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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ㅣ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현대예술이 태동되던 시절 당시민들에게 얼마만큼의 큰 충격을 주었을지, 그들의 경멸스런 폭언과 호들갑스러운 얼굴을 상상하는 일은 현대예술을 보여주는 가장 흥미로운 일면이다. 예술은 전에 없이 극치의 정점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파격과 충격의 소용돌이에 봉착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보수주의자들의 눈에 이 가속은 그저 추락의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21세기인 지금, 우리는 현대예술을 가장 아름다운 예술적 도약의 시기로 돌아본다. 아직도 대중이 보기에 아름답지 않거나 미디어아트같은 낯선 예술을 만나면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다는 호소를 하긴 하지만 어쨌든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는 분명히 그 전의 의미와는 크게 변했다. 이런 식으로 오기까지 20세기의 사람들에게 예술의 반역은 어떻게 기성의 사유를 위협했을지 상상할수록 재미있어진다. 이 시기의 위대한 추락이 예술의 한계를 또다시 확장시킨 셈이니 말이다.
당연하게도 19세기까지의 예술은 그 목적이 하나의 극명한 지점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 이라는 명제이다. 미의 추구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니 진리와도 같은 불변의 가치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은 더 이상 ‘아름다움’만을 예술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 아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혁명적이고 위대한 시대였던 20세기 초반의 미술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그 이전까지의 예술은 새로움을 추구한다거나 하는 것이 전혀 중요한 시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움을 터부시하고 기존에 있는 것과 흡사할수록 존중받던 시대였다. 신을 모방하는 일로부터 출발한 예술의 역사를 상기해보자. 신의 가장 가까운 존재인 인간, 신을 재현해내는 기술이나 높이 평가하던 시대였으니 기술로서의 예술장이나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시대였다. 작가 고유의 새로움은 신이 준 영역을 거부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현대예술은 더 이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 심지어는 추하고 역겨운 것, 기성품을 예술이라 우기는(?) 상황에 까지 오게 된다. 이러한 예술의 시대의 도래가 가져온 충격효과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사유체제 전반의 혁명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격렬한 시대를 그래서 우리는 예술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라 부르는 이유이다.
이 책은 주로 제들마이어라는 문화보수주의자의 논리를 분석하는 것을 참고하며 구성한다. 현대예술에 적대적이던 제들마이어의 태도가 결국 현대예술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이나 호의적인 평단의 시각보다도 더 객관적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가장 대척점에서 비판할 것을 찾다보니 엄격하고 정교함의 아이러니가 발휘된 것일까. 예리하고 객관적인 분석적이어서 어쩌면 이 흐름을 인정하기 어려웠다기 보다 이미 매력에 빠진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섬세하다.
현대예술은 흔히 아방가르드의 시대라고도 불린다. 이의 근본적인 맥락은 삶이 변해야한다는 급진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예술이 더 이상 머물거나 한걸음 정도 내딛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20세기의 아방가르드 시대 예술은 당시 체제와 급변하는 환경에의 급진적 사유의 전환이 반영된 결과다. 영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고상한 차원의 것이 아닌 사회에 적극적으로 반영이 될만한 도구가 되고, 밀접한 관계 속에서 쓸만한 피드백을 주고받는 꼴이 되었다. 대놓고 자본의 수단이 되거나 정치적 구호로 쓰이기도 하고, 예술이 더 이상 예술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모순의 방점까지 찍는 등 수없이 많은 사조의 탄생과 소멸을 오간다.
또한 현대예술 이전의 예술은 스토리텔링이 있던 신화적이고 문화적인 요소가 지배하였지만 이후의 시대에는 이를 의도적으로 완전히 배제하려다보니 점점 추상성을 띄게 된다. 그러나 극한의 기호를 배제해 버렸을때 그 의미가 상실되어버린 상태가 과연 예술일수 있을까란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정신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다. 근원적인 것을 진지하게 바라본다는 시각은 문명 이전의 그림에 관심을 갖는 표현주의같은 사조의 발전도 가져오게도 된다.
뿐만 아니라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기계화된 문명과 학살의 큰 충격은 '광기'로 표출됨으로서 기술의 합리에서 도망치는 행위로 표현되기에 이른다. 예술가의 역할을 슬며시 숨겨 놓음으로서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초현실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사회 변화에 따른 사유의 전환이 궁극적으로 예술을 변화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 셈이다.
순수한 예술의 상태에서 추상화가 되기까지, 또는 바우하우스나 구축주의자들에 의해 예술이 기술과 따로 분리되지 않는 기술적 구축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일 등은 미술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도 전혀 새로운 맥을 짚어내야 하는 예술의 본질을 흔드는 사건이었다.
아방가르드의 급진성은 주어진 상황이나 체계를 비판하게 하고 결국 내가 사는 세상을 마음껏 조립함으로서 의미의 폭을 넓히는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진보를 가능하게 한 예술은 이런 식으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아마 더 이상 이보다 더 급변하는 시대는 없을거란 생각을 하니 이들의 열성적 태도를 자꾸 들여다 보게 된다. 다 알기도 힘들만큼 수많은 사조가 탄생하게 된데에는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다양함들은 사회의 변혁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질서들을 만들어 나갔다. 언제나 현실보다 더 나은 삶으로의 몸부림이 예술 안에는 이런 식의 새로움으로 발현된 것이다. 격렬함 뿐인 예술의 한 시기가 왜 이토록 애처롭고 야단스럽게 아름다웠는지 이제야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