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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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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하는 가치조차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아,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상식과 비상식이 참신한 구호로 떠오른 요즘이야 말로 참 아리송한 일 투성인데, 숱한 논쟁 속에 파묻힌 진부한 상식 논리가 과연 어른들이 이룩해내는 판 안의 일인지 헷갈리기만 하다. 사실 모든 문제랄 것들은 영원한 명제로 귀결되기 보다는 수많은 가지를 만들 뿐이 아닌가. 더구나 눈으로 볼 수 없는 문제들을 말할 때 사람들은 유독 관대함을 잃고 독해지며 삐뚤어진다. 무형인 가치나 진리 따위같은 진중한 사안 앞에 수호해야 한다는 마음의 조종은 수많은 가지만큼이나 어떨때 참 한심하게 발휘 되곤 한다. 함정에 빠진 홀 안의 문제들은 소위 어른이 하는 말과 행동이라기에 시간의 진보와는 상관없이 나아가기도 또는 퇴보할 수 있는 것다는 것을 참으로 극명히 보여주는 구멍이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 어른이 되면 응당 자주적인 사람이 될 거라고 믿는 순진함이 있다. 이는 차라리 너무 아름다워서 처연하기까지 한 오해다균형을 지켜내는 절대적인 감각이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의 충격이란 고스란히 어른이 되고 말았다는 흉터 같은 증거로 남는다. 어른이 되어버린 것, 삶은 이런 식으로 실망과 경이를 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용케 이 시간이 주는 보상이라면 각각의 취향이라는 고유 감각 체계로 나누어 심는 일일 것이다. 이라도 생기게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어쨌든 타고난 기질을 제외하고 나면 거의 환경에 의해 생성되는 게 대부분이기에 취향의 고착은 아주 서서히 그리고 일순간에도 심어지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나쁘거나 좋음을 구분하고, 자신만의 감지 시스템이 24시간 가동되는 민감한 동물로 변화한다. 어른이 된 이상 더는 변화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쯤도 알게 되는 게 유감이긴 하지만 어쨌든 인간을 타자로 다름을 인식하는 첫 번째 기준이 취향인 것만은 확실해지니 이는 살면서 참 중요한 개인 요소인 것이다.

그래 더는 꼰대 같은 말도 듣고 싶지 않아지고, 몸에 걸치는 브랜드가 보이냐 안 보이느냐로 고상의 유무를 따지며, ‘네가 게맛을 알아?’란 유행어도 3년이면 잊혀지는데 도를 아십니까?’로 십여 년간 같은 블록을 왔다갔다하는 치들의 머릿속을 헤아리거나 죽어도 못하겠거나 생각하는 일들 모두 각각의 몫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이 가동 센서로 세상을 감지하면서 철저하게 개인의 패턴을 만들어 가고 그것을 유지 또는 보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취향의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주류건 비주류건 상식 안이건 밖에 있건, 그윽한 향기를 품건, 밍밍하건, 구역질나건 어떤 것이든 그 각자로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절대적일 리 없는 타인의 취향은 상하를 논할 수 없는 그런대로의 가치로 획일화에서 멀어질 수 있는 빌미를 주기 때문이다. 다르면 다른 대로 좋고, 비슷하거나 같거나해도 매력이 있는, 그러니 작가 하루키의 취향은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게 하는 즐거운 경우라 할 수 있다.

 

 

하루키의 명성이야 지구 끝까지 따라가도 그림자 곱절만큼 따라 잡을쏘냐 싶으니 설사 고약한 취향이라 하더라도 그저 특별하게만 보인다. 무엇보다 그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더라도 모를 듯한 미지의 사람 같아서 좋다. 시시콜콜하게 쏟아내는 유머 하나에도 내내 자문하게 하거나 수많은 자극이 되어주고, 상상하는 기쁨을 주기도 한다.

 

 

 

 

 

문득 왜 우리가 죽을 때까지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떠오른다. 어쩌면 책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무뎌질 수밖에 없는 취향을 좀 더 날렵하게 가공하고 윤색해야할 윤활유 역할을 해주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루키는 작가라는 특수한 직업인이라 세상을 보다 다르게 보고 체험하려는 갑절의 노력이 있다지만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행할만한 노력들을 생각해보면 책을 읽고 각종 매체, 취미 생활과 여행, 사교와 같은 경험이 아니고서야 심히 취향을 갈고 닦을 일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갈수록 그리 다양해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단언컨데 책이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철저히 한 개인과 사회와 현상에 대한 역사로 안내해주므로 그러니 많이 읽을수록 자신의 오류를 발견할 가능성은 열리고 수정할 수 있는 자극제가 돼 준다. 더러는 종이가 아깝다고 느껴지는 한심한 책을 만날 때도 그런대로의 경험이 될 것이며, 운이 좋을때는 지진이 일어날 것 같은 깊은 울림의 증명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책이 주는 짜릿한 순간이다. 책은 일방적인 텐션을 주긴 하지만 우리에게 수많은 가지의 발현을 돕는 아주 좋은 취향의 윤활제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사색의 시간을 선사해주고 더불어 끝내주게 부지런한 삶을 살으라 겁주는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솔직할 수 있는만큼 솔직해서 그가 좋아하는 맥주한잔 함께 나누고 있는 청량함이 느껴진다. 있는 모습 그대로 즐거워 할 줄 알며, 건강한 비판을 하고마음이 시키는대로 하면서 늙어가도 추하지 않고 오히려 귀여운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어른이다. 나이든 남자들에게 풍기는 전형적인 향기가 나지 않고, 계속해서 근원적 가치를 따져 묻지 않는 종교인 같은 장엄함이 없어서도 좋다. 그만의 취향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굳게 다물어 있는 입술의 다부짐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으니 참 근사한 어른을 만난 기분이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에서 하루키가 보이는 일상의 태도에는 아침의 숲길 풍경 같은 맑은 기운이 흐른다. 오랫동안 다른 곳을 살아낸 풋풋함 때문일까? 끊임없이 다름과 같음을 골라낼 줄 아는 혜안이, 소소한 가치와 타인의 취향을 새끼고양이 혓바닥 다루듯이 섬세하게 관찰하는 천상 소년의 눈 같다. 느린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게 하고, 하나의 조각품 같은 정형의 세계를 기묘한 방향에서 바라보게 하는 시각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의 성품을 감지하고, 익숙한 듯 다른 서로의 안목을 욕망하며, 남다르다고 믿는 자의식에 취할 줄 알고, 또 내가 갖지 못한 목록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부지런함을 신경 쓰게 되는 것일 테다. 영원히 오감으로 느끼며 투쟁하듯 흡수하고 버려내야 할 과정들을 왜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지 하루키는 그 일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자주적인 사람이라 믿게 해주는 고마운 착각이라도 생길테니까. 언젠가 내게도 더 배우면 뭐하나 싶어지는 순간이 찾아올 때, 여기 이런 어른도 있는데 왜 나이 따위로 더이상의 삶을 바라지 않느냐 채근댈 수 있는, 항상 옆에 두고 싶은 책이 하루키의 책이다. 어떤 식으로든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 언젠가는 하루키와 같은 근사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와 같은 진정 누군가로부터 닮고 싶어지는 어른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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