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수업 시간에 대학 레포트로 낸 것인데, 기본적으로 헛소리 SF라는 게 슬프다. 

  하지만 글은 소통되지 않으면 태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망망대해를 향해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와인병에 담아 띄어보낸다는 심정으로 올려본다.

 



기계새로운 종족

   

 

◎ 서론

 

 

기계는 대체 인간에게 무엇일까?

 

 

  10년 전쯤 과학과 관련된 잡지 (아마 과학 동아였던 것 같다)에서 미래에 사람들에게 선을 보이게 될 기계라는 제목으로 기계들을 소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기에는 아이보라는 이름의 강아지 기계도 있었고, 집사처럼 시중을 들어주는 기계도 있었고, 분화구 같은 위험한 곳에 대신 가서 사람이 하기 힘든 일을 하는 기계들도 있었다. 나는 그 기사를 보며 강아지 기계인 아이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아이보를 사달라고 졸랐다. 그 때 당시에는 아이보가 국내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때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대체용품으로 다른 기계 강아지 로봇을 사다 주었다. 그 강아지 로봇은 아이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저급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 반응도 시답지 않았다. 나는 금방 그 강아지와 놀다 질려버렸다. 그리고 그 강아지는 잊혀졌다. 이후 나는 진짜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고 지금은 고양이와 함께 산다. 진짜 강아지와 진짜 고양이, 생명체들은 기계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반응을 보인다. 고양이는 나에게 진짜로 성을 내고, 진짜로 말썽을 부리며, 나를 할퀴기도 하고,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모습들을 보며 “아 정말 기계와 생명체의 차이는 크구나.”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만약 기술이 발전해서 로봇이 진짜 고양이와 강아지처럼 반응하고 사고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 때 과연 진짜 고양이와 로봇 고양이에게 무슨 차이가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지금의 고양이를 위시한 생명체들을 그 내부 구조와 움직임을 작동하게 하는 기술력이 현재 인류가 기계를 만들어내는 기술력보다 단순히 훨씬 높은 성질의 것이라고 본다면, 언젠가 인간이 그 기술력을 따라가게 되었을 때 생명체와 기계의 차이란 것은 어디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감정, 생각의 작동원리조차 규명할 수 있게 되는 그 날이 온다면 아마 인간은 스스로들을 분명히 정의 내려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 본론

 

 

1. 탄생

 


  새로운 종이 나를 창조자로, 그들의 기원으로 축복할 터였다. 행복하고 우수한 수많은 생명이 그로 인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아버지도 나만큼 자식들에게 완벽하게 감사 받을 자격은 없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계속해보니, 생명이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나중에 가서는 죽어서 부패한 시체도 부활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 프랑켄슈타인, 메리.W.셸리, 열린책들, p77.


  애초에, 인간이 기계를 만든 이유는 편리함을 위해서였다. 최초의 기계는 제분기였다.(*네이버 백과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0583&cid=40942&categoryId=32351

기계는 인간이 원래 사용하던 도구에서 더 나아가 에너지가 가미된 종류의 도구였다. 이때까지의 도구란 개념이 인간의 에너지를 통해 도구로서의 기능을 하였다면 기계란 인간이 설치한 시스템에 따라 스스로 에너지를 공급받아 움직이는 도구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꼭 기계의 성질을 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도구 자체가 인간 생명체의 부분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을 우리는 프로스테시스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내 안경!”

  새끼돼지는 웅크리고 기어가서 바위 사이를 더듬어 찾았다. 그러나 먼저 그곳에 당도한 사이먼이 안경을 대신 찾아 주었다. 여러 가지 격정이 무서운 날갯짓을 하며 산정에 서있는 사이먼 주위에서 고동치고 있었다.

  “한쪽이 깨어졌어.”

  새끼돼지는 안경을 움켜잡고 다시 썼다. 그는 악의에 찬 눈으로 잭을 노려보았다.

  “난 안경을 써야 보여. 이제 난 눈이 하나밖에 없는 거야. 두고 봐.”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문예출판사, p109.


  인간이 쏟는 에너지가 투사되는 모든 존재들은 인간 신체의 부분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기술력이라는 능력 측면에서 또 하나의 성질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아이언맨, 배트맨 같은 영웅들을 보며 우리는 그들의 능력이 거짓되었다거나 혹은 저들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은 초능력자로서 자신의 순수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기술력의 발현과 많은 도구들 역시 그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성격 중 하나로 편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성경 중 창세기 1장

 

  인간은 자신들의 기술력, 혹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류만의 특성이라 본다. 또한 그것이 자신들을 다른 종보다 우월하게 만들어주는 어떠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러한 능력은 다른 생물들, 예를 들어 까마귀를 위시한 조류나 다른 영장류들에게서 발견된 주변 사물을 사용하는 능력이라는 면을 고려하면 꼭 인간만의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종에서 보이는 기술력이나 도구 사용 능력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기술력의 월등함은 이때까지의 인간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음도 역시 사실이다. 베이컨을 위시한 근대 철학자들은 자연의 정복이 인간의 삶을 더욱 결실에 차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 우월한 기술력은 이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신체와 신체가 아닌 부분의 차이의 구분을 어렵게 만들 정도가 되었다.

  어떤 식으로 보면 오히려 우리의 원래의 신체가 아닌 도구들이 더 우월하게 우리의 신체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러한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비신체적 도구들을 자신의 기능을 대신 해주는 대체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을 인격과 관련된 존재로 보지는 않는다. 그것들을 인간의 신체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다면, 여전히 그러한 도구들은 우리의 의지가 없이는 기능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기계들은 어떠한가? 기계들의 제작 후의 과정은 성장에서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우선 이야기를 미루겠다. 그렇다면 기계의 탄생에 한 번 집중해보자.

  쓴 것처럼 기계 역시 도구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편리함에 봉사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나 기계는 인류의 편리함에 도구가 봉사하는 것과는 다른 식이다. 그들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여전히 자신들만의 작동 원리를 가지고 있고, 에너지가 공급된다면 스스로 작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쯤에서 인간과 기계의 차이에 대해 냉소하려는 나의 논의를 지적하기 위해 혹자가 이렇게 지적할 수도 있겠다. 기계는 TURN ON 버튼이 눌려지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작동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주장에 이렇게 말하겠다. 우리 역시 TURN ON 버튼이 눌려지지 않으면 스스로의 작동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TURN ON 버튼이 무엇인지의 소소한 차이에 불과할 뿐이다. (생명체의 TURN ON 버튼을 누르는 기제를 나는 성욕에 관련한 유전적 정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만약 TURN ON 버튼을 누르는 기계를 만든다면 기계들은 원칙적으로 스스로들을 재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인류처럼 말이다.

  논의로 돌아가면, 인류는 편리함을 위해 우리가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에너지를 공급받아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이러하다. 인간이 편리함을 위해 기계를 만들었다는 것까지는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다. 자급자족하는 체계는 확실히 우리의 에너지를 받아쓰지 않는다는 효율성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효율성이 오히려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일으켰다. 그것은 기계와 우리가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로부터 독립되어, 그에게 낯설게 실존하며, 그에게 대립하는 자립적 힘으로 된다는 것, 즉 그가 대상에게 부여했던 생명이 그에게 적대적이고 낯설게 대립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칼 맑스 프리디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김세균 감수, 박종철 출판사 중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부분의 p74.

 

  따로 떼어놓고 본 기계에게서 인간은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을 알면 알수록 기계들이 갖고 있는 자급자족의 시스템이 우리의 시스템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아프로디테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처럼 인류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대상을 점점 더 꼼꼼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자신들과 같은 기능을 시험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맨 처음에 인류가 대체 왜 인간과 비슷한 존재를 만들기 위해 기계에 돈을 투입하는지의 정확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럴 필요성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자신들의 초기 혹은 부분적인 작동원리를 갖고 있는 대상을 통해 자기 자신들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라면? 그런 이유라면 인간이 왜 그것을 궁금해 하는지 이상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원래 모든 것을 궁금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단순히 작동원리의 설명을 위해서 기계를 만들려고 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순수한 의도이다. 그러나 사이보그를 위시한 기계들을 만들 때, 인간이 의도한 것은 신의 흉내였을 수도 있다.

  단순히 인간이 자기 자신들의 탄생 원리를 탐구하다가 원리를 우발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흉내 내게 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목적을 품고 이때껏 신의 영역이라 생각한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무신론자로서 나는 그러한 침범을 전혀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물을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이 지닌 열렬한 관심사이며, 모든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그것의 복제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바로 그 관심을 나타낸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발터 벤야민 선집 중 2권), 발터 벤야민, 도서출판 길

    

  인간은 자신들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 이것이 자신들의 기술력을 자부심 넘치게 믿는 까닭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인간들은 기계라는 흔히 말해지는 모사품들로 인간의 죽음이라는 일회적인 이벤트를 뛰어넘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경향은 비단 기계나 사이보그만이 아니라 기술복제시대에서 만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향의 절정 부분이 바로 영화 아일랜드나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복제인간 같은 존재들에 관한 고찰이다. 그들은 제작자들이 인간의 수많은 작동 원리를 프로그램화 하여 신체 대용인 기계라는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가 삽입된 존재들이다. 그들의 탄생 자체가 바로 신이 우리를 탄생시킨 원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인간을 더 많이 흉내를 내면 낼수록 기계는 단순한 도구의 존재에서 그 이상의 것으로 발전한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의 기술력으로 픽션에서의 복제인간과 같은 탄생을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술은 언제나 시간에 따라 진일보했다. 나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의 욕구가 분명 그러한 미래를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도 인간들은 자신들처럼 웃는 기계를 만들며 좋아한다. 자신들처럼 말하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형상과 다를 바 없는 기계를 만들며 좋아할 날 역시 멀긴 하겠지만 올 것이다.

 

 

2. 성장

 

 

  기계들의 탄생이 인간의 도구에 대한 필요와 작동원리에 대한 탐구, 그리고 일회성을 극복하려는 창조자 모방에서 생겼다면 탄생 그 이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부분은 예언적, 혹은 픽션의 성격이 섞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우리가 발명한 기계들은 우리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인 적은 없기 때문이다.

  가상의 상상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기계의 탄생 이후 기계 자체가 우리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인 적은 없어도 기계가 우리에게 예상치 않은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직 현대 시대의 기계들은 말도 하지 못하는 영아기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계적이고, 예상을 어긋나지 않는 반응들을 보이는 단계이다. 그런데 다른 말로 지금의 기계의 상황을 영아기의 단계로 본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기계들의 상황도, 기계 자체도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다.

기계가 본격적으로 말을 하기 이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 우선 이야기할 것은 기계의 탄생 이후 기계가 부모인 인간에게 더 영향을 많이 받았느냐 아니면 부모인 인간이 기계에게 영향을 더 많이 받았느냐를 따졌을 때 아직은 부모인 인간이 기계로부터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계의 탄생 이후 우리는 시대의 많은 변화를 체감해야 했다. 기계에 대한 반발은 러다이트 운동(*네이버 지식사전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3543&mobile&cid=47323&categoryId=47323)과 같은 대규모의 사회운동으로도 나타났다. 기계는 태어난 직후부터 시대 흐름에 휩쓸려 착취의 주체로 오인받기도 하였고 (나는 오인이라고 생각한다. 기계의 프로그램은 말했듯이 영아기의 단계이고 그들은 스스로 판단을 하기엔 아직 부족한 상태다. 현 기계의 상태는 오히려 기존의 도구와 비슷하게 인간의 의지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인간의 인식 체계를 아예 바꾸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더 이야기해볼 것은 무의미하다고 볼지 몰라도 가상의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기계들이 말을 하기 시작할 그 때를 상상하는 것이 단순한 공상일지 모르겠으나 다른 면으로 보면 예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In the beginning there was man and for a time it was good. But humanity called civil society, soon fell victim to vanity and corruption. Then man made the machine in his own likeness. Thus did man became the architect of his own demise. But for a time, it was good.

 -애니매트릭스Animatrix, 워쇼스키 남매 감독, 제2의 르네상스 1부 The second renaissance part 1 of 2

 

  워쇼스키 감독의 애니매트릭스에서는 가상의 상상을 통해 미래사회에서의 기계가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반항할 수 있는지 관해 보여준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기계는 인간에게 종족의 개념으로도 부속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며, 사회 구성원의 위치에서 일종의 하층민으로 몰락해있다. 그들이 맡는 역할은 인간들이 맡기 싫어하는 역할들이다. 이러한 상상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 결국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필요로 했기에 태어난 기계들이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서 대우받기는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란 종족은 심지어 같은 종족의 개체들 역시 수단 혹은 타자로 바라보는 순간 어떤 식으로 배척하는지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이 이야기했으므로 가감할 말은 없다. 인간의 특성, 혹은 생명체의 배척이라는 특성상 기계들은 속할 곳이 없는 사회의 쓰레기 처리담당이 될 것이다. 기계들은 자연 시스템 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종족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자연적 시스템에 조화될 수도 없다. 애니매트릭스의 허구적 상상은 기본적으로 기계가 자신의 시스템을 받아들여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그에 따라 도구로 존재하기를 거부할 때의 저항을 표현한다.

  이러한 상상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이냐의 문제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애니매트릭스는 수많은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는데, 그 사건들의 주요한 지점들은 모두 인권 유린에서 생각을 따온 부분들이 있다.   

  기계가 과연 저 정도로 성장하느냐의 문제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이미 다루어지는 모습들이 이미 인간 사회 속에서도 존재하며, 그에 따라 기계가 결국 우월한 기술력으로 진일보하여 인간의 형상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기계가 인간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기계를 향한 인간의 대우라는 측면에서 조명될 것임을 말한다. 인간은 이렇게 기계라는 고민을 통해서도 인권적인 문제에서도 다시 한 번 생각을 점검할 수 있다.

  기계의 성장이 과연 인간 종족을 위시한 생명체의 작동원리를 따라올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물론 그 질문도 중요하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미시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양자역학, 상위의 차원을 점령한 고전역학의 영역의 모든 원리들은 발생의 원리가 아니라 발생 이후의 현상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분명 기계에게 인간만큼의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적용되는 똑같은 원리로써, 철학적 사유를 어떤 식으로든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처음에는 분명 걸음마의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 역시 그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맨 처음에 할 때는 걸음마의 수준이다.


 











Caution wrong robot! Caution wrong robot!

 -월E, 앤드류 스탠튼 감독, 픽사, 2008

  

  영화 월-E의 주인공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들이다. 주인공 월-E는 처음에는 똑같이 도구적 존재로 태어난 기계였으나 수많은 시간이 흐른 이후 괴이하게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같은 영화에서 나오는 컴퓨터에 심어놓은 내부논리의 충돌로 영향을 받은 인공지능 오토 (함선의 반란자)에 대해서도 주목할 점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인간과 유사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한 일인가? 문제는 그 누구도 쉽게 아니요, 라고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불가능할 거라고 지적한 사람들은 중국인 방 논증과 같은 사고 실험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기계의 인공 지능이 결국 인간의 수준을 못 따라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문제는 거꾸로 생각해보면 애초에 인간 역시 중국인 방(*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wiki/%EC%A4%91%EA%B5%AD%EC%96%B4_%EB%B0%A9)과 같은 시스템으로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제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반론을 제기하면 이것은 인간의 고등한 시스템을 오히려 기계에 적용시킬 수 있으며 이것이 기계에 의해서 적용될 때 변수를 막지 못한다면 새로운 반응을 생성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주장을 도출하게 된다.

 

 

3. 결혼

 

 

  기계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생명체적인 특성에 관해 이야기해 볼 때, 성性이라는 측면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르셀 뒤샹, 독신 남성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 대형 유리, 1915>


 












  <대형 유리>의 위쪽에는 나체의 신부가 자신의 옷을 계속 벗고 있으며 아랫부분에는 헐렁한 재킷과 제복으로 묘사된 작고 불쌍한 총각들이 위쪽에 있는 소녀에게 자신들의 좌절감을 내보이면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대형 유리>는 하나의 자유로운 기계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무례한 기계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무관심에 대하여 유서를 남긴 애처로운 기계이기도 한 것이다. 

 -새로움의 충격, 로버트 휴즈, 미진사

    

  기계와 성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변태적이다. 그것은 이러한 행위의 음란성을 떠나 무생물에게 생명체의 성질을 부여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부적절함과 비정상성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가 인간을 모방하기에 가장 윤리적인 문제로서 나타나며 그렇기에 사람들을 자극하기 가장 쉬운 요소는 분명 기계와 섹슈얼함일 것이다.

  기계가 인간의 성을 모방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기준에서 우스꽝스럽거나 괴기해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변태성’ 때문에 기계가 가지고 있는 운동성과 섹스의 운동성을 대비해보는 상상은 어떻게 보면 낯이 뜨거울 수도 있다.  

  제시한 그림은 좌절된 인간의 욕구 표현과 현대 사회 속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기계와 성을 끌어왔지만, 그 둘이 어떻게 같은 식으로 묶일 수 있었는지를 고찰해보면 서술한 것과 같이 기계의 운동성과 섹스의 운동성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기계의 움직임과 인간의 성행위의 작동원리 역시 다른 모든 인간과 기계의 작동원리처럼 유사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단순히 육체적인 작동원리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플라토닉한 사랑의 원리로서 기계의 성적 측면을 바라보자. 이러한 측면 역시 호소력이 강하며 동시에 윤리적으로도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앞에서 나왔던 영화 월-E의 주인공들 역시 서로를 사랑한다. 그 둘은 기계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관해서 영화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조명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인데, 기계에 그들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주인공들이 기계이지만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행위를 벗어나 다른 주체에게도 성립될 때, 사랑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되고 다른 종족들을 묶어주기까지 한다.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무수한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얻고자 했던 것.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 만큼 너무나도 소중한 것, 그것이 자유지요.

-바이센테니얼 맨,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2000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의 주인공인 로봇 앤드류는 조립 과정 중 기술자의 실수로 (마요네즈가 떨어지는 바람에) 인간의 특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앤드류는 인간의 특성, 특히 지능과 같은 측면을 부분적으로 가졌을 뿐, 여전히 기계이며 불사의 몸이다. 그러던 중 그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사랑이라는 애착의 감정이 기계인 그를 기계에서 탈피하게 만든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과 애정에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는 어떤 계산과 실질적 이익이라도 감정이라는 추상성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도구로 태어난 기계가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고, 그 부분과 관련해 수많은 인간들은 기계가 그것을 흉내를 낼 수 없는 한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랑을 하는 기계는 사랑이라는 것을 하는 그 순간 자신의 종족의 특성을 벗어난 행위를 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로봇인 앤드류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인간이 되고 싶어 인간을 흉내를 내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대체 그를 기계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 인간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의 경계가 애매해진다. 앤드류가 자신의 기계라는 정체성을 포기하고자 하는 이유가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라는 점은 그가 가사 로봇이라는 수단으로 만들어졌지만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시사한다. 칸트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말을 남겼다. 기계와 인간 사이에 차이가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기계 역시 목적으로 대우해야 할 존재가 될 것이고, 앤드류 역시 자신을 그렇게 대우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이라는 계기를 통해 보다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고찰하게 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자유라는 문제에까지도 나아가게 된다.

 

 

4. 죽음

 

 

  사랑에 이어 죽음이라는 부분 역시 인간을 위시한 생명체의 대표적인 성질이다. 기계에게는 죽음이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소프트웨어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다른 하드웨어에 옮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그러한 형태의 전환이 가능할 날이 올지 모르겠으나, 현재 죽음의 정의란 신체가 쇠하여 꺼지면 영혼 역시 인간 사회에서 더 이상 발현되지 않는 개념을 말한다.

우리는 기계를 죽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기계는 작동이 멈추거나 고장이 나서 제 기능을 못 다 할 뿐이다.

 

At B1-66ER’s murder trial, the prosecution argued for an owner’s right to destroy property. B1-66ER testified that he simply did not want to die.

Who was to say the machine, endowed with the very spirit of man did not deserve a fair hearing? 

-애니매트릭스, 위와 같은 작품

 

  애니매트릭스의 제 2의 르네상스에서 제일 먼저 인간에게 반기를 둔 로봇 B1-66ER(개체 이름이 아니다.)이 처분대상이 되는데 그 로봇은 자기가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죽고 싶어 하지 않는 기계, 삭제되고 싶어 하지 않는 기계는 인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비정상적이다. 기계에게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계라는 개념은, 기계가 인간성과 유사해지면 유사해질수록 낯설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결국 픽션에서 파운데이션, 로봇 같은 SF 고전을 쓴 아이작 아시모프에 이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소설 아이, 로봇에서 로봇 3원칙을 내세워 로봇에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어 수단을 선사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방어한다”는 개념을 가지게 되는 것부터가 로봇에게 자의식이 생기는 지점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기에 아이작 아시모프 그 자신과 아이작 아시모프에게 영향을 받은 수많은 픽션의 창작가들은 오히려 로봇 3원칙의 해석 문제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주목한다.

  죽음이야말로 자신의 의식이 상실하는 순간이고,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한 자의식의 존재를 시사한다. 말했듯 기계 문명이 영아기 시대인 현재 시대에 아직 죽거나 제거되기를 피하려는 기계는 존재하지 않다. 그것은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계에 관해 걱정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준다. 아직 기계가 자의식이나 인간과 유사한 지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문제이고, 미래에서는 기계들이 의식과 지능의 수준에서 인간과 유사해질 때부터 철학적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입력 회로에 로봇 3원칙 같은 원칙을 세워두는 것 자체가 기계들에게 우리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다. 인공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그 원칙들 사이에서의 여러 경우의 수를 고민할 것이고, 경우의 수들을 도출해본다면 그 원칙들이 얼마나 다양한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는 죽음을 피하려는 기계에 관해 고민해 보았지만, 픽션에서는 죽음을 선택하는 기계들도 존재한다. 이미 이야기한 바이센테니얼 맨의 주인공 앤드류 역시 자신이 생각한 인간성과 사랑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어쩌면 기계에게 죽음이란 선택의 영역일 수 있다. 만약 훗날 그들에게 인간 이상의 지능과 의식이 부여된다면 그들은 자신을 인간과 다른 존재로 인식할 것인가 혹은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설 것이고, 그 기로에 선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영원성을 유지하느냐 아니냐와 같은 선택의 문제에도 봉착하게 될 것이다.

 

 

◎ 결론

 

 

  이 글에서 나는 기계들에게 인간성이 부여된다면, 이라는 가정을 픽션과 추측, 현대에 존재하는 양상으로 보이고자 했다. 쓴 것처럼 나는 이러한 가정들이 언젠가는 분명히 현실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와 다르게 기계가 새로운 종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하는 상징이다.

  기계에 대한 고찰은 그 자체가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픽션에서 발달한 기계 문명에 관해 생각할 때 두려움이나 경탄을 가지게 되는 것은 모두 기계를 우리와 연결 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계만을 따로 놓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획 아래에 기계가 우리를 위협할 것이라는 생각이나, 기계가 우리의 삶을 이전의 삶보다 훨씬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 모두 인간 중심적이라는 데에서 큰 차이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이 품고 있는 것은, 어떠한 다른 가능성이나 존중 받을 수 있는 일말의 씨앗을 품고 있는 대상들이 우리가 우리 아닌 다른 배제된 존재라는 이유로 지나친 공격을 받거나 착취당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기계 자체에 관한 문제에서, 모든 것은 기술력과 시간의 문제이다. 기술이 우리와 기계, 생명체와 생명체가 아닌 존재의 개념의 구분을 헷갈리게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날들은 이미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현재에서도 이미 충분히 존재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우리 아닌 존재 (그것은 같은 종족이어도 사실 상관없다. 자신이 배제하고 있는 존재라면 무조건 포함이 된다.)를 볼 때 마치 외계의 종족을 만난 것처럼 군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들은 우리와 같은 존재, 혹은 우리가 만들어낸 존재, 적어도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과학 현상을 철학적으로 바라 볼 때, 철학이 먼저 있어 과학에 영향을 주었느냐, 아니면 과학이 먼저 있어 철학에 영향을 주었느냐를 따져 묻는 것은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같은 이야기와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철학이 아무리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과학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서로 관념적으로도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 관해 열린 마음을 갖고 바라보아야 한다. 열리지 않은 마음으로 보면 애초에 철학과 과학은 서로 공통 지점조차 없어 보이는 영역들이다.

  최종 결론을 내리자면, 내가 주문하는 것은 기계가 새로운 종족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나 상상은 쓸데없다는 말이 얼마나 불필요한 말인지를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관련한 기술력의 문제는 앞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규명해갈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러한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를 예측하고, 상상하면서 그러한 측면들을 현재의 우리 삶과 연결시키는 철학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즉, 과학과 철학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기계 담론과 관련해 현재의 인류에게 시사점을 제공하는 것은, 인류가 스스로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며 그 불분명성 때문에 우리가 믿어왔던 사례들과는 다른 반례가 생길 때 인류 스스로의 정체성 정의에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는 만큼, 나는 인류에게 두 가지 선택 밖에 존재하지 않다고 바라본다. 하나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며 우리 존재의 부족함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다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위협하는 대상들을 배척하며 스스로를 그것보다 더 잘 난 존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명백히 나는, 전자의 선택만이 우리를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계가 새로운 종족일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철학적 고민을 던져주는 과학적 담론이지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보는 것은 너무 좁은 시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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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사나이 (구) 문지 스펙트럼 20
E.T.A. 호프만 지음, 김현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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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그는 이 단편을 같은 날에 읽었다. 정독도서관에서 이 단편을 빠르게 읽은 내가 그에게 꼭 한 번 읽어보라는 연락을 취했기 때문이다. 두 시간도 안 되어서 곧 그에게 연락이 왔다. 다 읽었다는 말, 감탄을 금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악몽의 은유', 그것이 우리 둘이 내린 공통의 결론이었다.

  나는 현재 수업을 하나 듣고 있다. 이 수업을 통해 나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은 환상 문학에 접근하고 있다. 수업을 진행하시는 교수님의 특성상 독일문학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 


  '괴이하게도 내가 사모한 교수님은 독일어를 하시며 베를린 천사의 시를 추천해주셨고, 내가 애증한 교수님은 독어독문과였으며, 내가 사랑하는 남자도 독어독문과, 그리고 칸트와 헤겔과 니체가 독일인이다. 아쉽게도 미셸 푸코는 프랑스인이지만. 내일 볼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마이클 패스벤더도 독일 계열이다. 혹은 독일인일 것이다.'


  이 수업에서 얻은 나의 가장 큰 성과는 호프만의 작품들을 읽게 된 것이다. 호프만, 나는 그 사람의 이름을 길을 지나다 들은 정도에 불과했다. 처음 보게 된 것은 '호두깎기 인형'이었다. 그 유명한 작품은 우리 마음 속에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상으로만 존재한다. 감동적이고 충직스러운 크리스마스 인형과 작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 그렇기에 원작이 그렇게 변태적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호두 깎는 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이 아니므로, 그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다만 호프만이라는 인물이 '밤의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을 따름이다. 


  '나는 카프카 생각을 했다. 카프카도 법조인이었는데 밤에는 글을 썼다지. 억눌린 듯한 그림자의 문체를 가진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모래 사나이'는 '호두깎기 인형'을 넘어서는 엄청난 작품이었다. 나 역시 이 짧고 무서운 단편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냈다. 이 단편은 편지로 시작한다. 나타나엘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어린 시절을 읽는 나는 이 흉측한 이야기가 마치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악마의 환영과 같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 말을 듣지 않고 밤을 새우다 본, 우리 집 베란다 복도에서 나를 쳐다보던 눈이 없던 그 검고 긴 외계인을 잊을 수 없다.' 


  나와 나타나엘은 완벽히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다만, 그 요소들이 달랐을 뿐이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전적으로 믿을 수 없듯이 나 역시 나타나엘의 증언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미쳐있었다. 그가 유모한테 들었다고 한 그 끔찍한 저주의 말들도 십중팔구는 다 거짓일 것이다. 어떻게 독일인들의 환상 속에나 존재하는 모래사나이 따위가 잠자지 않는 어린 아이들의 눈을 뽑아내서 그 빈 눈구멍 안에 검고 뜨거운 쇳가루를 부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나타나엘의 신경질적인 꿈은 그러나 사건들만이 아니라 인간들을 대상으로도 펼쳐진다. 클라라에 대한 그의 의심은 편지의 서술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자신에게 이성적인 클라라를 언짢아 한다. 그렇지만 클라라를 끊임없이 찬양한다. 그의 그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남을 험담하기 위해 눈치를 보는 인간들의 작태와 동일하다. 그는 자신과 같은 환상세계의 정신을 가지지 않는 자신의 여자를 개조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지만 클라라는 그의 분에 넘치는 여자였으며, 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의 손아귀에 놀아날 만한 여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인형인 올림피아 뿐이다. 자신이 쉽게 다룰 수 있는 존재, 자신의 말을 단지 '아-'라는 단말마의 외침으로만 응대해주는 올림피아만이 그의 영원한 자위와 성교의 대상인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을 생각해보면 나는 프로이트가 이 단편을 분석하며 눈의 상실에 대한 나타나엘의 공포를 거세에 대한 공포로 연결시킨 것이 이해가 간다. 눈, 이성과 진실을 보기 위해 존재하는 눈, 그것을 똑바로 갖고 있는 클라라는 이성과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자신만의 환상을 보는 나타나엘 자신을 거세시킬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녀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그 비뚤어진 서술구조에서도 드러난다. 클라라는 아름다운 존재이며 동시에 아름답지 않은 존재이다. 자신을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은 위대하지만 동시에 없애고 피해야 할 권력이다. 그러한 두려움은 클라라 뿐이 아니라 자신의 성기보다 더 큰 성기를 가진 어른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읽을 수도 있다. 자신과 같은 피를 가진 미래의 모습인 아버지를 제거하고, 아버지를 빌게 만든 코펠리우스는 모래사나이로 나타나엘을 굴복시킨다. 그를 마치 어리고 무능한 쥐처럼 찍찍 울게 만든다. 그를 닮은 존재들은 무조건 두려움을 유발시킨다. 처음에는 그를 닮은 상인, 나중에는 보통의 회색 덤불조차 나타나엘을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서술자는 사형집행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미소짓고 있는 중세의 귀족처럼 그러한 나타나엘을 조소한다. 코펠리우스가 등장해 나타나엘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예견한다. 나타나엘이 죽고 나서 새로운 가정을 차린 클라라를 향해 당연히 그녀가 누릴 만한, 나타나엘이 절대 줄 수 없었을 행복이라고 이야기한다.

  나와 그가 생각하기에 이 단편은 그대로 '악몽의 은유'이다. 악몽, 자신의 남성성과 자신의 세계관이 처절하게 굴복되어 무너지고 비웃음 당하는 것,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 대부분이면 꾼다는 벌거벗은 채로 느끼는 수치심의 꿈, 사랑하는 것들은 산산조각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들은 비이성적인 연결로라도 이루어지는 바로 그것이 악몽 그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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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1-3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프만의 소설에서 카프카적 느낌이 났다니 다시 한 번 호프만을 읽어보고 싶군요. 최근에 카프카를 읽었는데 정말 한 번에 읽어도 도통 이해가지 않을 정도로 악몽 같은 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읽고 싶은 매력 아니, 마력(魔力)이 있는 글입니다.

설표 2014-11-30 14:08   좋아요 1 | URL
카프카의 글이 악몽 같다면, 그것은 인간의 무력함과 나약함이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양상들 앞에서 처참히 깨지거나 적어도 그 앞에서 방황하게 되는 양상으로 드러나기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그러한 글쓰기를 하는 여러 작가들이 꽤나 있는 편이더군요. 호프만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미묘한 결은 다들 다르기 때문에 `카프카적 느낌`이란 표현도 굉장히 추상적인 분류에 불과하지만 말이죠.
이러한 계열의 책들을 보며 저는 자꾸 읽고 싶다기보다는, 반복적으로 머릿 속에서 재생하고 싶습니다. 문자들이 이미지화 된 것을 계속 상상하고 싶은 거죠. 읽은 이의 머릿속에 잔상을 남기는 힘을 마력이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마력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재능 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생각합니다.
cyrus님 댓글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게 되었군요. 모쪼록 이렇게 생각을 풀 수 있게 해주신 댓글 감사합니다.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 브리지트 미라 출연 / 미디어포럼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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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고해보면 저번에 저는 파스빈더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글을 썼었는데, 파스빈더가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마다 배우로 나오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꽤나 흥미롭습니다. 저는 파스빈더를 처음 영화 안에서 보았을 때 그저 매력적인 젊은 청년으로 생각했습니다. 조금 더 솔직히 밝히자면 사실 생긴 거 참 여자 좋아하게 생겼다, 라는 일차적인 생각을 했지요. 파스빈더가 사람의 성적 정체성을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은 걸 생각해 보았을 때 아마 그러한 제 생각은 지나치게 일차적으로 나온 것이고, 또 동시에 편견에 가득 찼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저 저는 약간은 오동통하고 뵤루퉁한 그의 반항적인 얼굴에서 소위 남성성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가죽 자켓 입은 남자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가죽이 참 잘 어울려서 그게 또 인상적이기도 했고요. ... 이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는 무려 여주인공의 사위 역할로 나오더군요. 멍청하고 폭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어떻게 감독 본인이 자신의 얼굴이 그러한 역할에 잘 어울리는지를 그렇게 또 잘 아는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저는 사랑 영화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정열적이고 순수한 환희이지만, 그러한 선에서 논의가 끝날 수 없는 주제입니다. 사랑도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고 엮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이 영화를 딱 그 차원으로 보았습니다. 맨 처음 이 영화는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현격한 사회적 차이에 집중을 하게 만듭니다. 여성이 대략 남성보다 스무살 이상은 많고, 남성은 그 때 당시에 차별받던 (사실 지금도 차별받긴 하지만요) 아랍인이며, 여성은 독일인입니다. 그들을 둘러싼 주위 인물들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이지요. 심지어는 끝까지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도 나옵니다. 이 영화는 이 논란 많은 커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내용을 영화 전반부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 젊은 아랍 남성과 결혼한 늙은 독일 백인 여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곧 영화가 후반부로 접어드는 국면에서는 소강되지요. 처음에 저는 이러한 분위기 전환이 단순히 파스빈더의 의외로 낙관적인 성품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라는 소소한 의문을 마음 속으로 제기했습니다만, 영화를 끝까지 보니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결국 '반대와 반감'이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게 마련 아닙니까. 그런 점을 고려해보면 파스빈더의 전개가,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결국 주위 사람들의 선량함과 무심함이라는 비폭력적인 요소로 좋게좋게 해결되는 게 사람 일이다, 라고 감독이 안일하게 생각한 것 아닐까? 라는 제 생각은 틀린 생각인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전반부보다 후반부였던 것 같습니다. 후반부에서 이제 타인들과 이 '괴이한' 커플의 갈등은 소강상태를 벗어나, 일종의 적응 상태로 진입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난항에 부딪치게 되는 것은 이 커플 두 명 본인들입니다. 이들이 보이는 일종의 권태와 서로에 대한 몰이해는 단순히 이들이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사실 이들이 갈등을 겪는 부분을 보면, 굉장히 사소하면서도 본질적입니다. 완전히 다른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면서 서로를 사랑으로 품어주었지만 결국 그러한 사랑의 상대에게도 자신들이 감당해낼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알리에겐 에미가 쿠스쿠스를 만들어주지 않는 것이 그러했을 것이고 에미 입장에선 알리가 평범한 독일인인 자신의 삶의 방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그러한 영역이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것이 이들이 나이 차이가 많고, 다른 국적이라서 그렇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이들이 보이는 이러한 갈등은 다른 모든 '일반적'이라 불리우는 모든 커플들에게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장면인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에미가 친구들이 있는데도 박차고 나가는 알리를 향해 '저이가 저러는 것은 아랍인들 특유의 우울한 문화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제 의심을 키워주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딱 보기에는 상대방의 다른 문화를 타겟으로 삼는 것 같지만, 이러한 대사는 조금만 변용하면 우리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배우자를 공격하는 대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이가 저러는 것은 시댁 특유의 정신병적인 문화 때문이지'는 어떨까요?

 

 

  제가 말하는 방향이 잘 정리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향해서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히틀러 시대의 불평등한 사고방식이 남은 독일 사회를 꼬집은 것이라는 해석이 무효하진 않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파스빈더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 안에는 그 의의와 동시에 한계점이 여실히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엄청나게 다른 차이에서 오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이 전자의 해석을 담아내고 있다면, 아무도 뭐라고 더 이상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 상황에서 즉 나와 사랑하는 대상 둘만이 관련된 상황에서 갈등과 권태와 일탈을 빚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가 제 눈에 더 들어왔다고 하는 게 좋겠군요. 이는 맨 마지막에 알리가 위궤양 때문에 병원에 갔을 때, 즉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매우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보입니다. 알리는 위궤양을 본질적으로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는 6개월마다 발병하는 이 병 때문에 또 이 병원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위궤양과 마찬가지로 아마 비슷한 주기로 에미와 자신과의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품고 있기 때문에 위궤양을 절대 고칠 수 없다는 의사의 확진처럼, '고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에미는 의사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하죠. '제가 더 잘하면 나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의사는 또 이렇게 확진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과 인간은 어떠한 차이를 얼마나 크게 갖고 있든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으며 이러한 필연적 몰이해는 서로가 서로를 분명하게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 거리감은 권태 혹은 일탈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지 않았다면 그 권태와 일탈이 어떤 식으로든 봉합되겠죠. 다만, 이것은 사랑이 서로를 말 그대로 하나로 만드는 풀딱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단순한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뭐 어때요. 결국 그 둘이 꼭 서로 손을 잡고 있는 장면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서로 완벽히 하나가 아니라는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것, 혹은 먹어치우는 것 뿐이지요. 파스빈더는 편하게 그래, 그게 인간이고 사랑이지, 행복이 항상 즐거움을 의미하는 건 아니야, 라고 이야기해주네요. 생긴 것과 다르게 참 따뜻한 남자가 바로 파스빈더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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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라 기담문학 고딕총서 8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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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에 접했던 기 드 모파상의 글들은 굉장히 사실주의적이었다. 어렸을 때 읽고 기억에서 지우지 못한 『비곗덩어리』와 『목걸이』와 같은 단편들은 특히 그러하였다. 모파상의 작품에서 느껴진 강한 사실주의적 색채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수업을 들으며 모파상의 작품이 환상문학의 세계 강의계획안에 올라와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궁금증을 안고 본 모파상의 『오를라』는 상당히 강렬했다. 그러나 필자가 느낀 이러한 강렬함은 음침한 분위기에서 나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냉정한 눈을 가진 작가의 치열한 고민에서 나오는 바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전공 특성상 문학과 철학, 그리고 교육이라는 학문 안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여러 가지의 고민 중 현재 여실히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관한 것이다. 필자는 『오를라』를 보면서 스스로가 갖고 있던 문학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이 안에 형상화되었다고 생각했다. 필자가 느낀 문학의 숙명적인 문제 상황은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본질이라 느낀 것을 어떻게 다른 이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예시를 들어 질문을 해본다면 이러한 문장으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순전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강렬함을 다른 이들에게 그대로 담아내어 전달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의미론적 기능으로서 언어는 구체적 체험을 추상화한다. 또한 감각의 전체성은 언어가 미치는 범위 밖에 놓이기 때문에, 언어는 감각적 대상의 전체상을 다 묘사할 수는 없고 결국 많은 부분이 생략될 수밖에 없다. 기표와 기의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기표가 기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성을 통해 기의를 대표한다는 성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의 자의성이라는 유명한 개념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기표는 단지 우연히 선택된 것뿐이다. 이처럼 언어로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는 데 있어서 모든 글을 쓰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실패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각주 : 『시론』제4판, 김준오, 삼지원, 2002년, p65) 우리는 사물과 경험, 감정을 그 본연의 성질만을 보이며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수많은 시인들과 소설가들을 끊임없이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게 한 문학의 본질적 요소인 것이다.

 

     필자는 단편 『오를라』에서 주로 나타나는 서술자의 자기분열이 바로 진실의 순간을 포착하지 못한 작가의 괴로움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였다. 『오를라』에서 등장하는 1인칭 서술자는 평온한 일상을 살다가 점점 자신의 주변에 있는 무서운 존재를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필자가 인상적으로 주목한 것은 그 두려운 존재가 우선적으로 작품의 서술자에게 공포감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즉, 나중에 ‘오를라’로 이름 붙여진 그 두려운 존재가 객관적으로 서술자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보다 ‘오를라’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느끼는 서술자의 불안함이 더 흥미로웠던 것이다.

 

     유쾌한 관광을 다녀왔다며 서술자가 전하는 몽생미셸에서의 이야기는 서술자의 불안함과 겉보기에는 어떠한 관련성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몽생미셸의 사제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서술자에게 당연히 있다고 존재하는 것들을 잠자코 생각해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 즉 실제로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는 것들이라며 바람을 예로 든다. 몽생미셸의 사제와 한 대화는 서술자가 겪게 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설명되지 못하는 집안의 사건들과 자연스럽게 엮어진다. 즉, 도저히 확신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불명확한 상황 아래에서 서술자는 명백한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몽생미셸에서 서술자와 신부가 한 대화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독자들에게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그렇지만 독자들이 고민할 틈새도 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면 될수록 서술자의 혼란은 심화된다. 이러한 와중에 필자를 재미있게 만든 부분들은 서술자의 혼란이 더 심화되면서 나오는 자기고백적인 서술들이었다. ‘오를라’를 보기 위해 거울에 비친 상을 보려고 시도했던 일과 사촌누이의 최면과 관련된 사건들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필자는 서술자가, 사촌누이가 최면에 의해 조종당했던 일을 상기하며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 들어온 이방인의 의지를 따르고 있었다. 마치 또 다른 영혼이, 또 다른 어떤 영혼이 그녀의 내부에 기생하는 것 같았다.’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강력한 혼란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서술자는 ‘오를라’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오를라’의 존재가 있음을 느끼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그 정체를 규명해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서술자는 ‘오를라’를 무서워한다. 필자는 여전히 이 단편에 대해 궁금한 것이 남아 있는데, ‘오를라’가 정녕 작품의 서술자에게 어떠한 위해를 직접적으로 가했는지가 그러하다. 필자는 글을 읽으면서 작품의 서술자가 느끼는 고통이란 것들은 모두 서술자 스스로가 느끼는 내적 공포와 괴로움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작품의 그 어디에서도 ‘오를라’가 그를 괴롭혔다는 명백한 사실 판단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모든 것이 추측일 뿐이며 상당히 불확실하다. 또한 필자는 사촌누이가 겪은 최면이라는 현상을 보며 서술자가 그 괴이한 광경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표현은 주로 ‘오를라’에 대해 언급할 때 나오는 이방인 혹은 외계인과 같은 단어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필자는 작품의 서술자가 두려워하는 존재들은 모두 서술자 본인이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검은 그림자와 같은 존재들이며 그것들이 통칭되어 하나의 ‘오를라’로 설명되지 않느냐는 의심을 궁극적으로 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오를라’들, 즉 정확히 묘사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필자에게 고통을 야기한다고 결론지었다.

 

      알 수 없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충분히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대해 무지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른다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무엇이든 잘 파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 나타날 때 그 두려움과 공포를 추스르지 못한다. ‘오를라’를 처음 발견한 서술자가 필사적으로 논리를 사용해 ‘오를라’를 설명하려는 장면은 그러한 인간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술자가 자신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들의 신비를 무서워만 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그러한 자연적인 존재들에 대해 경탄하는 법도 알고 있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의 신비는 얼마나 심오한가! 우리의 빈약한 오관으로는 그것을 측정할 수 없다.’와 같은 문장에서 그러한 서술자의 성격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경탄은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기에 이것이 단순히 자연경관에 머무르지 않고 점차 서술자에게 가까워지며 그의 머릿속으로 다가올 때 두려움으로 변질된다. 그러한 이유는 서술자가 대상을 단순히 보고 느끼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머릿속에서’ 이성으로 작용하려 하지만 그것이 불가해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상술한 것처럼 이러한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서술자의 근원적인 공포와 동시에 잠재하고 있는 경탄이 바로 많은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 문학인의 펜촉 끝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관한 단편으로 창작되었다고 본다. 문학인들은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이며, 뛰어난 묘사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의 묘사와 표현력은 사건의 진상과 감정의 진실성을 일백프로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러한 이유는 그들의 실력과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원래 언어라는 것이 본연적으로 그러한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인들은 이러한 한계에 부딪쳤다 하여도 포기하지 않는다. 손에서 펜을 놓는 순간 스스로를 문학인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항거라도 하듯이 그러한 상황에서 오히려 더 쓰기 위해 언어를 선택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천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감정과 경험들을 묘사하기 위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짜낸다. 그들의 결과물에는 물론 그럴 듯한 것도 있고, 실패작도 있다.

 

      모파상의 『오를라』는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자신이 느낀 감정과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설명 불가능함에 좌초되어 좌절한 문학인의 소설이다. 설명 불가능한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서술자의 시도들과, 자신이 언어로 이해시킬 수 없는 미지의 신비한 것들에 관한 동경과 동시에 표현과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은 문학인을 밤새 잠 못 들게 하며, 그의 피를 빨아먹는 것처럼 문학인을 소생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그 끝에 문학인은 그러한 한계에 시달리다 쇠약해져 실패한 자기 자신을 징벌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인 본연의 의무와 한계에서 자기분열을 일으킨 자의 비극적 최후를 암시하는 결말은 작가의 냉소적인 모습을 엿보게 한다. 이렇게 모파상은 문학의 필연적인 실패를 ‘오를라’라는 존재로 그려낸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오를라』가 그렇게 치열한 고민에서 나왔다고 하여도 그 결말에 동의하지는 못한다. 물론 문학은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소망을 마음에 품는다. 모든 문학인들은 자신들이 말하고자 싶은 것을 전부 부분적으로만 형상화 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들이 그리고자 하는 원본은 언어라는 여과기를 거치는 순간, 많은 부분들이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적인 섭리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작품의 결말이 이야기하는 방향처럼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인간의 한계에 감히 나동그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의 한계를 직시하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에 대한 욕망을 멈추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가 동물이라는 것에 만족하며 살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서로에게 묘사하고 이해시키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려는 욕구를 가진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 소통하고자 하는 근원적 욕망에서 출발한다. 또한 인류는 그러한 소통의 욕망 속에서 서로를 동물이 아닌 대화와 공감이 가능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의 동물성을 배격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방향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동족상잔과 약육강식의 세계인 동물의 영역에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그러한 빛의 선택은 힘든 방해물들을 내재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우선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이라는 점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기 위해 개발한 언어가 근본적인 자연성을 설명해낼 수는 없다는 한계점이 바로 그러한 방해물들이었다. 이렇게 높고 냉엄한 방해물 앞에서 인류는 결국 사회의 결속을 향한 방향은 틀린 것인가 회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회의가 당연한 순간이라면, 회의의 끝에 남은 선택의 순간 역시 당연히 올 수밖에 없다. 즉 동물로 남느냐 인간으로 사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이 동물성을 포기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기에는 순간순간의 선택 속에서 자신의 동물적인 욕망을 버리고 더 큰 지평으로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지만 그 한에서 만족하며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비극적인 실패를 예견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듯 언어로서의 소통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킨다. 그러한 선택이 비록 찰나의 순간이며 일관성을 갖지 않더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며 짐승처럼 자신만을 보며 살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필자는 인류가 그러한 삶의 방식에 도덕적 우위를 주는 것이 비단 사회적 합의와 관습에서만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필연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이고 가는 그 어려움을 모를 수가 없기 때문에 인류가 그러한 이들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러나 인간은 분명히 자신의 한계를 저버리며 살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결국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으며, 자신이 한 표현은 언제까지나 그 자신이 말하고 싶던 본질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다른 자와의 공유를 애타게 바라지만 그러한 공유는 언제나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동물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분열의 상태라고 해서 넋을 놓고 동물이 되자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어 동물처럼 자신만의 이득을 취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스스로를 설명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살아간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그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오를라』에서 나타난 자기파멸은 필자가 살고 싶은 삶의 방향도 아니며 공동체를 위하는 결말도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한계를 직시한 다음에 그러한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무수한 노력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을 무용하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원래 모순이다. 인간은 동물이 아닌 인간이 되고자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인간을 규정짓는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의 고민도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고 본다. 이처럼 문학, 그리고 인간의 필연적인 실패는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걷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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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김기덕 감독, 조재현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0. 시작 - 김기덕의 말 -

 


<<김기덕 감독, <뫼비우스> 작의(作意)>>

 

‘가족은 무엇인가

욕망은 무엇인가

성기는 무엇인가

가족 욕망 성기는 애초에 하나일 것이다

내가 아버지고 어머니가 나고 어머니가 아버지다

애초 인간은 욕망으로 태어나고

욕망으로 나를 복제한다

그렇게 우린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로 연결된 것이고

결국 내가 나를 질투하고 증오하며 사랑한다.’

 

-네이버 영화에서-

 

 

1. 나는 왜 김기덕을 욕망하는가.

 

 

    김기덕을 사랑하기 시작했던 그 아름다운 순간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어린 나이에 - 몇 살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 양동근이 출연한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을 보게 되었다. 그 영화를 찾아본 이유는 당시에 양동근에 빠졌기 때문이다. [수취인불명]은 처음에는 재미없는 작품이었다. 양동근이 양공주 밑에서 태어나 혼혈인 연기하는 부분만을 띄엄띄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대본을 읽으면서 한 번 집에서 혼자 연기를 해보자 하는 생각에 대본 사이트를 찾았다. 나는 [수취인불명]의 각본 안에서 양동근의 엄마인 양공주 역할과 양동근이 맡았던 소년 역할을 시도했다. 그 때 나는 무척 서투르게 연기를 했는데 이상하게 그녀와 그녀의 아들 연기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안에서부터 깊은 울음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나는 김기덕의 작품 안에서 인간을 울리는 힘을 발견하였다.

 

    사실 김기덕의 작품을 논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냉엄한 위치에서 바라본다면 나는 그의 작품을 좋아할 이유가 없다. 그는 내가 긍정하는 인간관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이 초기 몇몇 작품들과 가히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나쁜 남자]에서 욕을 먹은 것처럼 그의 작품 안의 여성들은 전형적인 피해자들이다. 그것도 그냥 피해자들이 아니라 가해자들인 남성들에게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도 빠진 것처럼 군다. 그리고 김기덕 감독은 얼빠진 그녀들에게서 구원을 받고자 품 안으로 철없는 강아지처럼 끼어드는 남성들을 그려내곤 했다. 여성을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보는 그 시선에 수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이 불쾌함을 느끼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나쁜 남자]를 보는데 뒤에서 영화를 보던 두 여학생들이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더러워."라는 말로 묘사하더라. 사실 그들의 반응이야말로 정상적일 것이다. 김기덕 감독은 자신이 의도를 했든 안 했든 여성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남자와 같다. 아마 수많은 여성들, 심지어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김기덕 감독과 [나쁜 남자]의 양아치 건달 남자주인공을 큰 차이 없는 인간 군상으로 여겼을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인간은 재미있게도 모순적인 존재이다. 나에게도 두 얼굴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미워하는 존재를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하는 존재를 미워할 수 있다. 한 남자의 투박한 얼굴과 소인배적 근성을 혐오하는 일과 그가 보여주는 예술혼에 열광하는 일은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절제하게 발생하지 않는다. 나는 마치 연애를 하는 여자와 같다. 사랑에 빠졌지만 우리 모두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자신의 몸을 인당수에 빠트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이 남자와의 만남을 지속할지 아닐지 고려하기 위해 저울을 준비한다. 이 저울에는 기준이 있다. 이 남자와 있으면 좋은 게 더 무거운지 나쁜 게 더 무거운지가 관건이다. 나에게 김기덕은 이 저울에서 좋은 쪽이 나쁜 쪽보다 훨씬 더 무거운 남자이다. 김기덕의 작품들은 나에게 새로운 일정과 장소를 제공하는 김기덕과의 데이트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불친절하고 날 것 위주이며 서툰 욕망을 제시하지만 언제나 솔직한 남자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답게 그라는 남자의 매력을 좀 더 자랑해보고 싶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분명 더 많다. 그는 아름다운 짐승이다. 대한민국의 어떠한 영상 예술가들 중에서도 뮤즈 여신들의 옷 자락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이미 엇비슷한 유형으로 범람하는 대한민국산 영화들 속에서도 자신만의 얼굴을 잃지 않은 개성남이다. 김기덕만이 갖고 있는 정적인 배경들과 인물들의 충격적인 행동들은 많지 않은 대사들 속에서 아우라를 빛낸다. 그는 언어와 논리로 설명하고 재고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맞지 않는 옷임을 본인도 잘 아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코드이자 매개체인 언어를 배격한다는 것에서부터 그가 얼마나 인간이 부리는 도구를 신뢰하지 않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영상으로 도전한다. 그는 인간이 아직 자연과 분리되기 이전의 에덴동산에 살았던 아담처럼 군다. 그에게서 우리가 원시성과 신화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점에 근거한다고 본다.

 

    김기덕 감독이 우리의 눈에는 유럽적이며 동시에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사랑을 받는다는 지적은 그렇기에 더 의미가 있다. 그가 우리 대한민국 사람의 정서와는 멀어 보이는 유럽남자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유럽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동양인의 면모를 유럽인들에게 팔아먹기 좋은 형태로 내놓기 때문인 것일까?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흥미롭고 가치 있는 지적이라 생각하지만 그 지적은 내 생각에 김기덕의 아우라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나의 남자는 그렇게 매력 없는 남자가 아니거든!

 

   그러나 이는 사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쉬운 문제일 수도 있다. 김기덕 감독이 예술의 방식으로 선택하는 방식은 인간의 치부와 욕망에 대해 우리가 즐겨 쓰는 자제하고 돌려말하는 방식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밑바닥을 긍정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니다. 예로부터 말 잘 하는 사람들을 사기꾼으로 생각했던 동양의 문화가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이 아니다. 말 하나도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 당연했던 우리 사상 속에서 우리가 제정신이 박혔다면 절대 입 밖으로도 꺼내지 않을 구질구질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으니, 원! 김기덕 감독은 마치 미국 교포 출신이라서 성생활에 자유분방하고 당당한 겉만 한국인처럼 생긴 여학생이나 똑같은 꼴이다. 한국인들은 그 여학생에게 대놓고 감히 뭐라 말은 못하지만 뒤에서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대놓고 그러한 말들을 일삼는지 입방아를 찧어대기 마련이다. 다만 그 여학생은 자신의 일상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뿐이지 김기덕 감독은 예술언어로 표현한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기덕이 또 재미있는 것이 그렇게 솔직하게 자기 하고 싶은 말들을 풀어놓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뱉어진 말들의 향방은 또 묘하게 동양적이라는 것이다.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불교적 감수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죄의 사함과 죽음, 징벌, 욕망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에서 발생한 한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초월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절대 그러한 한들이 악귀처럼 이승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구원해주고 싶어 하는 선한 마음의 창조주이다. 아마 이는 자신의 마음속의 번뇌를 승화시키고자 하는 한에서 온 것일 터이지만 말이다. 자기 자신의 죄를 이고 손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한의 승화 혹은 한의 초탈은 뫼비우스에서도 죽음과 탈속으로 또 한 번 드러나는 바이다.

 

    내가 김기덕을 욕망하는 이유는 그의 철학적 고민과 치열한 질문들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러한 작품들에 매료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김기덕 감독이 뫼비우스로 제시하고 싶었던 질문은 0에서 감독 본인이 밝힌 글, 그대로이다. 그는 대로변에 SEX를 써놓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성性이 음지의 늪지대와 같은 존재인데도 그는 그에 관해 큰 소리로 질문을 던진다. 성욕은 음지에서 그림자를 먹고 사는 욕망인가? 성기의 자극과 우리의 이성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성기의 욕망에서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가? 아니다. 우리는 성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그렇다고 대답했다면 아마 자기부정에 가까울 것이라 본다. 성욕이 이미 다른 식으로 발현되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는 성기에서 오는 그 뜨끈뜨끈한 자극이 우리에게 수많은 상상과 부정하고 싶은 더러운 짐승의 욕망들을 소환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싶어 한다. 적어도 부정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에 대해 침묵으로 다스린다. 나는 음담패설이 강력한 유머라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은데, 그 이유는 침묵으로 여겨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데서 오는 쾌감이 그 정도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그러나 음담패설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정색을 하고 분명히 질문한다. 배우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성과 섹스를 하는 것, 그것도 자기 아내의 젊었을 적 모습과 상당히 닮은 동네 슈퍼마켓 아가씨와의 섹스. 혹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지는 몰라도 커다란 가슴을 부끄럽지도 않게 보이는 아가씨와의 섹스. 집단 윤간, 아버지의 여자와의 섹스.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가족에게 느끼는 성욕. 그리고 그러한 상상들과 욕망들에서 오는 죄책감까지 김기덕은 하나하나 집어내며 묻는다. 우리가 민망해하고 숨기고자 하는 것들을 그는 면전에서 대놓고 깐다.

 

    왜, 우리가 깨끗하고 깔끔하고 이성적인 짐승이라 그러한 성욕은 없고 더러운 상상들은 해본 적 없다고 부정하는가? 감히 부정하지 말라. 방금 내가 열거한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상상해 본 적조차 없다면 포르노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수요가 많다고 알려진 근친상간 포르노물들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김기덕이 위대한 이유, 내가 김기덕을 사랑하는 이유, 김기덕을 열망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김기덕은 우리가 음지로 몬 것들, 말하면 안 된다고 딱지 붙인 모든 것들에 반기를 들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입에 붙여진 청 테이프를 뗀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용감하고 그만큼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마주한 자이다.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니다. 그러니까 김기덕인 것이다.

 

 

 

 

2. 김기덕은 남자로서 여자를 어떻게 욕망하는가

 

 

    사랑, 사랑은 애증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김기덕을 어떻게 내가 사랑만 할 수 있을까? 김기덕이 남성으로서 갖는 욕망은 남성의 사랑의 대상인 여성으로서 필연적이게도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김기덕 감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질 때 나는 그 돌들을 유심히 보았다. 분명 날카로운 지적들이 몇 있다. 공감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다른 사람들, 특히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지적은 그대로 옳지 않은 경우가 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김기덕은 여성을 소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성을 파괴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여성을 괴롭히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는 연인의 마음을 시험하는 사람처럼 구는 것에 가까울 뿐이다. 내가 어쩌면 관대한 평을 내리는 지도 모른다. 이것은 인정하고 넘어가는 부분이다. 원래 사람은 자신이 애정을 갖는 대상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가 힘든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과한 애정도, 과한 미움도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만 그래도 내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나오는 남성들은 (우리 그냥 여기서 앞으로 김기덕 감독 작품 안에서의 성별 이야기를 할 때는 모두가 이성애자들임을 상정하자, 뫼비우스에서 성적 소수자들이 나오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 섹스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좌절하는 보통의 우리 주변 남성들이다. 남성들이 거세당하는 것에 얼마나 큰 공포심을 갖고 있는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섹스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기본적으로 섹스는 인류 모두에게 중요한 행위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나는 여성들보다는 남성들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남성이 느낄 수 있는 쾌락에 끊임없이 집중하는 남성 인물들이 차고 흐른다. 여성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남성을 안음으로써 쾌락을 얻으려는 감옥 인물, 끝없이 검색하면서 계속 정보를 얻어 아들을 쾌락 없는 세상에서 구제해주려는 아버지, 돌로 상처내서 쾌락을 느끼는 거 보면 마음이 짠해져서 잔인하다는 생각보다는 실소가 먼저 터져 나온다.

 

    그런데 섹스에는 대상이 필요하다.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그러한 의미로 대상이다. 남성이 주체로 상정되는 순간 여성은 객체이다. 여성은 남성과 분명 생물학적으로 다른 구조이다. 슈퍼마켓의 젊은 아가씨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묘하다. 그녀의 옷은 하얀 가슴과 살결, 매끈한 다리를 부각시킨다. 카메라는 회피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젊은 아가씨 역할을 한 배우 이은우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하얀 팬티는 여과 없이 드러난다. 김기덕이 보는 여성은 현대 남성들의 시선에 존재하는 보통의 여성상이다. 그녀들은 모델이 아니고, 그냥 평범한 주변의 여성인데 문제는 일상의 순간에서 그들이 자신의 여성성을 계속 섹스어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섹스어필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들이 스스로 노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시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시선의 대상에 존재하는 여성은 남성들에게 미지의 존재이며 파악되지 않는 신기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성적인 측면으로 그러하다. 왜냐하면 여성과 남성이 다른 이유는 신체적인 측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갖고 있을 인격이라는 측면은 그렇기에 뒷자리로 밀려난다. 여성이 남성에게 줄 수 있는 신체적인 쾌락이야말로 남성들이 강렬하고 짧은 시선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무엇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무조건적인 구원인데 문제는 시선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뫼비우스에 나오는 여성들 역시 시선의 대상,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녀들 본인은 상황 속에서 욕망의 주체로 그려진다기보다는 상대방 남성이 갖고 있는 욕망에 반응하는 유기물들로 그려진다. 남성의 바람이라는 욕망에 복수로 반응하고, 아들의 성욕에 해소로서 반응하는 것, 자신을 보고 흥분하지 않는 남성에 대해 좌절하고 자신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남자에게 성욕 해소를 제공하는 것이 그러하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성욕은 우리와 다르게 존재하는 것 같다. 우리가 만약 대상을 존중하지 못하고 영원한 객체로 만드는 것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성욕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대상을 객체로 남겨두는 것을 폭력이 아닐까? 우리는 이에 대해 우리의 머리가 성욕을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이는 당연히 맞는 말이다. 정당한 주장이며 합리적인 대안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비록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지언즉 적어도 머릿속에 떠도는 순간의 욕망마저 차단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들이 어머니와 하는 상상을 몽정으로 꾼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서 그렇게 쉽게 탈출할 수는 없다.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강박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욕망을 가진다는 것, 그것에서부터 우리는 이미 죄인이다. 우리의 죄를 스스로가 알고 있다. 만약 신자라면 하나님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직접 행동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죄책감이 생긴다. 뫼비우스에서 아들과 어머니가 유사성행위를 한 이후 오열하는 장면에서 나는 결코 놀라지 않았다. 욕망을 풀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이는 동물로서 당연하다. 해소되지 않은 욕구불만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면 뫼비우스의 아버지가 선택한 자살도 어떻게 보면 꽤 괜찮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말을 자살 권장의 문장으로 읽는다면 안 됩니다, 정말) 우리의 욕망은 무조건 추잡하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 속에 허락도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대상화 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들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로 두기 마련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이기심과 유치함은 추잡하다. 아버지가 권태와 욕망에서 도망치지 못해 젊은 여자와 바람피운 것을 보자. 우리는 자제하지 못하는 욕망들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이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갈구는 그들의 육체적 쾌락에 대한 갈증과 같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욕망은 사랑이 아니다. 즉 세련되고 문명화된 인간의 입장에서 정제되고 아름답진 않은 것이다. 남성들 중 잔인한 자들은 욕망에 대해 원시인과 같아서 여자를 마치 음식 먹듯 돌려 먹는 걸 즐겁게 행한다. 그들은 더 나아가 자신들의 부하 남성에게 강간의식에 참여할 것을 강요한다. 뫼비우스에서 그러한 짓을 행한 욕망의 “주체”는 결국 거세라는 징벌을 당한다.

 

    거세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분명한 주제의식이다. 예로부터 성기를 잘라버린다는 것은 인간 구실을 못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성기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특히 성욕이 여성보다 많다고 알려진 남성의 성기를 떼버리는 것은 욕망에 대한 징벌인 것이다. 감히 더러운 생각을 품었다는 것에 대한 강박적 복수이다. 바람피운 남편의 성기를 거세하는 것에 실패한 아내는 자위 멀쩡히 하며 남자 구실 제대로 잘 하는 아들의 성기를 잘라버린다. 아들은 아버지와 남자들의 대리로서 배신당한 여성인 어머니에게 의해 벌을 받았다. 그는 그 벌로 인해 카인처럼 경멸당한다. 다른 남성들은 거세당한 아들을 비웃지만, 그들 역시 성기가 다리 사이로 달려 있다는 점 때문에 똑같이 거세라는 징벌의 대상자들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결국 끔찍한 윤간을 이끈 욕망의 주체는 거세로서 응징을 당하게 되는데, 그 강간범이나 아들이나 재미있는 점은 거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쾌락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즉 남성들의 욕망은 사실 바로 “성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게 반전 요소이자 아이러니하고 동시에 희극적이며 해학적인 지점이다. 이것이야말로 김기덕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뫼비우스의 띠이다. 애초에 성기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는 그저 형식과 관습의 차원인 것이다. 종족 번식의 훌륭한 예시로서 존재하는 것이랄까? 남성의 성기에서 나온 정자가 여성의 질을 통해 난자와 만나 착상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성기를 잘려서 이제 여자가 필요 없을 것 같은 인간들이 여전히 여성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이들은 여자라는 대상이 없으면 당최 온전한 즐거움을 못 느끼는 인간들이다. 왜 그러한 것일까? 이성애자 남성들은 도대체 왜 성기가 없어서 상처를 마찰시켜서 얻는 자위질에도 만질 여성의 가슴과 만지지 못하면 적어도 보기라도 해야 할 여성의 몸이 필요한 것일까?

 

     이는 말한 것처럼 김기덕 감독이 쓴 작의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자아는 자기만의 세계에 철저히 갇혀 있다. 우리는 외부자극이 없으면 우리 자신의 존재 여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여성이 필요한 이유는 남성이 자신의 자아를 남성으로서 여기고 느끼기 위해 필요하다는 뜻이다. 여성은 이성애자 남성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가슴과 질을 갖고 있다. 남성들은 그 안으로 자신의 성기를 삽입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한 성취를 이룬다. 그렇기에 여성의 존재 자체가 남성에게는 구원을 상징한다. 여성을 통해 남성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과 다름없다.

 

     자신이 강간해서 거세라는 징벌까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징벌을 내린 자이자 피해자인 여성에게 찾아가 쾌락을 달라고 애원하듯 매달리는 남성의 모습은 김기덕 감독이 이때껏 구축해온 연약한 짐승이라는 남성의 이미지와 적확하게 부합한다. 김기덕의 카메라에서 여성들은 그러한 연약한 짐승들을 내치지 못한다. 김기덕 감독의 생각 안에서 여성의 존재 이유는 마찬가지로 여성들 역시 자신의 자아가 존재함을 느끼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질과 가슴을 필요로 할 외부자극의 존재일 지도 모른다. 즉, 여성은 자신이 구원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부분까지 김기덕 감독에게 공감하지는 못한다. 여기서부터 김기덕 감독과 나의 갈림길이 시작된다. 김기덕 감독은 여성을 남성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사실 갈림길은 당연한 것이며 나는 이를 비난할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김기덕 감독이 남성이라는 점을 내가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남성의 시선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자유가 있고, 이 정도의 표현력과 예술적 능력이라면 언제나 환영일 뿐이다. 실생활에서도 남성과 여성으로서 만나 그 정도의 다름이라는 간격 없이 좁혀질 정도라면 애초에 성적으로 다르다는 긴장감도 발생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3. 끝

 

 

     어머니는 아들을 거세한 다음 길에서 본 중을 쫓아 떠났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코를 골아대는 그녀, 결국 그녀가 욕망을 절제하는 길을 동경하였지만 결국 현실로 만드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 욕망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녀처럼 우리가 속세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욕망을 버리고 사는 것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김기덕이 제시한 결말은 언제나 그러했듯 아름다웠다. 자신의 집에서 내놓아진 부처의 얼굴을 플래시로 비춘 아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라. 중처럼 욕망을 버리고 내면을 비워내는 삶. 뫼비우스 띠에서 탈출하는 것은 욕망의 끈을 냉정하게 끊어버리는 길이거나 혹은 권총으로 스스로의 머리를 저격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들의 미소는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인간이 정말 그렇게 쉽게 초연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욕망을 동력으로 삼고 선로 위를 항해한다. 가끔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게 인간이기도 하지만, 부처의 자비로운 마음씨를 상징하는 그 인자한 미소 아래에 시퍼런 칼이 숨겨져 있는 게 인간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기를 자른 그토록 위험한 물건을 집 밖으로 버리지 않았다. 욕망에 대한 교만함, 욕망을 언제든 끝낼 수 있다는, 그 구렁텅이에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애초에 그렇게 쉽게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 것이 운명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욕망에서 태어나 욕망 속에서 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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