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잔다르크의 수난 - [초특가판]
Carl Theodor Dreyer 감독 / 스카이시네마 / 200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잔 다르크의 얼굴이 카메라의 시선에 커다랗게 잠긴다. 빛나는 성스러움이 수수한 얼굴을 채운다. 곧 하얀 대사가 검은 화면 위에 고혹히 등장한다.

    “은총 속에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제게 계속 은총을 내려주실 것이고, 은총 속에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제게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현재 시중에 돌아다니는 이 영화의 판본은 맨 처음의 것은 아니다. 영화의 첫 부분인 해설 자막은 이 영화가 겪어야 했던 수난을 설명한다. 어떻게 보면 영화 ‘스타워즈’ 도입부분과 비슷하다. 방식 자체는 있었던 일들에 대해 단순히 나열하는 평범한 방식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마치 잔 다르크의 화신처럼 검열 받은 영화의 불운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설명에 따르면 이 영화의 초기 판본들은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성녀가 죽은 것처럼 장렬하게 화형 당했다. 

    그리고 어느 날, 80년대에 들어서야 노르웨이의 정신병원에서 잘 보존된 덴마크 판본이 발견되었다. 신의 가호가 있었던 걸까? 영성으로 충만한 이 작품이 세상에서 쫓겨난 자들의 구금된 장롱 속에서 그 야윈 깃털을 숨긴 채 간신히 숨 쉬며 은닉해 있었으니 말이다. 몇몇 조력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드디어 이 영화는 우리의 곁에 날아올 수 있을 만큼 깃털도 자라났다. 

    하지만 이 영화는 100년 전 만들어졌을 그 당시의 모습 자체로 화석 같이 굳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음악이라는 생생한 변주가 곁들어져 있다. 이 영화가 무성 영화였기 때문에 당시 영화가 상영될 때는 현장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방식이었는데, 시중에서 현재 접할 수 있는 이 영화의 판본인 Criterion Collection에서는 리차드 에인혼의 “voices of light”가 배경음악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 역시 이 판본에 나오는 해설자막에서 확인할 수 있다. 리차드 에인혼의 음악들은 1994년에 만들어졌다. 그의 음악은 이 영화를 위해 태어난 예술적 피조물이기에, 우리는 지금 이 무성영화를 보면서 현대인들의 이 영화에 대한 새로운 음악적 해석을 체험할 수 있다. 칼 드레이어 감독이 어떠한 음악도 배경음악으로 선정한 적이 없다 하더라도 에인혼의 음악은 실로 잔 다르크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위해 봉납된 신실한 제물이다. 

    이 영화를 이야기하며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러한 시도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았을까? 칼 드레이어 감독이 잔 다르크가 치른 전투에서의 수많은 업적을 영화에 형상화하려고 했다 생각하지 않는다. 칼 드레이어 감독을 놀라게 한 것은 고등 교육을 받은 성직자들 앞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 소녀 그 자체였다. 이 영화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오히려 잘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배경이다. 역사적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화 속에서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본다. 인물들에 대한 강렬한 클로즈업은 신의 의지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교회와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가녀린 소녀의 대립만을 보인다. 그녀의 공적에 대해선 언급도 되지 않으므로,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더욱 무력하고 평범해 보인다. 

    영화가 비추는 소녀의 얼굴과 성직자의 얼굴 주름들은 영화 전체에서 역사적인, 사회적인 맥락을 지워버린다. 우리는 인간인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속마음이라는 미시적 차원에 주목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참된 대립각은 성직자들과 잔 다르크만이다. 내면의 감정만이 핵심으로 부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국적이 아닌 권위자들과 권위 없는 한 소녀의 대화이다. 칼 드레이어 감독이 가장 기본으로 한 것 역시 심문 과정에서 이루어진 대화록이며, 이 대화록에서 보여준 잔 다르크의 신성함은 자신을 짓누르는 권위에 맞서 대항하는, 그녀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에게서는 도출될 수 없는, 다른 무언가로부터 발현되는 내적 힘이다. 

    성직자들은 잔 다르크를 조롱하고, 가히 침을 뱉듯 그녀를 이단이라 비난한다. 잔 다르크, 그녀는 그리스도교 정통파 성직자들에게 괴물이다. 서커스의 야수이며,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비천한 여자다.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자 잔 다르크는 손가락으로 떠듬떠듬 숫자를 센다. 성직자들이 모두 기가 막혀 한다. 주기도문도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낭송조차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널 보내셨다고?”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적어도 부름이라도 받기 위해서 인간에게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유식해야 하며, 교육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남성 옷을 입는 것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남자로 우선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주제에, 잔 다르크는 감히 수많은 질문에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성직자들이 술렁인다. 잔 다르크에게 미카엘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그녀가 보았다는 천사의 존재와 하느님의 형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이 무신론자처럼 보일 때도 있다. 성직자들은 소녀 하나를 앞에 두고 몰락시키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 그들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내면 안에서 끓어오르는 말들을 하나하나 말하지만, 성직자들 앞에서 흔들리는 두려움까지 숨기지는 못한다. 영혼의 구원을 바란다는 잔 다르크를 향해 성직자들은 신성모독을 외치는데, 그들은 잔 다르크가 신과 영접했다는 사실을 완벽히 부인한다.

    이 나이 많고 많이 배운 남성 성직자들의 모습이 문제시되는 이유는 그들이 과연 성직자인지 세속인인지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점에 있다. 그들이 말하는 신은 그들이 내세우는 가상의 관념으로 떨어진지 오래이며, 그들 안에서 진실한 신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들한테 신의 진리가 먼저인지, 아니면 현실의 복잡한 정치 관계가 먼저인지? 게다가 그들은 신을 보았다고 말하는 잔 다르크를 부정하는데, 그 모습이 시기 어린 질투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그들의 의심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일 수도 있다. 신이 대체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여자에게 강림하여 그녀의 조국에 대해 지시를 내리고 그녀에게 길을 제시하였단 말인가? 만약 어떤 길이 필요했다면,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정진한 남성 고위 성직자들에게는 왜 다가가지 않으셨단 말인가? 이성적으로, 인간의 논리와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신이라는 것이 진정 있다면, 신이 대체 언제부터 미천한 인간에게 그 뜻을 가르쳐주려 했단 말인가? 신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기는 한단 말인가? 그런 것이 가능했던 적은 있는가? 성직자들은 결국 모든 것을 자신들의 잣대로 판단하기에 이르며 결국 그들이 그녀에게 부여하는 괘씸죄는 정치적이고 인간적이다. 그녀를 파괴하는 이유는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여 여성이 남성의 옷을 입고 남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사회적인 것, 그리고 자신들의 세속적 노력과 반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 무지한 여성이 신을 만났다는 참을 수 없는 ‘불경함’ 때문이다. 

    그들은 신을 보지 못하고, 천사를 보지 못한다. 성직자들은 그녀에게 자신들의 신을 강요한다. 자신들을 거치지 않은 그녀의 신은 과연 신인가? 그들은 그녀에게 착한 천사와 타락한 천사를 구별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가능한가? 그들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이 타락한 지상에서만큼은 권력을 잡은 신의 대리자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이 내려왔다 한들 그 사실을 그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정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신을 진심으로 신실하게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가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서 변질된지 오래이기 때문에, 유일한 길은 그녀를 죄인으로 모는 것뿐이다. 몇몇 양심적이고, 진실한 성직자들만이 자신들의 권위에서 벗어나 그녀를 도와주려 노력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다. 다른 성직자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성직자들은 신이 있는 하늘로 닿기에는 지상의 인간 사회의 굴레에 지독히도 묶여 버렸다. 그들은 지상의 시련을 통과하는 데 실패했다. 

    “학식 있는 박사님들이 과연 잔 다르크 너보다 현명하단 말이냐.” 

    잔 다르크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지만 신이 더 현명하십니다!”

    성직자들은 잔 다르크를 굴복시키려 한다.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대치한다. 잔 다르크가 성직자들을 향해 한 명씩 악마라고 가리키며 비난하는 강력한 정서의 폭발은, 무성영화의 역사 안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일 것이다. 

    전쟁영웅인 잔 다르크가 이 핍박 속에서 언제나 꿋꿋한 모습만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칼 드레이어 감독은 그녀를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로, 끝없이 절망하고 눈물 흘리는 소녀로 그린다. 그녀가 고통 앞에서 의연함만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강력한 철의 여인을 기대한 사람들로서는 실망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그녀가 고난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그녀의 숭고한 내면의 전장이 가치를 갖는다. 그녀의 표정에서 우리는 대사와 언어가 보여줄 수 없는 심연을 엿보게 되고, 그러한 지경에서 희극배우 마리아 팔코네티는 잔 다르크가 되어 유래 없는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탈바꿈한다.

    이어서 소녀를 윽박지르는 교회의 위협은 절정에 다다른다. 그들은 그녀의 왕, 조국을 들먹이며 그녀가 내면의 소리를 외면할 것을 종용한다. 팔코네티의 얼굴에서 이성이 사라진다. 마침내 잔 다르크가 굴복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성직자들은 그녀를 파문시키지 않고, 그들의 하나님, 과연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이 있기는 한 것인지 모를 그들의 보호 안에 죄인의 이름으로 잔 다르크를 수감시킨다. 부조리에 반감을 갖는 이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일반 백성들이다. 

    삭발한 그녀의 머리카락, 그리고 눈동자에 어린 좌절의 눈물. 잔 다르크는 영화 내내 새처럼 쉼 없이 울지만, 이 장면만큼 그녀가 우는 모습이 가련해 보이는 장면은 또 없다. 잘린 머리카락을 보며 그녀가 슬퍼하는 이유는 이내 밝혀지듯 자신의 마음의 목소리, 즉 신의 말씀을 두려움 앞에 거절한 자기 자신에 대한 모멸감 때문이었다. 곧 재판관들을 다시 소집한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밝힌다. 그녀가 고백한 죄는 바로 거짓말, 신에 대한 불복종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들었던 말들을 신의 음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신이 아니라 부정하지 못한다. 죽음이 결국 그녀를 꺾지 못한 것이다.

    이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그녀의 비극에서 바로 그녀의 성스러움이 태어난다. 그녀는 못 배웠고, 비천하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보통의 인간이다. 곧 이제 화형 당한다는 말에 잔 다르크의 오른쪽 뺨이 근육경련을 일으킨다. 그녀를 도와주던 성직자는 그녀에게 하나님의 말을 아직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질문한다. 하나님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다르다고, 자신이 그의 자식이며, 신이 자신의 승리와 순교, 죽음까지 약속했다고 말하는 잔 다르크. 

    성직자들이 마지막 미사를 준비한다. 그녀를 경멸했던 자들도 이제 함부로 다시 비웃지 못한다. 그녀는 마지막 고해, 미사를 받는다. 잔 다르크를 음해하고자 했던 성직자가 그녀의 미사 장면을 몰래 훔쳐본다. 그녀의 신실하고 순수한 믿음이 부러웠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심지어 자격을 갖추는 것까지도 쉬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항상 실천이 어렵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결국은 그 남자의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잔 다르크의 죽음이 다가오면서 민중들이 그녀의 죽음을 보기 위해 모여든다. 잔 다르크의 화형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그녀는 십자가를 끌어안고 너무 오랜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끝까지 주님을 찾는 그녀, 아이가 젖을 물다가 갑자기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다시 젖을 문다. 신이 그녀를 보고 있을까? 십자가조차 빼앗겨지고, 그녀는 끝없이 울며 화형대 앞에 혼자가 된다. 교회 지붕의 끝, 십자가에서 새들이 날아가고, 나무 장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녀가 죽는 걸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 눈물조차 뜨거운 열기를 식혀 잔 다르크를 지상에서 구원 받게 해줄 수는 없었다. 

    민중의 누군가가 성녀를 화형 시켰다며 소리를 내지르고, 성의 병력은 민중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교회의 이름으로 죄인이 된 성녀를 성녀라 불렀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폭압의 상황에 놓인다. 계속 불타는 그녀의 시신을 앞에 두고 마지막, 혼란의 대치 상황이 발생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그녀의 위대함을 칭송하며, 그녀가 프랑스인들의 마음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 찬양한다. 나 같은 경우 종교인이 아니기에 그녀가 보고 들은 것, 혹은 그러했다고 믿은 것에 대해서는 사실 알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요컨대 그녀가 신의 이름을 걸고 나온 광인이었는지, 아니면 진정한 기독교의 수호자였는지 말이다. 기독교적 신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나의 논평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만 칼 드레이어 감독의 영화에 나온 그녀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그가 형상화한 대화록 안에서의 잔 다크르가 어떤 인물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잔 다르크가 진정 신이라는 존재를 순수하게 믿은 사람이며, 지상의 모든 욕망과 공포라는 감정들로부터 연유되는 시련들을 통과하여 자신이 가야 한다 믿은 곳으로 갔다는 사실 말이다. 한 특정 종교의 힘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그럴 거면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왜 자신들이 믿는 신의 길을 따르는 데 실패한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기 자신의 ‘도덕률’, 내면의 소리,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믿어냈다는 점이다. 그게 신이든 마귀든 무엇이든 다른 인간들의 억압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바늘 같이 소름끼치는 눈치를 받으면서, 이 사람들이 나를 해코지 할까봐 무서워 덜덜 떨게 되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내면을 지켜낸다는 것, 그 행위는 종교를 믿든 안 믿든 해내기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잔 다르크, 그녀는 그것을 해낸 사람 중 한 명이다. 내가 그녀가 믿은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해서, 그녀가 나에게 성녀가 아닐 이유는 없다. 단지 그녀가 무식하고 순수해서 가능했던 일인 걸까? 글쎄, 원래 가장 순수한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에 가장 솔직하기 마련이다.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그런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대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는지? 멀리 안 가서도 개인성이 역사상 가장 존중 받는 지금의 시대에서도 우리 모두 잘못된 일이란 걸 알아도 대부분 다 군말 없이 까라면 까라는 대로 하지 않나. 종교의 이름이든 무엇이든 아닌 걸 아니라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 용기가 필요한 일은 항상 그 자체로 성스럽다. 그리고 억압이 크면 클수록, 지켜내기 어려운 일이면 어려운 일일수록 그 성스러움을 기억하는 사람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는 것이 이치이다. 칼 드레이어도 그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잔 다르크의 수난'이라는 놀라운 성스러움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는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일반판
웨스 앤더슨 감독, 에드워드 노튼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이여, 그대들에게 축배를!

((전반적으로 내용이 아주아주아주 상세합니다.))

 

 

      묘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여자가 한 동상 앞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듯이, 영화가 시작하기 10분 전 급하게 영화표를 한 장 샀다. 이미 보았던 영화지만, 다시 보아야겠다는 필요성에서였다. 어떻게 딱 그렇게 시간이 났는지. 표를 사자마자 읽고 있던 종이꾸러미를 들고 황급히 내 자리에 앉았다. 시간은 오후 한시 삼십분, 모든 것이 적적한 십삼 시이다. 싸늘하게 추운 자리,어두운 조명, 언젠가 보았던 파리의 지하묘지 같다. 공간에는 시간이 깃들고, 그 다음에는 내 기억이 번진다. 이 영화관은 수많은 영화들의 묘지, 홀로그램 육체가 전시된 영상의 박물관이다.종이꾸러미 위에 놓인 철학자의 이름, 집중이 잘 안 되어서 독서는 접었다. 한시 사십분, 내 신체 안의 욕망이 두런두런 침묵을 잡아먹고 곳곳에 피어오를 때쯤, 영화가 시작된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내가 읽어야 할 새로운 이미지 꾸러미.

 

   1985년의 작가는 창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창작이란, 우리 주변의 인물들의 삶 속 이야기라고. 곧 이어질 영상들의 환상성과 가상의 공화국을 고려하면 궁금증이 떠오른다. 이 모든 가상적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그 뻔뻔한 시도는 쓸데없는 무위인가, 아니면 당연한 행위인가? 그 문제에 대해선 아직 충분히 고민할 여유가 없다. 이내 시청자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소나기에 맞아 죽어갈 소녀처럼 흠뻑 젖게 되니까.

 

 

 1968년의 젊은 작가는 신경쇠약 때문에 다 쇠락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요양 중이다. 지식인들이 걸릴 법한 그 신경쇠약의 근원은 무엇인지? 그는 우연히 호텔의 주인인 제로 무스타파와 조우한다. 눈에 뜨일 우울함을 얼굴 주름들 사이에 깊이 새긴 무스타파의 이국적 풍모가 작가의 시선을 끈다. 그들은 곧 편하게 말을 섞고, 무스타파는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제공한다. 이러한 일이 자연스럽게 가능했던 이유는 젊은 작가가 무스타파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무스타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신경쇠약과 같은 우울함을 앓고 있다. 

 어찌 되었든, 이야기를 시작한다.

 

 

1부 무슈 구스타브 

 

       1932년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미래의 쇠락한 시점과 같은 건축 특징을 공유하지만, 발산하고 있는 에너지는 상당히 다르다. 이때의 호텔은 아름답고, 깔끔하고, 우아하고, 인기가 많은 장소이다. 그리고 그 구심점에는 일류 호텔지배인 무슈 구스타브가 있다. 구스타브라는 캐릭터는 자신의 일이 천직인 사람이다. 아마 그는 호텔지배인이 아닌 자신을 상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타고난 그는 세련된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미학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관리하고 주도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아마 아름답지 않으면 삶에 큰 의미를 두지 못하는 인간 유형일 것이다. 그의 미학에는 그의 개성을 반영하는 특정한 취향이 잠재되어 있고, 그는 자신의 속물근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나이 들고 돈 많고 권세 있는 귀부인 고객들에게는 카사노바 노릇도 한다. 그는 예술가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전형적이고 전문적인 예술가. 마치 그림을 그리듯 자신의 구도에 무엇 하나가 맞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사람. 클리셰, 진부한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의 연인이자 윗사람인 마담 D에게도 손톱 색깔에 대해 조언한다. 자기 영감이 떠오를 때면 시도 외우고. 미학자 나셨다. 이쯤 되면 무조건 예뻐야 한다고 총까지 직접 제작 주문한 금자씨 수준이다.

      이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보고 배우게 된 제자는 바로 제로이다. 전쟁난민인 이 소년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institution이라고 표현한다. 나야 뭐 영어에 대해 크게 지식 없는 사람이니 영어사전을 참고했는데, 소년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어떤 이상적인 배움터로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영화자막을 번역한 사람도 그러한 의미로 옮겨놓았고. 자신의 미학을 존중하고, 배우고 싶어 하는 어린 학도를 만났는데 어찌 구스타브가 매정하게 내쫓을 수 있으랴. 전반적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미학을 가르치는 대학이고, 구스타브는 미학과 교수님이며 제로는 도제관계로 배우는 제자 꼴이다. 어쨌든, 그 때부터 제로는 로비 보이가 되어 구스타브의 곁에서 호텔에 대한 모든 것,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호텔에 대한 구스타브의 '해석'을 배우게 된다.

      호텔이라는 사치 공간을 예술로서 창조하고 유지하는 사람들 말고도 음식으로서 예술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다. 혀 전반을 자극하는 달달한 버터크림, 코에 밀가루를 묻힌, 얼굴에 멕시코 모양 점이 있는 아가씨.

      아니, 그 아가씨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잠시의 망설임. 지금은, 말을 이을 수 없다.

 

 

2부 마담 D

 

 

      전쟁이 났다고 한다. 맙소사, 마담 D가 죽었다. 구스타브는 아끼는 술을 챙겨 기차를 타고 루츠 성을 향해 떠난다. 가는 길에도 고양이 오줌 맛 나는 술은 참을 수 없다. 우리의 로비보이 제로도 같이 있다. 그 둘은 바깥 풍경을 보며 기차를 타고 가는데 어느 수수한 곳에 다다르자 기차가 멈춘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곧 객실로 들어와 그들의 정체를 검열한다. 구스타브는 문제가 없지만, 제로한테 문제가 있다. 개성을 검열하는 시커먼 파시스트 놈들 같으니. 유럽 놈들한테는 언제나 피부색깔이 문제다. 제로를 끌고 나가려는데 구스타브가 격렬히 저항한다. 그의 사치품에 대한 열망과 고상함에 대한 욕망과는 어울리지 않는 휴머니즘, 그것 역시 구스타브의 천성이다. 모를 일이지. 어쩌면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사람으로서 배척받는 외부인, 아웃사이더의 비통함을 참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사람은 결국 천성대로 살고, 반항하는 구스타브와 제로는 군인 남성들의 무장한 힘에 압도되기 직전이다. 그 때, 헨켈스가 들어온다.

      헨켈스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간 적이 있는 군인이다. 그리고 구스타브의 아름다운 돌봄에 감동을 받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은 사람에게 어떠한 신뢰를 보장한다. 이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일종의 신분증 같은 것이다. 헨켈스는 구스타브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구스타브를 도와준다. 글쎄, 어떤 이들은 이 구사일생의 상황을 아직까지는 낭만이 통용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후반의 무스타파가 하는 이야기지만, 구스타브가 꿈꾸는 세계는 이미 옛날에 죽은 지 오래이다. 어쩌면 구스타브가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언제나 그렇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원해 본적 없는 세상에 태어났다. 그렇기에 구스타브에게는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 자신의 희망이고, 그라는 존재가 추구한 가치의 따스함을 느낀 다른 존재가 그와 그의 동료의 목숨을 구했을 뿐이다.

      용케 목숨을 구하고 루츠 성에 입성한 그들은 그 집의 집사 서지 엑스, 그리고 죽은 마담 D를 만난다. 마담 D의 시체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배려를 다 한 구스타브는 이제 본격적인 갈등, 즉 이야기의 꽃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때 들어가는 카메라 구도가 환상적이다.

      시체의 옆에 있던 문으로 카메라 시선이 움직여지고, 문이 차례로 열리며 카메라가 그 안으로 들어간다. 이 이야기가 영화라는, 창조라는, 인위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예술가의 세심한 붓질이다. 케이크를 만들면서 장식을 놓치지 않는 제빵사의 손길이고, 리본을 꼭 묶어야 선물이라 믿는 자의 꼼꼼함이다. 게다가 이 구도는 단순히 기능적이지 않고, 분명히 위험한 인물들과 대면하며 본격적인 갈등으로 진입하는 주인공들의 운명을 알리는 종소리이기도 하다.

      호텔 주인의 법적 대리인이자 죽은 마담 D의 유언집행인인 변호사 코박스는 곰 조각상 옆에 선다. 중후한 그의 앞에는 떡고물을 바라는 수많은 일가친척들이 시체를 노리는 독수리들처럼 허공을 앉은 채 맴돌고 있다. 그 중에는 죽은 이의 진정한 친구였던 구스타브와 그의 로비보이도 껴있기는 하다. 하지만 독수리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살점을 물어뜯을 자격이 있는 맹수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렬한 남성성과 검은 코트, 콧수염, 머리, 까만 눈을 자랑하는 날선 코의 드미트리와 그의 충직한 금이빨의 사냥개가 조용히 앉아 있다. 강렬한 배우들이 불꽃 터지듯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 긴장 넘치는 순간, 고인의 미술 작품 '사과를 든 소년'이 fruit인 구스타브의 손에 떨어지게 되고, 그와 동시에 드미트리의 컵도 바닥으로 떨어진다.

      성정체성을 공격하는 드미트리의 여러 욕들을 들으며 구스타브는 자신의 기분에 대해 전혀 생각조차 해주지 않는 못돼먹은 드미트리와 맞서게 된다. 전형적인 마초성의 눈에 호텔의 아름다움을 관리하는 구스타브는 확실히 이상한 놈처럼 보이긴 할 것이다. 쟤가 남자이긴 한가? 게다가 욕심 많은 아들은 모든 것을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마음에도 안 드는 이 이상한 놈에 의해 그 꿈이 좌절되었으니, 더 화나는 건 그 놈이 자신의 어머니와 섹스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시길. 저런 인간한테 게이 혹은 바이섹슈얼로 보이는 남자가 자기 어머니와 잤다는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믿기 힘든 불편한 진실일 것이다. 관객의 상당히 중립적인 눈으로 보기에도 드미트리와 구스타브는 서로 생각과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다. 다른 취향에, 다른 세계를 사는 이 사람들의 조우란. 그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확실히 너무나도 다르다. 그러니 폭력적인 갈등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아니, 마초성과 폭력성을 지향하는 입장에선 이 비정상적인 '괴짜'는 탄압해야만 한다. 이제 그리고 신나는 주먹싸움 장면! 드미트리도 퍽! 로비보이도 퍽! 마지막으로 강펀치를 날리는 것은 조플링이다. 폭력으로는 이 프라다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림을 보게 된 제로와 구스타브는 사과를 들고 있는 소년의 그림을 얼른 빼서 그 자리에 춘화를 대신 건다. 그림과 기밀서류를 주인 몰래 은근슬쩍 포장해준 서지의 떨떠름한 얼굴과 작별한 그들은 기차에 다시 몸을 싣는다. 가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구상하는 구스타브, 그의 과거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 번도 본인이 이야기를 해준 적 없으니까. 어쩌면 구스타브의 과거는 최악의 인간이었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엄청난 시련과 비극의 주인공이었을 수도. 아니, 아니. 어쩌면 그냥 평범했을 수도. 그러나 누구한테 그것이 중요할까? 그의 현재 삶은 호텔 예술인, 상속 받은 명화를 그 집에서 챙겨 도망가는 죽은 노파의 정부이니 말이다. 그의 창조적 오늘이 그의 어제를 죽인지 오래다. 그리고 이번에 그는 또 한 번 명화에 대한 가치와 자신의 생명에 대한 두려움으로 명화를 팔고 도망갈 구상을 한다. 그를 마냥 비장하고 거창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는 중요한 요인은 바로 그의 그러한 소시민적인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이웃집의 조금은 유별난, 수채화 그리는 텔레비전 속 밥 아저씨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러한 독특한 평범함 말이다. 어쨌든 이 김에 구스타브는 제로를 자신의 상속자로 위임하게 된다. 물론 내용을 살펴보면 상속자 겸 시종이긴 하지만. 그래도 1.5%는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하긴, 이러한 박함도 일종의 소시민성이라 간주해줄 수는 있다. 여기서 20%를 떼어 준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호텔로 무사히 도착한 줄 알았더니, 이런, 경찰이 그를 찾는다. 헨켈스는 마담 D의 살해용의자로 구스타브를 연행한다. 튀려고 하지만 잡힌 그. 그리고 그는 더 깊게 영화 같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3부 체크포인트 19 교도소

 

 

       멘들 빵집의 양과자를 챙겨 온 제로는 멍 자국이 얼굴에 잔뜩 난 구스타브와 만난다. 제로는 그에게 핵심 증인인 서지가 사라졌다는 말을 전한다. 물론 감옥 안에서도 구스타브는 삼류 소설책의 지침을 충실히 따르며 자신의 삶의 원칙을 여전히 쫓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삼류 소설책의 내용이 그에게 실제로 도움을 주긴 한다는 것이다. 환상의 세계는 실제의 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상과 실제의 경계가 모호하다. 자신이 믿고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세상을 이룬다. 우리의 형이상학이 우리의 현실에 침투한다. 참으로 구스타브답게 이 와중에도 그는 두고 온 호텔을 걱정한다. 자신이 만들어 낸 창조물을 걱정하는 것이 창조주의 의무라도 되는 듯이. 하지만 서지의 여동생을 찾아가 위협하는 무서운 조플링의 모습을 본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걱정이 참 절로 걱정스럽다.

      교도소 안에서도 열심히 옥수수 죽을 나르는 구스타브는 결국 여기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만들 기세이다. 우리의 영혼을 묶는 것이 목적인 이 교화소는 예술가를 비참하게 만들 수 있을지언정 예술을 지향하는 마음을 죽이지는 못한다. 사실 아름다움을 쫓는 마음은 어디서도 죽이지 못한다. 게다가 구스타브의 영혼은 누구보다도 자유롭다. 그는 칸막이 지워지고, 고정화 되고, 세분화된 공간들에서조차 그 사이로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마치 호텔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런 그의 모습이 항상 어둠 속에 수용되어 있던 인상 나쁘고 덩치 좋은 사내에게는 뱃속을 든든하게 만들어줄지 모른다. 어떤 인간은 클리셰가 아닌 존재에 감탄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한 감각을 잃지 않기 때문에.

      들고 온 멘들 양과자를 4등분한 채 쪽쪽 손가락까지 빨아먹는 죄수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그들의 죄가 무엇이든, 그들의 평소 생활이 어떠했든, 아름다움, 맛, 향은 우리 모두에게 즐거움을 준다. 교도소, 사회의 비정상적 인간들을 잡아두는 것이 목표인 이 인간성 말살의 공간에서 그들은 달콤한 양과자를 먹으며 탈옥을 꿈꾼다. 아직 그들의 영혼은 죽지 않았다. 죽일 수도 없다! 그들은 자신의 인간성을 수호하기 위해 탈옥계획을 짠 상태이고, 구스타브에게 그 계획을 제안한다.

      가끔 생존을 위해서는 놀랍게도 사치품이 필요하다. 물론 사치품 없어도 어떻게 살기야 하겠지. 동물들도 사치품 없이 잘 사니까. 그러나 꽉 막힌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끔 여유라는 것을 가지고 다른 방향으로 현 상황에 대해 질문해 볼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멘들 빵에 칼을 몰래 가져온다든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교도소 안으로 칼을 빵 안에 숨겨 보내는 것이 가능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한 용기라는 자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우리 모두에게 용기라는 것이 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었겠지.

 

 

 무스타파는 눈물을 멈출 수 없다. 그의 깊은 의식을 과거에서 현재로 끌어올리는 유일한 주제는 그녀, 아가사, 즉 사랑이다. 사랑, 언제나 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로서 나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마냥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세상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예술행위 중에서, 가장 강렬한 감각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가장 온전한, 순간의 보관소. 그렇기에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소년 제로가 아닌 할아버지 무스타파가 자신의 아가사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빵과 소시지는 벌컥벌컥 썰 수 있다. 빵과 소시지야 원래 썰어먹는 것이라 해도, 멘들 양과자는 한 번 썰면 모양이 붕괴한다. 멘들 양과자를 당신이라면 썰어낼 수 있는가? 아마 몰인정한 사람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아니라고 감히 내 앞에서 말해보시지. 단지 우리에게는 차이로서 아름다움이 존재할 따름이지, 아름답지 않은 걸 사랑할 순 없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친구들한테 물어보라. 그 사람이 아름답냐고 아름답지 않냐고. 우리는 다른 이들의 대답과 상관 없이 항상 그 대상을 사랑한다. 왜냐면 우리의 두 눈에선 그 사람이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우리의 눈을 통해 본 아름다움이든, 정말 그 대상 안에 잠재해 있든 간에.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마음 안의 깊숙한 본능, 열망을 일깨운다. 그 열망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데, 왜냐하면 그 열망이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즉, 종교적 차원이다. 우리에게 삶을 사는 근거를 주는 존재의 성질은 아름다움이다. 내가 왜 저 사람을, 내가 왜 이러한 선택을, 내가 왜 이러한 삶을 사는지, 그 근저에는 그 방향 안에서 어떻게 하면 추해지지 않고 나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안타까운 우리만의 발버둥이 있다. 다만, 그 선택이 이 세상의 수많은 것들처럼 클리셰인지 아니면 자신만의 것인지의 차이가 있겠지만. 

      변호사 코박스가 자신의 신념을 지킨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죽은 이의 수수료, 그런 게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그냥 이 못돼먹고 무서운 불한당들에게 고개 한 번 조금 숙여주면 고양이가 떨어져 죽을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놀랍게도 무시무시한 생존본능보다도 다른 것을 선택할 때가 있다. 산다는 것 자체보다도, 어떻게 사는지의 방향을 더 중요시하면서 정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다리가 후들후들한 데도 해야 할 말을 하게 되는, 그러한 이상하고 불길한 순간. 가진 모든 것을 날려버리게 될지 몰라도.

      그러나 불한당들이 그러한 선택의 아름다움을 알 정도로 생명을 사랑한다면, 불한당들이라고 불리울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키운, 당신이 시간을 들인 것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당신의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멀리 하라. 천성이 잔인한 사람이니. 이 영화에서 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하이라이트 중 한 부분은 모순적이게도 코박스가 살해되는 장면이다.

      코박스는 고양이의 시체를 쓰레기통에 넣고 쿤스트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자신을 뒤쫓는 살인마를 피해 15분이 남은 박물관을 선택한다. 이 어찌나 괴상한 선택인지. 하긴 그는 자신의 인생이 15분 남았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부분의 장면들은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다른 수많은 주요 장면들처럼 인위적이고 가상적이며, 환상적이다. 모든 것이 진실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시치미 뗄 때는 언제고, 갑자기 내가 바로 영화라는 티를 팍팍 낸다고 해야 할까나. 폐관 직전의 아슬아슬함과 사람 없는 조용함 속에서 살인마와 변호사의 그림자가 서로를 의식한다. 박물관 안의 반복적인 전시품들과 바닥의 타일 무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낳게 한다. 강박적이고, 편집증적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이 추격전이 언제 끝날지 조마조마하게 지켜본다. 보이지 않는 살인마의 구두 소리만이 끔찍하게 크게 들린다. 코박스가 출구를 찾기만을 간절히, 수동적으로, 그 세상의 건너에서 지켜보는 우리는 살인마가 신발을 벗는 순간을 목격한다. 하나의 아름다움이 지는 것을 막을 수 없겠구나, 탄식하는 순간 손가락 네 개가 똑 떨어진다. 여성 관객의 비명이 들린다. (두 번 다 영화관에서 봤는데, 두 번 다 그랬다.) 손가락들을 수거해 가는 조플링의 뒷모습이 시선에 잡힌다. 삶에의 의지 하나가 세상에서 거세당했다.

      한편, 감옥에서 탈옥이 시도된다. 이 탈옥 장면은 꽤나 우습고, 어찌 보면 복고적인 느낌을 준다. 하나하나의 과정이 끝날 때마다 보물섬을 찾아 떠나는 아이들의 여행처럼 일사천리이다.가끔 장애물들이 나타나지만 무리 없이 장애물들이 제거된다. 구스타브 덕분에 배가 불렀던 덩치 큰 죄수가 그들의 탈옥을 돕는다. 구스타브는 빠짐없이 감사를 표시한다. 당한 거나 갚은 거나 잊지 않는 구스타브의 꼼꼼한 성격은 역시 큰 자산이다.

      하나의 권력 체계, 거대한 힘으로부터 탈출하는 네 마리 생쥐 중 한 마리 생쥐가 순직을 하고 만다. 필수불가결한 희생에 구스타브와 나머지들은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 우리가 그렇게 큰일을 하고 있는 거야. 그들은 앞으로 달려 나갈 뿐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정신인 것인지, 아니면 영화라서 그렇게 묘사가 되는 건지. 아마 후자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무용담은 오히려 이렇게 배수관 구멍 뚫듯이 막힘이 없어야 하는 법이다. 예를 들어 14대 1로 싸웠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처럼. 어쨌든, 그들은 쓱싹쓱싹 탈출하고, 무사히 밖으로 빠져나온다. 우리는 그저 영화 보듯 보면 된다.

      나오자마자 구스타브는 제로에게 성질을 부린다. 나머지 죄수들은 버스를 갈취하고 총총 퇴장한 상태이다. 제로는 그의 이기적인 횡포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가끔 사람들은 투정을 부리기 마련이고, 구스타브도 그러한 때이다. 이를테면 자기가 당한 거대 권력의 횡포로부터 비참했기 때문에 밖에 나와서 자기의 작은 도제 소년한테 종로에서 맞은 뺨을 한강에서 푸는 격이다. 그러나 그들의 작은 실랑이도 얼마 되지 않아 끝난다. 구스타브는 그렇게 못되고 이기적인 놈이 아니다. 그는 남의 감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아마 그러한 이유는 구스타브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그만큼 중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순간들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임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다. 어쨌든 싸움을 마무리한 그들은 시를 공유하며 어긋날 위기였던 감정을 매듭짓는다. 이러한 순간에도 시를 꼭 암송해야 해? 물론 그렇다. 이러한 순간이니까. 그렇지만 일단 도망친 다음에 더 듣자고.

      그러나 공권력이 그렇게 만만한 존재들은 아니다. 탈옥한 장소를 꼼꼼히 살피는 헨켈스의 고개는 여러 방향에 머물러 있다. 그의 시야는 전체에 머물러 있다. 그것이 바로 공권력이다. 하지만 그 공권력 밖에는 가끔 공권력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사적 권력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느새 현장에 들어와 있는 조플링을 헨켈스가 내쫓는데, 조플링을 애초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게 했던 것은 그의 뒤에 있는 한 가문의 가세 때문이다. 어쨌든, 사냥개 노릇을 잘 하고 있는 조플링은 멘들의 양과자 맛을 이미 맛본 상태이다. 너무 몸집이 크고 시야가 광범위해서 우둔해 보이기도 하는 공권력과는 다르게, 훨씬 더 날쌔게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사적 권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권력과 사적 권력의 압박이 강해지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구스타브는 어떻게 다시 한 번 구사일생의 기회를 잡아야 할까? 일전에도 말했지만, 구스타브를 구할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구스타브 자신이다. 그가 이때껏 해왔던 것처럼, 그는 그 자신답게 이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 그것만이 길이기 때문에.

 

 

4부 십자열쇠협회

 

 

      십자열쇠협회는 일종의 예술가 서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무려 다섯 명의 호텔 지배인들에게 연락이 간다. 그 호텔은 모두 아름답고, 각자만의 개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역시 로비보이들이 있다. 아름다움은 그 고유의 씨를 뿌리고 전파되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기꺼이 구스타브를 도와준다. 이들의 권력은 상당히 미시적이라서 소믈리에와도 인맥이 닿는다. 그들이 공권력처럼 대단한 수의 경찰,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움의 영역에선 확실히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들도 어떻게 보면 막강하진 않을지 몰라도 하나의 사적 권력이다. 구스타브에게 무려 향수도 챙겨주는 걸. 비록 조금 소량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들은 분명 그걸 돈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구스타브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애초에 갖고 있던 구스타브에 대한 존경심이 구스타브를 살렸다.

      잘 생기긴 했지만 예술에 관심 없는 드미트리가 그림이 바뀐 것을 아는 것도 드디어 이맘때쯤이다. 도대체 여자 성기가 다 보이는 동성애 춘화랑 얌전한 소년이 사과를 든 그림이랑 바뀐 걸 이때껏 알아채지 못한 건 대체 뭐란 말인지. 그만큼 드미트리가 '예술적인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드미트리 본인한테서는 수컷냄새가 풀풀 난다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그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들의 폭력성 자체가 또 다른 종류의 매력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중 아름답지 않은 존재는 없다. 위험한 악당도 어떤 의미로는 아름답긴 하다. 모든 생명이 갖는 의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의 취향 차이와 윤리적 문제가 걸릴 뿐이지. 애초에 조플링이 모는 오토바이부터 장난이 아닌 걸.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하이라이트는 역시 이 산꼭대기 정상에서의 활극일 것이다. 서지의 메모를 바탕으로 모든 인물들이 모여드는데, 물론 우리의 구스타브는 향수를 꼭꼭 뿌려주시기 때문에 그 냄새를 만인이 알아챈다. 그리고 서지를 찾아 제로와 구스타브는 산꼭대기 위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 부분의 아름다움을 문자로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우선 음악부터 그들의 활극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수도사를 처음 만나는 부분은 케이블카의 중간에서이다. 케이블카가 멈추어서 끼익-거리는 소리가 음악과 조화를 이룬다. 그들은 수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계속 올라가게 되고, 수도사 옷을 차려입게 되며, 심지어는 그들의 음악까지 참여하게 된다. 대충 그렇게 수도사 4명을 거쳐 그들은 고해성사를 하러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서지와 만나게 된다. 그들의 급박한 만남에서 그들은 서지가 사본을 챙겼다는 중요한 비밀을 접하게 되지만, 그 순간에 서지는 살해되고 만다. 조플링 역시 수도사 복장을 차려입고 어느새 들어와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키, 썰매 추격전을 벌이게 된다.

      이 부분 역시 놀라운 영화적 기교를 자랑하는데, 이 장면을 미니어처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작업이 매우 번거롭고 수고로웠을 것 같다. 그러나 고생한 값어치를 한다. 상승에는 수많은 버퍼링과 반복이 걸렸지만, 내려갈 때는 씽씽 무지막지한 속도감을 자랑한다. 산에서의 활극은 감옥에서의 탈출처럼 순조로우면서 동시에 여러 과정을 거치는데, 확실히 현실감을 주는 요소는 아니다. 맨 처음에 작가가 분명 우리는 놀랍게도 현실에서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받는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영화적 처리는 그 진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바로 핵심이다. 우리의 기억, 우리가 갖는 현실이란 것을 생각해보자. 어차피 우리의 관점이라는 하나의 예술이 모든 현실적 순간들을 윤색하고 왜곡한다. 그 의미부여는 한때 사실이었던 것을 환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예술은 우리의 인생이 바로 그러한 것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은유이다. 우리는 항상 예술적 삶을 살고, 그렇기에 환상과 세계는 구분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스키를 타고 내린 조플링과, 절벽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구스타브가 마지막 위협 앞에서 시를 읊조리는 장면은 기가 막히다. 구스타브는 자신의 인생을 수없이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인간 유형이다. 그는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해내며 자신의 삶을 클리셰가 아닌 살아있는 창조물로 만들어낸다. 그가 갖는 소시민성을 그의 그러한 예술성이 압도한다. 그리고 그의 예술성은 그 자신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순간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의 미적 자식이자 형제인 제로가 선방을 날려 조플링을 ‘제거’해버리는 것은 통쾌한 한 방이다. 그들의 예술성이 드디어 그들의 의지를 위협하는 하나의 의지를 제거하였다.

      공권력이 때마침 등장하여 굴복을 권유하지만, 그러한 권유에 제로와 구스타브가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서지를 위한 묵념을 잊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대단원도 하강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5부 두 번째 유언의 사본

 

 

      마지막 전쟁의 시작이다. 팔에 완장이 걸쳐진 군인들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점령한지 오래이다. 자신의 근거지가 그 꼴이 난 것을 보고 통재를 금치 못하는 구스타브. 그의 미학이 사라지고 다른 인간들의, 다른 시대의 물살이 넘실거린다. 이 와중에 최종 보스인 드미트리가 호텔에 들이닥치고, 그는 그림을 빼내는 데 성공한 아가사와 그림을 알아본다. 호텔 6층까지 따라간 드미트리는 아가사와 추격을 시작하는데, 곧 뒤따라온 구스타브와 제로와 맞닥뜨리게 된다. 분노한 드미트리는 총을 꺼내어 발사를 한다. 그리고 곧 한편에서 시작된 총성에 놀란 다른 편의 군사들도 총을 꺼내어 제각기 발사를 하기 시작한다. 전쟁에 대한 훌륭한 은유가 시각적으로 구현되었다.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총질을 시작하고,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에 다 같이 총질을 시작한다. 이 의미 없는 폭력전 아래서 사랑에 집중한 제로는 아가사와 함께 멘들 빵 위로 떨어짐으로써 목숨을 구하고, 그들은 그림 뒤에 숨겨져 있던 두 번째 유언의 사본을 발견한다.

      그 사본은 결국 공권력, 사법부에 의해 인정받게 되고 모든 것은 구스타브의 몫이 되며, 드미트리는 사라진다. 그러나 결말이 해피엔딩인가?

      제로는 후계자가 되었고, 아가사와 결혼하여 몇 년을 살았지만 아가사와 아이는 프로이센 독감이라는 병으로 죽었다. 역시, 현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아무리 아름답고 용감한 존재라도. 그리고 전쟁이라는 커다란 물살로 인해 공화국은 사라졌다.

      구스타브는 언젠가 벌판 앞에 선 기차에서와 똑같이, 똑같은 선택, 똑같은 행동을 한다. 참 변함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그의 아름다움조차 그를 구해주지 못한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 때가 그의 마지막인 것이겠지. 시대가 변한 것일까? 글쎄. 그렇지 않다. 어쩌면 영화는 이 부분에서야말로 흑백화면을 통해 이것이 현실이고, 진실임을 말해준 것일지 모르겠다. 운이 좋았던 어느 날의 그 기분 좋았던 때가 아닌, 우리를 먹어 삼켜버린 잿빛 하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우울한 사실. 아무리 우리가 아름다움을 쫓아도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생존을 언제나 보장받을 수 없는 때가 존재한다는 비참한 진실. 그의 죽음이 나오지 않은 것도, 그의 죽음을 영화처럼 다루지 않은 것도 감독의 그러한 슬픔에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감독은 예술인의 입장에서 구스타브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어찌 되었건, 여전히 호텔에는 그림이 매달려 있다. 적자를 감수하고서도 지키고 있는 이 호텔에서 무스타파의 뒷모습은 살짝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그는 구스타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 아가사와의 추억을 위해 이곳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스타브와의 기억은 그에게 아마 이젠 방법론적인 문제, 그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 자신에게 녹아든 무엇일 것이다. 구스타브의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미적인 노력이 무스타파의 몸에 베인지는 오래였을 것이라 본다.

 하지만 무스타파에게 몸에 베인 것과 다른 문제인 것이 사랑이다. 그것은 기억이다. 한 사람과의 우정과 의리를 통해 배운 것들이 몸에 남은 것과는 다른 문제로, 이젠 가버린 영원한 순간을 영원하지 못한 것으로 잡아두려는 애탄 노력. 그렇기에 호텔은 낡아가고 있고, 마찬가지로 무스타파 역시 늙어가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그가 우울해 보였던 이유일 것이다.

 

 

   노작가의 집은 새로 페인팅 중이다. 과거를 다 말한 그의 곁에는 손자가 있다. 새로운 희망이 이어지고 있다. 창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운 것을 쓰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변에서 창작의 방법을 찾아나간다. 작은 순간순간에 있어, 항상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는 우리의 방법을 지향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술이다.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채워나가는지, 어떻게 그려나가는지가 문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창작의 요소를 현실에서 채워나간다. 그 방법은 영화감독으로라도 좋고, 가정주부라도 좋고, 호텔 지배인으로도 좋고, 빵 굽는 사람으로도 좋고, 한 사람의 애인으로서도 가능하고, 한 사람의 친구로서도 가능하다. 그것 역시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 우리는 어차피 언제나 우리만의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간다. 말했듯이, 클리셰로 남든 클리셰를 벗든 그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겠지만. 어차피 모든 사람이 알아봐 줄 필요 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아봐줄 지기를 찾는다면 될 문제이다.

 

      묘지 안의 여자가 책을 다 읽고 덮듯이, 스크린에 배우들의 이름이 하나씩 올라간다. 두 번 본 것을 다시 볼 필요는 없겠지. 나 역시 영화를 다 읽었으니 이제 나가야 할 차례이다. 새로운 순간이 이젠 기억으로 다시 전환되고, 이제 다시 이곳에 나의 기억 조각 하나를 남기고 떠나련다. 길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새로운 나를 찾아, 새로운 순간을 창작하기 위해 간다. 안녕,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 존재들을 위해 축배를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양연화 (1disc) - [초특가판]
왕가위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화양연화,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이야기.

 

  영화의 맨 처음 도입부 삽입된 문장을 보면서부터, 이 이야기가 바로 당신의 이야기임을 직감하게 된다. 꽃문양 치파오를 입은 고전적인 수리진과 1900년대 어느 시기의 서양문명의 혜택을 입었을 주모운이 좁은 공간에서 마주치지 않고 계속 한 공간에서 떠돌고 있다. 같은 아파트로 이사한 그들은 각자의 배우자 없이 짐을 옮기고 있다. 일본 서적인 남편 책 때문에 처음 얼굴을 보게 된 그들은 건조한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그들의 관계는 바로 그 만남 같다. 그들 서로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항상 다른 이를 전제하는 관계.

  아슬아슬한 음악 위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천천히 얼굴이 나오지 않는 두 배우자와 주인공들의 동선을 따라간다. 그 안에 정서가 농축된다. 그 누구도 어느 누구의 심리에 관심 없이 마작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불안하고 아슬아슬하며, 암시한다. 이 영화는 언제나 그렇다. 불륜관계인 것처럼. 누구 하나 노골적이지 않다. 누구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솔직히 표현할 수 없다. 그러기 전에 도망간다.

  언제부터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걸까? 전기밥솥의 값을 나눠주기 시작한 때부터일까? 아니면 맨 처음, 서로 눈길이 맞부딪친 그 순간부터? 알 수 없다. 수리진과 주모운의 인연은 배우자들의 외도로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배우자들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역시 암시만 될 뿐. 배우자들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언젠가부터 바람을 피우는 배우자들의 거짓말들이 우리의 눈에도 보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 거짓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수리진과 주모운을 이어준다. 한 눈에 봐도 습해보이는 홍콩, 착 달라붙은 치파오는 여성의 뒷모습 특히 매력적인 엉덩이를 강조한다. 음식을 기다리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계단을 올라간다. 우리는 치파오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수리진의 어딘가 헐거워 보이면서 동시에 연약해 보이는 얼굴은 우리의 시선을 치파오에서 얼굴로 부드럽게 채간다. 주모운은 그 곁을 지나갈 뿐이지만, 카메라의 시선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은 우리에게 채워진 허공을 가리킨다. 수리진과 주모운이 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에게 연결되어 있는 무채색의 감정 선을 본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서로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는 그러한 순간. 서로를 의식하는 것이 강하게 느껴지고, 피부로만으로 알 수 있는, 그러나 그렇기에 기피하는 순간.

  우선 모든 것을 떠나서, 어쨌든 수리진은 남편의 곁에 있는 부인이다. 1960년대 홍콩, 그 좁은 아파트 공간 옆집에서 일어나는 강탈행위 앞에 그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꼭 서로 뒹구는 것을 볼 필요 없이 진실을 직감하는 순간이 있다. 그 진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남몰래 울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는다. 바람난 배우자한테도, 그 상대자에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옷을 잘 차려입은 채 걸어 다니고, 하루하루 살아갈 뿐. 그러나 그녀가 점점 연약해지고, 텅 비워지는 것이 보인다.

  주모운에게 이 상황은 어떤 것일까? 아내의 바람 앞에서 그는 딱히 상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단조로운 가정을 꿈꾸며 황홀한 쾌락보단 사소한 가치를 지키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일까? 그는 수리진에게 다가간다. 아니, 수리진도 주모운에게 다가간다. 누가 먼저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둘이 붙여두면 서로를 본능적으로 탐하게 되는 관계. 사회적으로 어떤 관계인지, 어떤 기반 위에 있는지 고민도 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끌림을 느끼게 되는 관계들. 그리고 가끔 그러한 관계들 중 몇몇 개는 사회의 냉혹한 눈초리를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건 끌림보다 분명 약해 보인다. 적어도 맨 처음,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감정을 눈치 채기 전까지는. 잠시의 지연, 사건과 알려짐 사이의 아주 잠깐의 허용된 순간, 매우 불안하게 떨리는 그 나뭇가지 위에 이 가련한 새들은 관계의 둥지를 짓는다.

  우선 그들은 서로의 배우자가 그들 뒤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가간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된 관계와는 다른 관계가 주는 낯설음이 불편하다. 오래되고 안정된 관계가 주는 강점은 비단 사회적 인정에만 달려있지 않다. 오랜 습관은 마치 그것이 당연한 선함인 듯 굳어진다. 흐물흐물한 무엇이라도 오래 두면 딱딱해지는 것처럼. 그들이 계속 이야기하는 주제는 서로의 부인과 남편에 대한 것이다. 박완서의 한 단편 소설이 생각난다. 아마 ‘그리움을 위하여’ 같은데, 오래 남편과 살다 사별한 한 할머니는 새로 재혼한 할아버지와 서로의 옛날 배우자에 대해 수다를 떤다. 그들은 질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상대방의 옛날 배우자는 단순히 사랑의 대상만이 아닌 상대방을 형성한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모운이 스테이크를 위해 떠다주는 겨자소스는 아마 그의 아내가 좋아하는 소스일 것이다. 수리진도 그것을 안다. 그 사람의 굳어진 습관, 그 사람의 배려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통 정상적인 관계에서라면, 그러한 것들을 하나하나씩 자신에게로 맞추어 나간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그들이 의식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환경 때문에 정상적일 수 없다.

  수리진이 너무 슬퍼보인다. 그래서 아름답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무조건 아름답다. 화양연화의 순간을 담아냈기에. 주모운과의 관계는 자신의 배우자들의 불륜 관계 때문에 생긴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그저 핑계에 불과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이미 이 관계는 다른 이들의 존재가 너무 크다. 안정적인 사랑을 위해서라면 나와 너만이 있어야 하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들의 관계에는 나와 너만이 아닌 나와 너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크다.

  예를 들어, 만약 영화를 좋아하는 보통의 성인 남녀라면, 자연스럽게 영화관에서 영화를 같이 보기로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그것이 가능해 보이지도 않고, 딱히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들 눈을 신경 써야 하니까. 그들은 그저 안전한 공간들에서 만난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황폐한 거리. 그러나 그 안에서 그래도 애정이나 호감이 싹트긴 한다. 아주 조금씩, 아주 조금씩 피어서 그러지. 그러나 걱정과 불안, 초조함으로 인한 담배 연기가 훨씬 더 짙게 피어난다. 그리고 그게 그들의 사랑이 꽃 피우기도 전에 씨앗을 갉아먹는다.

  결국 일이 하나 소소하게 생긴다. 소소해보이지만, 사실 작지 않은 일. 그 둘은 아파트 한 공간에서 있다가 밤을 새며 마작 하러 온 사람들 때문에 갇히게 된다. 그러한 불편함은 어떻게 보면 그 둘에게 있어 재미난 추억을 만들어 주었겠지만, 다르게 보면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점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괜히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 같아요.”

  “우리가 결백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죠.”

  “절대 잘못되어선 안 돼요.”

  그렇다, 그 절대 잘못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 그들 마음 안에 있는 불안함과 위태로움이 그들의 가장 큰 독이다. 잠은 오지 않는다. 그들에게 결혼, 그리고 평판, 현실은 중요하다. 어른이니까.

  그 둘만의 아지트가 생긴 이후, 그들은 주체할 수 없이 서로에게 시간을 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 그 자체가 그들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만든다. 그들은 아무도 자신을 안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두가 보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흔적을 남긴다. 범죄에 베테랑이 아닌 이상, 그 모든 흔적들, 그리고 여기서 흔적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감정의 흔적들 역시 강하게 남는다. 그것 역시 당사자들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옆에 있는 제3자도 안다. 하나의 사랑이 싹트는 것, 그 남녀의 숨기지 못하는 얼굴의 환희를. 그리고 소문은 그 환희의 정도에 따라 짙게 혹은 옅게 퍼진다.

  행복함, 그 둘만이 전유하는 행복함이 불안을 없애주지 못한다. 행복해지고, 사랑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면 열릴수록, 소심한 남자는 더욱 불안해진다. 더욱 무서워진다.

  사람들은 여전히 지켜본다. 결국 수리진은 아파트 주인에게 한 소리 듣게 된다. 나가지 말라. 남편에게 출장을 덜 다니라고 해라. 어떤 의미인 것일까. 이러한 말이다. 다 안다, 수리진. 무심한 남편 때문에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 여자인 너는 자제해야 한다. 여기 이곳, 한심하게 늙어가는 우리들 사이에서 마작을 구경하고, 밥을 먹어라. 불나방처럼 굴다가는 모든 것을 다 잃을 테니. 그리고 그 간접적이고, 걱정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지 날카로운 메시지는 수리진의 심장을 꿰뚫고 간다. 다만 두렵고, 무서워질 뿐.

  수리진과 주모운은 이별 연습을 한다. 이별을 또 연습할 것은 무엇이람. 그런 것은 그냥 소나기 오듯 찾아오던데. 수리진이 운다. 눈물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저 표현이고, 표출이다. 이미 다들 마음속에서 안다. 서로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올 일은 오니까.

  시간은 계속 간다. 헤어짐 이후, 몇 년 뒤.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하지만 다른 시간 차이로 스쳐지나간다. 닿으려고 하는 시도가 있지만, 다시 한 번 시도하진 않는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아쉬움의 탄성이 날까? 아니, 나는 그렇지 않다. 그 누구보다 가슴의 열정이 큰 사람이라도 자신의 열정을 꺼트릴 강한 바람, 차가운 물 앞에서 계속 불탈 수는 없는 법.

  그리고 1966년, 시간이 또 간다. 수리진은 옆집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감정이 살아난다.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 자신의 아들과 머무르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찾아온 주모운. 그녀가 사는지도 모르고, 수리진이 그랬던 것처럼, 옆집을 보며 옛날 기억에 사로잡힌다. 또 그렇게 스쳐지나간다.

  그는 머나먼 곳까지 가서 자신의 비밀을 놓아두고 온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한 것일까? 누군가한테 하고 싶었지만 차마 못한 말인 것일까. 헛된 상상은 의미 없고, 여전히 모든 것이 희미하다. 우리 모두는 영화를 보듯 자신의 일생을 보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의 비극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놓치니까. 아니, 사랑이 될 수 있었던 것들을 놓치니까. 어안이 벙벙한 채로,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잘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채로. 그와 내가 만나고, 사랑하려면 가장 좋은 최적의 조건, 시간, 공간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채로. 그 가능성이 조그마한 양촛불처럼 타고 있다고 믿은 그 때는 그저 아름다운 순간으로 남고, 사랑은 시작조차 해보지 못한 채로 꺼진다. 그러나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듯이, 모든 것은 그저 가능성으로만 남는다.

  그가 그립고, 그녀가 보고 싶다. 만날 순 없다 해도, 그 감정들이 죽지 않는다 해도, 손에서 떠난 순간은 우리로부터 저 멀리 도망간 이후며, 그리고 그 때로부터 떨어져 온 나는 계속 그 사람의 존재를 아득한 꿈처럼 그리워만 한다. 언젠가는 희미해지겠지. 그것만을 바라며. 슬픈 감정이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벌레처럼 자라나 언젠가는 나비처럼 날아가기만을 바라며.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한, 그와 나의 순간은 영원한 화양연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마를 보았다 (2disc)
김지운 감독, 이병헌 외 출연 / 플래니스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전체적인 이야기가 다 담긴 글입니다. 안 보신 분은 안 읽으시길 권장합니다.)

(지속적으로 문장 비문 수정, 표현 가다듬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이 영화를 보기 최근 한 달 동안 나는 영상에 빠져 있었다. 하루에 거의 한 편씩 보며 영상 속에서 기쁨을 찾던 어느 날, 결국 나는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제목, 음산한 기운, 잔혹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망설여졌던 찰나, 나는 이 영화를 재생하였다. 그리고 보는 내내 이 영화를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고, 불편했다. 한때 어린 나는 강하고 잔인한 영화를 잘 보는 것이 무슨 대단한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철없이 굴었건만, 이제 나이가 좀 들었다고 이런 영화를 보는 것이 버거웠다. 한숨과 또 이어지는 한숨, 끝나지 않는 김수현과 장경철의 지난한 이야기와 그 결말에 나는 이해할 수 없이 막연한 어둠에 사로잡혀 이 영화를 계속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는 영화를 제대로 사고할 수 없었다. 뿌연 연기 안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하나의 사소하고 사적인 일이 생겼고, 그 일에 마음을 빼앗겼던 나는 우연히 '악마를 보았다'를 다시 떠올렸다. 영화에 대한 단상과 나의 사적인 일에 대한 단상이 마치 끊어졌던 붉은 실이 다시 만난 것처럼 합쳐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일말의 사적인 통찰을 통해 이 영화의 불쾌함과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흐린 연기 때문에 무서워서 차마 들어가지도 못하다가 결국 등불 하나를 손에 들고 깊은 밤의 숲으로 발을 간신히 디디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영화를 제대로 보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 장경철과 태주가 바로 그러한 인물들이다. 살육을 즐기는 자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평소에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산다. 그런 사람들의 존재를 의식하면 우리는 이 사회 밖에 나가서 살 수 없다. 무서워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괴물 같은' 인간들은 분명 존재하고, 그들은 우리를 분명 노리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들의 존재가 우리의 부정보다 앞선다. 김수현과 그의 약혼녀 주연은 그런 의미에서 운나쁜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잘 조우하지 못하는, 살육을 쫓는 미지의 존재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해 참혹한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김지운 감독은 김수현과 주연을 같은 카메라 시야에 담은 적도 없다. 그들은 그저 느끼한 전화 통화 하나로 보여졌을 뿐이다. 감독의 관심사는 전혀 사랑이나 로맨스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깔끔한 전개는 오히려 효과적이다. 빠르게 전개되는 그 속에서도 우리는 장경철을 잡고 풀어주는 김수현의 심리에 공감한다. 장경철은 보통 인간 사회에서 사랑 받을 수도 없고, 보듬어 줄 수 없는 인물이며, 보듬어서도 안 되는 인물이다. 흔히 밥 먹여주고 거두어주면 기운 내서 주인 물어버리고도 남을 개새끼를 이야기하는데, 장경철이 바로 딱 그런 짐승이다. 인간의 도리를 알지 못하는 인간, 광인이라는 칭호를 받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우리에 의해 비정상의 너머로 가버린 이해받을 수 없는 괴물이다.

  이 영화는 비극이다. 철저한 비극이다. 복수극이 아니다. 약혼녀 주연의 상실을 과연 김수현이 보상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불가능하다. 주연은 무슨 짓을 해도 살아돌아 올 수 없다. 주연의 여동생이 김수현에게 전화로 호소한 것을 보라.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김수현은 괴물 흉내를 내서라도 자신의 약혼녀인 주연이 받은 괴로움을 돌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말했듯이, 이 영화는 복수극이 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김수현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져 아름다운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아리따운 아가씨가 참혹하게 조각내어 죽는 그 고통도, 그 어느 것도 그 어떤 것으로 보상 받을 수 없다. 피 1.5kg를 피 1.5kg로 교환하고자 하는 자리가 아니다. 고통 받았다면 그것은 김수현과 주연이 보통 사람들이고, 보통의 아름다움과 미래에 가치와 기대를 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사회의 건전한 한 구성원으로 산 것이 그들이 한 행위의 전부였다. 

  장경철을 보라. 그에게는 그 어떠한 것도 가치없다. 그에게는 먹고 자고 섹스하는 것만이 전부이다. 놀랍게도 그것만이 전부이며, 다른 존재를 괴롭히고, 착취하고, 죽이는 것이 즐거움이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든 이해할 수 없다. 그가 무엇에 가치를 두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김수현은 그것을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할 수 없다. 장경철이 무엇을 잃어야 김수현이 사랑을 잃은 그 고통만큼의 상실감, 한 여자가 느껴야 했던 신체의 고통, 미래 박탈의 어두움을 채울 수 있을까? 

  없다. 장경철에게 그 정도 가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그가 이 세상에 부여한 가치란 없다. 만약 있다 해도 김수현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김수현은 단 한 번도 장경철의 시선에 서본 적이 없다. 그저 그 흉내만 내었을 뿐. 김수현은 장경철의 욕망을 끝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복수란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으며, 김수현은 맨 처음부터 진 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결말을 보며 정확히 그러한 생각을 했다. 그가 결국 생각한 것의 최대치란 것은 결국 장경철의 가족이 장경철을 죽이게 하는 정도였다. 

  만약 정말 똑같은 복수를 해야 했다면, 장경철의 가족을 장경철 앞에서 죽여야 했던 것 아닐까? 그러나 김수현은 그럴 수 없었다. 여기서는 니체의 격언도 부족해진다. 심연을 바라보았고, 심연도 그를 바라보았지만, 김수현은 심연 그 자체는 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장경철의 죽음을 장경철의 가족들로 하여금 시행시켰을 뿐이다. 역시,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는 말이지만, 복수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감독이 이것을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죽이는 것이 여전히 복수라고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영화의 이야기에서 복수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실, 복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김수현이 한 짓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엄청나게 큰 의미가 있다. 김수현이 장경철을 죽이지 않은 덕분에 여러 명의 여자가 살았고, 어쩌고 저쩌고 같은 것은 그저 발생한 결과를 수식으로 붙인 것에 불과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장경철 때문에 김수현이 잠을 잘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약혼녀를 잔인하게 죽인 그 놈을 붙잡기 이전에는 절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러한 존재가 지구상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그 자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전히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이상, 그는 자신의 복수가 철저히 실패할 것이고, 사랑한 사람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는 자신이 이러한 복수를 성공시킨다 하더라도 영원히 마음에 큰 구멍이 남아 휑한 바람만 불어 우울함과 괴로움 속에서 살게 될 것임을 알았어도 장경철을 잡아서 괴롭히고, 고문하고, 죽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능력만 된다면 김수현처럼 복수를 선택할 것이다. 이 영화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받은 것을 언제나 되돌려주고 싶어한다. 여러 이유로 우리는 보복의 욕망을 참는데, 자신의 안전을 굳이 복수한다는 미명 하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서거나 혹은 기분은 나빴어도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넘겨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고통과 쾌락에 분명히 반응하는 살아있는 동물들이지만, 고통과 쾌락에 언제나 격렬히 반응하지는 않는다. 무시할 만한 것들에는 무시한다. 그러나 감각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반응은 격렬해지고, 어떤 것들은 그 흔적이 평생을 가간다. 우리는 그 흔적이 즐거움과 쾌락일 경우에는 추억이라고 부르지만, 고통일 경우에는 영원한 보상과 벌충을 필요로 하는 악몽이라 부른다. 

  사실 굳이 살인과 범죄라는 극한 경우를 가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김수현과 같은 상황에 항상 놓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 역시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해 의도치 않게 혹은 의도한 바대로 피해를 줄 때가 있다. 가끔 어쩔 때 보면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장경철의 짐승 같음에 치를 떨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어떠한 지점에 치를 떨기도 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그러한 일들이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하면 현실부정이 된다. 그러나 존재가 당위를 앞선다. 그러한 존재들은 분명히 있고, 그러한 경우들도 분명히 있다. '악마를 보았다'처럼 무서운 이야기말고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한다고 해도, 그 존재가 꼭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비극적인 일이지만 말이다.

  이 세상은 그렇게 불공평하다. 왜 주연처럼 예쁘고 창창한 아가씨가 그런 짐승 같은 놈의 손에 의해 참혹하게 죽어야 했는가?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일어난 일이다. 왜 그와 내가 헤어져야 했는가? 왜 그녀는 나를 떠나야 했는가? 내가 그렇게나 잘해줬고, 우리는 정말 즐거웠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일어난 일이다.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보상받고, 받은 아픔을 되돌려주기를 원한다. 내가 쏟은 만큼 돌려받고, 내가 일한 만큼 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그 불공평함에 우리는 분노하고 좌절하고 울게 되고, 심지어는 잠도 못 이룬다.

  그래서 아주 재미나게도,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때에 우리에게는 김수현에게 닥친 것처럼 선택권이 생긴다. 이러한 일들을 깔끔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내버려둔 채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그저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인정할 수 없는 부분에 치열하게 그리고 독하게 도전하든지. 김수현은 후자를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잠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지금 안 하면 밤에 잠을 못 잘 것 같고, 영원히 후회할 것 같고, 마음 속에 천불이 일어나 이 천불로 인해 내가 죽을 것 같으면 무조건 해야 한다. 그래야 그 선택에 의미가 생겨난다. 그리고 가치도 생겨난다. 게다가 아주 드문 경우지만 심지어 생각지도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물론 이 영화의 경우에, 김수현의 경우에는 기적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의 결말은 눈물 뿐이었다. 친절한 금자씨의 결말처럼, "수현 씨는 그토록 원하던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했다." 사실 기적 없고, 아무 일 없이 예상했던 수순으로 흘러가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이다. 하지만 어쨌든 천불에 의해 집어삼켜졌고, 괴로워졌을지라도 김수현은 이제 잠에 들 수는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주연의 가족마저 다치고 죽었다 하더라도, 그 인간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김수현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수현은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 일을 한 것이고, 그렇게 복수의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장경철을 죽였다. 김수현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다.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그렇게 무슨 일이라도 하면 혹여 누가 아는가? 저 멀리 저승길에서 오르페우스의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죽은 자가 산 자로 돌아오는 기적이라도 생길지?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며 이 사회 그리고 세상의 불공평함, 불공정함, 무심함이라는 악마를 본다. 그러나 악마를 보았다 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면 도망조차 치지 못한다. 언제나 행위하는 것이 행위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적어도 잠에 들기 위해, 후회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천에 하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벼랑 끝의 거센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 같이 있을 '변화' 혹은 '기적' 혹은, '구원'을 위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기덕 감독의 활 - 할인행사
김기덕 감독, 전성환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김기덕 감독의 영화 「활」은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이다. 극 초반, 카메라는 푸른 바다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큰 배 한 척을 잡는다. 영화는 겉만 보았을 때는 평안하고 아름다운 영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배 안에는 욕망이 강하게 도사린다. 카메라의 담담하지만 집요한 응시, 강한 욕망과 염원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영화가 바로 이 「활」이다.

      이 영화에서 중심인물은 할아버지이다. 그는 일곱 살짜리 소녀를 데려와 대략 십 년 동안 키웠다. 그는 소녀가 열일곱 살이 되면 결혼할 계획을 하고 있다. 그의 모습은 언뜻 보면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잠든 소녀의 길이를 줄자로 재고, 일 나가기 전에 소녀를 위해 상을 차려주는 그만의 보살핌은 따스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는 달력의 하루하루를 빨간 펜으로 지워나가며 소녀와의 결혼을 기다린다. 할아버지는 소녀를 닦아주고, 같은 공간에서 매일 잠을 잔다. 그러나 언제나 소녀의 손을 꼭 잡기만 할 뿐 그 이상의 성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에게 소녀는 지켜줘야 하는 신붓감이다. 심지어 소녀에게 손을 대기라도 하면 배를 찾아온 낚시꾼들에게 경고의 활을 쏘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소녀를 자신과 배라는 일종의 팬옵티콘적 구조에 가두어 둔 상태이다. 절대적 보호자인 자신이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응시한다.

      그러나 팬옵티콘의 죄수와도 같은 소녀는 자신이 응시의 대상인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할아버지와 소녀는 세상과는 다른 질서를 가진다. 그 둘의 관계는 외부인들에게 의심과 편견이 가득 찬 판단하는 시선의 대상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소녀는 서로 바라보는 방식에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는다. 사회의 도덕질서가 적용된 시선을 갖게 된다면 할아버지와 소녀는 그 배에서 같이 살 수 없다. 존 버거의 보는 방식이 말하는 것처럼, 할아버지와 소녀는 외부인들과는 다른 사회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외부의 윤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둘의 관계가 일반인들과 다름을 묘사하는 부분은 할아버지와 소녀가 치는 활 점을 보여주는 데서도 나온다. 활 점을 치는 방식은 위험하다. 방법을 대충 요약해보자면, 소녀가 그네를 탈 때 할아버지가 활을 쏘아 부처 그림을 맞춘다. 할아버지가 활을 세 번 쏘고 있는 동안 소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유혹하듯 미소 짓는다. 활 점을 치고 난 후의 결과는 소녀가 할아버지에게로, 할아버지가 다시 활 점을 의뢰한 사람에게 귓속말로 전달하며 이루어진다. 요컨대 소녀와 할아버지의 소통은 다른 이들이 큰 소리로 감히 들을 수 없는 것이며 소녀와 직접 소통하는 것은 할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허락받지 못한 일이다. 소중한 신붓감이 할아버지와 나누는 교류의 정점이야말로 활 점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남성의 근원적 욕망을 대변하는 할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팬옵티콘이며 소녀를 자신의 것으로 교육시킨 내용 그 자체이다.

     혼인 날짜가 다가오던 어느 날, 외부 세계에서 젊은 대학생이 오면서 이들의 세계에는 균열이 가게 된다. 대학생은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외부 세계의 질서를 대표하는 그는 할아버지에게 소녀를 놓아달라고 항의한다. 대학생의 말들은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의 시선을 상징한다. 그뿐 아니라 소녀의 자발성으로 유지되던 팬옵티콘도 소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객체성을 깨고 여자로서의 주체적인 시선으로 대학생을 응시하기 시작하며 완벽히 불안해진다. 할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이 된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애욕은 이를 불쌍하게 여긴 소녀가 결국 그와 혼례를 올리고, 배 위에서 죽은 할아버지의 영혼과 섹스하면서 해소된다.

     이 영화에는 남성 위주의 욕망이 극단적으로 녹아 들어가 있다. 할아버지가 만든 배 위의 팬옵티콘적 세계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만들어놓은 사회 구조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남성들은 능동적인 시선으로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구속한다. 여성은 그에 길들여져 있으며 담담하고,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소녀와의 성적 결합을 지향하는 할아버지의 욕망은 그 위에서 정당성을 갖게 된다. 할아버지가 소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동등한 존재를 바라본다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정권을 가진 그에게 소녀는 자신의 감옥에 갇힌 죄수이자 신부이다. 그런 그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며, 배신행위이다. 그들의 관계는 명백히 불평등하다.

     배 위에서는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남성 전체의 욕망의 시선이 담겨 있다. 다른 남자들에게 역시 소녀는 응시의 대상이며 특히 그녀의 젊은 육체가 그렇다. 그들에게 그녀는 늙은 남자의 애첩에 불과하며, 철저한 소유물이다. 그녀를 만지는 그들의 손은 인간이 아니라 장난감을 만지듯 거침이 없다. 단지 할아버지라는 주인에 의해 제지될 뿐이다. 그녀를 그나마 욕망의 시선보다 동정이라는 애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젊은 대학생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그녀가 오줌을 싸는 모습, 목욕을 하는 모습을 훔쳐본다.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유일한 여성인 소녀는 모든 남자들이 탐내는 여성의 파편화된 육체이며 불타는 욕망의 대상이다. 그녀의 신체는 남성들이 갖는 절시증의 대상이며, 육체적 욕망을 이룰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 소녀는 심지어 팬옵티콘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욕망을 풀어주어야만 한다.

     영화 「활」의 결말에서 소녀는 팬옵티콘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아버지를 진심으로 동정해야 했고, 할아버지에게 자신을 바쳐야 했다. 소녀를 가지고 싶어 한 할아버지의 욕망은 그로써 해소되고, 비로소 소녀의 탈출을 용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인간의 욕망에는 구원이 필요하며 그를 위해서는 여성의 성이 필요하다는 메시지이다.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카메라의 시선 역시 철저한 일방향이며 인간으로 설정되는 유일한 주체가 남성뿐임을 전제한다. 팬옵티콘은 영화 속의 인물만이 아니라 영화 외부의 세계에서도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속에서 여성은 영원한 응시의 대상, 절시증의 수단이며 주체가 될 수 없는 객체이고 무엇을 선택하든 남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자발적인 구원자도 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는 할아버지라는 남성의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외부세계로 나간 소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팬옵티콘임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