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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한창훈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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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문학작품으로 귀결되기까지 작가가 가장 공들여 신경 쓰는 과정 중 하나는 아마 ‘고쳐내기’ 작업이 아닐까 싶다. 이미 최선이다 싶게 고심했다 하더라도 작가는 더 나은 문체를 위한 단어를 선별하고, 오류는 없는지, 문맥에 맞는 흐름을 위해 의심과 고심을 인고하며 완성해 낸다. 숱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만 원하는 결과물로 단장해낼 수 있는, '수정의 힘'이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러한 시간에 대한 투자가 반드시 좋은 결과물로 비례되는 일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훌륭한 안목을 가진 작가에게 마침표를 찍게 되기까지의 노력은 응당한 보상일 수 있을 것이다. 성공적인 '고쳐내기'의 일환으로 가장 이상적 화합을 이루게 될 때 독자는 안전하게 흐르는 기류를 감지하며 감화 된다.

 

 

성공적인 작품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독자들은 그 안의 어떤 상반되는 가치들과 만나게 된다. 그 중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어떤 일반적이고도 가치 전도된 보편적인 면이다. 매번 흔하고 비슷해 보이는 인생들을 보면서도 쉽게 몰입하고 위안을 찾게 되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나의 삶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면에서 우리는 작가의 개성, 디테일한 기술의 발견을 통해 재미를 찾는다. 말하자면 작가만이 보유한 고유한 어투랄지 참신한 비유들, 독창적인 소재, 유연하게 흐르는 문장의 맥과 같은 창조적 발현에 따른 것들이다.

이렇게 작품의 보편성과 독창성이라는 두 면이 상호보완적 긴밀함을 유지하게 될 때 좋은 완성을 위한 지지대를 올릴 수 있게 된다. 가령 똑같은 주제를 다룬 영화를 볼 때도 거장이 만든 훌륭한 영화와, 그저 그런 뻔하고 지루한 영화를 구분하는 이유는 총지휘자 즉 감독의 연출력에 그 차이를 읽기 때문인 것이다. 밀접하고도 이웃하는 두 가지 가치들이 합당하게 전개될 때 창조적 면모는 더욱 돋보이게 되고, 동시에 작품 안에서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보편적 타당도 가능해 지는 일이다.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의 제목만 보면 사실 글쓰기에 대한 작가만의 어떤 기술적이고도 전문적 면모를 기대하게 되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이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가에 대한 사실상의 긴 여정과도 같은 필연 같은 삶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한참을 읽으면서 위에서 언급한 문학작품의 내부적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작가에게 '쓰기'란 무엇일까란 물음을 떠올렸다. 

어쩌면 여기 나온 이야기들은 작가로 하여금 인고하며 '고쳐내기'를 반복돼 실천하는 문학적 인고와 참 많이 닮은 인생들이다. 보편적이고 독창적인 소설 내부의 균형을 맞추는 일 따위를 끊임없이 세상 속에서 헤집고 두리번거리며 찾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걸 말이다.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치고 완성하는 일처럼 이 책에 언급되는 삶은 거듭된 오류를 목도해야 하는 고된 일이며, 조금씩 진보하려고 애쓰는 일이었다. 작가가 겪어내고 응시한 시간들은 거의 외부세계와의 고리를 찾기 위해 떠난 바람 같은 기록들인 것이다. 



그래서 ‘쓰기’를 위한 인생은 사실 별스러운 예술인으로서 살아가고자 결심한 순간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이미 벌어진 삶의 되돌아보기 속에서 찾아진 일에 가깝다고 돌아본다.

서문의 말마따나 왜 쓰는가에 대한 말은 이후에 붙여진 몇 가지 핑계처럼 만들어졌다. 이후에 생각해 낸 여러 현실적인 이유들을 보니 궁색하게 축조된 허술한 말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사실 너무나 타당하고 고결해서 애처롭기까지 하다. 사람이라면, 어른이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이유들인데, 차마 제 재능의 자랑을 드러내놓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정도로만 비춰지게 됐다. 그의 겸손한 태생적 기질이 사회 맥락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놓고 가장 최적인 직업을 선택하게 한 모양이다. 한창훈에게는 왜 쓰는가, 왜 소설가가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은 해질 무렵 자연히 돌아가야 할 바닷가 섬집처럼 절로 그 발걸음이 그려지는 일이었다. 

온 생을 걸쳐 만나 온 주변인들, 그들을 둘러 싼 기막힌 삶, 그리고 작가 개인의 소신에 합당한 직업인으로서의 소설가를 꿈꾸게 된 이야기꾼으로서의 상상은 이런 식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작가가 말하는 주변인들에 관한 인생들을 지켜보면서 주의깊게 들여다 본 면은 이들의 삶과 존재가 구체적으로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 주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책을 덮게 될 무렵에는 조심스럽게 그 감정이 아마 ‘연민’으로 귀결되는 숱한 무엇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되는 숱한 사람들, 이야기들 속에는 삶의 저변을 확장해 볼 수 있는 보편적 의미들이 있다. 작가 개인사뿐 아니라 주변의 좋은 예술인, 흥미로운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긴 하지만, 곳곳 주목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는 조금 다른 면을 들추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무지하고 때론 무책임하며 처량한 몸부림을 치는 나약한 인간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연민으로 이해됐을 수많은 인생의 가련함을 들추고 싶었을 것이다. 너무도 남루하고 왜소해져버린 인간의 내면을 보는 일은 동정 보다는 차라리 외면하고 싶어지는 불편함이 더러 있다.

예컨대 여고생을 짝사랑한 남성의 이야기에서는 덜컥 고백해 버리는 장면에서 뭔가 좀 아니다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비루한 인생의 한 빛 희망을 주는 우화처럼 읽어낼 수도 있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그러한 두 사람의 행동은 참으로 무책임하며 일방적일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는 일이다. 이런 식의 일방통행으로 타자에게 혹여 폭력이 될 수 있지 않나, 쉬이 낭만으로 무마돼 버리는 일은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종종 폭력과 폭언이 나오는 일화를 들을 때도 무심하게 인간을 바라보는 게 다일 수밖에 없을까 하는 생각이 미쳐 결과적으로는 '이게 다인가'란 생각이 들어 허무했다. 작가의 ‘연민’이라는 관점에 좀 더 가지치기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좀 더 세밀한 배려의 개입도 기대하고 싶어진다. 가난하고 소외된 삶에서 보이는 폭력성이 슬픈 보편이라는 큰 덮개로 가려졌던 것은 그동안 많이 봐왔던 우리네 모습이다. 이제는 좀 더 날 선 비판적 시선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작가는 고향에서 나는 바닷내를 맡아야 삶의 의미를 찾고, 비린내 풍기는 음식을 먹어야 살며, 가련한 삶의 입이 되는 글쓰기를 해야, 산다. 그렇기 때문에 물의 길처럼 언제나 새로운 한걸음을 내딛는 그런 소설가이기를 응원하고 싶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변화 가능한 특권을 가졌기에, 부디 이 땅의 초라한 개인들에게도 변화될 모반의 열망이 가득해지길 바라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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