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 (7~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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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루 - Living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이키루(生きる)>의 뜻은 '살(아간)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사내의 엑스레이가 보입니다. 그리고 들리는 내레이션. "이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의 엑스레이 사진이다. 주인공은 위암에 걸려있다. 그는 얼마 살지 못한다." 아, 시한부 인생의 마지막을 다룬 영화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봐왔습니까! 그러나 <이키루>는 신파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죽음을 통해서 살아간다는 의미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민과 과장인 와타나베 다케(시무라 다카시)는 30년간 공직을 지켜온 공무원입니다. 그는 30년이란 세월을 그저 흘려보냈습니다. (영화에서 보이는) 공무원이란 직업은 무언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딱히 일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관할이 아니란 이유로 다른 부서로 일을 미루는 게 일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속이 좋지 않은 와타나베는 병원에 가 진찰을 받는데, 위암 판정을 받습니다. 짧으면 반년, 길면 1년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와타나베는 두려움에 떨지만, 직장 동료는 물론이고 심지어 식구들에게도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그는 저금한 돈을 찾아 흥청망청 써보기도 하지만, 공허함과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옛 부하직원의 말에 따라,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해볼 결심을 합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탄원서를 읽고, 버려진 땅에 공원을 지을 계획을 합니다. 그리고 반년 후, 그는 죽습니다.
이 영화는 여러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일단, 공무원이라는 직군의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그의 영화에서 일관적으로 경찰을 무능하거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부정적인 인물로 그렸던 것처럼, 구로사와 감독은 공무원을 거의 혐오하다시피 그렸습니다.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에서는 말 그대로 '나쁜 놈'으로 그렸고, <요짐보>의 관리는 마을의 질서를 지키기는커녕, 악한 상태의 균형을 즐기는 인물입니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는 아예 관리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 사무라이들을 고용하지요. 심지어 <라쇼몽>에서 조차도 재판을 맡는 관리는 등장은커녕 목소리조차 존재하지 않으며, 사건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가장 호의적이었던 <천국과 지옥>에서조차도, 경찰들은 항상 늦습니다. 그들이 범인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닌 유괴된 아이의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이키루>에서는 이 공무원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영화의 초반부, 마을 주민들이 동네 공터에 공원 설립을 위한 민원을 제출하러 토목과에 옵니다. 이때부터 공무원들의 뺑뺑이가 시작됩니다. 각 과의 공무원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하면서 다른 부서로 가보라고 미룹니다. 토목과 → 공원과 → 보건소 → 위생과 → 환경위생과 → 예방과 → 방역과 → 충역과 → 하수과 → 도로과 → 도시계획과 → 구획정리과 → 소방소 → 아동복지과 → 시의회 → 부시장 → 시민과, 그리고 다시 토목과로 이어지는 이 무한궤도. 참으로 웃을 수만은 없는, 아직까지 이어지는 슬픈 현실입니다. 이 수많은 부서와 그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와타나베와 같은 인물들입니다. 모두들 미라입니다. 세월의 흐름을 견뎌내는 죽은 미라들. 마을 사람들의 항의로 이 문서는 일단 시민과에 접수됩니다.
위암 판정을 받은 와타나베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모릅니다. 그는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했지, 스스로 사용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돈을 흥청망청 써보기도 하지만, 산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더욱 외롭고 허탈할 뿐입니다. 같이 사는 아들과 며느리는 이런 아버지의 변화에 대해 의심만 할 뿐 직접 묻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돈을 함부로(아버지 돈인데도!) 쓰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합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아버지의 돈이지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여러 번 아들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가로막고 자기의 말만 합니다. 와타나베는 가족과 직장동료 모두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오해받는 인물이 됩니다.
살면서도 죽어있고, 이렇게 진짜 죽음을 향해 시나브로 삶을 갉아먹던 그가, 진정으로 살게 된 계기는 사직서를 제출하던 여직원 때문입니다. 와타나베는 그녀와 있으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는 위의 고통보다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가슴의 통증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시간을 함부로 뺐을 수는 없습니다. 어느 커피숍. 그는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활기차게 생활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녀는 간단히 대답합니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게 기뻐요. 책상에만 앉아있는 공무원생활보다는 힘들지만, 그래도 나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는 게 절 이렇게 밝게 만드는 것 같아요." 아주 간단하고 진리인 대답. 하지만, 이미 굳어진 공무원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하며 그녀를 남겨두고 자리를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때맞춰 흘러나오는 「Happt Birthday」노래. 그 노래는 새로 태어난 와타나베를 위한 축복의 노래입니다. 오랜만에 출근한 와타나베는 마을에 공원을 만들어달라는 탄원을 보고 바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위대한 결말.
전 <이키루>의 결말을 위대한 결말이라 부릅니다. 이 결말은 장장 40여분에 걸쳐 와타나베의 장례식을 보여줍니다. 다른 감독들이었다면, 한 5분 정도면 설명됐을 이야기를 구로사와 감독은 40여분에 걸쳐 보여줍니다. 네, 보여줍니다. 구로사와 감독은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장례식의 처음은 온통 오해로 시작합니다. 마을에 공원을 설립됐지만, 정작 현장에서 뛴 와타나베는 무시당하고, 그 과실을 부시장을 비롯한, 부서의 장들이 나눠 갖습니다. 망자를 모독하는 이 역겨운 인물들을, 구로사와 감독은 그만의 방식으로 퇴장시킵니다. 그리고 남은 직원들끼리 편안하게 고인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 질문을 던집니다. 와타나베는 자기가 죽을 줄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을까. 다른 감독이었다면 이 장면에서, 죽은 와타나베를 깨웠던 그 여직원이 나타나 모든 사람들을 향해 호통치고 울면서 끝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화는 신파가 되었을 것이고, 그저 그런 영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로사와 감독은 그런 시시한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에 남은 인물들은 자신의 기억 속에 남은 와타나베를 불러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그가 마을의 공원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때론 지친 모습을 보여주고, 때론 죽음도 불사하며 이 일에 매달렸는지. 교훈은 배움을 얻지만, 고루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깨우치는 것은, 그만큼 힘이 들지만, 배움과 감동을 얻습니다. 구로사와 감독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잔재주를 피우지 않고, 우직하게 정공법으로 파고듭니다. 이 영화가 위대한 영화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키루'라는 제목처럼,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죽음과도 같은 절박함에 가까워서야 이루어질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얻은 공무원들은 그 다음날 다시 미라의 삶으로 돌아갔으니까요.
지금 2010년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이 영화는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꿈을 위해) 힘들게 '살아가기'보다는 (돈이 우선한) 편안한 '미라 같은 삶'을 원하고 있으니까요. 아마 우리들도 와타나베처럼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사실을 깨달을지 모르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덧붙임:
이 영화가 아마 필름포럼에서 보는 처음이자 마지막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10분마다 영화가 끊어지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문입니다.
한 달간 즐거웠어요, 감독님. 사요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