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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진 1
마키무라 사토루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1년 9월
평점 :
절판


난 마츠코의 캐랙터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 어릴 적 의부에게 성폭행을 당한 상처, 그런 딸을 보호해주지 못한 나약한 친모에게 느꼈을 분노...이 모든 상처를 끌어안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 관대해지는 강인함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모두 생략되어 있지만 말이다. 딸인 유우에 비해 어머니인 마츠코가 무책임하고 방종스럽다고 느끼는 분들은, 아직도 어머니는 인간이 아니라 철인이라는 환상을 깨지 못한 거라 생각한다.

자신에게 무책임할 정도로 관대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경지이다. 난 힘든 일이 있으면 숨긴다. 울고짜는 자기연민을 스스로가 견딜 수가 없어서 말이다. 그러다 한번씩 무너지면 한동안 자괴감이 참으로 씁쓸하다.ㅎㅎ 이 책을 읽고 그렇게 무너져 버렸다면야...참 그 또한 무색하지만 말이다.

사실 유우나 마츠코나 난 너무도 비슷해 보인다. 가정적인 여자나 성공한 직업 여성이나 결국은 한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난 후자 쪽에서 늘 전자를 동경하지만 (동시에 동경으로만 그치기를 내심 원한다..현실을 제발 되지 않기를...) 내 속에 묻혀 발휘될 기회를 얻지 못했고, 앞으로도 얻지못할 그저 아스라히 그리운 내 지극히 '여성다운' 여성성이라고 해 두자, 쩝.

둘 다...과거의 상처가 있었기에 현재의 이 모습이 있다고 긍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사실은 똑같다. 사실 내 인생을 지탱하는 힘또한 그게 아닌가 싶다. 다만 그들처럼 현실을 지극히 살아있는 느낌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지.

하지만...마츠코와 그 연인의 관계는 너무도 이상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이다. 마츠코는...이 세상의 남자 80%와는 커뮤니케이션이 안된다고 남은 20%도 너무도 커뮤니케이션하기 힘들다고..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사실 난 그 20%란 퍼센트에 대해 마츠코가 너무 관대하다고 말하고 싶으니까.

'이기고' 싶다는 유치한 승부욕이 주된 동기처럼 얼핏 얼핏 내비쳐지는 남자들은 옆에서, 직장에서 볼때마다....그래, 사실 한편으론 아직도 누가 더 딱지를 더 많이 따나 골똘하는 유치한 어린 애들을 보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한편으론 늘 수컷끼리 세력 다툼을 하는 동물의 왕국 한편을 보는 것같은 더러운 기분도 들고 말이다. 난 사실 남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은 99% 포기했다. 1%는 남겨둔다....- 울 아들내미.아직 스폰지 같아서 세상보는 방식에 내가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내 아들이 1%다.

이 만화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다만 상대로 등장하는 남자들이 찾아내기 너무도 힘든 희귀종, 들이다. 그런 희귀종을 찾아냈다,는 가정 위에서만 이 만화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 그래....수박밭에서 참외 고르기, 라고 생각함 된다. 말통하는 남자 찾기란. 근데 또....살다보면 말통하는 것 가지고만 해결이 도저히 안되는 것도 많고 말이지.

가장 좋은 해결책은 스스로 충만한 둥근 항아리가 되어야 하는거지. 마츠코는 사실 그 이상이다. 혼자 서는 충만함 - 자신이 얼만큼 강한지 스스로 느끼는 것...에서 나는 위태위태 한 수준인데, 그래서 아직 누군가에게 손을 뻗어 성장시키고 함꼐 성장하는 수준이 절대 못되는 데 말이다. 마츠코는 해내고 있지 않는 가 말이다.

난 내가 여자라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럴떈.어릴땐 자조적으로ㅡ남자보다는 천국에 들어가기 좋은 조건이라 좋다, 고 생각했었지만, 세상에 태어나 소수자로 살아 본 경험을 해보고 거기서 배울 수 있는 멋진 삶의 조건이 아닌가 말이다. 차별받아보고, 억울해 보고, 이용당해보고, 인격이 없는 존재로 취급 당해보고, 그거에 분노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힘들어 하는 다른이들에게 내 아파본 아픔으로 상대의 아픔을 손을 내밀 수 있는 축복의 조건이 아니던가 말이다. 백인이 아니라, 남자가 아니라, 그래서 다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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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타렐라 1
요우 히구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체자레 보르지아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얻고 싶으시다면, 시오노 나나미의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거기 불운의 여인 루크레치아와 체자레의 이야기가 나오죠. 음..사실은 형인 페드로조 체자레가 암살했다는 구절도 있구요. 개인적으로는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고 아이들을 인질로 잡아 죽이겠다고 항복하라고 하는 체자레 들에게 치마를 들추며... '난 이것만 있음 애들은 더 낳을 수 있다'고 큰 소리를 뻥뻥 쳤던 (이름이 뭐였더라.....-___-;) 한 군주의 미망인이 더 기억에 남네요.^^;(용감도 하여라....) 체자레...그 야심에도 불구하고 헛되이 열병에 걸려 죽습니다. 역시 인간은 유한한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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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소로우와 에머슨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 역시 이 둘을 영문학 시간에 접했다. 역사가 짧은 미국서는 이정도의 철학(?)으로 철학가 대접을 받는구나 싶었다. 소로우를 더욱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그 청빈해보이는 삶이 실은 얼마나 우스운 농간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단지 몇달러 들여서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것 같은 그의 삶은, 실은 부유층 도련님의 허랑방탕 백수생활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부모님의 대농장이 불과 걸어서 한시간도 안되는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는 자연과 하나된답시고 오두막 하나 덜렁 지어놓고 툭하면 부모님 집에가 밥 얻어먹으며 살아다는 것을 아는 사람? 죽는 순간 조차도 대중의 인기에 부응하려 자신의 이미지를 너무도 의식한 나머지...자신이 길이 남을(?) 마지막 한마디를 했는지 확인하려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나 끝까지 기록인에게 거듭 확인하고 죽는, 진면목을 보여줬다. 난 삶으로 증명해 보이지 못한 이상은 싫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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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moo 2012-01-22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봤습니다. 기존의 시선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소로우와 월든을 평해주셨는데, 저도 저자의 생각과 삶이 일치하는 철학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평에 공감합니다. 화려한 문장과 이론으로 가득찬 실천 없는 사상가보다, 삶 자체가 메시지로 다가오는 이태석 신부같은 분의 인생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게 되지요.

그런데 그의 부모님의 대농장이 걸어서 한시간도 안되는 곳에 있었다는 것, 그가 월든 생활 중에 부모님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다는 것, 그리고 소로우의 마지막 순간에 기록을 의식했다는 이야기의 출처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월든과 소로우는 국내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지식인들의 뿌리와 같은 존재이며, 시간이 갈수록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는 작품인데 만약 톡톡캔디님이 적어주신 소로우의 에피소드가 사실이고 명확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라면 세계의 석학들이 소로우와 월든을 이토록 높게 평가할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톡톡캔디님이 저에게 답변을 해주실 의무는 없지만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명저에 대한 부정과 비판을 했을 때에는 더 명확한 출처와 근거가 있었을 터인데 그 부분을 생략하셨기에 의문이 들어 댓글을 남겨봅니다.

명절 연휴인데 혹시 제 댓글을 보고 공격적으로 느끼셨거나 마음이 상하셨을까봐 우려도 되는군요 ^^;; 단지 의견을 나누고 싶은 마음과 호기심 때문이니 너그럽게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글로써 생각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비언어적인 소통이 생략되니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행복한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톡톡캔디 2012-01-22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부 수업 시간에 들었습니다. 고 장영희 교수님께요. 덧붙여서 소로우가 죽어갈 때 죽다가 기어코 떨치고 일어나 자신이 마지막 말을 남겼는지조차 확인하고 죽었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소로우 전기를 찾아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소로우와 에머슨의 글은 미국에서 정책적으로 띄운 바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적인 정신이 무엇인지 나타내주는 담론이 필요해서요. 이들이 속한 철학사조가 초절주의인데, 세계적인 석학이 인정할 만한 철학적인 사조였는지요 (아마 거의 들어보신 적이 없으실텐데요.) 마치 허클베리 핀이 막상 읽으면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가장 큰 강 중 하나를 배경으로 소수자들 (흑인,아웃사이더인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미국적인 소설이라는 중요한 의미로 해석되면서 명작이 된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합니다.

전 더 이상 문학을 하지 않고, 미국문학은 더더군다나 제 전공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적인 색채를 떠나 좀 더 보편적인 인간과 가치를 이야기하는 문학 작품으로 저는 멜빌의 작품과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훨씬 좋습니다.

airmoo 2012-01-2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영희씨에 대해서는 물론 톡톡캔디님이 더 잘 아실거라 생각되지만, 소로우에 대한 호감이 있고 직접 월든 호수까지 찾아가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맥락에서 저런 에피소드들을 이야기 하셨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네요. 그때로 되돌아가서 청강이라도 하고 싶군요 :)

그리고 톡톡캔디님에게 출처를 밝혀달라는 요구를 하면서 세계적인 석학들이 인정했다는 저 자신의 주장에 근거를 밝히지 않는 우를 범했군요 ^^;; 소로우와 월든이 간디, 톨스토이, 법정스님의 사상에 뿌리가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고, 이외에도 존 메이너스 케인즈, 버드난트 러셀, 마르틴 루터 킹 등 수많은 경제학자, 철학자, 사상가들이 소로우의 사상을 인용 및 확대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월든을 읽으면서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좋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획일화되고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해 인색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월든같은 책을 만난다는 것은 나다움과 인간다움을 유지한다는 것에 대해 아주 좋은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설령 소로우의 청빈이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글을 미국에서 정책적으로 띄워줬다고 하더라도 소로우와 월든의 사상은 여전히 큰 가치와 힘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톡톡캔디님이 보시기에 더 뛰어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정책적으로 대중적으로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멜빌이나 에밀리 디킨슨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했기에 이 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기는 어렵겠네요.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것이 이럴 때 참 아쉽습니다.

톡톡캔디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찬사 일색인 리뷰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소로우의 옆구리를 과감하게 찌른 리뷰였기에 ^^;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에 댓글을 달았던 것이었는데 정성스럽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온오프라인을 불문하고 참 즐거운 일인 것 같습니다. 즐거운 독서 생활 되시길 :)

톡톡캔디 2012-01-25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교수님은 제 은사님이시고 제가 존경하고 개인적으로 가까이 모셨던 맨토이십니다. 장교수님이 미국문학 전공자이셔서 소로우와 에머슨은 꿰뚫고 계셨을 거예요. 음..전 덕이 부족해서 주로 시니컬합니다만 (특히 글이 그렇습니다), 장교수님은 글은 아주 따뜻하시지만^^ 직접 대하면 가끔 권위나 정통을 뒤집거나 도전하는 발언들 하셨습니다.

제 성향이 그런 거 같습니다.
예를 들어 퍼시 쎌리가 아무리 위대한 시인이었다고 해도 사상활이 개차반인 사람이 사랑이 어쩌구 저쩌구하면 던져버리는 스타일이라서요 ㅠ.ㅠ -_-ㅋ

정치적인 바탕이 되기에는 소로우나 에머슨의 글들이 낫겠지요. 멜빌은 아주 난해하고 디킨슨은 면도날같은 자의식을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를 가두어버린 사람이니까요. 문학 작품은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나 해석하는 이들에 그 가치와 의미가 달렸다고들 말하기 시작한지가 이미 수십년이라 그런 맥락에서는 - 소로우의 글과 사상의 가치는 그걸 해석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밖에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정치적인 혹은 거시적인 시각과 거리가 지극히 먼 사람이라 .... 개인의 삶에서 구현되지 못하는 가치를 타인에게 떠들지 말아야한다고 믿어서말입니다. ㅠ.ㅠ 이 편벽됨으로 인해 그냥...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볼려다 모래만 보는 인간이랄까요. 소로우에 대한 호불호는 그냥 모래 한 알 같은 세계에 갇힌 사람이 한 말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ㅠ.ㅠ

울프심 2012-06-18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내용이 있었는 줄 몰랐네... 쏘로우 얘기는 학부때 19세기 미국문학시간 때 나도 들었던 것 같은데..그래서 월든을 아름다운 글로서 보지는 않았던 것 같군..벌써 17년전 얘기네..군대 갔다와서 3학년 이었으니까...너도 나도 많이 늙었네...ㅋㅋ

톡톡캔디 2012-06-18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도 장교수님 수업 들었어? 넌 복학해서 17년전이지만 난 더 옛날 얘기다. ㅠ.ㅠ 장교수님 보고싶네. 얼마 전에 유고 나왔더라. 강의록. 너도 보고 싶은데... 참 사는 게 그렇다. 넌 딴 모습은 사라지고 아빠만 남은 것 같아서 ^^ 서울 올라오면 연락해라.
 
강한 여자의 낭만적 딜레마
마야 스토르히 지음, 장혜경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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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음...난 융의 심리학적 접근이 참 좋다. 동화를 심리의 초등학교, 라고 부르며 원형적인 모습들을 밝혀내는 것이.'손없는 소녀'라는 동화를 통해 강한 여자들이 연애라는 환상에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혹은 꼭 왜 잘못된 남자들을 만나는지, 설사 만나도 일상속에서 어느순간 관계가 왜 파탄나는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 음.. 또 내 심리 분석을 하면 한번 나자신을 갈아 엎고 있는데, 고통없이 성장이란 없고, 성장은 불가피하다는 대목은 수긍한다.

지금 이자리에서 그래도 나는 20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줌마'라는 중성적 딱지가 그 아무리 이 사회에서 '굴욕적인' 가치 평가로 자리매겨진다 한들, 한편으론 놈들이 신경 안써서 참...편하다. 놈들한테 신경 쓸 필요도 참 편하다. '여자 놀이' 따윈 신경 안써도 되니 참 편하다. 가증스런 평화일 망정, 그 평화로운 숲속에서 내 속에 내면화된 지긋지긋한 '손 자르는 아버지들을, 은으로된 가짜 손을 달아주는 아버지들을' 더 이상 분노로 징벌하고 밟으려 하지않고 그저, 깔끔히 넘어서리라.

그리하여 '봉해진' 정원이 아니라.... 그저 내 온 세상이 '정원'이 되기를 ... 아직은 '지뢰밭 사이를 춤추며 지나가며' 소망한다. 그리고, 애타는 그리움으로. 내 속에서 빙긋이 '둥그렇게' 미소짓는 어머니, 하나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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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진 시노다 볼린 지음, 조주현 옮김 / 또하나의문화 / 1992년 12월
평점 :
절판


많은 여성 관련 저작들을 읽으면 이론에 치우친 나머지 분노에만 들끓고 마음이 팍팍해지는 걸 많이 느낀다. 좀더 어렸던 20 대엔 그 들끓는 분노의 힘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 뜨거운 분노로 성취한 것들, 실패한 것들을 이제 줏어담자 보니, 차가운 분노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되었다.

겉으로 갈무리 된듯 보이고, 이젠 내 불완전함과 내 죄로 (대상이 남자든 여자든) 남의 불완전함과 죄를 어느 정도 가늠하고 한발짝 물러서는 법도 배웠지만, 여전히 손을 뻗을 줄은 모르는 한계를 느낀다. 여전히 정화되지 못하고 앙금처럼 가라앉은 상처를 보듬어주는 언어들을 가진 지혜로운 이마를 가진 여자들이 있구나 싶다.

사실, 난 아르테미스와 페르세포네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 이 두개가 동전의 양면이다. (우습게도) 난 아르테미스 부분을 읽으며 울었다. 아르테미스 딸과 그 어머니부분을 읽으면서.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하는 아르테미스 딸들의 결연한 말속에는 결코 엄마의 삶을 구원해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있다는 저자의 통찰이 날 울렸다. 많은 여성들을 만나며 카운셀링을 하며 치유한 저자의 통찰이 원형편 다음에 실제 생활의 예에서 잘 드러난다. 읽어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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