며 끝난다.

 

  성 안에 쌓이는 기억들은 무엇일까? 그 기억들은 바로 성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 모든 현재들일 것이다. 알랭 레네가 제시하는 시간의 견고한 성 안에서 로브 그리예의 무한한 현재들이 마치 유령처럼 저택을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음악이 영화 전체에서 반복되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카메라는 이 성 안에 퇴적될 기억들을 하나라도 더 담기 위해 사람들의 대화를 열심히 쳐다보며, 초반에 대화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순간적으로 멈추기까지 한다. 그들의 대화는 서로 닮았으며, 그들이 겪는 만남도 서로 유사한 데가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성일지도 모르며, 이 영화 안에서 제시되는 이미지들은 성의 기억들일지도 모르겠다. 

 

  알랭 레네와 로브 그리예의 시간 이미지에 대한 관점이 달랐다 해도 그들의 합작이 이런 근사한 이야기, 공간, 그리고 기억이미지들을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필시 현재와 과거가 아무리 다른 존재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본 정체에 있어서는 베르그송의 생각처럼 동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는 영화 속의 성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현실이자 과거인 방문객들의 기억들을 자신의 내면에 퇴적시킨다. 그렇기에 처음 보면 길을 잃는 것이 불가능이라 생각할 정도로 직선의 공간인 성은 자신의 응고된 기억을 엿보려는 자들을 퇴적된 기억의 조각들과 화강암의 포석들 사이에서 미아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다소 장난스럽게도, “당신은 이제 길을 잃어버렸다, 영원히. 깊은 밤에, 나와 함께.” 라며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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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
조엘 코엔 외 감독, 저스틴 팀버레이크 (Justin Timberlake) 외 출연 / 콘텐츠게이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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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있습니다.



1. 

 

  포크송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주인공 말부터 맞더군요. 듣다보니 이 노래가 저 노래 같고, 저 노래가 이 노래 같은 현상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크게 상관 없이 정말 좋은 노래가 개인적으로 세 곡이었습니다. 

  제일 좋은 곡은 Hang me ~ Oh, hang me 네요. 구슬픈 선율이 르윈의 '비참한' 인생 같아 제 맘이 시큰해졌습니다. 코 끝이 짜한 느낌 들게 만드는 불쌍한 노래지만, 단순히 불쌍하다고만 표현하면 그 곡에 미안해져요. 콧소리 담긴 오스카 아이작의 인생을 보고 나면 왜인지 이해되는 가사가 별 볼일 없는 사람 마음을 더 울리기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 좋은 곡은 Please~mr.kennedy네요. ㅎㅎ 이건 저도 듣자마자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웃기긴 하잖아요. 중간중간에 목소리 넣는 건장한 청년의 Outer! Space!가 진지살까지 더해져서 말이죠.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근데 정말 몇 분 나오더군요. 그래도 나름 의미 있는 역할이긴 하지만.

  원래는 둘이서 부르다가 혼자 되어 불러 더 처량해진 Fare thee well도 좋았어요. 뭐 더 할 말은 없고, 이것도 가사가 좋더군요. 

 

 

2. 

 

  한 번 영화를 보고 나면 르윈 데이비스란 사람이 뭐하고 사는 놈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그런 영화인 것 같아요. 앨범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가 제목인가 싶었습니다. 맨 처음 나오는 부분이 뒤에도 반복되면서 그 인간이 왜 그런 소리 들었고, 왜 그런 취급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요. 게다가 그 인간이 어떤 면에선 참 한심하고 어떤 면에선 동시에 불쌍한 인간이란 것도 알게 되었죠. 캐리 멀리건 역의 배우가 거의 독기 품다시피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이 적어도 여자에 관련해 건드린 것들은 좋게 풀린 일이 없더군요. 자기 아이가 있다는 것을 낙태하려 했던 산부인과 의사한테 듣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아마 허탈하겠죠. 로맨스 영화들의 공식과는 철저히 먼.

  이 영화는 영화답지 않죠. 주인공도 고전적인 면에선 주인공답지 않아요. 어중간한 재능을 가진 것으로 나오죠. 그런 주제에 자신만의 기준은 너무나도 확고해서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음악이 좋다고 음악을 하지만 음악이 자기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끔찍한 짝사랑을 보는 느낌이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저는 제 처지가 이입되어서, 요 근래에 본 영화 중 가장 비극적이면서 울림을 주었어요. 대박을 칠 음악의 저작권료보다도 현실의 돈 한 푼이 더 급해서 다른 선택을 내리기도 하고, 남의 고양이 잘못 주워서 아주머니 비명 지르게 만들고. 그나마 자기들 거두어주시는 착한 교수님 부부 아니면 잠잘 데도 거의 없는 형편이죠.

 

 

3.

 

  게다가 그런 주제에 죄책감까지.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자기 애 가진 여자가 있는 동네쪽으로 가보지도 못하고 계속 가던 길에 지나가던 괴물체(고양이 형상) 보고 급정거하게 된 그에게 뭔가 연민이 들더군요. 참 이상한 일이에요. 아마 현실이든, 영화에서든 자기가 주워온 고양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자기 애 가진 여자들의 애도 그냥 쓱쓱 지우게 만드는 그ㅡ런 남자 이야기를 들었다면 불쌍하긴 뭐가 불쌍하나 싶었을 거에요. 그런데 그래도 불쌍하더군요. 그리 살다가 타임즈에서 온 비평가한테 좋은 평을 받아서 대박 가수가 되는 꿈 ...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영화 안에서 그의 그러한 꿈은 정말 말 그대로 잠자며 드는 꿈 같은 일일 겁니다.

  그리고 그게 어른이 된 사람들한테 대다수 일어나는 일들일 거에요. TV에 나오는 사람들, 아니면 영화 속의 짐과 진처럼 어떤 식으로도 어떤 위치를 가진 사람들은 나랑 다른 인생, 적어도 나보단 성공한 인생들이죠. 아주 잘된 사례들은 TV에 나오거나 엄친아의 경우처럼 주위 사람 건너건너에게 질투심과 열등감을 유발시켜 잘된 얘기 듣는 사람 마음 따끔해지게 만들겠죠. 아니 저 나사 빠진 놈이 대체 뭐가 나보다 낫다는 거지? 그렇지만 그건 나만의 관점이고, 냉정한 세상은 르윈 데이비스 같은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과 다시 합치라는 조언이나 하죠. 그리고 말씀드린 것처럼 아마 그게 대다수 인생일 겁니다. 안 될 놈은 안 되는 그런 불공평하고, 비참한 인생 말이죠. 그런데 그런 르윈 데이비스이기 때문에 그의 노래가 더 슬프게 들려오고, 그를 다룬 이 코엔 형제의 영화가 영화의 수많은 영웅적인 주인공들이 아닌, 현실 속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묘한 생각이 드는 것일 터입니다. 

 

 

4.

 

 

  아주 잘 만든 영화에요. 지금도 이 영화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아련해지네요. 고양이가 지하철 바깥을 보는 그 어린아이 같던 모습이 잔잔하게 남습니다. 코엔 형제는 이 고양이 배우를 다루는 게 꽤나 힘들었다고 하지만요. 고양이 대역을 세 마리 정도 썼다고 하더라고요. 매우 겁 많은 고양이 키우는 사람으로서 저는 이 세상에 저렇게 잘 안겨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도 몇 초라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고양이가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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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마틴 스콜세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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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상을 잘 못 받는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크게 안타까워 하진 않습니다. 분명 매력적인 배우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그 사람의 매력에 빠져 주연한 영화들을 일일이 다 찾아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아이언 마스크]를 보고 갑자기 정나미가 뚝 떨어져서 더 안 찾아보긴 했지만요. 어쨌든 개인적으로 이름이 알려질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이효리씨처럼 이름이 독특해서요. 이게 아마 보시는 분들 입장에선 무슨 얼토당토 않는 소리인가 싶으시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얼토당토 않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이름이 독특하면서 예쁜 사람은 그 이름 값을 하지 않나 싶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니, 너무 예술적인 이름 아닙니까. 

   마틴 스콜세지의 페르소나로 그의 작품들에 열심히 등장하면서 자기복제에 가까우면서 묘하게 반복적인 기능공 연기를 하는 그이입니다. 저는 냉정하게 말씀 드리자면, 그가 절치부심하거나 대오각성을 하지 않는 이상, 소위 '연기를 인정받는 상'을 받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연기 못한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에요. 잘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비슷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모든 배역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개인의 아우라가 사라지지 않기도 하는 감상이 들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신 쟝고에서의 악역도 저는 사실 다른 작품들에서의 그가 보여준 연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디카프리오가 옛날의 고운 얼굴이 사라지고 난 다음 거친 역할들을 많이 맡기 시작했는데, 저는 그 거친 역할들 자체가 서로 유사한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배우에 대한 제 개인적 감상이 사족으로 먼저 들어가는 이유는 이 배우가 보여준 그 비슷비슷한 연기들 속에서도 저는 이번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보여준 모습이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이유는 왜인지 잘 모르겠어요. 마약에 취해서 엉금엉금 기어 고급 차(기종이 무엇인지 모르겠네요)에 올라타려고 발악하는 모습 보며 저는 레오나르도 고생했네를 연발 외쳤거든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두번째 마누라가 그냥 건성으로 마지막 섹스를 해주는 장면에서 완전 사랑에 도취된 채 삽입하는 연기 장면이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연기를 그렇게 끔찍하게 잘 이해하며 영상에 표현하던지. 조단 벨포트 역으로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조단 벨포트의 정상과 몰락의 아주 세밀한 감정과 소회가 그의 얼굴에 분명 비쳐지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금융계에서 도덕 윤리따위는 잠시 안드로메다로 집어치우고 마약과 섹스를 일삼으며 천문학적인 부를 누리는 남성들을 다룹니다. 섹스와 마약이 정말 오질나게도 나오더군요. 남성이 중점적으로 많이 나오긴 합니다만, 굳이 언급하자면 이곳에 나오는 여성들의 모습도 쉽고 거칠게 표현하면 속물들이죠. 조단 벨포트는 자본주의의 허락 받지 못한 사이비 교주 중 하나였습니다만 그의 신도들은 교주와 큰 차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주는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부자로 사는 삶이 좋다. 부자가 싫다고 말하는 새끼들은 다 맥도날드 가서 서빙 일이나 해라. 그러므로 우리는 샤넬 옷을 입고 벤츠를 몰면 되는 겁니다.  마치 올림픽 경기를 뛰듯 연속적으로 쾌락 속을 종횡무진하며 자극과 아드레날린이 폭발적으로 분비되는 바닷 속에 침몰하듯이 말이죠. 그러나 한때 배우 김정은 씨가 찍은 화제의 광고였던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를 생각해보면, 한국이든 어디든 그러한 소비행태가 권장되는 사태는 놀랍지 않은 일이죠.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중반부터 극심한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오르가즘이든 고통을 주는 자극이든 무엇이 한계치에 도달하면 그 감각마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그 선에 도달해버린 것이죠. 이곳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절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눈을 부릅 뜨고 이 몰락을 차근차근 보았습니다. 실화라는 것을 강조하는 영화인데, 영화는 그저 영화 같습니다. 비정상적으로 예쁜 여자들과 살면서 보기도 힘든 요트들, 집들, 물건들, 파티가 나오고, 무슨 범죄 영화에서나 볼 법한 마약들이 쏟아져 나오죠. 우리가 예사로 들어본 마약들은 이 사람들 기준으로 마약 취급도 못 받는 것이고요. 이러한 삶에 젖어든 사람들에게 그 모든 삶이 멈춘다면 삶은 재미없는 무엇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조단도 친구인 도니한테 마약을 끊고, 알코올을 중단한 다음 그렇게 말하죠. 인생이 아주 재미없어졌다고요. 인생은 사실 원래 재미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돈으로 삶을 영화처럼 살아온 거죠. 

   사실 몇 달 사이에 어떤 분이 (혹시 이 글을 보실지 모르겠네요. 듀나게시판 분이라서요.) 아주 인상적인 말을 해주셨습니다. 누군가를 거짓말 하게 만드는 상황에 빠지게 해놓고 그 누군가에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말씀이셨어요. 어쩌다 나온 이야기였지만, 저는 그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깊이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말씀이 생각났어요.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바로 함정 그 자체가 아닌가 싶어서요. 부자가 되는 것이 다들 좋다고 말해서 부자가 되었다면, 그게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도덕과 윤리는 원래 승리자들한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조약에 불과한 것 아니었습니까? 조단과 친구들에게 사기꾼 말에 걸려 넘어지는 그 어리숙한 놈이 그저 문제 있는 호구입니다.

   만약 지금 당장의 저에게 조단 벨포트처럼 살 것이냐,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냐고 묻는다면 제가 당차게 나는 지금의 나 자신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제가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만약 제가 조단 벨포트의 삶을 조금이라도 맛본다면, 아마 저는 지금처럼 살 것이냐 조단 벨포트처럼 살 것이냐의 문제에서 조단 벨포트의 삶을 선택할 확률이 더 높아질 거에요. 그런데 이런 유치한 양자택일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우리에게 그러한 자극의 힘을 끝없이 제공하며 유혹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도처에 놓여 있습니다. 자본은 우리에게 변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며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으며 안온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죠. 나와 내 가족, 내 친구들'만' 잘 살면 됩니다. 다른 사람까지 구조해 줄 정도로 배가 넓지 못하기 때문이죠. 아니, 애초에 그 사람들을 쫓아내야 배에 자리가 나는 구조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조단 벨포트가 과연 '죄인'이냐는 문제에 있어 쉽게 입을 뗄 수 없습니다. 물론 법적으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가치라고 불리는 윤리적 기준에서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저 평범한 저란 인간, 영화의 마지막, 부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저 자신을 봅니다. 그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 부추기는 사회, 이 안에서 살아가는 한 조단 벨포트의 삶이 언제 내 삶이 될지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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