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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학자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 - 야생의 순례자 시턴이 기록한 북극의 자연과 사람들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 지음, 김성훈 옮김 / 씨네21북스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시턴의 동물기>라는 표제는 어디서 주워들은 적이 있지만, 이 외 어떤 정보도 아는 바가 없었다. <동물학자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을 읽었을 때 간단한 책소개와 앞날개의 저자 소개를 훑어 보고 나서야 어느 시대를 살았고 어떤 명망의 위치에 놓인 사람인지를 대충 알았다. 그런데 목차를 지나 심지어 책의 절반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내려놓지 못하게 되었다. 그 이유인즉은 분명 시턴이란 사람이 백여년 전의 인물로 이 책 역시 그 때 쓰인 글이라는걸 알고 출발했는데, 문체라던가 시대의 분위기 같은 것이 전혀 지금과 동떨어진 채로 읽히지 않아서였다. 이 책이 필시 재편집된 본이라던가 시턴의 여행기를 다시 재구성한 제3자의 저자가 있는게 틀림없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정말이지 시턴의 생각이나 말투같은 것이 주는 느낌이 너무 생생한 것이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날것의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상세히 덧붙인 그림이라던가, 어딘지 모르게 옛날 사람들의 글에서 느껴지는 점잖음 같은 것들이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가 흔히 좋은 고전을 읽거나, 훌륭한 오랜 영화를 봤을 때 이를 칭찬한다는걸 고작 ‘과연 시대에 어떻게 이런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졌는가, 놀랍다!’ 라는 식의 말을 할 때가 있다. 과거 특정한 시대를 특별히 얕보거나 해서 하는 말은 아니겠으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세의 흐름에도 전혀 뒤쳐질 게 없다는 생각을 확인할 때 이런 찬사 아닌 말을 한다. 과거에는 마치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라는 듯 대단히 한심한 착각을 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들 세대에서는 가장 젊고 신선한 작품을 생산하는 신세대였음은 자명한 일 아닌가. 이런 논리로라면 지금의 우리도 반세기만 흐르면 똑같은 소릴 들을게 뻔하다. 고작 과학 하나 발전시켜 놨을 뿐인데 거의 모든 면에서 이런 소릴 들으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평소 작품에 대해선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동등하게 평가하려는 편이지만 이 책은 뭐랄까 백여년이 넘는 작품치고 매우 생동감이 넘치는 기운 같은 것이 느껴지는 놀라움을 선사한다. 너무나도 재미있는 자연 관찰기이면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현재와 미래를 잇게 해주는 훌륭한 에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시턴이란 작가의 뛰어난 글 솜씨 덕이 가장 크겠지만 이에 앞서 북극이라는 세계가 아직도 우리에게 미지의 땅이고 잘 변화하지 않은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시대 차이를 크게 체감하지 못할 곳, 이곳은 여전히 비슷한 모습으로 천천히 자연에 순응해 살아가는 것만이 진리인 비문명국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난 백여 년간 이토록 변화가 더딘 곳도 없었을 것이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크게 위협받지 않은 채라서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대조적으로 이 땅을 제외한 거의 모든 땅은 지구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인 변화의 시간을 지났고, 지나친 감도 있어서 말로 다하지 못할 불행의 결과도 초래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변화하지 않은 땅이어서 이곳과의 거리가 안심되기도 한다.
문득 세계지도를 펼쳐보면 세계는 그저 한 무리의 이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어떤 차이나 구별이 없이, 다른 언어 다른 이념 다른 얼굴색 따위는 땅 위에 쓰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나 선명한 차이라면 강이며 바다며 산과, 황무지, 두텁게 쌓인 눈의 대비만이 서로를 구분 지을 뿐이다. 시턴의 눈에도 북극이란 땅은 다름을 인식하기 위해 밟은 나라가 아니다. 자신이 좀 더 많이 배웠으며 우월한 나라에서 온 여행자로서의 신분 차이를 알려고 떠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고 그럴 수 있다면 보호해줄 수 있는 방도를 알기 위해서 떠나온 여정이었다. 이 따뜻한 마음을 다 알아서였을까? 그 척박한 땅에서 무려 반년이나 살도록 허락한 자연의 자비가 시턴에게 있었다. 그리고 시턴은 그 고마움을 평생 동물을 연구하고 사랑하라는 뜻으로 알고 살아간다.
생물체가 존재하기에는 너무나 추운 땅, 사람은 거의 살지 못하고, 그나마 생존해 있는 동물마저도 멸종 위기에 처한 북극이란 땅, 이런 땅을 시턴은 왜 탐험하고 싶었던 걸까?
혹시 그는 세상의 끝을 보고 싶었던걸까. 카누를 타고 순백의 그림에서 까만 눈의 순록 한 마리가 달려오는 걸 보고 싶었던 그 단순한 꿈이 그의 마음에는 항상 살아 있었다. 그렇게 이 책은 탄생했고, 이 호기심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탐험가와 여행가들의 가슴에 별처럼 존재하게 되었다.
시턴은 오래 꿈꾸던 곳에 와있게 되었고 반년이란 시간을 그곳에 머물며 사람들의 표정과 자연과 상상을 초월한 교감을 하게 된다. 이곳 사람들과의 많은 일들을 함께 경험하고, 천산의 위용을 그저 경이롭게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는 동안 어느새 내 눈에도 설맹의 위험이 도사리는 것만 같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시턴의 여행을 쫓으면서 문득 여행은 새로운 풍경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람들의 인식의 차이, 그곳의 역사, 문화 등을 알게 해주는 것 외에 또다른 진짜 만남이 기다린다는 걸 알았다.
이는 바로 자신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사는 곳으로부터 떠나 다름을 체험하려고 여행을 시작하지만, 궁극으로는 ‘나’자신을 좀 더 극명히 알게 해주기에 떠나는지도 모른다. 시턴의 여정에는 자연이 그렇게 존재하게 된 연유의 역사와 생존의 법칙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살아 숨쉰다. 그들이 사는 습성들을 지켜 보면서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한 생각, 그리고 ‘나’에 대한 생각을 한다. 자연의 일부인 '나'를 말이다.
시턴은 거스르기 보다는 전적으로 자연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며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의 미개함을 보더라도 잠시 불편해할 뿐이지 어떠한 잣대를 휘두르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순록을 볼때도 무리하게 다가가는 법이 없고, 적잖은 혼혈인을 볼 때마다 어떤 기질 같은 것을 미워하긴 해도 다름을 분명히 인지하곤 한다. 특히 나는 천차만별의 얼굴들을 상상하면서 문득 이 혼혈인들은 오랜 세월 떠돈 자연스러운 만남들과, 자연의 순리를 얼굴로 새겨 온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함의 유전자, 자연의 온 얼굴이 미묘하게 얼굴에 버무려진 미지의 얼굴임이 분명하다.
시턴이 본 적막의 세계는 어쩌면 죽음과 가장 맞닿아 있는 곳이리라. 어떤 전조의 조짐이 있는 땅의 움트림처럼 동물의 죽음이 도처에 있고, 사람들은 동물들을 죽이고 먹어야만 사는 숙명이 있다. 자연의 고리 같은 것, 순환의 샘 같은 것이 호수처럼 고여 있음을 본다. 사실은 우리의 삶 역시 죽음이 아주 가깝게 맞닿아 있기에 오히려 살아있음 또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대면하는 북극의 얼굴은 아주 느슨한 경계로 삶의 연장선상 위를 달리는 카누의 속도만큼 달려간다. 문명과 물질의 세속적 욕망과는 차단된, 오로지 자연과 깊은 약속된 순결만이 아주 오래 퇴적된 눈의 두께만큼이나 두텁게 허락되는 그런 곳, 북극. 그곳의 참된 아름다움을 영원히 지키라 말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