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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평점 :
누구나 글을 읽는 태도에는 제 각각의 관습적인 데가 있는 것이어서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에 균형이 잡혔다면 깨뜨리기 쉽지 않은 문제가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전작 <책 읽는 방법>을 읽었을 때 ‘슬로우 리딩’이란 주장을 전적으로 동감하면서도 속도감이 별로 늦춰지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고 좀 실망을 했었다. 사실 빨리 읽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속도감을 자랑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는 성미를 지닌 것도 아닌 내가 고쳐지지도 못할 그저 그런 책읽기를 해나가겠구나 하는 자조감만 들 뿐이었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나는 어떤 책을 읽어도 훗날 상세히 기억해내는 법이 거의 없다. 당연하게도 대강 눈으로만 읽어낸 탓이 클 것이다. 그러나 천천히 음미해가며 혹은 기억하려 애쓰며 읽는다는 것은 속도감과는 조금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작가가 말하는 속도감 안에는 당장은 조금 어렵더라도 천천히 알아간다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긍정의 가능성이 전제로 깔려 있다. 그러나 내 경우처럼 천천히 읽더라도 머리를 복잡하게 작동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작가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채로 머물게 된다면 당연히 책을 제대로 읽는 길과의 만남은 요원해진다. 그러니 그것은 천천히 읽는다고 해서 달라질 근본적인 대안은 아닌 것이다. 내가 유지하는 속도감의 윤활유라면 언제나 ‘재미’라는 요소가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천천히 산책하는 듯 읽고 싶어진대도 재미가 없는 책은 아주 시시하거나 지루한 상대와 함께하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책일 때만 더 알고 싶어지고 깊게 성찰하고 싶어지는 여유를 누리게 된다면 음미할 수 없을 정도의 책에는 전혀 가동될 리가 없다는 소리다. 물론 이 문제는 작가가 후기에 언급한 ‘슬로우 리딩’을 할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의 구분을 든 예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재미있는 책임을 전제로 했을 때 훗날 기억해내지 못하는 내 경우는 대관절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문제는 다시 원점이다. 나는 재미있더라도 거의 눈으로만 읽은 탓이 큰 것이다.
다시 말하면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우 리딩’이란 말 안에는 천천히 눈으로 읽으라는 뜻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중요한 건 천천히 마음으로 읽으라는 뜻이 담겨있다. 나는 천천히 읽었으되 눈으로 읽었기 때문에 그것을 거의 체득하지 못했고 기억까지 해내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천천히 여러 생각을 조합하면서 산책하듯이 걸어 나갔다면 나는 좀 더 다른 풍경들을 기억해냈을 것이고 좀 더 유익한 책읽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책을 읽는 방법 가운데서도 ‘소설’에 대한 좀 더 특화된 읽기 제안을 하는 책이다. 읽는 것에도 ‘방법’이 있다는 유아적인 가르침은, 뭔가 역행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소설 읽기’에 대한 구체적 제시를 한 책을 거의 접해본 적이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은 읽는 방법에 대한 빌미를 얻어 우리의 관습적 태도에 대한 성찰을 도와주고, 책을 대하는 창조적 해석을 이끌어내는 흥미로운 책이다.
그렇다면 좋은 책읽기란 무엇일까? 히라노 게이치로는 실제로 소설 쓰는 작가의 안목과 독자로서의 입장을 동시에 고려한 신중한 역할을 잘 활용하고 있다. 소설 속에 나돌며 떠도는 오브제들에 말을 걸어오는 영매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상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대상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일 것이다. 그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진 문장이 던지는 직구를 받는 일이 아니라 그 동안의 수많은 단서들을 골라내고 추려내 앞으로 이어질 상상력에 대한 가능성을 퍼즐처럼 재구성해보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이는 소설이 단 한 장면으로 축약될 수 있는 서사의 풍경화가 아닌 거의 모든 장면들이 겹쳐지고 포개져 거의 알아볼 수 없는 불분명한 형체의 그것, 추상화에 가까운 화폭을 증명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주 신중한 시간을 들여서 여러 가능성에 대한 매듭을 연결하고 새로운 통로를 발견하는 일이 인정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바가 바로 관계의 연동을 윤활하게 도와주는 일이다. 다른 장르에서와는 달리 소설의 책 읽기란 단어 하나만을 두고도 상황 그 이상 너머의 수가지 통로를 뻗어 상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책을 쓴 작가와 독자의 감각적인 환경을 잘 조합하고 문장의 행간에 담긴 각자의 상상력을 동참하라고 유도한다. 책에서 작가가 설명하고 있는 기초편만을 잘 봐도 이 막연하고도 무수한 경우를 새삼 보게 되는 일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함축화, 구조화 되어 쉽게 설명되는지도 동시에 보여준다. ‘거대한 화살표’의 표식대로 따라가다가 보이지 않는 ‘작은 화살표’의 방향대로 플롯을 이해하다보면 미시적인 단서들이 독자에게 어떤 기쁨을 주는지 세세한 단서 또한 놓치지 말라고 전한다. 소설이 주는 기쁨 중에 이러한 미세한 방향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책이 주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세상에 없는 픽션의 세계를 동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예를 들며 언급하는 거의 모든 소설들은 그것마다의 특장점 혹은 단점을 어떻게 커버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어떨 때에는 왜 이런 것까지 고려하며 읽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요한 데가 있다. 이렇게 작가가 늘어놓은 장치들을 모두 끼우고 장착되어 연동되는 추진력은 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진 기분을 선사하는 기쁨을 준다. 좀 달리 말하면 소설을 전보다 좀 ‘낯설게’ 읽게 되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한 번도 해보지 못했지만 책에 동그라미나 밑줄 따위를 그어가며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천천히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수만 가지를 구획하며 깔아 놓았을 혹은 그러지 않았지만 독자의 참여로 증폭되는 기운을 모두 떠안은 합작의 완성을 돕는 일이다. 그러니 그것은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좁은 통로를 건너야 하는 이유이고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소설의 진풍경을 진정으로 누릴 자인 것이다.
이 상상의 공간을 넓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의도를 밝혀내는 집요함이 요구된다. 좋은 글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삶 보다는 보이지 않은 그 너머를 응시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언어가 빚어내는 대상의 본질을 알아내고 새로운 가치로서의 언어를 바라보는 일은 그래서 새로운 책읽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