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냉담자'이다 못해 성당 근처에 가본지도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가톨릭 신자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 '소녀시절'의 거의 모든 추억이 성당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새 교황이 탄생했다. 요제프 라칭거, 베네딕토 16세. '베네딕토'는 '축복'이란 뜻이라는데 이 사람이 선출된 것은 과히 축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아침 외신기사들을 읽고 스케치하면서 보니 나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자들 중 상당수가 새 교황을 맘에 안 들어하고 있었다. 기뻐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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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생기신 거 봐라... 맘에 안 들지)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을 메운 수십만 순례자들은 시스티나성당 굴뚝에서 새 교황 탄생을 알리는 흰 연기가 피어오르자 “비바 일 파파(교황만세)”, “아반티 파파(교황성하 발코니로 나오세요)를 외쳤다. 새 교황은 발코니로 나와 “우르비 엣 오르비(바티칸과 전세계에)”라는 말로 첫 축복을 했고, 세계 각지에서 온 군중은 환호를 보냈다. AP·AFP 등은 “진보·보수 노선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이번 콘클라베는 역대 최단 시간에 교황을 선출했다”고 논평했다. 이거 이거, 혹시 짜고 친 고스톱 아냐 -_-a

시스티나 성당에서 흰 연기가 피어 오를 때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프랑스도 '한 카톨릭' 하는 나라다. 노트르담 앞에 시민 & 관광객들이 모여서 나름대로 행사를 하고 있었나본데, 외신에 실린 표정이 재미있다. 시스티나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를 때 노트르담 성당에서는 새 교황 탄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광장에 모인 군중은 대형 스크린에 ‘베네딕토 16세’라는 이름이 발표되자 박수를 보냈으나, 일부에선 야유가 나오기도 했다고. 한 미국 여성은 보수적인 교황이 선출된 것에 대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고, 스페인 관광객은 "라칭거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향한 인물" "그의 선출은 진전이 아닌 퇴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말들 잘하네...

어쨌거나 '각국 정상'들은 이런 일이 있으면 메시지 보내는 것이 일이렸다. 재섭기로 소문난 부시는 머라머라 떠들었나 들어봅시다.
부시는 “새 교황은 큰 지혜로 하느님께 봉사하는 분”이라며 “새 교황이 카톨릭 교회를 강하고 지혜롭게 이끌어가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당시 부시는 부인 로라랑 같이 놀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자들한테 지난번 라칭거 설교를 일전에 들었던 얘기를 꺼내면서 "우리 부부는 깊이 감동했었다"고 했다는데, 난 왜 부쉬가 말하면 뭐든지 듣기가 싫을까. 암튼 미 국무부는 정례브리핑에서 “우리는 교황청과 협력, 전세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증진시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공식 환영 논평을 내놨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 아일랜드 대통령과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스페인 총리가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등 각국 정상들의 축하논평이 뒤를 이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새 교황이 평화와 사회정의, 인간존엄, 종교적 자유, 종교간 협력 등의 가치를 강화하는데 기여하길 바란다”는 환영논평을 내놨다는데... 아마 요새 미국에게 목졸리는 아난 입장에선 남을 축하해주고 자시고 할 기분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상들이 지극히 정상스러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한쪽은 한껏 상심하고 있었다.
제일 크게 실망한 것은 중남미. 사실 이 동네가 카톨릭 밀집지역인데 여지껏 교황이 하나도 안 나왔으니 섭할 만도 하다. 그렇다고 '우리 동네 출신 짱'이 안 나와서 실망한 것만은 아니다. 중남미 가톨릭은 라칭거 류와는 분위기가 다르단다. 세계 최대 카톨릭 국가인 브라질 신문들은 새 교황이 동성애 등 사회윤리 이슈를 놓고 개혁적인 중남미 카톨릭과 견해차를 빚을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남미 가톨릭의 진보적·개방적 분위기를 대표하는 칠레의 알레한드로 고이크 주교회의 의장은 새 교황의 나이가 78세인 점을 들어 “과도기적 교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그럼... 새 교황은 빨리 죽으라는 이야기일까 ^^;;)
첫 흑인 교황이 탄생하기를 바랬던 아프리카도 아쉬운 표정이었다. 교황 후보였던 프란시스 아린제 추기경의 고국 나이지리아를 비롯해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아프리카 국가의 언론들은 새 교황의 이력을 간단히 소개하는데에 그치며 아쉬움을 나타냈다고.

새 교황이 얼마나 논란거리인지는, 독일 여론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새 교황의 모국인 독일에서는 자국 출신 교황의 탄생에 환호하는 목소리와 초(超) 보수주의자의 취임에 반대하는 여론이 뚜렷이 갈렸다.
1940년대 교황이 신학을 공부했던 성미카엘 신학교에는 오전부터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바티칸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새 교황으로 선출됐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학생들은 환호했으며, 교사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진짜로 울었대요...
토마스 프라우엔로프 교장은 “우리와 함께 지냈던 사람이 교황이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곳 주민들은 “바깥에서는 그를 보수적인 신학이론가로만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자상한 면모를 모두 알고 있다”면서 새 교황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이 된 것은 독일의 영광”이라며 “새 교황은 전임 요한 바오로 2세의 훌륭한 계승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독일 사회에서 새 교황에 대한 지지도는 당근 낮다. 시사주간 ‘데르 슈피겔’ 여론조사에서는 독일인 중 라칭거 추기경의 교황 추대에 반대하는 사람이 36%로, 찬성(29%)보다 더 많았다. 
종교개혁의 본산인 독일은 개혁 전통이 강하게 배어있는데다 최근 이주노동자들이 늘어 이슬람 인구도 급증하고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피임, 동성애, 생명윤리 등 사회적 이슈를 놓고 예전부터 라칭거 추기경과 갈등을 빚어왔다. 독일의 한 가톨릭 개혁운동단체는 “그가 새 교황에 오른 것은 재난”이라며 “교회에 등돌리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혹평했다.

자국에서조차 '재난'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교황 자리에 오르다니. 교황이 비록 우리 생활에 별 관련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영 맘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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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5-04-20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어나자마자 그 소식 듣고는 마음이 참...... 답답하더군요. 한스 큉 신부의 책을 너무 재밌게 읽어서였는지......

딸기 2005-04-20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렌초의시종님 카톨릭이신가봐요. 교황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은데. :)

로렌초의시종 2005-04-20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어요. 저는 그저 책을 읽다보니 어찌어찌 관심이 생긴 것 뿐이랍니다...... 뭔가를 믿는다는 건 성질 나쁜 제게는 너무 어려워서요 ;;;

딸기 2005-04-2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글을 고치고 있었는데 벌써 읽어버리셨어요 ^^;;
(다시 읽으셔욧!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까 글이랑 내용은 똑같답니다)

클리오 2005-04-20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톨릭.. 저도 한때.. ^^;; 아린제 추기경이 유력하다는 '설'을 들으면서, 설마 유럽인들이 그렇게까지 만들까, 하는 생각을 했었었는데, 역시나... 하여간 교황분석글 여기서 첨 읽어요. 감사합니다..

딸기 2005-04-2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씩이나요 ^^

chika 2005-04-20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분.. 하셨군요. 저는 그냥 받아들이는데.. ^^;;
짜고 치는 고스톱..일수도 있다고봐요. '비밀회의'쟎아요. ㅎㅎ
어쨋건 4월의 딸기님이 새교황님 전력에 유겐트 소년단(맞나?) 가입 시기가 있다는걸 알게 되면 더욱더 흥분.. 아니, 분노(^^;) 하실거 같은데... 걱정됩니다. 딸기가 더 빨개져 뭉개져버리면 어쩌나... ㅡㅡ;;

chika 2005-04-20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말은 웃어보자고 덧붙인건데.. 별로 안웃겨서.. 죄송함다~ ㅡㅡa

물만두 2005-04-20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찍 돌아가시기를 바란다니 그걸 바라는게 나을 듯 합니다. 연세가 많으시다니...

로쟈 2005-04-20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인 중 라칭거 추기경의 교황 추대에 반대하는 사람이 36%로, 찬성(29%)보다 더 많았다"지만, 독일의 종교개혁의 발상지인 것이고, 절대 다수의 추기경들뿐만 아니라 과반수 이상의 신자들은 찬성하거나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군요. 그게 '현실'이라고 봅니다. 교회의 80% 이상이 개신교 근본주의 교파인 한국에서 '진보적' 종교를 얘기하는 건 사리에 어긋나는 것 같기도 하고. (종교란 그런 게 아니야가 아니라) 그게 '종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을산 2005-04-20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저도 비슷한 서운함을 느꼈어요.
그리고 정말 오랜만의 새 교황이라 낯선 교황의 얼굴에 당황했구요.
음.... 저도 교황의 연세에 기대를 걸어보렵니다. 미래 지향적인 교회를 위해서도.

딸기 2005-04-20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가지 의견을 내주신 여러분들에게 축복을!
음냐음냐... ^^

balmas 2005-04-20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남미 가톨릭의 진보적·개방적 분위기를 대표하는 칠레의 알레한드로 고이크 

주교회의 의장은 새 교황의 나이가 78세인 점을 들어 “과도기적 교황이 될 것”

이라고 말했다.(그럼... 새 교황은 빨리 죽으라는 이야기일까 ^^;;)

 

 

 

 

 

 

 

 

 

ㅋㅋㅋ 나만 저런 생각을 한 게 아니군요.

헉, 가톨릭 신자님들에게 돌맞겠다 ...

(추천하고 퍼갑니다 ...)


딸기 2005-04-20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종 제게 추천을 안겨주시는 발마스님. 4월입니다. 저는 발마스님이 언제쯤 한가해지실까, 늘 기다리고 있다는걸 알고 계시는지요. 발마스님이 바쁘시면 달마스님이라도... ^^

조선인 2005-04-20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냐리 음냐, 어렸을 때 유겐트였다는 건 솔직히 문제삼지 않아요. 하지만 낙태반대론자일뿐 아니라 반페미니스트주의자임을 알기에 영... 쩝...

딸기 2005-04-20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생각에 동의.

마태우스 2005-04-20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멋진 글이십니다. 당근 추천을 때려요. 동성애 이혼에 반대한다는데, 그게 반대/찬성을 할 일인가요...

chika 2005-04-20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제 입장에서는 반페미니스트주의자라기보다는 정통교리보수주의자..라 하고 싶어요. 약간.. 틀리지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과도기'라 말하는거 보니, 정말 새 교황님이 빨리 저세상으로 가셔야 한다, 라 하는거 같이 좀 씁쓸합니다.
그리고 우리야 그저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보는데도 이리 찜찜한데, 가톨릭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진보개혁자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그들이 결코 꺽이지 않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한길로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임다.

딸기 2005-04-20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말씀도 맞습니다.

마태우스 2005-04-20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제 말이 맞습니다
-도대체 난 왜 이러는 걸까...-

딸기 2005-04-20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말도 맞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건가요. ㅋㅋㅋㅋㅋ

chika 2005-04-2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궁~ 여기에 댓글 쓰는건 까먹었군요. '과도기적 교황'이란 얘기는 라칭거 추기경, 즉 새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직접 본인이 얘기한 것으로 나이와 상관없이(빨리 서거하리라는 것과 상관없다는 뜻임) 향후 몇년 이내에 사임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ㅡㅡ;;;;
마태우스님!! 오 ㅐ ㄴ ㅏ 만 미워하는거예욧!! 엉엉~ ㅠ.ㅠ

딸기 2005-04-23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본인이 그런 얘길 했더라고요.

근데 치카님, 요한바오로 2세는 한때 거의 마피아수준의 반공&냉전주의자였지만,
실은 저도 그분이 한국에 오셨을 때 '먼발치에서 얼굴이나 보려고' 여의도까지 찾아갔던 사람 중의 하나랍니다. ^^

2005-04-25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5-04-25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알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