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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평점 :
그러고 보면 시간을 분단위로 끊어 사는 정교함 부린 적 없이 용케도 꾸려 살아가는 듯하다. 비록 혀를 내두를 만한 결과물이나 업적, 돈과 담을 쌓기는 했어도 크게 남들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의 마음을 꾸린 일도 그리 무의미한 시간은 아닐 테니까. 조금 더 말하면 내게 시간이란 달리의 그림에서나 나오는 시계처럼 몹시 변형돼 있고, 한껏 늘어진 상징어에 가까운 것 같다. 수시로 협소해지고 길게 일그러지기도 해서 겨우 원형만을 유지하는, 그런 이미지에 불과하달까. 그래선지 객관적인 시간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보통의 사람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편이라 퍽 게으른 편이다. 그래도 그런대로 나는 한 살 한 살 먹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해본 일이 거의 없을 정도의 태평한 마음을 가꾼 편이기도 하다. 대게 그런 식으로 시간은 의식하지 않은 채 흘러갈 뿐인 것 같지만, 이게 또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만 계절마다 피부에 와 닿는 온도들, 가령 해가 떨어지는 일몰의 풍경이나 하루하루 배가 고파지는 때가 찾아올 때, 이러한 순간의 존재하는 시간만큼은 조금 더 기억해보려고 의식한다. 가장 먼저 몸이 알아버리는 감지계를 항상 켜 놓아서인지 그나마 그 시간마다의 유효한 일을 꾸릴 수가 있다.
가끔은 썩 괜찮은 책을 만나는 때도 내 기질과는 상관없이 주어진 객관적인 시간들을 상기해보기도 한다. 이 때는 없던 조바심도 슬쩍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는데 가보지도 못 했구나’ 라든지 ‘끝내주게 맛있다는데 이 맛의 근처도 못가보고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 따위들. 겨우 이 정도의 순간에 시간의 무한함을 생각한다고 코웃음이 절로 나오는 노릇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없던 조바심이 생긴다는데.
책의 목차를 죽 보고 있자니까 어김없이 한숨과 조바심이 드는게, 어떻게 이런 부지런한 삶을 살아보나 싶어서 마음이 자꾸 채근되는 것이었다. 매일 매끼 먹는 것만 잘해도 뭐가 되도 됐을 것을 어느 누구는 한 끼의 양식이 마음을 차고 넘치게 할 만큼 마음의 양식이 되어 돌아오는데 대관절 나란 사람은 입에 맞는 나물 이름 하나도 모르고 사니 한심하다지 않을 수 있을까.
책의 작가는 일일이 궁금해 하고 그 역사를 알아낸 덕분에 쌓아 올린 뒤켠의 광 안에 보고 배울 게 그득해 보인다. 꼭 그처럼 많이 먹어보지 못해서 안달 난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 탐구하고 그 뿌리를 더듬는 태도의 노력이 멋져서 닮고 싶은 의미에서의 안달이 생겼다. 농담이 아니라.
박찬일 작가는 요리사로서 음식에 대한 추억을 더듬지만 동시에 작가로서도 글의 품위가 뛰어나서 요리일화에 그치지 않는 그야말로 가니쉬가 풍부한 삶의 글쓰기를 선보인다. 무엇보다 여행을 사랑하고 그곳이 선사하는 자연의 맛을 잊지 않은 덕에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와 같은 책이 나왔으리라. 이탈리아에서 배우고 돌아온 이후에는 안타깝게도 가게사정이 악화된 최근까지 훌륭한 맛의 전도를 해왔다. 그의 가게에 들러 진한 토마토향이 풍기는 파스타 한입 먹어보지 못했다는 게 뒤늦은 아쉬움이지만 대신 2부에서의 이국적인 풍경하며 친절한 비법 소개와 에피소드들을 들여다보노라면 본토의 맛은 과연 어떨지, 그가 만드는 파스타의 맛은 어떨까 침이 잔뜩 고인 채로 상상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좀 더 인상적이었던 1부에서 특히 바닷가 음식 편에서 그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모든 전말이 나오기도 한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허름한 가게에서 화려하지 않은 단출한 가짓수의 재료만 가지고 그 고장의 고유의 음식을 만들 것, 요란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곳이 아닌 손맛의 진정성이 있는 곳일 것. 이는 먹는다는 것의 의미, 이와 관련한 모든 철학이 모든 재료가 되고 발효가 되어 하나의 음식으로 탄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부에서 언급한 책들의 언급 역시 가지치기를 도와주는 흥미로운 글이었다.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어쨌든 그 끝이 있게 마련이어서 소중하게 일구고 잘 안배해서 살아가야 하는게 마땅하다. 돌아봤을 때 인생의 추억을 더듬는 맛의 찡한 울림이 전해지는 순간만큼은 잊을 수 없기에 시간의 영원성을 상기하게 되는 것 같다.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만큼은 좋아하는 사람과 푸짐한 한 상의 음식으로 떠올려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아마 대양과도 같은 미소가 그 끝을 모르고 스르르 번져나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