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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 박범신 논산일기
박범신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4월
평점 :
감히 작가에게만 허락될 ‘우울’이란 우물 속의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혹 동화됐던들 주변의 모든 일들이 유폐된 유리관 안의 안락한 온도로만 감지되는 일일 텐데 진짜일리는 만무하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그런 것이다. 물론 이 책이 덩달아 우울하게 만드는 이야기만을 담는 것은 아니다. 청년의 기백, 소소한 일상, 기쁨과 슬픔이 모두 담겼다. 다만 나는 작가가 주는 여러 감정의 전파 중 우울의 틈에 끼어 든 것이다. 엄마 손을 놓은 고아처럼 슬피 울어보지만 작가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각자에게 허락된 우물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지 그런 생각을 해봤다. 과연 끝 모를 깊은 세계는 유한하게도 펼쳐진다.
작가는 제 안의 깊이를 자꾸만 확장시켜 나가기 위해 홀로 걸어가는 구도자, 한사코 말리는 싸움을 부리는 열네 살 소년, 혓바닥이 시퍼레지도록 애원해도 소용없는 투정꾼 같다. 아니면 제 안의 여러 소년들을 데리고 곧 연기처럼 흩어져버릴 피리 부는 사나이는 아닐까?
그의 보폭으로 따라가는 내내 운율에 맞춰 부를 수 있는 수만 가지의 노래가 흘러나오지만 돌아서면 아무 음표도 생각나지 않는 희미한 악보만이 손에 쥐어져 있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금방이라도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닌 언제나 구름 하나쯤 걸쳐 내려앉을 수 있는 만큼으로만 따라가고 싶어진다. 서로를 위해서 필요한 간극인 것 같아서. 누구나 고유한 향기를 지닐 권리쯤은 얼마든지 필요하니 말이다. 작가가 ‘향기롭게 늙어가고 싶다’란 말을 할 때 이 뜻은 홀로 폈을 때 나는 향기리라 싶었다. 아무리 시든 꽃을 손에 쥐어든다 해도 결코 그 향기를 의심하지 않을 것 같은 명징함이 작가에겐 있다.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는 바로 ‘향기롭게 늙어가기’ 위해 영혼의 정원에서 꽃을 가꾸는 일일의 기록이다. 스스로 먹을 밥을 짓고, 살기위한 글을 짓고, 홀로 방안을 가득 채울 수날의 외로움과 기쁨, 숱한 회한의 언어들이 눈먼 달에게 속삭이고 자연을 응시하고 있다.
세계는 끝도 없이 작가의 눈과 귀에 대고 순간의 진심을 반추하도록 종용한다. 그의 마음에 언어로 떠돌아 뒷문을 통해 걸어 나오는 그 뒷간의 풍경을 한참도록 서성여 봐도 지루할 틈이 없다.
나는 가끔 작가들이 제 삶을 돌아보기를 ‘어디로부턴가 끊임없이 떠나가는 유배자’란 신분을 고백할 때 의아해 하곤 했었다. 제 홀로 시련을 내리는 심보는 어떤 행복을 위한건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어느 순간 찾아오는 게 외로움의 정서일텐데 왜 작가들은 수만 번이라도 떠날 것을 주저하지 않는 걸까. 이 추상적인 상태를 감내하는 자질은 대관절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이길래. 그런데 여기 박범신의 고백을 듣고서야 무엇이 각자의 몸을 부풀게 하는지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어차피 그것들은 하루아침에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삶은 다만 순간에 소속된 은하의 자장 안에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각자의 오목하거나 볼록한 눈으로 감지하는 망이 있고, 그것이 끊임없이 어디론가 홀로 떠날 준비를 도와주는 촉매제가 되어 주는 것 같다. 이는 예민하게 감지해 내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특권인 것도 알겠다.
때때로 작가의 그것은 좀 더 날선 포물선을 그리며 불시착하기도 한다. 그가 아니라면 우리가 대신했을 세상의 끝점에 서서 기꺼이 체험하고 미지의 세계를 생생히 증언하는 대범함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불시착이 언제라도 아름다운 여정일 수 있게 돕나 보다. 작가에게는 늘 오롯이 놓인 바위의 기개, 그 틈을 비집고 나온 야생초의 은은한 향이 맡아진다.
‘안락은 작가의 몫이 아니’며 ‘풍향계처럼 외부의 새바람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제 이데올로기는 굳세게 지키는 청년’이기를 희망하는 부분에서는 그만의 고유한 의지가 느껴진다. 악센트 없이도 장엄한 연주가 흘러나오는 삶의 연주자처럼 무수한 이야기를 기대하게 한다.
마냥 즐거울 낙관이 없고, 명백히 뻗쳐간대도 흉이 아닐 고고함을 벗어버리는 태도도 흥미롭다. 그 삶이 알 수 없이 흩뿌려진 별의 배열처럼 헤아리지도 못할 역사가 되니 과연 장관이란 생각만 든다.
이 책은 자주 ‘길’을 이야기한다. 반백의 ‘청년’이지만 아직도 그는 자주 길을 잃고, 오가다 만난 살아있는 모든 것에 연민하며 눈물 흘리는 헐거운 눈을 가졌다. ‘차라리 어서 우물 밑에 닫기를 기다린다’니 그는 어쩌자고 이 상한 얼굴에 어두운 출구만을 쫓는 걸까. 언제고 부스스 일어나는 붉은 흉터 자국을 신화처럼 간직하고 싶어서?
그가 때때로 세상에 걷어차인 방랑자처럼 굴긴 하지만 결코 제가 죽을 나무 위에서 걸음을 멈추고 울어버리는 눈먼 조울증 환자는 아니다. 길 끝에 놓인 비밀을 알려주는 열쇠를 손에 쥐고서도 과감히 그것을 강물 속에 던져 버릴 용기가 있고, 매순간 사랑할 줄 알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성장의 기로에 언제고 놓여있다.
작가의 하루만을 쫓는데도 잔뜩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다. 길은 사랑이 끝나지 않는 한 계속 될 테고 저녁이 되면 그저 밥 짓는 연기 앞에 서서 자욱 거리는 만큼의 포만감을 상상하면 그만일 것 같다. 그가 가꾼 꽃들이 만발한 길옆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는 늦은 오후에, 나의 반백 '청춘'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