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한 세계의 축소가 다른 세계의 확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확장이 돌발적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축소해야 할 세계와 대비를 이뤄 확장해야 할 세계가 더 또렷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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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이지만, 대개의 취향은 돈을 먹고 자란다. 그 때문에 어떤 취향의 세계가 막 넓어지려는 순간 그 초입에 잠시 멈춰 서서 넓어질 평수를 계산하고 예산을 미리 짜보지 않고서는 성큼 걸어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확장공사 다 해놨는데 잔금 치를 돈이 없으면 그때 가서는 어떡해? 그 돈으로 다른 좋은 걸 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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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취향의 확장과 감당의 깜냥에 관해 생각했다. 그동안 돈이 많이 나가는 취미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던 데다가, 취향이라는 것은 경험, 사유, 지식, 능력, 근육량과 함께 확장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나에게는 새로운 종류의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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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건들은 버리지도 못하고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이어서, 그것들에 대한 모든 언어는 기만적인 것이 된다. 그 물건들, 은밀하고 온전하지 않으며 모서리와 가장자리가 다른 빛깔을 띠고 있는 그 물건들을, 너 자신과 혹은 다른 사람이 볼까 봐 집요하게 감춘다. 진부한 형용사들은 그 물건의 가늠할 수 없는 비밀들, 봉인된 기억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죽음의 편도 아니고 삶에도 가깝지 않은 그런 물건들에 대해서는 어떤 포즈도 취할 수 없다. 응시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도 없다. 사물들의 끈질긴 고독 앞에서 최선의 예의는 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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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에 마지막 카트의 세간들을 버리고 다시 잠자리로 돌아올 때의 느낌은 해방감과는 다른 것이다. 이제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후회와, 결국 더 지니지도 못하고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기이한 자기혐오가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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