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에 송성문 선생이 별세하셨다는 뉴스(클릭)를 늦게나마 보게 됐다. 80이라면 가히 호상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그거야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의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흰소리일 뿐이고. 선생의 죽음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들락날락하던 내 학창시절이 정말로 과거가 됐다는 당연한 사실을 환기시켜줬다. 그야말로 한 시대의 종언. 

내가 고등학교 시기를 보냈던 1990년대 초중반은 그야말로 복잡한 시기였다.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새로운 시험 형태인 '수능'이 도래하는 시기였다. 명문학교는 미리 준비를 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다니던 학교는 평소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모의고사를 보면 서울 소재 72개 고등학교 중 71위를 하는 학교였으니. 난 솔직히 72위가 더 궁금하긴 했었다. 선생들은 별 준비 없이 관성적으로 교과서를 가르쳤고, 배우는 우리도 별 생각 없이 관성적으로 수업을 듣고(졸고) 있었다. 특히 영어는, 언제나처럼 문법 위주의 교육이었고, 그런 우리가 관습적으로 선택하는 교재도 성문 시리즈였다. 수학은 정석 시리즈의 대항마로 해법수학이라도 있었지만, 영어는 거의 전무했다. 물론, 이런 호시절도 맨투맨의 아성으로 얼마 못가 흔들리긴 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성문 영어 오딧세이는 뿌듯함이나 성취감보다는 언제나 좌절만을 가져왔다. 성문 기본영어가 특히 그러했는데, 적당히 얇은 두께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만을 가져왔을 뿐, 언제나 명사 부분만 시커멓게 연필칠을 했던 기억만 난다. (정석의 집합 부분도 마찬가지.) 게다가 짧은 독해는 왜 이리 어려운지. 특히 한글로 된 해석을 봐도 도대체 뭔 소리를 해대는지 머리를 싸맨 적이 부지기수 였는데, 그 어려운 글들의 저자가 버틀란트 러셀이라는 철학자라는 것을 알고, 한 때 철학을 저주하기도 했었더랬다. (얄궂어라. 그런데 내가 철학과를 선택할 줄이야.)   

    

 

성문 종합영어는 더욱 할 말이 없게 한 책이다. 내가 이 책으로 공부를 하긴 했었나? 아마 베개로 더 많이 쓰지 않았나 싶다. 두툼한 두께는 학구열보다는 수면욕을 더 일으키게 했으니까. 침으로 부풀어오른 이 책은 한자책인지 영어책인지 도통 모를 고루한 구성과 참으로 불친절한 해설로 많은 악명을 떨친 책이었다. 

그러다 그 해 여름과 겨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해 두 번의 수능이 시행되자, 판이 바뀌기 시작했다. 문법이 100% 차지했던 영어의 영역은 독해가 70%, 듣기가 20%, 나머지 10%를 문법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는, 여전히 학력고사를 대비한 수업을 진행했지만.  

    

 

그 당시 영어 기본서 시장을 양분 한 것은 성문과 맨투 맨이었지만, 맨투맨은 그닥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성문에 비해 조금 친절하게 보일 뿐, 그 내용은 거기서 거기인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책이 분권된 것도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성문은 어렵고, 맨투맨은 싫고. 그 때 내가 찾은 대체 교재가 안현필 선생의 영어실력기초다.  

안현필 선생은, 아버지 세대는 아니고, 삼촌 뻘 되는 세대에 친숙한 이름인데, 서점에서 사온 책을 보고 "영어삼위일체, 그 책 아닌가?" 막내 삼촌이 반색했던 기억이 난다. 성문과 맨투맨이 문장의 형식 또는 명사 파트에서 시작하는 반면, 이 책은 "동사" 파트부터 시작했는데, 영어는 우리말과 체계가 달라, 그네들처럼 명사부터 시작해서는 흥미를 잃기 쉽다며 일갈했던 머리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책은 재미있는게, 곳곳에 선생의 잔소리가 메모장 형식으로 붙어 있었는데, 공부에 관한 것 뿐 아니라, 건강(이를테면 선식, 냉수마찰 같은)에 대한 정보도 깨알같이 적어 놓아 '혼자 공부하는' 재미를 일러주기도 했다. 문제는 그 잔소리 부분이 너무 재미있어, 공부보다는 잔소리만 읽게 된다는 것?   

안현필 선생이 건강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한창 때에 암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가 90년대 초반이었나? 어쨌든 선생은 이겨냈고, 그 이후에는 영어 보다는 건강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건강에 대한 책도 여럿 집필하셨다. 하지만,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인지. 건강을 되찾은 선생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천명(天命)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수능시험이 18년간 지속되면서, 이들 기본서는 점차 사라져갔고, 영어 문법도 이제는 원서에 자리를 밀리게 됐다. 옥스퍼드의 빨간책 파란책 시리즈는, "문법이 재미 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당돌한 생각까지 하게 할 정도니까. 수능, 토익, 토플 등으로 시험이 갈리면서, 이들 영어 기본서는 점점 설자리가 없어졌고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나 역시 이 문법책들을 버린지 꽤 오래다. 그 자리는 지금 『Practical English Usage』가 차지하고 있으니, 선생들이 보면 허탈할지도 모르겠다. 성석제의 표현처럼 꿈속에서 놀다보니 (슬픈) 소식을 맞이한 셈이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처럼, 흥망성쇄는 당연한 자연의 이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성문 선생의 부음에 이렇게 착찹한 마음이 드는 까닭은, 세월의 흐름을 목격하고 있다는 슬프지만 진실인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시대는 저물고, 그 시대에 발을 담궜던 우리들은, 다른 곳으로 건너간다, 계속.  

RIP. 편히 영면하소서. 



 
 
노이에자이트 2011-09-26 18:15   댓글달기 | URL
성문기본을 명사부터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Tomek님은 영어공부는 명사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소신이 강했나 봅니다.저는 그냥 처음부터 읽었어요.

Tomek 2011-09-26 18:31   URL
아~ 아뇨. 솔직히 첫번째 챕터가 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요. 종합영어는 명사였던 것 같고, 기본영어가 문장의 형식이었나? 아님 기초 영문법이 명사부터였나...

뭐 여튼 학창시절에 공부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1-09-27 19:04   URL
성문기본은 부정사부터 시작해서 특이하구나 하고 생각했어요.그런데 위의 글에서 학교에서 성문으로 강의했다는 얘긴가요?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그런 특정교재를 대놓고 강의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Tomek 2011-09-27 18:09   URL
학교 수업시간에는 오로지 교과서죠. 가외의 시간에 따로 공부하는 교재를 말했던 거였습니다. 제가 글을 워낙에 두루뭉실하게 써서...

:)

노이에자이트 2011-09-27 19:04   URL
아...그런 뜻이었군요.

Tomek 2011-09-29 09:31   URL
넵.

:)
 

내 손에는 습진이 있다. 근원은 확실치 않으나, 기원은 확실하다. 아마도 고등학교 때부터 발병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동안 안녕했던 손가락에서 진물이 새어 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깜놀”할만한 일이었으니까. 이 습진은 환절기마다 약하게 발병했는데, 아주 심각해진 것은 (역시나) 군대에서였다. 당시 내 보직은 취사였는데, 기름과 물을 손에서 뗄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간 숨죽여있던 습진균들은 드디어 때를 만난 것처럼 창궐했었다. 마치 자해라도 한 것 같은, 찢어지다 못해 터져 입을 벌린 상처들, 그리고 그 벌린 상처 안에 낀 찌든 기름 때. 확 잘라버렸으면 시원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시 습진은 엄청난 고통을 가져왔었다. 제대한 후 습진은 많이 나아졌지만, 요즘도 환절기만 되면 손가락이 붓고 진물이 샌다.  

하지만, 습진의 발병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가려움이다. 이 가려움은 인간 이성의 제어력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쉽게 증명하곤 하는데, 벅벅 긁다보면, 진물과 피가 한데 엉겨있는 것을 확인하는 지저분함을 늘 확인하게 된다. 근 10여 년간 몸에 지닌 질병이라, 어느 정도 대처법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최고는 뜨거운 물에 손가락을 지지는 것이다. 수도꼭지를 틀고 조금씩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물을 기다리며 손을 대고 있는 그 순간은 곧 닥쳐올 공포와 환희를 기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물이 적정 온도를 넘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손가락에서 시작된 짜릿한 소름이 팔과 어깨를 거쳐 바로 머리로 직행한다. 살이 익는 고통과 잠시나마 가려움에서 해방되는 쾌감! 물론 그 짜릿한 순간은 매우 짧고, 습진과 발진은 더 심해지지만, 환절기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난 아마도 그런 미련한 짓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내 이런 비이성적인 행위들이, 내가 백가흠의 소설을 읽는 것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백가흠의 소설은,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읽다가 책을 던져버리는, 늘 확실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소설엔 이상한 고통이 있다. 물론 백가흠의 인물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 문학에서 많이 봐 왔던 것들이고, 그보다 더 고통스러움을 감내하는 소설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유독 백가흠의 소설만 “책을 던져버리게(혹은 덮어버리게) 하는” 힘(?)이 있다. 그의 소설은 읽는 이에게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예전에 <시사IN>에서 『조대리의 트렁크』를 언급하면서 김기덕을 이야기했었는데, 이는 (어느 정도는) 맞는 표현이다. 김기덕의 영화와 백가흠의 소설엔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는 인물들이 하나 같이 모두 우리의 사회적 관계망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밑바닥 인생들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같은 밑바닥 인생들끼리 서로 가학-피학의 관계를 주고받는 것, 그리고 셋째로는 ‘나’와는 상관없는 이들끼리의 행동이 영화를 보는/책을 읽는 ‘나’로 하여금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물론 김기덕은 <빈 집>부터 인물(들)을 중산층 이상으로 설정했다. 그 이유는 인물들의 계급 때문에 자신의 영화가 오해받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더 자세히 들어가면 글이 산마저 벗어나 다른 행성으로 가버리니 이쯤에서.)  

신문에서 조차도 “추잡하다”고 버릴만한 ‘소재’들을 이 둘은 자신만의 이야기로 가공해서 세상은 실제로 안녕하다고 생각하는 내 눈먼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이것은 언제나 세상(일)에 관찰자인 ‘나’의 위치를 ‘주체’로 돌려놓으려는 행동이다. 그러니까 백가흠의 인물들이 부서지는 모습은, 마치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것과 같은 종교적 행위처럼 보인다. (그들의 행위가 순교적이라는 게 아니라, 그저 비유일 뿐이다.) 종교적 행위에서 비롯되는 죄의식. 바로 그 불편함.  

백가흠의 소설들을 분류해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식의 ‘사회 고발 소설류’(마눌님의 표현대로라면 <긴급 출동 SOS>류 소설들)와 그의 일상을 모사해 낸 듯한 ‘사(私) 소설류’로 나눌 수 있다. 전자가 끔찍하다 못해 진저리친다면, 후자는 의외로 귀여운(?) 느낌이 들 정도로 발랄하다. 전자가 읽는 이의 사회적 위치를 주체로 바꾸는데 노력한다면, 후자는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데 주력한다. 『귀뚜라미가 온다』가 전자에 치중했다면, 『힌트는 도련님』은 후자에 치중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가 계속해서 소설을 써가는 과정이 그 자신이 작가가 되고 싶은 ‘바람’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귀뚜라미가 온다』에서는 온갖 끔찍하고 역겹고 (가끔) 섹시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 기괴한 상상력의 끔직한 사건들을 가지고 백가흠은 서사를 구성하려고 ‘애쓴다.’ 소설들은 그럴듯하지만, 다분히(혹은 당연히) 위악적이고 소재주의적이다. 『귀뚜라미가 온다』만을 읽는다면, 아마도 백가흠이라는 이름은 센세이셔널리즘에 기대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대리의 트렁크』부터 무언가 달라졌다. 여전히 (그리고 더 지독하게) 끔찍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그 이야기들은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귀뚜라미가 온다』의 소설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차갑게 ‘바라보게’ 한다면, 『조대리의 트렁크』는 ‘(고개를 들어) 쳐다보게’ 한다. 이런 시도가 가능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 책에 수록된 「장밋빛 발톱」에서부터 시작한 사 소설들 때문일 것이다. 백가흠은 『힌트는 도련님』에 등장하는 ‘소설가 백’, ‘백 도령’, ‘P’를 통해 소설의 인물에 자기 자신을 투영한다. 이 등장인물들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같이 ‘욕망’에 집착해있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은 ‘소설의 서사를 완성’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 글을 써도 글자가 증발하는, 그래서 자신의 글이 원고지에 ‘새겨지길’ 바라는 소설가 백이나, 자기가 썼던 소설의 주인공에게 ‘그럴 듯한 이야기’를 부탁하지만, “(네가 써왔던 대로) 그냥 몇 죽여”라는 말을 듣는 백 도령, 소설을 쓰기위해 상대방을 압박/협박해 잊(으려 애쓰)고 있던 죄의식을 몽땅 끄집어내 결국 고해성사를 하게 만드는 P, 이들 모두 소설을 완성하지는 못한다. 작가가 되고 싶지만, 결국 되지 못하는, 혹은 탈고된 원고를 결코 보지 못하는, 하지만 독자들은 결국 보게 되는 이 이상야릇한 사 소설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너무 과장된 기대일까?  

백가흠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그는 (적어도 내게는)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였다. 이번 『힌트는 도련님』을 읽었을 때 드는 생각 역시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다. 하지만, 단편들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그는 장편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 같아 보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들은 그의 작품 안에서 모두 완성되지 못했으니까. 나는 혹시라도 그가, 10년 후에도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로 남게 되는 게 아닐지 걱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임에 분명하다. 그는 소설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소설에 대한 “힌트”는 찾았으니까. 그의 다음 작품에서 “글자가 새겨지는” 것을 쳐다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피부과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손이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방치했냐고 야단을 쳤다. “한순간의 짜릿한 쾌감 때문”이라고 차마 말을 못하고 처방과 약을 받았다. 앞으로 나는 내 고통스런 쾌락을 백가흠의 책에서 찾아도 될 것 같다.



 
 
iamtext 2011-09-01 11:59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래도 편혜영보다는 백가흠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트윈픽스 연재 잘봤어요. 십몇년전쯤, 칭구들하고, 트윈픽스MT라는걸 했습죠. 아침9시에 만나 라면만 먹으며 1박2일동안 비디오 서른몇개 다보기. 토론, 혹은 뒤풀이 따위도 없었습니다. 트윈픽스면 충분하니까. 십몇년만에, 어찌나 우울하던지 다시 트윈픽스를 보기 시작했는데 파일 검색하다가 우연히 연재글을 봤어요. 좋았어요!

Tomek 2011-09-01 15:48   URL
제겐 백가흠만으로도 벅찹니다! 제게 있어 여성 작가 중에서는 (아직까지는) 신경숙 작가를 넘어서는 "끔직함"을 보여준 예가 없는 듯해요.

트윈 픽스! 정말 좋죠! 고맙습니다.
:D

iamtext 2011-09-02 14:38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인생 몇개의 중요 프로젝트 중에 하나가 '신경숙과 그를 둘러싼 운동권 가부장들'연구인데... ㅋㅋ. 지금 당면한 프로젝트는, 둘째 기저귀떼기-_-. 어린이 집에서 젤 나이가 많은데, 기저귀차고 다니니...

Tomek 2011-09-02 16:54   URL
신.경.숙. 제겐 정말 무서운 이름입니다!

:)

novio 2011-12-30 20:14   댓글달기 | URL
저도 손은 물론 팔꿈치에 습진이 있습니다. 약을 발라도 계속 낫지 않았는데 올해 큰 맘 먹고 약을 계속 발랐습니다. 올 봄부터 발라서 지금까지 바르고 있는데 이제 조금 습진이 없어지네요. 그래도 재발은 쉽기 때문에 언제나 주의합니다. 겨울 때면 역시나 습진으로 손가락 습진이 갈라져서 고생인데 그런 고약한 습진을 갖고 이렇게 책을 예시하시니 정말 필력 하나는 최고시네요. 부럽습니다^^

Tomek 2012-01-01 06:43   URL
병원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전 병원다니고 샴푸와 비누는 모두 끊고 설겆이나 빨래 할 때는 비닐장갑+면장갑+고무장갑끼고 하니까 많이 사라졌어요. 문제는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한다는 게 힘이 들지만... 뭐 어쩔 수 없죠. NOVIO님도 약보다는 병원가셔서 진단 받으셔요. 치료 받으시는 게 병을 키우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12년 새해에는 항상 기쁘고 즐거운 일만 일어나길 기원합니다. :)
 
제5회 CinDi영화제 프로그램 및 상영작 (8.17~23)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9. 23일과 24일은 영화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작 이틀동안 장편 4편 단편 8편의 영화만을 보았는데도, 이유 모를 피로감이 갑자기 닥쳐왔기 때문이다. 축제에 탐닉하려는 지독한 욕심(혹은 욕망)때문일까? 아니면, 2년 연속으로 내리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만 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뜨거운 영화광들의 열기에 지쳤기 때문일까? 영화에 탐닉할수록 점점 영화가 시시해지는 이유는 무얼까? 

 

10. 김수현 감독의 <창피해>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지 난감하다.

 

10-1. 시시한 미대교수(김상현)는 싸가지 없는 신입생 희진(서현진)과의 유치찬란한(하지만 무시무시한) 육탄전을 벌이더니, 희진의 친구 지우(김효진)를 모델로 발탁하고 사진을 촬영하러 바다로 간다. 그곳에서 지우는 교수에게 자신의 옛사랑(김꽃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후부터 이야기는 마치 라운지 소설처럼, 화자를 바꿔가며 계속 건너뛰기 시작한다. 

전작 <귀여워>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참으로 지독하고 끔찍한 이야기이다. 불편한 금기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도 갑작스레 튀어나오지만, 김수현 감독은 예의 따스한 터치로 그 끔찍함을 감싸안는다. 우린 그런 그의 능력을 <귀여워>에서 확인한바 있다. 

 

10-2. <귀여워>는 제목과는 달리 정말 끔찍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씨를 뿌려대는" 박수무당 아버지와 그의 배다른 형제들이 꾸린 가족 안에 한 여자 순이가 들어오는데, 그녀는 집 안의 모든 남자들과 관계를 하고, 심지어는 방석집에 팔리기도 한다. 그들이 살고 있는 동네는 "철거가 진행되고 있는" 청계천 황학동 시민아파트다. 그곳에 사는 여자 "아이"는 둘째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남자 "아이"들은 깡패들에게 돈을 받고 방화 용역을 벌인다. 그 와중에 건달인 셋째는 직업적/개인적인 이유로 살인도 행하고 다닌다. 참으로 지옥이 따로없다.

<귀여워>의 놀라운 점은 이런 끔찍하고 위악적인 이야기가 참으로 "귀엽게" 보인다는 것이다. 김수현 감독은 이 끔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하는, 이 보잘것 없고 초라한 인간 군상들을 시종일관 "귀엽게" 위로한다. 영화의 온갖 효과-음악, 미술, 심지어 CG조차-가 유치해보이지만, 그래도 시종일관 우직하게 밀고나가는 감독의 뚝심 때문에 영화는 어떤 독특한 느낌을 얻는다. 환상과 실제가 서로 섞이는 기이한 현상들의 연속.

 

10-3. <창피해> 역시 환상과 실제가 서로 섞이는 근사한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김수현 감독은 이제는 그런 것에 흥미를 잃은 듯 하다. 대신 그는 이야기에 대한 욕망에 빠진 듯 하다. <창피해>의 이야기는 단선적인 이야기를 이상하게 풀어놓아(베베 꼬았다는 게 아니다!) 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교수와 희진의 이야기는 희진과 지우의 이야기로, 지우와 옛사랑, 옛사랑의 가족, 형사(최민용!)와 후배(우승민!), 옛사랑과 옛사랑의 애인, 옛사랑과 옛사랑의 아버지, 지우와 교수, 서현과 선배 등으로 "종횡무진" 넘나든다. 

이런 형식은 소설에서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 김연수 작가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아마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에서는 이런 형식은 피로감을 불러 일으킨다. 책은 독자 스스로 끊을 수 있지만, 영화는 한번에 봐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감독이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찍었을까?  

 

10-4. <귀여워>를 보면, 어쩐지 이야기가 부족해보이는 느낌이 든다. 영화에는 굉장히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인물들의 이야기가 "잘린" 것을 느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둘째 "개코"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세 아들 중 가장 적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영화의 흐름을 위해 감독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잘렸을" 확률이 높다. 어쨌든 그 영화에는 다른이의 "자본"이 들어간 상업 영화이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가장 최소한의 자본으로 자신이 시나리오로 만들었던 모든 장면들을 다 붙인 게 아니었을까? 

그 시도는 높이 사지만, 영화를 보는 나는 보는 내내 어리둥절하고 힘들었다. 영화의 지난란 리듬 때문에 결국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창피함"의 감정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무언가를 보긴 했는데, 마음을 울리지 못한 "아쉬움". 위악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만큼 에너지도 잃어버린 듯한 "안타까움". 지난 7년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1. 선타르 지올 감독의 <태양의 길목>은 보는이의 절창을 뜯는 영화다. 영화는 기나긴 길을 걷는 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고행을 하는 듯한 모습. 그의 뒤를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집에 가는 한 노인이 쫓는다. 알고보니 청년은 사고로 어머니가 죽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라사로 속죄의 순례를 떠난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바로 목격한 자식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섭다. 청년은 그 엄청난 감정을 속에 묻고 걷고 또 걷는다.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속죄의 마음을 지닌채로 걸었는지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알지 못한다. (물론 영화가 끝날 즈음에야 알 수 있지만.)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태양처럼, 어머니의 죽음을 비로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작별을 하기 위해, 그만큼의 시간은 필요했던 것이었겠지.  

 

12. 그런데 영화에 대한 이런 끼적임은 어떤 행위일까?




 
 
즈라더 2011-08-23 10:13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창피해>를 예의주시해야겠네요. +_+

Tomek 2011-08-24 08:14   URL
음... 제겐 좀 혼란스러웠던 영화였어요.

이하 감독의 두 번째 작품처럼, 김수현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역시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novio 2011-08-24 13:00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객원기자로 뽑혔었는데 그만 일이 생겨서 (생존은 해야 하니까ㅠㅠ) 그만 기자 역할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제, 매우 인상적인 영화들로 가득했나 보네요. 매우 아쉽고 유감입니다. 그냥 이 글로 대충 느끼는 수밖에 없겠네요 ㅠㅠ

Tomek 2011-08-25 09:11   URL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특성상(?) 인상적인 영화들은 많지만, 여러편 계속해서 보면 좀 피로감을 느낄만한 영화제인 것 같아요. 그냥 편하게 몇 편 골라 관람하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아요.
 
제5회 CinDi영화제 프로그램 및 상영작 (8.17~23)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5-1. 박종철 감독의 <수선火>는 보는 내내 불편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종근은 좁은 동네 안에서 사사건건 가게 주인들과 일을 벌인다. 종근의 말이나 행동은 언뜻 보면 다 옳은 소리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자기-소비자- 중심의 우격다짐이다. 종근은 "앞에선 찍소리 못하고 뒤에서 호박씨 까는 한국 놈들"을 경멸하는, 그래서 초지일관 앞에서 호박씨를 까는 "인간 말종"이다.  

종근의 이런 행동은 영화를 보는, 일상에서 찍소리 못하고 대부분 "참고 사는" 우리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켜야 하지만, 그저 이해하지 못할 답답함과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안함만을 느낀다. "4년제 대학을 나온 고급 인력"의 분노 표출? 하지만 그의 분노는 조그마한 동네의 영세 상인들을 벗어나지 못한다. 시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끼리의 싸움. 그렇게 종근의 인생은 한심하게 흘러간다. 

 

 

5-2. 이창희 감독의 <소굴>은 정말 잘 짜여진 스릴러다. 한 여기자가 기사 송고를 위해 시골의 PC방에 간다. 밤이 깊자 그 곳엔 단 몇 명의 남자들만 남고, 기자는 자신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들의 "소굴"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시도를 벌인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영화란, 지금 보여지는 상황이 "말이 돼냐 안 돼냐" 보다는, "그럴 듯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 같다. <소굴>의 이야기 전개는 가끔 불필요한 장면들이 나와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그 모든 장면들의 분위기와 이야기 전개가 정말로 그럴듯해 보여, 그런 사소한 장면들은 금세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특히나 단 한마디의 대사 -"시끄럽다잖니."-로 평범한 공간을 단숨에 공포로 가득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 감독의 발군의 센스는 정말로 뛰어나다. 

<소굴>에서 여기자와 같이 있는 남자들은 모두 범죄자임이 분명한 인물들이지만, 이들이 정말로 여기자에게 범죄를 저지르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오히려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은 여기자이고, 이들 남자들의 행동들은 정당방위로도 볼 수 있다. 심지어 마지막 장면의 여기자의 목에 잔뜩 묻은 피조차 남자의 피가 아닌가. 

별 곳 아닌 장소에서 별 것 아닌 행동들만으로 보는이의 긴장을 한껏 끌어올린 이창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을 진심으로 기대한다. 

 

  

5-3.  최진성 감독의 <이상,한 가역반응>은 1936년, 동경으로 어떻게든 건너가려는 천재 이상의 시도를 그리고 있다. 인물들의 대사나 사운드는 차단되어 있고, 마치 무성영화처럼 음악과 이상의 시가 내레이션+자막으로 나오고 있다. 영화에서 나오는 모든 내레이션은 이상의 작품에서 따와 가뜩이나 몽롱한 영화에 기이한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계속 특정 장면을 반복해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시도들은 마치 이상의 시(詩)들을 영상으로 찍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처럼 보이는데, 마치 예전에 일본에서 출시한 무르나우의 무성영화 <노스페라투> DVD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새로운 시도이긴 하지만, 마치 예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랄까? 물론 내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다른 쪽으로 이해의 촉수가 뻗어나간 경우이겠지만 말이다.  

 

5-4. <수선火>, <소굴>, <이상,한 가역반응>은 8월 21일 13시 30분, 8월 23일 17시, 두 번 더 묶음 상영한다. 

 

 

6. 비묵티 자야훈다라 감독의 <버섯>을 상영 리스트에 넣은 이유는 단 하나, "인도 영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디를 경험한 이후로는 영화를 국가별로 나눈다는 것이 별 의미 없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편의상 그렇게 나누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춤추고 노래하고 가끔 대책 없이 느껴지기도 하는 지독한 낙천성이 빠진 인도 영화가 존재하기는 할까?"하는 이 단순한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버섯>은 지금껏 봐왔던 인도 영화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영화다.  

영화의 진행은 친절하지 않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숲에 오고, 한 남자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도망친다. 그리고 그 숲에서 (아마도 유럽 출신의) 탈영한 군인이 마치 유령처럼 등장한다. 그는 국경을 넘는 100명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숲에 고백한다. 그는 숲에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하지만, 숲은 그 비밀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갑자기 영화는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고층빌딩 숲(!)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건축사 라훌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는 미친 동생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가 동생이 숲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동생을 찾으러 숲으로 간다. 

자연의 숲과 (거대 건물로 이루어진) 인공의 숲, 미친 동생과 정상인 형. 영화는 대비를 하지만,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동생의 관점으로는 도시에 살고 있는 형은 공포의 대상이다. 형은 미친 동생을 자신의 품에 가두고 싶어한다. 숲의 관점에서는 거대 빌딩으로 이루어진 도시는 필요악이다. 하지만, 우리는 도시 없이는 살 수 없다. 비묵티 자야훈다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공존"을 이야기하고자 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그는 다양한 언어, 종교, 인종이 서로 어우리져 하나의 거대한 국가를 이루는 인도에서 영화를 찍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스리랑카 태생이다.) 

버섯은 잔균류로 다른 생물에 기생하며 자란다.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고층 빌딩들은 우리 시대의 "버섯"들이다. 버섯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자연이 존재해야 버섯이 존재할 수 있다. 무분별한 개발의 시대에 우리는 너무 당연한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게 아닐까. <버섯>은 이런 당연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8월 21일 17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7-1. 토니 힐 감독의 <교차로의 오아시스(North Cross)>는 영국 플리머스의 북부 교차로에서 찍은 영상이다. 이 교차로의 윗부분은 차가 다니고 아랫부분은 보행자 통로로 사용된다. 감독은 아주 카메라 조작을 통해 윗부분과 아랫부분, 차량의 흐름과 사람의 흐름을 다른 속도로 담아낸다. 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서로 다른 감흥-리듬을 느낀다. 마치 속도에서 튕겨져 나갈 듯한 차량들과, 한없이 느려져 누군가가 끌어 당기는 듯한 사람들의 걸음 걸이. 단순한 조작만으로도 세상의 시간을 능수능란하게 조작할 수 있는 영화만의 연금술. 

 

7-2. 토니 힐 감독의 <라반 댄스(Laban Manoeuvres)>는 프레임의 장난이다. 감독은 프레임 구조물에 카메라를 달고 영상을 찍는데, 그는 카메라의 프레임 조차 나누어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상들은 미셜 공드리가 작업한 뮤직비디오나 CF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미셸 공드리가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 나온 탄성을 자아낸다면, 토니 힐의 작업은 우연성에 기댄 듯한 느낌이 든다. 카메라와 거울을 통한 데칼코마니? CG가 아닌, 단순한 카메라의 고전적 조작으로 이런 감흥을 불러 일으키기란 쉽지 않다. 

 

  

7-3. 밥 세비스턴 감독의 <디지털 로토스코프 놀이공원(The Even More Fun Trip)>은 새로운 체험이다. 이 영화는 친구들과 함께 놀이 공원에서 하루를 보내는 짧은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밥 세비스턴은 이 평범한 다큐멘터리에 로토스코프 기법-영상 위에 그림을 그린 기법-을 사용해 전혀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로토스코프를 통해 이 개인적인 영상 기록은 감독의 주관적인 느낌이 깊이 베어들게 되고, 그 당시 상황의 느낌을 그림을 통해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같은 기법을 사용한, 그리고 감독이 참여하기도 한 <웨이킹 라이프>, <스캐너 다클리>가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들의 연기를 낯설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면, <디지털 로토스코프 놀이공원>은 평범한 것을 새롭게 보이게 한다. 애니메이션처럼 완벽한 창조와 통제가 아닌, 배우들이 이루어 놓은 상황을 감독의 의도에 맞게 수정/강조하는 로토스코프 작업은 아마도 아직도 진행 중인 새로운 효과임은 분명하다. 

 

  

7-4. 우로 피코프 감독의 <몸의 기억(Kehamälu)>은 무시무시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다. 기차 화물칸 안, 그 안에 털실 모양의 인간들이 있다. 열차 바깥의 거대한 힘이 이들의 털실을 하나씩 잡아당기기 시작하고, 한 명씩 털실이 당겨짐에 따라 형체를 잃어가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절규하기 시작한다. <몸의 기억>은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즉각적으로는 몸의 고통을 느끼게 한다. 천천히 그러나 고통스럽게 진행되는 죽음, 그 고통을 안고 사는 우리들, 그리고 그저 지켜만보는 우리들 그리고 결국에는 모두 사라지고 말 우리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을 향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고통은 순전히 우리의 몸이 느끼고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7-5. 고시마 카즈히로 감독의 <3D 입체 도쿄 풍속도(東京浮絵百景)>는 도쿄의 일상을 3D로 보여준다. 3D의 효과는 굉장한 것이 아니고, 어렸을 때 장난감 카메라에서 봤음직한 간단하지만 독특한 기술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아바타>로 시작된 3D 효과에 대한 광풍이, 실은 이렇게 간단한 것이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3D라는 효과는 신기루도 엄청난 기술도 아닌, 우리가 예전부터 봐왔었던, 이런 단순한 효과가 아니었을까? 이 영화는 우리에게 3D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야기의 개입으로서의 3D가 아닌, 그저 바라보는 풍경으로서의 3D.  

 

7-6. <교차로의 오아시스>, <라반 댄스>, <디지털 로토스코프 놀이공원>, <몸의 기억>, <3D 입체 도쿄 풍속도>는 <익스트림 3>이라는 이름으로 8월 22일 20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8. 케빈 맥도널드 감독의 <라이프 인 어 데이(Life in a Day)>는  2010년 7월 24일 하루 동안 자신들의 일상을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린 전 세계 192개국 8만편 이상의 비디오들을 다시 편집해 한 편의 영화로 완성한 영화다. 7월 24일, 전 세계의 평범한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영화는 우리들이 찍은, 우리들의 희노애락, 생노병사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지만, 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하루. 그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그냥 보는 순간만으로도 가슴 찡하다. 이 영화의 위대함은 우리가 지구라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삶은 살아지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것이기에. 

<라이프 인 어 데이>는 아쉽게도 신디에서의 상영이 모두 끝났다.




 
 
. 2012-04-19 01:05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영화 창피해를 봤던 사람으로
간만에 검색하다 (우연히)블로그 방문하게됐어요.
포스팅하신거에 창피해를 보고싶단 언급이 몇구절있더군요..

(갑작스런말일수도있지만)
실제 동성애에 대해 혹 편견없이
열린맘으로 이해하시나요?
저는 이반(동성애자)을 개인의 개성이고, 취향이라 생각하며 이해해요. 편견이나 이상하게 생각하는거야말로
이상하다생각해요. 왜냐면 육체적인성이 아닌 마음이나 영혼에 끌리는게 진정한 사랑이라생각하니까요.
여튼 제가 쪽지드린이유는, 편견과닫힌맘이 많은 사람들중에서 혹시 열린맘을 가지신분이면 소통하는 친구되고싶어서요.

Tomek 2012-04-19 14:54   URL
이 세상에서 '사랑해선 안 될 사랑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갑습니다.

:)

2012-04-19 19:39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14:03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14:04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20:24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1 0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라딘happy 2012-04-21 12:30   댓글달기 | URL
네 모쪼록 제얘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담에또 들(려도되죠?)^^ 늘행복하시길바래요.

Tomek 2012-04-23 09:47   URL
네. 볼 건 없지만 종종 놀러오세요~
:)

저 역시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제5회 CinDi영화제 프로그램 및 상영작 (8.17~23)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0. 그러니까 이건 작년에 썼던 "제 4회 신디 영화제 ~"의 연장선상 혹은 속편격 되겠다. 

 

1. 작년에는 정말 "멋모르고" 참석해 "정신없이" 영화들을 즐겼었다면, 올해는 작년과는 달리, 좀 더 자유롭게 - 멀찍하니 떨어져서 영화제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작년과 똑같은 장소에서 행해지는 영화제이지만, 이번 영화제는 어떤 "센세이션"이나 "스캔들"이 없는 관계로, 조금 그 열기가 식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신디의 이번 모토는 "필름과 디지털의 공존(맞나?)"인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는 "필름" 영화들도 다수 상영한다."디지털"이라는 단어에는 "새로움"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번 5번째 신디는 그 "새로움"을 잠시 접어두고, "공존"을 모색한다. 이 행보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좀 더 두고봐야 할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퇴보/정체"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밀려들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은 이번에 초대된 100편의 영화들이 답해줄 것이다. 

  

2. 알란 자마니 에스마티 감독의 <오리온(The Orion)>은 이란 영화다. 지금까지 내가 봐온 이란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자파 파니히 감독의 "동화" 같은, 당대의 현실을 교묘히 피해간 영화들이었다. 그나마 이란의 사회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마르얀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정도였을까? 현실에선 손목을 자르고 코를 베어가는 끔찍한 모습이 벌어지지만, 영화에선 짝궁의 공책을 돌려주려는 웃음이 베어나는 아름다운 모습만을 보아온 내게 <오리온>은 묵직한 충격을 전해주었다. 

영화는 여주인공 엘함을 중심으로 진행한다. 처음에 영화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엘함은 무슨 수술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그녀의 애인인 아미르는 "불법" 수술 준비에 분주하다. 하지만, 이웃의 신고로 이들은 체포된다. 

우리의 기준으로는 엘함이 행하려는 수술은 정말 "어이가 없는" 수술이다. 하지만 이 "어이없음"이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여성들"에게만 피해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엘함"과 "아미르" 쌍방간의 합의에 비롯된 일이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엘함에게 돌아간다. 아미르는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지만, 그 책임은 엘함의 아버지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황무지에서의 무시무시한 소동극은 안타깝기 보다는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아미르와 친구들이 "불법 수술" 때문에 구치소에 머물러 있을 때,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밖을 보기 위해 창문을 만들었는데 왜 그 위에 커튼을 다는 것일까?"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종교가 만들어졌을 것인데, 지금의 이란은 종교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그로 인해 생기는 이 웃지못할 끔찍한 아이러니들. 이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창문은 왜 만든 것이었을까? 

8월 21일 14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3. 쉬통 감독의 <풍비박산>은 -감독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초여름>, <점술가>에 이은 "유민 3부작"으로 그는 연속적으로 중국의 최하층민-농민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풍비박산>의 원제는 탕 씨 노인(老唐頭)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풍비박산"이라는 제목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 그 이유는 탕노인을 중심으로 한 가족들이 모조리 "풍비박산"나는 과정을 찬찬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냥 그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들의 삶이 정치적/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어찌됐든 삶을 견뎌내야 한다. 그 안에서 아버지와 자식간에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의절을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삶의 방법일 뿐, 그것을 윤리적으로 재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영화 중간에 돼지를 도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굉장히 사실적으로(잔인하게) 찍혔는데, 이상한 것은 이 장면이 굳이 영화의 내러티브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독은 왜 이 장면을 넣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깔끔하게 도축된 고기를 정육점에서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를 찍는 감독들은, 그 깔끔한 고기를 만들기 위해 돼지를 죽이고 털을 밀고 부위별로 분류하는 고통 아닌 고통을 겪는다. 쉬통 감독은 자신의 다큐멘터리 작업이, 그만큼 고통스러움을 직접적으로 알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편안한 객석에 앉아 그들의 고통을 음미하는 우리들의 행위는 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8월 22일 13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4. 오영두 감독의 <에일리언 비키니>에 대해 할 말은 많지않다. 아니, 솔직히 많긴 한데 하지 않으련다. 악평은 누구나 쉽게 쓸 수 있지만, 그만큼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내가 지지하지 않는다/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에게 그 영화가 엉망일리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이 영화는 "임성한 작가가 <지구를 지켜라>를 썼다면 나올법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진짜 임성한 작가가 썼다면, 훨씬 재미있고 찰지게 썼을 것이다. 지나친 임성한식 정보 나열은 가뜩이나 짧은 영화를 진저리나게 질리게 만든다. 온갖 금기는 다 튀어나오지만, 그저 나열에 그치고 만다. 만약 이 영화가 "무의미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찍은 영화라면, 영화는 100% 그 임무를 완수했다. 하지만, "무의미의 의미"가 "무의미"인 것을 굳이 75분의 시간을 버려가면서 깨달을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저 무의미한 것일 뿐인 것을. 

8월 22일 17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4-1. 한마디 더 보탠다면, 원래 일정은 어제 한 편 더 볼 예정이었으나, <에일리언 비키니>를 보고 그냥 집에 와버렸다. 

 

4-2. 한마디 더 보탠다면, 원래 어제 바로 정리할 글이었으나, 이 영화의 충격으로 폭음하고 오늘 아침에야 멍한 정신으로 끼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