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옥같은 대사가 가득한 이 대사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한 건,

이 책의 문을 여는 '작가의 말'이었다.


이십 년째 드라마를 썼다. 살면서 어떤 사랑도 이십 년을 지켜본 적 없고, 소중한 관계도 이십 년 꼬박 한마음으로 숭배하기 어려웠는데, 내가 무려 이십 년간이나 즐거이 드라마를 썼단다. 그것도 준비 기간을 치면 한 해도 쉬지 않고. 참 별일이다.

이젠 간혹 내 기억에서조차 지워진 말들을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조금은 어색하고, 낯설고, 부끄럽다. 내가 한 말들을 내가, 내 삶이 온몸과 마음으로 지켜냈다면 어색할 것도 낯설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겠으나, 말만 해놓고 행동하지 못한 삶이 이러한 민망을 초래하는구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내놓는 건, 자신에 대한 채찍이다.

나이 오십, 다시 돌아보렴, 노희경, 너를!

웃기는 말이지만, 나는 내가 오십까지 살 줄도 몰랐고, 이십 년 지고지순하게 드라마를 사랑할 줄도 몰랐다. 그저 순간순간 살아지니 살고, 쓰고 싶어 쓰니, 이리 됐다. 이 꼴로 가면 앞날도 훤하다. 지금처럼 멋모르고 살다, 가리라. 어려선 이 나이쯤 되면 뭐든 확연해지고, 내 삶은 내가 쓴 한 줄 대사처럼 꿰뚫어질 줄 알았는데… 기껏 혼란만 인정하는 수준이라니, 사는 게 참 재밌다.

대사를 잘 쓰려 애쓰던 서른을 지나고, 말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은 사십의 야망을 지나, 이제 오십의 나는 말 없는 드라마를 쓰고 싶다. 배우의 손길이 그저 내 어머니고, 배우의 뒷모습이 그저 내 아버지고, 배우의 거친 반항이 그저 시대의 청춘들의 고단을 인정해주는. 그래서, 결국 내 드라마에 대사가 다 없어진다 해도 후회는 없겠다.

확신컨대 이 책은 마지막 대사집이 될 거다. 그래야, 중견 드라마 작가로서의 내 꿈이 이뤄지는 걸 테니까. 이 다짐 속에서도 혹여 말로 대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대사를 쓸 땐,
제발, 노희경, 말이 목적이 아니길, 사람이 목적이길.
입을 닫고 온 마음으로.

2015 겨울, 노희경




'어려선 이 나이쯤 되면 뭐든 확연해지고, 

내 삶은 내가 쓴 한 줄 대사처럼 꿰뚫어질 줄 알았는데… 

기껏 혼란만 인정하는 수준이라니, 사는 게 참 재밌다.'

라는 구절이, '그사세' 6부 지오선배의 내레이션을 환기해서 그랬던 걸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놈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법은 없다고.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 억울해 말라고.
어머니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니 다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육십 인생을 산 어머니 말씀이고,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별일이다, 젠장.
(그사세 6부 '산다는 것' 지오 N)





'제발, 노희경, 말이 목적이 아니길, 사람이 목적이길.'
이 부분도 정말 좋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와같다면 2016-02-25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희경작가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거짓말`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작품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