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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ㅣ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하루를 살아도 ‘하루키처럼 어마어마한 생각을 해내고, 신선한 글을 써내려갈 수 있다면’ 이란 생각을 해본다. 참으로 다양한 영역의 일을 하는 것으로 가짓수는 많지만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키처럼 ‘단 몇가지 일인데 이걸 못하겠어?’ 라는 듯 완벽히 해내는 사람이 있다. 더한 것은 과시욕에서 뿜어진 열정같은 것도 아니고, 그저 이룸의 바탕 위에 글쓰기와 음악이라는 중심축이 바로 서있을 뿐이라니 더 할 말도 없어진다. 이쯤이면 하루키같은 사람이 부럽지 않고 달리 어떤 사람이 부러울까란 말만 무한 복창하게 된다.
그는 워낙 사생활 노출을 꺼려하는데다 작가라면 부푼 마음을 안고 참여할 것 같은 낭독회나 사인회 마저도 마다한다니 인간 하루키를 상상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다. 그럼에도 그가 전 세계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노벨상에 여러 번 언급될 만큼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상기하면 단언컨대 사람들이 한 작가의 사적인 면모를 전혀 모르거나 다소 아는 정도라 할지라도 별로 상관 없어한다는 것을 반갑게 인지할 수 있다. 작가의 사생활을 조금 더 안다고 해서 작품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것도 아리송한 일이고, 또한 생각해보면 전혀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다. 몇몇 산문이나 에세이, 소개글, 또는 신문기사를 통해서 알게 된 정보일 뿐이지만 이 정도라도 하루키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아주 가까운 사람처럼 인식한다. 그리고 이 착각의 기쁨을 매우 즐겁게 누린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루키의 글은 언제나 그렇다.
이번 <잡문집>이 하루키의 사적인 면모와 생각들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에게 아주 반갑고 소소한 재미를 줄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아 반갑다. 하루키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허구의 인물을 통해 그의 생각이나 삶을 조금이나마 반추해보던 독자들에게 이번 책은 온갖 잡설의 형태로 다양한 하루키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된 점이 흥미롭다. 물론 메모지에 적혔을만한 지극히 사적인 발현 정도라기에는 모자람이 있겠지만 나름대로 형식과 격식을 내려놓은 평범한 글로의 선보임이 하루키를 좀 더 가까운 사람이게 해줌에 부족함이 없다.
친구를 대하는 태도라던가, 평소 어떤 일상을 즐기며 하루를 보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마치 사생활을 카메라로 찍어 방영해주는 듯이 자세하다. 소설 이외의 산문이나 에세이 형식의 글을 간간이 읽어보기는 했지만 소개되지 않은 짧은 글들은 읽을 기회가 좀처럼 없어서인지 잡문들이 하루키의 일상을 쫓아 다니는 것처럼 소소하다. 그는 여전히 늙지 않은 채로 40년 전의 그와 지금의 그를 데칼코마니처럼 그려내고 있다. 청춘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한 화석같은 사람, 왜 고유명사 ‘하루키’일 수 있는지 처연하게 말한다.
<잡문집>에서 하루키는 논리에 근거하지 않은 자신만의 호불호가 분명한 인간이기를 선언한다. 이 호불호란 것도 주도면밀하게 축조되어 온 바탕위에 지어진 것이니 조금은 엄격해 보이는 면까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장인의 고집처럼 느껴진다. 그의 고독과, 이상하리만치 청춘의 봄날처럼 느껴지는 문장들을 읽으면서 아무런 짐도 꾸리지 않은 채 떠나온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고 싶어지는 기분이 든다.
생각해보면 그가 소설 속에서 창조해낸 세계는 어딘가 있을 법한 세계지만 한 번도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 드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본질에 대한 통찰을 담고, 불온한 풍자와 부조리함이 버무려진 현재의 모습은 아프고, 끔찍하고, 쓸쓸하기만 해서일까. 그래서 하루키의 글을 읽는 것은 대게 밀어내는 세월처럼 느껴졌다. 이쯤이면 여느 소설과도 구별되는 힘을 가지기 어렵다고도 할 수 있지만 하루키는 여기에 관습적인 내러티브 형식을 살짝 비켜나간, 그러니까 좀 더 내밀하고 치밀한 인간의 본성과 치부를 드러내는 것으로 사람들을 당황시킨다. 그는 소설에서나 여기 실린 잡문에서 조차 전능적이고도 현학적인 자세를 한번도 취하지 않을 만큼 권위적인 글쓰기를 거부한다. 그의 어체가 남성적이고 호불호가 분명하다는 느낌같은 것을 고려할 때 이 또한 그리 쉬운 일은 아닐텐데 어느 글에서나 섬세함을 놓치지 않는걸 보면, 참으로 고집스러운 규칙이 작동하는 모양이다. 언제나 자유롭고 관습적 태도를 따르지 않는 그만의 세계를 유연하게 그려나갈 줄 안다. 그 어떤 통제의 관장 없이 자연스럽게 세계관을 만들어나가는 태도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의 이야기는 굴곡 없이 매끈한 흐름을 보여주지 않고 좀 더 고약해지기를 궁리하고 변형되기를 꿈꾸는 글쓰기다. 금기라던가, 억압된 욕구 같은 것을 두 볼이 빨개지도록 과감히 그려내기도 하고 어떤 경계조차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일탈을 부추기는 당돌함이 있기도 하다. 그의 글이 언제나 ‘청춘’이란 단어를 머금게 하는 생기와 신선함이 있는 이유와도 상통할 것이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감흥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정확한 때와 뭘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시시콜콜함을 읊는 것은 마치 어느 대통령이 죽었을 때라던가 큰 재난이 왔을 때 무얼 했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에 대한 말을 줄줄이 내뱉는 일처럼 큰 충격인 모양이다. 이 책에서는 하루키가 왜 그토록 평범한 글쓰기를 거부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순응하듯 살아가는 것 같아도 어딘가 자유분방해 보이고 그 느낌이 영롱하게 발산되어 보이는 이유는 이런 남다른 생각때문이었다.
그의 글을 보며 전 세대가 공감하거나 한편 크고 작은 파문을 일으킬 때마다 누구나가 그 젊은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 생각의 끝에는 항상 이러한 흥미로운 호기심이 미치곤 했다. 그가 언제 태어났고 어떤 환경 속에서 자란 세대인지를 돌아보게 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나이로 따지면 환갑이 넘은, 아무리 요즘 세상에 노인 축에도 못끼는 나이라지만 노인이라면 노인인 나이. 하루키는 일본이 한창 부흥하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는데 이를 감안해보면 그의 젊은 글쓰기가 왜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았는가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어려움 없이 살만한 가정에서 태어나 팝송과 재즈를 들으며 자랐고, 결혼을 해서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는 요즘 세대에서나 봄 직한 두 사람만의 생활을 영위해 나간 삶. 살만 해진 1세대의 사람들이 이제 노인이 되어 어떻게 늙어가는 지를 하루키를 보며 가늠해 본다. 그와 우리네 환갑 넘은 노인을 나란히 놓고 상상하기에는 아무래도 괴리가 크겠지만 우리의 60-70년 세대들이 40-50대가 된 지금 앞으로 십년 후에 하루키처럼 젊은 생각으로 넘쳐나는 그야말로 ‘꼰대스럽지’ 않은 세대의 출현이 더없이 반갑게 기다려 진다. 하루키는 도무지 ‘늙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언제나 변함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내는 신작들만 보아도 '언제까지나 파릇파릇한 감성으로 젊음을 이어갈 수도 있구나' 하는 믿음 같은 것을 더욱 견고하게 심어주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글장이로 살아가는 삶,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가장 날선 눈으로 보고 예민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숙명이 버거웠을 법도 한데 철두철미한 마음가짐으로 상처받지 않는 사람처럼 매우 단단한 심지로 버티며 작가의 삶을 살아왔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작가지만 하루키는 분명 우리 안에 있는 사람이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라는 삶과 지극히 개인적인 또 다른 삶을 잘 분리하며 살아간 것이 이 <잡문집>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겸손하고도 고집스러운 비법, 이것이 어쩌면 엄숙하거나 거장의 반열에서 느껴질 아우라를 벗어나는 그만의 젊은피였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글을 쓰지만 적당량을 쓸 것, 언제나 일어나면 운동을 하고, 맥주를 마시며 야구를 관람하는 평범한 일상들이 젊음을 언제까지라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처럼 다음 작품에도 미칠 것이다.
글 속에 이웃해 있는 모든 존재들의 입에서 그가 보는 세상과 우리가 봐야 할 세상에 대한 미지의 그림자가 건강히 드리워 질 것 같은 기운으로, 오늘따라 雜스러움이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