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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a Logical Point of View: Nine Logico-Philosophical Essays, Second Revised Edition (Paperback, 2, Revised)
Willard Van Orman Quine / Harvard Univ Pr / 198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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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가 2020년 UCB 봄학기에 가서 선생과 함께 읽은 것들에 대한 짧은 리뷰 글을 영어로 썼던 글을 다시 내가 한글로 번역한 글이다. 한글로 번역할 때 그 뜻을 쉽게 알아먹기 위해 조금 다듬었다.  읽기 자료들의 주제는 후기 분석철학 Post-analytic Philosophy이였다. 


 

            우리가 경험을 하기 전에 아 프리오리적 지식 (선험지식이라 하겠다) 이란 것들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이번 주의 읽기 자료들을 관통한다. 콰인의 경우 그는 분석명제와 종합명제 사이를 흐트리고 환원주의의 단점을 지적함으로써 선험지식의 가능성을 비판하였다. 그의 목적은 두 가지의 독단이 없는 실용주의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콰인, 20) 하지만 나는 수학처럼 난공불략으로 여겨지는 지식들이 엄연히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순전한 분석명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콰인이 수정에서 자유로운 진술은 없다고 주장할 때 (콰인, 43) 나는 우리가 보기에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학적 지식을 수정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글에는 없는 것이지만 글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예를 들자면, 1+1=2 이라는 수학적 지식을 수정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퓨트넘이 콰인을 반박하는 부분은 나의 질문과 맥을 같이 하는데 퓨트넘은 선험지식이 존재함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퓨트넘은 수학조차 수정 가능하다는 콰인의 주장을 요약한 (퓨트넘, 432) 다음, 만약 누군가가 모든 진술은 사실이면서 동시에 거짓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선험지식이라고 주장하는데 (퓨트넘, 435) 그는 이것을 Absolutely Inconsistent Rule (A.I.R) 완벽히 모순된 규칙이라고 부른다. 즉, 퓨트넘은 그 누구도 모든 진술이 참이면서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누군가가 이 세상의 모든 진술은 참이면서 거짓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분명 잘못된 말이고 경험할 필요도 없이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이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퓨트넘의 진술에서 찾은 문제는 이성이라는 개념 그 자체에 관한 것인데, 이 이성이라는 것은 완벽히 모순된 규칙을 선험적으로 부정하도록 만드는 무엇이다. (우리가 이성을 이용해 생각해보면 완벽히 모순된 규칙은 완벽히 모순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퓨트넘을 직접적으로 인용하자면, 그는 “온전히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완벽히 모순된 규칙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고, 지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퓨트넘, 438) 그의 말이 맞다면, 이 온전히 이성적인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만약 이 온전히 이성적인 사람이 어떤 것은 받아들일 만하고, 어떤 것은 받아들일 만하지 않다고 지각 있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게임 이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언어라는 것이 “규칙에 의해 주재되는 행동양식의 공간 (오닐, 14)” 안에서 배워지는 자의적인 문법의 총체라면, 이것이야말로 퓨트넘이 설명하는 이성이라는 말인가? 이런 경우에라면 이성이라는 개념은 선험지식이라기보다는 무엇이 이성적이고 아닌지를 말해줄 수 있는 언어규칙에 불과하지 않느냐 이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선험지식이 존재하느냐 아니냐라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미궁에 있다.

 

Reference:

O'Neill, M. (2001). Explaining 'the hardness of the logical must': Wittgenstein on grammar, arbitrariness and logical necessity.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24(1), 1-29.

Putnam, H. (1979). Analyticity and Apriority: Beyond Wittgenstein and Quine. Midwest Studies In Philosophy, 4(1), 423-441.

Quine, W. (1980).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9 logico-philosophical essays (2d ed., rev. ed.).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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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써놓았던 글이 워낙 마음에 안 들어서 한글로 많이 고쳤다. 특히 나는 도입부 글을 재미있게 시작하는 재능은 영 없는 것 같다. 아이디어 자체는 좋은데 문법이 너무 비정확해서 영어글은 참 문제가 많았다.


또한 내가 해석한 대로 본문들을 읽어냈기 때문에 어쩌면 나의 오역이 벤야민, 홉스, 데리다의 글들과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내 스승 말대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언제나 일정 확률로 오역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 안에서 바르게 자기 주관을 다시 세우는 것만큼 또한 중한 자세가 없을 거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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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 권위체가 쓴 가면을 두 손으로 벗기다; 발터 벤야민의 총파업 general strike 개념과 자크 데리다의 해체 deconstruction 개념을 홉스 비판에 근거하여 따져봄

 

         나는 이 글에서 권위체의 적법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권위체 authority (권위체의 정의를 위키피디아에서 치면, Authority is the legitimate power which one person or group possesses and practices over another라고 나온다. 이것을 해석하면, 권위체란 한 사람이나 혹은 그룹이 타인에게 행사하거나 점유하는 식의 적법한 권력이라는 뜻이다. 즉, 나는 이 권위체를 적법성을 주장하며 타인에게 규칙을 지킬 것을 행사하는 정치적 집단 혹은 기관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시작점에서부터 밝히고자 한다)는 법과 규칙을 제정하는 로고스의 힘으로 적법함을 기반에 쌓아올린 이후 정의를 사수한다. 이 매커니즘은 법 없이는 커먼웰스의 부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토마스 홉스의 논리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식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특히 무엇이 먼저 어떻게 나타났는지의 순서를 설명에서 뒤집어 놓음으로써 권위체를 정당화하는 방식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가장 큰 요지 중 하나는, 홉스와는 정반대로, 부정의는 권위체의 기반인 법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커먼웰스에게 가장 먼저 존재하는 정의/부정의를 따지고 사수할 필요성에 대한 그 강렬한 감정, 그리고 그 감정에 따른 요구를 반영할 수 있도록 권위체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합의를 내렸다고 본다. 그렇지만 권위체는 법을 제정하고 나서부터 사람들에게 법을 따르라고 강요한다. 권위체에게 힘이 실린 이후부터는 권위체가 직접 무엇이 법이며 무엇이 불법인지를 정하는 프로토콜 양식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가치전도 현상 발생이라고 간주하며, 이 중요한 우선순위가 바뀌는 부분을 잘 포착해 낸 것이 발터 벤야민의 총파업과 자크 데리다의 해체 개념이라고 본다. 벤야민의 경우에는 권위체에게 쏠린 강한 권능이 그가 일전에 신화적 폭력 mythic violence라고 이야기한 시스템적 힘으로 변모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 지점에서 벤야민의 총파업은 신화적 폭력을 무효화함으로써 폭력적인 것을 폭력적이지 않게 돌리는 비폭력적인 개념으로 등극한다. 비슷하게, 데리다의 해체 개념 역시 원초적인 정의가 로고스(적법성을 부여하는 절차를 생성시키는 원리이며 데리다가 언어에서 문법과 같은 규칙이라고 보는 힘)가 법 이전에 존재한다는 점을 까발린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데리다는 정의란 법칙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말하며 이것은 사과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가 가리키는 사과와 사실은 아무런 상관도 없이 묶여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다.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몇몇 중요한 단어들부터 정리하고자 한다. 일단 여기서 말하는 폭력의 개념부터 정리해놓자. 나는 폭력을 독일어인 ‘Gewalt’로 바라보는 데리다의 지적을 따르려 한다. 이 ‘Gewalt’는 영어로 폭력이라고 번역되는데 물리적 폭력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적법한 권력, 권위, 공권력”을 이야기한다 (데리다, 6). 이러한 관점에서 폭력의 의미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물리적 폭력보다는 더 넓은 개념으로 권위가 타인에게 강압적으로 행사하는 것 역시 단어의 의미에 포괄된다. 내가 이 글에서 중요하게 바라보는 홉스, 벤야민, 데리다 이 셋은 모두 권위체의 적법한 권력  행사 중 하나인 법 제정의 문제에 치중하고, 이것은 공권력의 폭력적 행사에 대해 반추하게 만든다. 홉스의 경우에 그는 리바이어던이라는 이름을 법 제정을 위해 필요한 총체적 권력에 붙어주었으며 리바이어던의 권력 행사가 적법함을 주장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벤야민의 경우에는 그러한 법 제정의 폭력성을, 데리다는 법칙으로서 작용하는 언어 권력의 허구성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이야기들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들 모두 법과 규칙이라는 이름의 적법성이 자의적 기준을 정하여 분별의식을 창출하고, 무엇이 적법인지 아닌지의 기준을 결정하는 권위체의 강대한 권력을 따져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권위체는 왜 이러한 종류의 정당화된 권력이 필요한가? 왜 그들은 로고스, 언어,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법칙을 필요로 하는가? 나는 맨 먼저 홉스식의 정의 개념부터 보겠다. 토마스 홉스는 “공통된 힘이 없는 곳에는 법칙도 없다. 법칙이 없는 곳에는 부정의란 개념도 없다” (홉스, 181)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커먼웰스를 조직하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 개별 상위에 존재하여 개별들을 묶어내는 권위체를 통해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를 따질 때 정의 개념을 사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나 다름없다. 공통된 힘이 없이는 정의 개념을 사수할 수 없다는 말의 의미는, 커먼웰스의 조직 없이는 우리에게 부정의한 것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막을 힘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부정의라고 말해줄 커먼웰스가 없어서 모든 행위들이 다 정의롭고 비문제적인 것으로 여겨질 때, 사람들은 무엇이 부정의인지를 말해줄 권위체를 찾아야만 부정의를 심판할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과연 권위체 없이는 부정의도 없는가? 법의 집행만이 부정의의 존재를 보장하고 부정의를 심판하는가? 홉스가 주장하는 것의 옳음을 따지기 위해 커먼웰스가 탄생하는 기원을 상정해보자. 사람들은 그들을 보호할 수단이 없는 폭력적인 상황들 때문에 겁에 질려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힘을 모아 집단적인 힘을 창조한다. 이 순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보존을 선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홉스, 182) 다른 말로 사람들은 상실의 두려움이 있어서 공통적인 힘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의 범위는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그 상실의 공포 중 하나가 바로 부정의와도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합당한 이유없이 잃었을 때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은 사람들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서 무엇인가를 상실한 경우와는 다르다. 부정의하다는 감정은 우리가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로 일들을 막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정의란 것은 우리가 당연하고, 정당하고, 받아들일 만하다고 느낄 때 발생하며 부정의는 당연하지 않고, 정당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길 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류가 부정의와 같은 상실을 피하고 정의를 사수하기 위해 집단적 힘을 건설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렇게 홉스식의 기원을 따져봐도 발견되는 사실은 권위체 없이도 부정의는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는 권위체가 있어야만 처벌할 부정의가 존재한다는 홉스의 생각과 분명 다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부정의는 객관적 진실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심리의 문제이며 감정의 문제이다. 우리는 논리적 이성으로 이것을 설명할 수 없다. 가슴 안의 불꽃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부정의를 해결하고 정의를 지키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이란 사회적 연대를 위해 기반으로 작용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로고스를 이용할 때처럼 이론으로 잘 다듬을 수는 없을지 몰라도 자기보존을 위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실용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순서를 왜곡할 때 나타난다. 내가 앞서 밝힌 것처럼 집단적 권력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보존의 필요성을 느끼고 부정의를 수정하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와 같은 사람들은 집단적 권력이 정의와 부정의 사이의 구별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벤야민의 폭력에 대한 비판은 홉스와 같은 사람들이 이 순서를 전도시키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법 제정은 폭력의 즉각적 현현이 가능할 정도의 권력을 상정한다. 정의란 모든 신성한 목적을 창출하는 길의 법칙이며 모든 신화적 폭력의 기초로 작동하는 힘” (벤야민, 248)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정의 개념을 신화적 폭력의 힘으로 착취하는 권위체를 비판한다. 벤야민이 니오베를 예시로 드는 것에서처럼 권위체의 힘은 자기 존재를 과시하며 이는 정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이제 사람들은 피하고자 하는 상실의 두려움과는 별개로 권위체의 권위를 무서워하며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벤야민이 여기서 신화적 폭력mythic violence과 신성한 폭력divine violence을 구분하는 지점이 중요한 이유는 권위체가 적법성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온 왜곡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신화적 폭력으로 규정하는 권위체의 힘이란 자연적이지 못하다. 신성한 폭력은 정반대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위해 온 삶에 걸쳐 존재하는 순수한 힘”이다 (벤야민, 250). 이 힘은 너무나 거대하여 사람들이 감히 정의를 따지지 못한다. 이는 비인간적 영역에 속하여 우리로 하여금 신성한 폭력을 굳이 눈으로 확인할 필요 없게끔 만든다. 왜냐, 이 힘은 우리가 뒤집을 방법따위 없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적 폭력은 눈으로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권위에 도전한 니오베가 얼마나 처참하게 당하는 것과 같이 피가 난자한 모습을 보여야만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경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 재해가 신성한 폭력의 예시인 반면 반역은 신화적 폭력의 대표적인 양상이다. 자연 재해의 경우 누구도 비극을 막지 못하고 그들이 땅에 흘린 피는 곧 비에 휩쓸려 사라진다. 사람들은 피할 수 없었던 비극을 받아들인다. 자연은 자신이 죽인 자들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그들의 삶을 거둔다. 그렇지만 신화적 폭력은 반역자들의 머리를 요구하며 그 머리들을 최대한 높이 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그들의 피는 기억되어야 한다. 신화적 폭력은 그들을 희생시키며 어떠한 자비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벤야민이 “첫번째 (신화적 폭력) 경우는 희생한다; 두번째(신성한 폭력) 경우는 받아들인다” (벤야민, 250)라고 이야기한 것과 상통한다.


         발터 벤야민의 총파업이 의미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이 개념이 신화적 폭력을 무너뜨리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신화적 폭력의 비정상적 힘이 권위가 형성된 기초 순서를 뒤집음으로써 사람들을 속이고, 사람들을 지키려는 노력 없이 그들의 피를 희생시키는 것이라면, 이는 기존의 존재이유를 상실한 것이기에 그 모순이 드러남으로써 파괴되어야 한다. 벤야민은 총파업이 일시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이야기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총파업은 지배질서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총파업은 “국가 권력을 전적으로 파괴” (벤야민, 246)하는, 권위에 대항하는 중점적 저항이 되어야 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총파업이 비폭력적이라는 설명이다. 총파업이라는 말 자체가 듣기에도 꽤나 파격적이기 때문에 비폭력적이라는 것은 일견 납득하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총파업은 권위체가 힘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결과인 폭력의 신화적인 행위들을 뒤집고 무효화시킨다는 점에서 비폭력적이다. 총파업은 권위체의 손 안에 들어가 있는 축적된 폭력의 발생들을 지운다. 폭력을 지운다는 관점에서 총파업은 비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총파업이 신성한 폭력의 다른 형태이면서 동시에 신이 아닌 인간의 손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라는 지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신성한 폭력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것을 한 번에 받아들이고 무화시키는 거대한 힘이며 총파업은 신화적 폭력의 영향력을 0으로 무효화시키지만 사람들의 손에 이루어지는 큰 힘이기도 하다. 이 아나키스트적 혁명은 모든 신화적 폭력을 없앨 것을 꿈꾸며 법제정의 근원으로 작동하는 모든 종류의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에 이별을 선고한다. (벤야민, 246)


         이제 데리다가 어떻게 자기 식대로 정의와 법의 관계를 바라봤는지 살펴보겠다. 그의 철학이 프랑스인으로서 영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의 관점이라는 점을 인식하면 그 난해한 텍스트도 일견 이해가 될 법 하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언어의 제한을 매일 겪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능력이 남들보다 더 큰 편일지 모른다. 그의 핵심 주장은 곧 언어라는 것은 관철되어야 하기 때문에 강압적이란 것이다. 언어는 올바른 방식으로 구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영향력도 가지지 못한다. 그가 영어를 바르게 구사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영어를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데리다, 4) 만약 누군가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자 한다면 필수로 해야 하는 일은 언어의 법칙을 이해하고 배우는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 언어의 법칙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규칙을 준수하고, 잘 쓸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면, 외국어를 쓰는 사람이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인데, 모국어를 쓰는 사람은 그들이 사용해 온 모국어라는 언어가 그들이 새롭게 배워야 하는 두 번째 언어만큼 가상적이며 기능적이었다는 것도 성찰할 수 있다. 우리가 두번째 언어를 배울 때 깨닫는 것은 새로운 언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한마디로 규칙들을 외우고 익숙해져야만 그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 때 우리가 제2외국어가 아닌 모국어를 배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조금만 돌이켜보면 모국어를 배우는 것도 사실은 두번째 언어를 배우는 것과 원리적으로 같은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어릴 때라서, 모국어도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일종의 강요를 받으며 익혔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만약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면 우리가 해당 공동체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고, 존재할 수 있다고 치손 언어 구사력이 좋지 않으면 발생하는 불이익에 대해서는 내가 굳이 여기에서 지면을 할애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언어 학습의 이야기가 법칙과 정의 사이의 차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몽테뉴를 인용하는 것을 참고하면, 언어와 같은 법칙에 기대는 것은 적법한 픽션 (환상) 없이는 정의(혹은 옳음)를 사수하기 위해 작동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데리다, 12) 이는 내가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부정의와 권위체의 순서 오류라는 이야기와 맥락이 상통한다. 나는 앞에서 부정의가 권위체 이전부터 존재하였고 그 부정의의 존재 때문에 권위체가 성립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그대로 언어에 대입시켜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비유할 수 있다.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 무슨 말을 하기 이전에 마음 속에 어떤 이미지 혹은 감정 혹은 느끼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미지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그 이미지는 우리가 써야 하는 표현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사과란 말이 빨갛고 둥그런 그 과일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저 그 빨깧고 둥그런 과일을 나타내는 지표에 불과하다. 단지 우리는 법칙을 깔아줌으로써 그 두 가지를 연결시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언어의 법칙을 준수함으로써 의미를 완벽히 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데리다가 설명한 적법한 픽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 안에서 법칙이 제대로 사용될 때만 언어들이 온전히 전달될 수 있다는 사람들의 환상 말이다. 하지만 언어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권위체와 권위체의 법칙이 그러하듯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데리다가 법칙은 해체가능(데리다, 14) 하지만 부정의는 해체가 불가능하다고 (데리다, 15)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정의는 근본적인 요소이며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무엇이다. 감정 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법칙은 그렇지 않다. 법칙 이전에는 그 법칙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존재한다. 그 마음이 있고나서야 사람들이 법칙을 제정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며, 그 필요성이 합의로 도출된 다음에야 강제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권위체의 강제성이란 사람들의 요구에 의존적인 것이지 그 자체로 근원적인 것이기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해체가 권리의 해체가능성 (권위, 적법함 같은)으로부터 정의의 비해체가능성을 구분하는 간격 사이에 발생하는” (데리다, 15) 이유이다. 해체는 권위체 이전에 존재하는 생생한 그 감정이 생겨난 그 다음에 권리가 제정했음을 보이기 위해 그 둘 사이에 껴서 권리 사이에 숨겨진 근원적 감정으로서의 정의를 발굴해낸다는 점에서 바로 정의롭고, 벤야민의 총파업과 같이 비폭력적이라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권위체에 수반되는 강력한 집행력이야말로 정의를 사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권위체가 관리하는 법칙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분별을 만들어내며 부정의를 처벌한다. 이는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권위체가 정의의 이름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법칙을 행사하고 생산해내고 있다고 지적하는 바이다. 이는 우리가 정의/부정의가 권위체의 기원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권위체는 정의보다 먼저 올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의/부정의의 감정을 사수하기 위해 집합적인 권력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법칙과 권위체란 우리로 하여금 자기보존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에 불과하며 정의/부정의의 사수를 요구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로고스는 가장 근본적이며 비해체적인 정의의 감정을 포착할 수 없고, 오로지 이것의 실현을 도울 뿐이다. 그러나 현재 권위체의 권력은 신화적 폭력으로만 작동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가리는 기준을 생산해내는 그 자체로 강대한 힘으로 변모했다. 그리하여 자기에게 도전하는 이들은 가차없이 희생시켜 자신의 원래 목적인 사람들의 목숨을 보존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벤야민과 데리다의 개념을 사용해서 보면 이렇게 비대해진 권위체를 해체하고 총파업으로써 공격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비폭력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정의로운 것인데 왜냐하면 이 둘이야말로 권위체의 가식적인 가면이 적법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한 질서를 왜곡하면서 신화적 폭력을 자행하는 것을 알고 그 가면을 찢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권위체의 가면 뒤에는 그 어떤 얼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여백은 우리가 항상 우리 위에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우리를 우리보다 더 큰 힘으로 짓누르고 있다고 믿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라 믿기 힘들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가면이 찢겨지고 나면 우리는 감정 하나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위한 권위체를 만들어냈지 이것에 의해 조종당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는 당혹감 말이다.


Reference:

Benjamin, Walter, Critique of Violence (The version uploaded on Ilearn)

Hobbes, Thomas. 2009. Leviathan: 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l. Floating Press. 

Derrida, Jacques. 1992. 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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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아래 글에 대한 정보를 우선 밝히겠다. 


(1) 저번 신자유주의 수업에서 교수님이 내주신 양식에 따라 제출한 기말 시험 답안지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세 권 중 내가 선택한 두 권은 다음과 같다. 본론에 쓰이는 인용문은 바로 다음 두 텍스트에서 나오는 인용들임을 밝힌다.

 

(ㄱ) Introduction by Plehwe from The Road from Mont Pelerin: The Making of the Neoliberal Thought Collective

(정확한 인용은) Mirowski, P., & Plehwe, D. (2009). The making of the neoliberal thought collective.













 

책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로부터의 길, 신자유주의 집단 사고 형성 과정에 대하여”에서 나오는 플류의 서문  

 

[노트] 음 우선 저자의 이름을 플류? 무엇이라고 읽을까… 선생님은 플류라고 읽었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 그리고 thought collective가 신자유주의적 집단 사고 ..? 음 나는 사실 집단 지성 이런 느낌이 들었는데 다시 보니 아닌 것 같아서 이렇게 바꿨다. 확실히 본문 내용은 (오스트리아-미국 신자유주의들이 어떻게 자기 패거리의 세를 불렸는지에 대한 내용이라서…)

 

2.     Dardot and Laval’s The New Way of the World: On Neo-Liberal Society

(정확한 인용은 )Dardot, P., Laval, C., & Elliot, G. (2014). The new way of the world: On neoliberal society.















(ㄴ)     다르도와 라발의 책 “세계의 새로운 질서: 신자유주의 사회에 대하여”

 

[노트] 이 책 진짜 좋다. 꼭 필히 번역되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2) 이 수업은 할배교수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할배교수는 좀 심하게 과장해서 말하면 진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선생님 급일 정도로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특히 그 진가가 빛난 게 이 기말 시험인데, 보다시피 위의 두 책들은 이론서이기 때문에 비교가 쉽지 않다. 일반적 경우라면 그냥 각자 책에 대해 대략의 큰 주장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어떤 것이 더 우월한지 근거를 대라 정도일 텐데, 할배교수는 진짜 짬밥 장난 아니신지라 그 전개 양식부터 정말 논리적으로, 학생이 이론서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체크될 수 있는 답을 쓸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각 내용에 대한 이해가 100프로 선행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시험지 양식을 제공하였다. 그 양식은 다음과 같다.

--

(ㄱ) A와 B에 나오는 결론을 쓰시오. 그리고 그 결론의 증거들을 찾아 쓰시오.

(ㄴ) 둘 중에 더 합당한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고르시오. 그 이유를 설명하시오.

(ㄷ) (그리고 여기서부터 정말 소위 쩌는데) 만약 당신이 A를 골랐다고 친다면,  A의 약점/혹은 B의 강점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진술하시오.   

(ㄹ)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생각하기에 A가 더 나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약점을 상쇄할 만한 강점은 무엇이었는가를 설명하라는 뜻)

--

보다시피 텍스트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절대 쓸 수 없는 답지들이고, 내가 봤던 모든 서술식 평가문항 중 가장 이론적으로 완벽하다.

 

(3) 만약 내가 저번 학기에 썼던 답지들 중 가장 만족할 만한 글이라면 주저없이 나는 이 글을 꼽는다. 왜냐하면 이 답지들은 보다시피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그만큼 완벽한 만점을 뽑아낼 수 있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ㄱ) 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만점을 받았는데, (ㄱ) 부분 같은 경우도 결론과 그 결론의 증거들 중에서 둘이 중첩적으로 이루어진 탓에 내가 결론의 증거들에 일부러 몰빵했기 때문에 몇 점이 깎였을 뿐, 하자는 없었다. (나는 답이 중첩적으로 이루어지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기 떄문에 의도적으로 이렇게 썼다) 즉, 나는 이 질문지를 봤을 때 교수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해 썼고 텍스트에 나오는 말들을 적절히 인용하여 내가 해당 질문지에 맞는 답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할배 교수도 이 답안지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다음과 같은 부분/전체 코멘트를 달아주었다. “Exellent answer; well-written, thoughtful, creative, and excellent”, “This was a superb exam, showing mastery of understanding of both readings.”

 

(4) 내가 위의 같은 교수 코멘트를 단 이유는 자랑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건 소소하고, 전체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 이 글의 이 책들에 대한 정확도가 적어도 아주 그릇되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담보하기 위함이다. 내가 이 글을 번역해 쓰는 가장 큰 목적은 위의 이 두 책들과 그에 대한 내 분석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신자유주의 책과 그 내용에 관련해 미국/유럽(내가 넣진 않았지만 나머지 하나는 미국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의 책이었다.) 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담론의 일부를 공유하기 위함을 밝힌다. 내용 적인 측면에서 나는 현재 신자유주의를 아나키즘 이론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석사논문으로 쓰려고 하는 사람인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고, 이 두 개의 책 특히 다르도와 라발의 책은 내게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밝히는 바이다. 두 번째 목적은 교수가 교사로서 제출한 시험지 양식의 뛰어남이 공유되어 많은 서술형 문제지를 작성하는 교사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그리고 글쓰는 학생들은 이에 어떻게 답을 해야하는지의 하나의 예시를 보이기 위해서이다. (특히 한글과 영어 공용으로) 내가 백프로 잘 쓰지 않았고 이상하게 쓴 부분도 있지만, 이 글은 다른 내 영어 글보다 꽤나 정확하게 쓰여진 글이다. 인용도 많았고. (….)

 

본론

질문항은 교수의 질문지. 답은 내 답지.

 

A.   The Main Conclusions of the Works

A.    저작들의 주요 결론을 말하시오.

 

(a)   몽페를린~ 관련

Plehwe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에서 매우 중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세계적이고, 다채롭고, 그만큼 모호한 성격을 사학적 관찰로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 현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자유주의는 같은 목적 하에 모인 수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사전에 충분히 준비되어 장기적으로 진행되어온 프로젝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사람들과 조직들 간의 중요한 네트워크들 뿐 아니라 헤게모니 차지를 향한 신자유주의의 부상을 위해 꼭 필요한 지식 영역, 사회적 지위를 갖춘 모임들, 국경, 그리고 문화를 가로질러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 채널들” (3쪽)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지 않고서 신자유주의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점이 바로 그가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이유이다.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는 오랜 기간 신자유주의를 형성시켜온 매우 중요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a)   Introduction by Dieter Plehwe from The Road from Mont Pelerin

: The main conclusion of Plehwe is that since neoliberalism has been considerably influential all over the world, we need to examine its cosmopolitan, diverse, and obscure characteristics through historical observations. Above all, if we examine it attentively, we can find out that neoliberalism is a well premeditated, long-term project by various intellectuals, who share the same goal.

According to Plehwe, it is impossible to understand neoliberalism thoroughly without knowing the fact that there have been “crucial networks of people and organizations as well as channels of communication cutting across knowledge domains, social status groups, borders, and cultures that were crucial to the rise of neoliberalism to hegemony” (3). That is one of the main reasons why he primarily deals with Mont Pèlerin society; it is a crucial organization which has shaped neoliberalism for a long time.

 

(b)  다르도와 라발의 책에 관련해

다르도와 라발은 개인과 국가가 정치 이슈가 아닌 경제적 요소들에 집중해온 이래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약화시켜왔다고 결론짓는다. 저자들은 신자유주의 사회를 비민주적인 사회로 규정하며 국가와 개인 차원에서의 두 가지의 방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첫번째는, 사람들이 국가 차원에서 자치적인 통치성(governmentality)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상황에서 파생되어선 안 되고 완전히 새로운 상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들은 정부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하지, 사람들을 통제하면 안 된다고 보는 시각을 견지한다. 두번째로, 그들은 주체화의 실천으로 ‘받아치는 행동(counter-conduct)’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개인 사업 모델을 따르는 현재 주체화 양식의 대안” (316쪽)으로, 개인의 수준에서 저항하는 양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이 두 가지의 방안은 사회적 조건과 인간 행동의 일반 준거 양식이라는 두 방향에서 모두 기능하는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모색한다.

 

(b)   Dardot and Laval’s The New Way of the World: On Neo-Liberal Society

: Dardot and Laval conclude that neoliberalism undermines democracy since individuals and states have prioritized economic factors, not political issues anymore. The authors define the neoliberal society as anti-democratic and suggest two solutions according to the level of state and subject. First, people need to invent autonomous governmentality on the state level, which should be invented not from current contexts but novel imaginations. They argue that government should be for people, not controlling them. Second, they suggest ‘counter-conducts’ as practices of subjectivation. It should be “the present alternative forms of subjectivation to the model of personal enterprise (316)”, which would be a recalcitrant way on the subject level. Both suggestions aim for escaping neoliberal rationality, which has become a general standard for social condition and human behavior.

 

B.    Supporting Evidences for A

A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제시하시오.

 

(a)  몽페를린~ 관련

Plehwe는 1947년 이래로 중대한 신자유주의 조직 중 하나로 자리해온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를 깊이 파고든다. 그에 의하면 왜 그렇게나 다양한 신자유주의자들이 한곳에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두 가지 관심사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고립되었다고 느꼈다. … 두번째는, 하이에크와 다른 이들은 고전자유주의가 이론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뜻이 맞는 지성인 모임에서 집중적인 토론을 통해서라 보았다.” (16쪽) 몽페를린 소사이어티가 시작될 즈음 신자유주의자들은 정책 행정에 사회적 계획을 적용하는 지식인들(케인스 학파)에게 수적으로 불리했다. (16쪽) 신자유주의자들이 여러 모로 불리했고, 전체주의와 같은 사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몇 십 년에 걸친 신자유주의적 지성인들을 키워내는 장기적 전략을 계발하기로 동의했다.” (15쪽)

이러한 맥락에서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는 신자유주의가 매우 오랜 기간 형성되어온 집단적 사고의 의도적 결과물이라는 증거물로 존재한다. 이 조직은 매우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싱크탱크였는데 “초학문적이고 … 학제간으 넘나들며… 초학문적이라 설명될 수 있는 집단의 노력”(5쪽)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국적과 학문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의 발전을 위해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로 모여들었다. 저자는 몽페를린 소사이어티 지도자들의 자세한 명단, (19쪽) 간략한 역사와 만남 장소들 (17)쪽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 조직이 초국가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보인다. 하지만 몽페를린 소사이어티가 다양한 구성원을 자랑했음에도 그들이 몽페를린 소사이어티 안에서 같은 목적을 공유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집단응집성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적 사고 집단을 이끄는 구성원들의 국제적 명망은 싱크탱크와 다른 조직들을 확장하고 설립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금 형성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6쪽). 한마디로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는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신자유주의를 전파시키는 데 성공한 지식인들의 중요한 사례 중 하나이다.

 

: Plehwe delves into the Mont Pèlerin Society, which has been one of the crucial neoliberal organizations since 1947. According to him, the reason why such diverse neoliberalists gathered in the same place is that they shared two considerations: “First, the (neo)liberals felt isolated … Second, Hayek and others believed that classical liberalism had failed because of crippling conceptual flaws and that the only way to diagnose and rectify them was to withdraw into an intensive discussion group of similarly minded intellectuals” (16). At that time around when MPS begins, neoliberalists were outnumbered by the others who apply social plans to policymaking (16). Since neoliberalists were aware of the disadvantaged conditions, and willing to stand against ideologies such as totalitarianism, they “agreed on the need to develop long-term strategies projected over a horizon of several decades, possibly to involve several generations of neoliberal intellectuals” (15).

MPS, in the context, is an evidence to prove that neoliberalism has been a deliberate outcome of collective thought for a long time. It was a think tank full of diversity because there was “the collective effort (which) can be described as transdisciplinary, … interdisciplinary, … and transacademic” (5). People from a variety of nationalities and professional fields co-operated for the development of neoliberalism within MPS. Plehwe shows readers the detailed list of MPS leaders (19), its brief history and several meeting locations (17), which implies it has been transnational and cosmopolitan. Even though MPS has various members, however, they share the goal in the statement of aims of the MPS. Based on its cohesiveness, “the international reputation of leading members of the neoliberal thought collective has worked wonders in local fund-raising efforts to establish or expand think tanks and other organizations” (6). In short, MPS is a great example of intellectuals who share the same goal and succeed to empower neoliberalism.

 

(b)  다르도와 라발의 책에 관련해

다르도와 라발은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약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를 가능하게 한 신자유주의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신자유주의는 “구성주의적 사업”이다. 두 번째, 시장질서는 경쟁을 기초로 한다. 세번째, 국가는 경쟁을 위한 수호자로 기능하고 있다. 네번째, 사람들이 인간 자본 혹은 사업체들로 취급받고 있다. (301, 302쪽)

경쟁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규범이 된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경쟁 속에서 다른 이들을 제치고 승자가 되는 것에 실패하였다. 신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이들은 성공적인 인간 자본이 아니기에 사회는 이러한 “패자”들을 돌볼 책임을 지니지 않는다. 이러한 논리는 패자들이 보호받을 수 없는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한다. 그렇기에 “신자유주의는 ‘부차적 시민(sub-citizens;일반 시민보다 그 권리가 덜 적용되는 것을 뜻함)과 ‘비시민(non-citiznes)’이라는 사회적 배제 구조를 강화한다.” (304쪽)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치적 자유를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인 개인적 자유 (다른 말로, ‘사유재산)’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306쪽)

다르도와 라발의 결론은 우리가 경제적 요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에 맞설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형식의 통치성과 주체를 만들기 위해 푸코의 이론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푸코에게서 여러 표현을 빌린다. 대안으로서의 통치성을 “발명” (312쪽)해야 한다는 표현은 기존의 좌파이론이나 사회주의로부터 만들어질 수 없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저자들은 책에서 제3의 길이나 블레어주의 같은 좌파이론의 실패를 설명한다. 그들은 “지배적 합리성에 노골적 종속을 주장한” (183쪽) 신자유주의 좌파였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저자들은 “통치는 정확히 ‘배치’”이며, 이때 “배치는 사람에 반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개념” (132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푸코에 기반해 정부에 관한 의견을 개진한다. 다른 말로, 정부란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지 통제하거나 조종해선 안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들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주권을 형성할 자주적 통치성을 개발하고자 한다.

다른 해결책인 ‘받아치는 행동’이란 주체화의 훈련양식이다. 이는 주체적 수준에서의 조치이며 마찬가지로 푸코의 개념에서 비롯한다.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인간이 인간 자본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저자들은 ‘받아치는 행동’과 같이 저항할 수 있는 윤리적 방법을 제안한다. 이것은 “비행(잘못된 행동)”과는 다른데, 비행은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받아치는 행동’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행동에서 자유롭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타인에게 자신들의 행동이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319쪽) 하는 적극적인 행동양식이다. 즉, ‘받아치는 행동’은 주체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다.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거부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들을 인간 자본으로 포획하려는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다.

 

(b)  Dardot and Laval’s The New Way of the World: On Neo-Liberal Society

: The authors claim that neoliberalism undermines democracy, based on its characteristics as follows: First, neoliberalism is a “’constructivist project’”; second, the market order has a basis on competition; third, the state functions as a guardian for competition; and, fourth, people are treated as human capital or enterprises (301, 302).

Since a competition has become a norm of neoliberal society, there are many people who fail to outrival others in the competition. According to neoliberalism, they are not successful human capital, and society does not have responsibilities to take care of those ‘losers.’ This logic brings about the social inequality in which losers cannot be protected. Therefore, “it strengthens social logics of exclusion that manufacture a growing number of ‘sub-citizens’ and ‘non-citizens’” (304). In the circumstances, people do not pay attention to political liberty since there is only “individual liberty, understood as a faculty left to individuals to create a protected domain for themselves (their ‘property’)” (306)

Dardot and Laval’s conclusion is that we need an alternative to the current neoliberal governmentality, which too much focuses only on economic factors. They rely on Foucault’s theory to make solutions in the new form of governmentality and subject. As they borrow the expressions from Foucault, the alternative governmentality should be “invented” (312) since it cannot be found from existing socialism or left theories. (The authors criticize the left theories’ failures in their book, such as ‘the third way’ or ‘Blairism’. They were neo-liberal left “suggesting outright submission to the dominant rationality” (183), not solving underlying problem of neoliberalism) They examine the idea of government based on Foucault, who argue “governing precisely consists in ‘disposing things’” and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by ‘things’ is meant not things as opposed to people” (132). In other words, the government should help people, not control nor manipulate them. In this context, the authors seek a way to invent the autonomous governmentality in which people could be its direct sovereign.

The other solution, ‘counter-conducts,’ is practices of subjectivation. It is a treatment on the subject level, relying on Foucault’s concept. Since human in neoliberal society has become a human capital, they propose an ethical method to be resistant with ‘counter-conduct.’ It is different from ‘misconduct,’ which implies the passivity. ‘Counter-conduct’ is an active movement in which “people seek both to escape conduction by others and to define a way of conducting themselves towards others” (319). In other words, ‘counter-conduct’ is to disobey neoliberal order on the subject level. By denying neoliberal order, people can escape from the attempt of neoliberalism, which tries to make them human capital.


C.    Which work offers the most sound or superior conclusion?

둘 중의 하나를 고른다면, 어떤 텍스트가 더 설득력 있는가?

 

나는 다르도와 라발의 책을 골랐다.

 

 

D.   What reasons can you offer to support your assessment in response to Question C.?

그 텍스트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비록 Plehwe의 관찰이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배경지식을 알기에는 그 의의가 크나, 현재 신자유주의 사회를 바꾸기 위한 대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의 결론은 신자유주의가 왜 현재 성공적인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다르도와 라발은 현 신자유주의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가능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와 개인들이 시장 질서에서 행동과 사업의 내용을 규정하는 신자유주의 합리성에 매몰된 문제를 분석한다. 그 다음 그들은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질서에 저항하기 위한 국가적/주체적 차원의 다른 방안을 제시한다.

더욱이 Plehwe의 역사적 관찰은 다르도와 라발의 연구에 비해 범위가 좁고 그 깊이가 얕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시작점으로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를 주로 다루지만 다르도와 라발은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더 심오하고 넓게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사회에서 경쟁의 중요성과 같은 중요한 신자유주의 개념을 고안한” 허버트 스펜서와 같은 몽페를린 소사이어티 이전의 인물들에 주목한다. (다르도와 라발, 29쪽) 게다가 그들은 “1947년의 몽페를린 소사이어티의 창발이 종종 신자유주의의 탄생으로 잘못 인용된다. … 1938년 8월 26일에서 5일 간 열린 월터 리프만 학회가 진정한 탄생의 순간이다.”라고 밝힌다. (다르도와 라발, 49쪽)

한편, Plehwe는 몽페를린 소사이어티 이전의 신자유주의 기원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의 글에서 월터 리프만 학회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그 학회를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들의 느슨한 모임” (Plehwe, 12쪽)으로 묘사하며 이를 “보통 몽페를린 소사이어티의 선임격으로 간주되는” 모임이라고 규정한다. (Plehwe, 12쪽)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만 부각시킴으로써 질서자유주의/독일식 자유주의(ordoliberalism)과 같이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를 배경으로 삼지 않는 다른 신자유주의 이론들에는 소홀한 경향을 보인다. 즉, 그의 단편적인 시각은 더 넓고 깊은 신자유주의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다.

Even though Plehwe’s observation is meaningful to know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neoliberalism, it is not a sufficient answer to change the current neoliberal society. His conclusion is good enough to explain how neoliberalism is so successful now, but it does not contain any prospects of how to overcome neoliberalism. On the contrary, Dardot and Laval make readers see possible ways to reform the current neoliberal society. They analyze the problem that states and subjects are subject to neoliberal rationality, which reproduces and manages their behavior and projects on the logic of the market. Therefore, they propose that states and subjects should find out the other way to resist the dominant neoliberal order.

Moreover, Plehwe’s historical observation is narrower and shallower than a research of Dardot and Laval. Plehwe mainly deals with MPS as a pivotal starting point of neoliberalism, while Dardot and Laval dig into the more profound and broader origin of neoliberalism. For example, they pay attention to the past before MPS, such as Hebert Spencer, who “introduced some of the most important themes of neoliberalism-in particular, the primacy of competition in social relations” (Dardot and Laval, 29). Besides, they argue that “the creation of the MPS in 1947 is often incorrectly cited as marking the birth of neo-liberalism … it was the Walter Lippmann Colloquium held over five days from 26 august 1938” (Dardot and Laval, 49).

On the other hand, Plehwe did not pay attention to the origin of neoliberalism before MPS. I am not saying that Plehwe did not mention Walter Lippmann Colloquium in his article. However, he describes Colloquium as “a loose group of economists, philosophers, and sociologists” (Plehwe, 12), and defines it as “often regarded as the precursor of the MPS” (Plehwe, 12). By only highlighting the MPS, Plehwe loses other neoliberal theories which are not mainly based on MPS, such as ordoliberalism. In short, Plehwe’s narrow approach lacks opportunities to explain neoliberalism deeper and broader. 

 

 

E.    How might the author NOT judged to be superior in Question C reply to the reasoned defense expressed in your response to Question D?

어떤 지점에서 보면, D에서의 답변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면서 C에서의 선택이 다른 선택보다 더 우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한 지점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라.

(한마디로 D에서의 문제점을 방어하고 C에서 내놓은 답변의 약점을 진술하라는 말)

 

다르도와 라발의 결론은 현실에 적용하기에 기술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그들의 답안은 실용적이라기보다는 이론적이다. 푸코의 논의에 기대어 그들은 새로운 통치성과 ‘받아치는 행동’ 양식의 새로운 발명을 주장한다. 하지만 어떠한 종류의 통치성과 ‘받아치는 행동’이 존재해야 하는지에 관해 분명한 답을 주지 않고 있다. 가능이나 하긴 한 건지를 보여줄 역사적 예시가 없다. 세부사항들은 독자들에게 미궁으로 남았으며, 남은 부분은 우리가 채워나가야 한다.

게다가 다르도와 라발의 결론이 신자유주의에 관한 깊은 배경지식을 토대로 삼는다 하더라도 Plehwe의 몽페를린 소사이어티에 대한 풍부한 설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스트리아-미국 신자유주의 학파에 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는 몽페를린 소사이어티의 전반적 형성 과정을 소상히 밝히며 이 조직의 영향력과 중요성을 밝힌다. 다르도와 라발이 신자유주의를 전반적으로 탐구할 동안 Plehwe는 몽페를린 소사이어티의 역사를 분석하고 이 조직의 국제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구성원 명단을 제공한다. 그의 접근법은 오스트리아-미국 신자유주의 학파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오랜 기간 쌓아온 과정을 매우 성공적으로 소개한다.

 

Dardot and Laval’s conclusions lack technical and realistic methods to apply their solutions to reality; they are theoretical instead of being practical. Based on Foucault’s argument, they merely suggest that we should invent new governmentality and ‘counter-conduct.’ However, they do not have clear answers of what kind of governmentality and ‘counter-conducts’ should exist; there are no historical examples which show if it is possible or not; details are left in mystery for readers, and now it is their task to fill the remaining parts.

Moreover, although Dardot and Laval’s conclusion has a more in-depth basis on neoliberalism, Plehwe’s detailed description of MPS is beneficial for readers to understand Austro-American neoliberalism especially. He concentrates the whole process of MPS and reveals its importance and the reason why it has been so influential. While Dardot and Laval examine neoliberalism generally, Plehwe analyzes MPS’ history and offers a detailed list of members to show the cosmopolitan characteristics of MPS. His approach is useful in the sense that it successfully reveals that Austro-American neoliberalism has developed its clout for a long time.

 

F.     What rejoinder to the reply you provided to Question E can you provide in defense of your judgment of which work was superior?

E에서 내놓은 답변을 어떻게 응수해야 당신이 선택한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보다 낫다고 설득할 수 있는가? (다시 E를 비틀어보라는 말)

 

         비록 다르도와 라발의 결론이 추상적이긴 해도 그들은 현 신자유주의 사회를 극복할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들은 현 상황이 완전히 새로운 대안으로 극복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조종해 온 이상 그들은 지배질서로 사람들을 조종하지 않을 새로운 통치성을 고안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새로운 종류의 통치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통치성의 근본이 될 주권을 만드는 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시킬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사유재산에 의거한 ‘부차적 시민’이나 ‘비시민’과 같이 사람들이 동일한 정치권 권리를 갖지 못하는 상황을 방지할 자립적인 통치성을 통해 민주주의를 구원하고자 한다.

또한 이는 주체에 관한 그들의 다른 해결책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주체들은 ‘받아치는 행동’을 해야 한다. 비로 저자들이 역사적 사건들에서 예시를 주고 있진 않으나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부터 그 예시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예시들은 사실상 다른 말로 하면 시민 불복종이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에서부터 사회 질서에 저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공유경제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받아치는 행동’의 일환이라고 본다. 공유경제는 경제의 개념을 소유와 비교하기로부터 빌리고 공유하는 것으로 전환시킨다. 다르도와 라발이 우리에게 큰 청사진을 제공해 준 이상 우리는 남은 부분을 우리 자신의 ‘받아치는 행동’으로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르도와 라발의 논의는 신자유주의 이론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까지 다루며 신자유주의의 전반적인 구조와 영향력을 설명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가 경쟁을 중시하는 합리성을 구축해냈고, 국가와 주체들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하에 자기통치를 하도록 유도했다. 비록 저자들이 단 하나의 신자유주의만 집중적으로 파지 않았으나 그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깊은 통찰은 이를 더 넓은 시야에서 조망하고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Even though Dardot and Laval’s conclusions are abstract, they offer direction for people to overcome the current neoliberal society. They have a point that the current situations should be treated with a completely new alternative. Since neoliberal governmentality has oppressed and manipulated people, they should design new governmentality which would not control people under the dominant order. Therefore, the form of new governmentality should guarantee people to participate directly in the process of making sovereignty, which would be the source of governmentality. It is a valuable perspective since it emphasizes autonomous governmentality to save democracy in which everyone has equal political rights and no one gets excluded as noncitizien or subsitizen based on their properties.

Also, it is similar when it comes to their other solution about subjects; that subjects should do ‘counter-conduct.’ Even though they do not give an example of it from historical events, we can imagine these examples from our everyday. It is, in other words, civil disobedience; people can resist oppressive social order in their lives. For example, I think people who focus on sharing economy are doing ‘counter-conduct’ against neoliberalism. They try to change the concept of the economy from owning and comparing to burrowing and sharing. Since Dardot and Laval suggests a big blueprint for all of us, we could fill the remaining part with our ‘counter-conducts.’

Also, Dardot and Laval’s discussion explains the overall structure and effects of neoliberalism, covering not only one neoliberal theory but also others. They reveal that neoliberalism has constructed rationality which highlights competition, and made states and subjects self-govern them under the neoliberal governmentality. Although it does not concentrate on only one neoliberalism, their examination on liberalism is valid to explain it in a broad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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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철학사론 -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
이규성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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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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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성실하고 세계에 충실했던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을 삶의 방향과 연관하여 고찰 - [한국현대철학사론] 2장을 읽고 박지원, 홍대용과 연결 지어서

 


 

  필자는 [한국현대철학사론] 2장에 나오는 대종교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박지원, 홍대용의 사상과 연결 지어 평가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가 지녔던 고민을 서론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 고민은 다음과 같다. 필자는 왜 철학을 공부하는가? 이유는 하나다. 신체기관을 멀쩡히 가지고서도 자신의 참된 의지로 그것을 움직이지 못하는 종속에서 탈출하고자 함이다. 삶은 언제든 감옥이 될 수 있다. 정신을 놓치고 살다보면 현대화의 급류에 휩쓸려 갈 곳 없이 길을 잃어버린 채, 발이 묶여서는 곧 자신의 향방마저 잃게 된다. 그 지점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 지 고민을 멈춘다면 우리는 주변의 거시적인 흐름을 아무 생각 없이 쫓아간다. 그것들을 쫓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가고 있는 이 길이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길인가? 이때까지 스스로 발걸음을 멈추어 생각하고, 판단하고, 따져보고, 마음먹어서 행동한 적은 있었던가?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고민조차 하지 않고 무작정 걸어온 것은 아닌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스스로에게 자율과 독립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삶의 주인은 정녕 스스로가 맞는 것인가?

  철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잠시 멈추어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힘을 갖는다. 철학 공부의 의의가 바로 그곳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만약 철학 공부를 통해서도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 공부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철학이라는 이름에 도취해 버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철학 속에서도 공허한 타인의 말들만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철학 공부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건설하려 했던 초심을 잃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던 것이 바로 최근의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필자는 ‘한국철학’ 수업을 들으며 홍대용을 만났고, 박지원을 만났으며, [한국현대철학사론]을 읽으면서는 독립 운동의 최전선에 서있었던 대종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고고히 비주류의 길을 택한 홍대용과 박지원, 일본의 압제 속에서도 자신들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대종교인들의 정신이야말로 철학 공부를 그저 허황된 남의 이야기로 만들지 않고, 현실의 행위로 변환시킨 진정한 선비의 그것이라 평할 수 있었다.

  대종교의 인물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격변이 심했던 시대인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시기의 사람들은 몰려오는 국내외의 여러 문제들과 직면하였다. 기성 사대부의 부패한 세도 정치와 외부에서 밀려오는 국가적, 민족적 억압은 한반도의 사람들에게 심각한 위기이었다. 그처럼 경황없는 세태가 그들로 하여금 치열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고민을 멈추었다면 남은 선택지는 외부의 억압과 부조리한 권력에 굴복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행동하는 지식인들은 굴복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미 그 시기에 한반도 내부에서는 신분제에 대한 회의와 저항의식, 개개의 개체를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옹호하는 정신 등이 동학 농민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은 안타까운 실패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실패를 딛고 민중적 지성들은 점차적으로 자신들을 짓누르기 시작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으로 그 의지를 이어나간다. 대종교에 참가한 인물들은 외부적 측면에서는 나라와 민족 모두가 공존하며 상생하는 원리를 지향하였고, 내부적 측면에서는 한민족의 근원적 뿌리를 단군사관으로 삼는 문화적 기초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제로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지식인들 중 많은 수가 대종교에 사상적 근간을 두고 활동하였다.

  중요한 것은 그 때 당시 대종교인들과, 대종교에 관여한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에 유가적 전통이 잠재한다는 점이다. 내외합일을 이룩하여 자신의 기초를 잡고 그를 바탕으로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유가의 살신성인하는 정신이 당시의 독립 운동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투쟁을 지속하도록 이끌었다. 그들의 이러한 자세는 홍대용, 박지원 같은 조선 후기의 실학파들이 지향한 선비가 가져야 하는 자세와 유사성을 갖는다.

  조선 후기 실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홍대용과 박지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속한 시대상을 알 필요가 있다. 당대에는 노론에 해당하는 주자학자들이 정파의 위치를 주장하며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그들의 편협한 습성은 당시 사회경제학적으로 불합리한 수취제제로 고통 받던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주자의 말을 숭상하고 예와 도에 천착하는 것 말고는 당시 급변하는 시대 정세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옆의 청나라로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들에 대해서도 명에 대한 절개를 지켜야 한다며, 청나라를 오랑캐로 쉽게 낙인찍고 경계했다.

  이러한 폐쇄적이고 답답한 시대 속에서 홍대용과 박지원은 사회 주도층이 무시한 백성의 실질적, 현실적 괴로움에 귀를 기울였다. 노론 명망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당대의 기준으로는 좋은 신분에 해당한 그들이 당시의 주류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기 철학을 바탕으로 주자학자들이 중시하는 초월적 이(理)가 아닌, 세상의 만물을 창조하는 무한한 기(氣)의 발현에 집중하여 현실의 세태를 중요시 하였다. 그들이 그러한 생각을 쫓아 그것들을 글로 남기고, 사회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이유는 그들이 선비들이 가져야 할 자세인 내적인 성실함과 외적인 충실함을 다하였기 때문이다.

  홍대용과 박지원, 이 두 학자가 속한 실학파와 대종교를 위시한 독립 운동가들의 공통점이 바로 유학에서 말하는 선비의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실학파와 독립 운동가들은 세상의 민초들이 내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소급해보면 유가의 근원이자 선현인 공자와 맹자의 정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무릇 선비라면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긴장된 의식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고, 맹자는 군주가 무엇을 즐기고자 한다면 백성과 함께 즐겨야 참된 가치가 있다는 ‘중락衆樂’,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을 이야기했다. 이 두 명의 이야기를 조합하면 선비는 백성과 민중의 즐거움을 위하여 정진하고, 노력하는, 그리하여 끝없이 긴장하는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긴장하는 사람으로서는 매사 경계를 놓지 말아야 하니 벅차고 고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자는 단호히 죽은 뒤에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진정한 선비라고 말한다. 이러한 점을 보면, 막중한 책임의식과 사명의식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면 감히 스스로를 선비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가의 선비정신은 결연히 실학파와 독립 운동가들로 이어져 당대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발현되었다.

  하지만 처한 위치가 다른 만큼 실학파와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 취한 구체적인 행동 양상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홍대용과 박지원은 당대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여러 이론을 제시했다. 그들이 이야기한 한전제와 같은 토지개혁제도가 그러하다. 그들이 대안을 내놓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높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초월하여 더 넓은 차원의 평등을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박지원은 한전제를 이야기하며 토지 소유에 상한선을 두었다. 이는 그가 사대부의 권익을 인정하는 측면이 있었음을 보인다. 반면 대종교의 해학 이기는 토지 공개념을 주장하여 사적인 매매를 전면 금하고, 국가의 공적 매매만을 허용하는 급진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이 실제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일제에 투쟁했다면, 홍대용과 박지원이 당대 사회 문제의 개혁을 위해 그 정도 차원의 실천을 보여주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독립 운동에 힘썼던 홍암 나철이 자신의 죄가 막중하다며 자살한 것과 비교해 홍대용, 박지원은 자신들의 사회 개혁적 사상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비교적 완만하고 애매한 식으로 글을 쓰는 경향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특히 그렇다. 물론 시대상의 위급함이 어느 쪽이 더 중하고 급했나를 고려한다면, 홍대용과 박지원의 선비 정신이 독립 운동가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쉽게 평가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선비 정신이 1900년대의 대종교 독립 운동가들에 비하면 아직 신분적 질서에서 훨씬 덜 자유로웠다는 것을 파악할 수는 있다.

  박지원, 홍대용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 사상적 유사성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 될 수 있다. 그들은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현 세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노력했다.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자들이 종종 이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기(氣)의 측면을 위계상 아래의 것으로 보고 경시한 경향이 있는 것과 다르게 기 철학은 인간 개별을 옹호하고, 현실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는 데 활용되었다. 또한 실학자들이나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나 유가적 전통에 가장 충실하였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를 불교, 도교, 양명학 등 유가 밖에서 찾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유, 불, 도의 주요 개념을 가지고 고유한 내외합일의 관계를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의 맥을 나눈다.

  대종교의 인물 중 하나인 서우 전병훈의 경우, 그는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도교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해석한 [천부경]에서는 장자가 이야기한 내성외왕의 정신과 유사한 ‘겸성(兼聖)’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다. 이는 초월적 수련과 정치적 실천을 종합하려는 방향을 의미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신체를 다스리는 수련법을 익혀서 몸 안에 흐르는 생명 에너지를, 정신의 자유를 위한 형식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이처럼 대종교에서 인간의 몸 안에 내재한 생명원리를 그 자체에서는 완전한 것으로 긍정하고, 그를 바탕으로 외부를 향한 실천을 강조한 부분은 도가적이면서도 기 철학 중심적인 사고를 드러낸다.

  그러나 기 철학을 중심으로 하였다고 해서 대종교의 사상이 개별자들 각각에게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기 철학을 통해 행동해야 할 윤리적 실천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전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만물의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실천적 원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만유와 인간은 본원이 같고, 그렇기에 우주적 연대성이 윤리적 실천의 근본 원리로 작용해야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더 나아가면 대종교에서 주장한 만민평등권과 인민주권론에 대한 지향, 공동의 연대 의식이라는 개혁적 성격도 엿볼 수 있다. 해학 이기가 민권의 보편적 원리를 심화해서 이야기한 것이 비슷한 맥락이다. 또한 실제로 대종교의 이러한 홍익인간정신,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그 생각이 대종교의 사람들로 하여금 단순히 민족적 차원에서 생각이 머물지 않고,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나아가게끔 하는 사상적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홍대용, 박지원의 경우에도 유가를 중심으로 하고는 있지만 불교, 도교, 양명학, 묵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홍대용은 철저한 주기론자, 그것도 기일원론자로서 궁극적인 생명원리는 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노장의 사상에 특히 영향 받았다. 노장 사상에 따르면 사람과 사물이 생겨나는 것이 천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천지는 광대한 공허이고, 시간과 공간 역시 그 시작과 끝이 없다. 그 텅 빈 곳을 가득 채운 것이 바로 무한량의 기(氣)다. 홍대용은 그 기(氣)가 내포하고 있는 생명력에 중점을 두었고, 만물과 인간이 동등하게 같은 기(氣)를 나누어 가진 것이므로 모든 것들의 기본은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세계관에서 안과 밖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누가 더하고 누가 덜하다는 식의 차별과 위계의 원리는 통하지 않는다.

  박지원의 경우도 비슷하다. 노장사상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우주적 차원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그러한 시야를 통해서 만물의 평등성을 이야기하는 개방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당대 사회의 좁은 인습을 비판하였다. 신분 안에 존재하는 낡은 구분과 구별에 따른 폐단을 지적하고, 고통에 시름하는 백성들의 처지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 과정에서 기(氣)의 발현인 우주 그 자체를 긍정하고, 맹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들의 식(食)과 색(色)이라는 본성 그 자체를 존중하여, 그것을 충족시켜주고 같이 즐길 줄 아는 것의 중요성에 눈 떴다.

  이처럼 실학파들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 기 철학을 중심으로 하려고 했던 이유는 그들이 처해있던 사회적 맥락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대안 제시를 요구할 정도로 급박한 시국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理)를 인정하는 상태로 주기론적 입장을 견지하는지, 아니면 기일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지와 상관없이 그들이 기(氣)라는 실체적 존재에 방점을 찍은 것은 부정적인 현실 세계를 빨리 바꾸어야 할 긴요한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시의 세상이 도탄에 빠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주리론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성리학자들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기의 긍정과 그를 통한 자유와 평등성에 대한 이야기를 바깥에서 찾고, 검토함으로써 자신들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려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실학파들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은 크게 유교에서 지향하는, 세상의 일에 근심하며 백성과 사회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해 항상 긴장하는 선비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그 사상적 바탕을 기(氣)에 방점을 둔 철학으로 삼고, 동시에 다른 사상이나 학파에서 이야기하는 평등성과 겸애 같은 중요한 정신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자기들의 것으로 삼은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크게 본다면, 당시 사회에서 개방적이고 개혁적이었던 실학파 홍대용과 박지원의 주체적인 기 철학자로서의 면모가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계승되어 독립 운동이라는 자립적이고 굳건한 활동과 한민족의 시조로 단군을 삼은 종교적인 색채로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우리가 삶의 방향성으로 취할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인가? 홍대용, 박지원이 당시의 시대 맥락에서 실학을 주장한 것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 압제 속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지켜낸 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다시 우리의 현실 문제와의 연결고리로 나아갈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처럼 사는 것은 매우 지난하고 힘겨운 일일 수 있다. 특히 대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식의 노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적 활동을 멈추고 ‘무상’의 본원으로 수렴하는 자기변형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렇게 생명의 본원에 접한 자는 차별성이 없는 본원의 덕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다시 현실적 상황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내적 수렴과 외적 활동의 종합적 구조는 언뜻 들어서도 고차원적이고 부단한 수행을 전제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을 과연 소수의 지식인이 아닌 만민이 해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기 위한 굉장한 주체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정도로 힘든 수행을 담보하여야 얻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떠받들고 존경하는 독립 운동가들이 그러한 주체적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과연 그렇게 자신의 몸을 던져 주권을 수호하고 자유를 쟁취하려는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까? 홍대용과 박지원이 세상의 불의와 불합리함, 부조리함이 버겁다는 이유로 그 답답한 시세에 지성과 주체성을 팔고 노론 대작으로 살았다면 지금과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남아 있었을까? 그들이 쉽게 포기했다면, 우리가 그들의 삶에서 배울 점이 남아 있었을까?

  그들의 삶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그들이 남의 삶을 살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시대를 초월한 어떤 종류의 정신성을 쫓지 않았고, 시대 속에서 호흡하면서 그 시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실천을 쫓았다. 그것이 그들이 바탕으로 삼은 기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세계와 자신들의 위치가 서로 어긋나 있다 하더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고, 그를 통해 세계를 변형시키려는 최선을 다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내적인 곳에서는 성실성을, 외적인 곳에서는 충실함을 다하려 한 자세와 관련이 있다. 홍대용과 박지원은 자신들의 시대적 맥락 안에서 끊임없는 저술 활동과 대안 제시를 위한 공부를 통해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정신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깨달음을 대종교 윤리 교훈집 [참전계경]의 한 구절과 연관 지어 이야기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안주하는 생각은 크게는 인간의 본성을 멸하고, 작게는 의지를 멸할 수 있다. 본성과 의지를 다 멸하면, 존망을 분별하지 못한다.(安念者, 大可滅性, 小能滅志, 性與志俱滅, 存亡難辨.)”

  무너지지 않는 의지로 본성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독약인 것은 안주하는 생각이며, 안주하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남들의 말에 휩쓸려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과 같다. 그러한 처지에 놓인 사람은 자신이 죽고 사는 존망의 문제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을 잃어버린 처지와 같다. 우리 역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안주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비록 고난의 여정일지라도,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어느 날 죽어버리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끝없이 현실의 문제들을 살피며 자신과 세계에 성실함과 충실함을 다하여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라면 충분히 유의미할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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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이청준」 - 눈길, 서편제, 벌레 이야기 사피엔스 한국문학 중.단편소설 4
이청준 지음, 김준우 엮음 / 사피엔스21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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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과제 //


너무나 커서 숨기지 않으면 흘러넘치는 어머니와 자식의 빚에 대하여 - 이청준의 「눈길」을 소설의 구성요소 중 주제를 중심으로 분석


  이청준의 「눈길」이 이야기하는 주제는 매우 분명하다. 소설의 끝에서 독자는 주인공 '나'와 노모 사이에 자리한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 연민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그러한 주제를 한 번에 다 보이는 데 있지 않다. 부끄럼 타는 여인처럼 속살을 조금씩 드러내는 데 있다. 모친을 향한 사랑과 연민이라는 주제는 흔하고 대중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이 소설이 그 주제를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루는지 그 접근법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이 소설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면, 드러내 놓고 환하게 빛나는 모자의 사랑 때문이 아니다. 그토록 선명한 것을 어둠 속에 꼭꼭 숨기고 안 보려고 한 아들의 심정과 그런 못난 아들을 탓하지 않는 어머니의 강인함이 엮여져, 그들의 사랑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뜨겁고 강한 것인지, 오히려 얼마나 외면하기 힘든 것인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주제가 노골적으로 노출되었다면 눈물이 흐를 만큼의 감정을 자극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이 소설은 자신의 주제를 열심히 숨기려고 한다. 주인공이자 노인의 아들인 '나'라는 서술자의 상당히 건조한 진술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나'는 이 소설의 맨 처음 1장만 보면 무척 무정한 사람으로 보인다. 아내에게 말하여 먼저 어머니를 찾아뵙자고 말한 것이 본인이면서, 막상 오고 나서는 노모의 곁을 최대한 빨리 떠나려고 기를 쓴다. 하지만 막상 간다고 하니 딱히 잡지도 않는 노모를 보며 '나'는 불현듯 짜증이 올라와 자리를 피해버린다. 이 단편 소설은 1장에서부터 많은 것을 암시한다. '나'는 어머니를 최대한 떠나려고 한다. 그러면서 또 어머니의 반응을 신경 쓴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다는 고백이나 자세한 심경을 '나'의 서술에서 발견할 수는 없다. '나'는 감정을 토로하거나 있었던 일을 전부 밝히지 않는다. 시골집의 풍경을 묘사하는 어휘는 풍부하지만, 막상 인물 간의 이야기에서는 인색하다. 이러한 서술 방법이 오히려 무뚝뚝한 아들을 잘 형상화한다. 그렇다고 그저 무뚝뚝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이 군다. '나'는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는 서로 빚진 것이 없다는 말을 계속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매정함을 정당화하지만 그러한 반복적 진술은 그의 억압된 심리를 언뜻 보여준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모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윤곽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러기까지 몇 가지 징검다리가 있다. 여느 방문처럼 왔다 빨리 갈 수 있었는데, 노인이 생전 안 하던 말을 꺼낸다. 바로 노인이 넌지시 바라는 소망, 지붕을 고치고 싶다는 바람이다. '나'는 노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행여 해달라고 할까봐 매사 초조해했다. 서로에게 빚이 없다는 '나'의 강한 인식은 그 자신의 무결함을 강조한다. 소설 안에서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주벽으로 패가망신한 형의 뒤처리를 자신이 해야 했다는 억울함, 그리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것을 상실해야 했다는 아픔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서는 그저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만 언급되지만, 집을 잃어버리고 난 후 찾아간 골목에서 황망히 헤매던 소년의 발걸음에서 상실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역경들을 디디고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자신이 장남의 책임을 건실하게 해냈다는 그 사실 하나야말로 그가 내세우는 정당성이자 동시에 생색내기다. 그는 혼자만의 계산속으로, 이때껏 자신이 당한 것, 억울한 것이 많음을 어머니도 알아서 자신에게 함부로 무엇이든 요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머니가 당신의 집도 지붕 개량 사업에 참여하면 어떻겠냐고 말하니 그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는 꿋꿋이 자신이 빚이 없으니 아무래도 상관없고, 바로 올라가 버리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한 명의 인물이 더 있는데, 바로 아내다. 이 외부 인물이야말로 그 둘 사이를 매개하여 정확히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감정이 묻혀 있었는지 알려주는 일등 공신이다. 그녀는 끝없이 어머니에게 말을 거는데 그것이 다 남편으로 하여금 자신의 숨겨진 마음을 살펴보게 하려는 배려다. 자신의 마음을 꿍쳐둔 아들이나 모친이나 아내가 꾹꾹 찔러대니 그제야 진심이 흘러내린다. 노인은 귀여운 며느리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에 대답하다 보니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게 된다. 반대로 아들은 관심도 없는 척 하지만 그 둘의 이야기에 귀를 한껏 쫑긋 기울이며 듣고 있다. 그리고 제발 아내가 그만 두었으면, 어머니가 그만 말을 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내의 대화를 통해 그도 기억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다. 예전, 망해버린 집 앞의 골목으로 찾아와 서성대는 그를 거두어서 밥을 먹이고 재워 보낸 어머니와의 기억이 바로 그 과거다. 망한 집에서 아들을 위해 해준 일을 살펴보면 어머니의 상당한 정성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지금 그렇게 차갑다는 게 못 믿길 정도다. 하지만 아들의 입장에서는 그 이후로 본인이 겪은 고초가 여러 가지 있어서 어머니와 자기 사이에 빚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무엇이 더 있다. 바로 어머니의 심경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숨기려 드는 못난 남편을 위해 아내가 그것을 파내려는 순간, 어머니도 망설이고, '나'도 헛기침으로 끊어낸다. 어머니에게 숨겼던 마지막 사랑의 빚을 아는 순간, 이때까지 의지해 온, 서로에게는 빚이 없다는 계산식을 뒤흔들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대화가 결국 터지고 만다. '나'가 졸음기에 빠져 그만 잠이 들었는데, 그 아들을 내버려두고 아내랑 어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소설 안에서 어떻게 며느리와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생략되어 있다. 필자는 그 부분이 참 인상 깊었다. 깜빡 잠에 들어버린 아들을 내쳐두고 둘이서만 이야기하게 된 것이 참 재미지면서도, 왜 그러한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깊은 속내로 들어가기까지 아들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불가능해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아들도 그렇고 노모도 그렇고 그 정도로 깊은 사랑의 이야기, 숨겨 왔던 깊은 아픔과 슬픔을 서로를 두고 마주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며느리도 필요한 존재였다. 그들이 의식을 갖고서, 둘만 있을 때는 항상 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이제야 진심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어린 아들을 보내놓고 같이 걸었던 길을 혼자 돌아가던 어머니는 눈길에 난 발자국들을 보면서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앞으로 갈 데 없는 것을 걱정했던 것이 아니라, 잠시 부끄러움을 가라앉히고 갈 생각했다는 어머니의 황당할 정도로 강인한 모습은 아들의 얄팍한 계산으로도 숨기지 못할, 아들이 어머니에게 받은 엄청난 빚의 무게를 가리킨다. 

  감수성 좋은 독자라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흘린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모친에게 받은 빚이 너무나 커서 아들은 그걸 볼 수조차 없었다고. 그리고 독자는 각자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참 영리한 소설이다. 주제는 참 보편적인 것인데 기필코 그걸 숨기려는 아들의 이야기로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어머니에 대한 부채의식을 긁어내니 말이다. 갚을 것 없다고 말하는 못난 아들과, 한사코 사양하고 숨기는 어머니의 답답할 정도로 강인한 체념이 동시에 호흡하는 이 무덤덤한 소설이야말로 어머니와 자식의 사랑 혹은 빚이라는 주제를 잘 형상화해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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