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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글.사진 / 문예중앙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셔터를 누르고 한쪽 눈의 시야에서 조리개가 닫혀 지는 찰나의 단순함, 이내 찰칵하며 최소한의 기계음만으로 전해지는 건조함의 마른 기운, 그저 이 순간이 전해오는 기쁨만으로 언제 어디로든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이윽고 인화되어 나온 작은 네모 안의 세상을 만나면 마치 봉인된 시간이 열리는 일처럼 세상과 사람, 사물과 마음이 온통 흔들려대는 타임슬립을 경험한다. 그 때 그 시간으로 흠뻑 빠지게 되는 일이 좋아서, 내 손이 포착해낸 찰나의 기록이라는 점이 좋아서 언제나 우쭐함의 경계어딘가를 간지럽히는 '사진'의 물성을 사랑했을 것이다. 분명 사진을 찍지 않을 때 내 눈이 한 일보다 사진을 좋아하게 된 이후의 내 눈이 더 나았다. 몇 배는 더 유심히 세상 안의 작은 것들을 들여다 볼 것이 종용되는 기쁨은 아주 큰 것이었다. 사진은 눈이 본 ‘기억’이라는 이름을 영원히 묶어두어 사람들에게 ‘남는 건 사진뿐이다’라는 추억의 증표로 존재의 가장 편리한 증거인 예술이 되었다.

사진이 가지는 여러 속성들 가운데서도 아마 '표현의 도구'로서의 의미가 사람들에게 가장 쉬운 접근 방식일 것이다. 언젠가 숲길을 걷다 죽은 뱀을 찍게 되었을 때, 놀이터에서 노는 꼬마들의 웃는 모습을 보고, 뻥튀기 장수와 무가지를 줍는 노인의 손을 포착해낸 순간들은 아직도 내 방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소중한 일상의 기록이다.
지금의 내 사유를 표현하고 싶다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말’이 가장 편한 도구가 되겠지만 그것을 '기록'하고 싶어지면 사유는 ‘글’로 표현될 것이다. 여기에 나만의 창의적인 해석이 가미되면 ‘예술’이라는 이름의 ‘문학’과 ‘음악’과 ‘그림’이 된다. 사진은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기록의 산물이었는데도 지금은 가장 대중적인 예술의 한 장르가 되었다. 이제 현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예술은 사진임에 틀림없을 것이고 미술의 중심에 사진이 있게 된 것도 예술의 놀라운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일상의 기록들을 사진이라는 일기로 저장할 수 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과거가 되어 버리지만 사진으로 남겨진 풍경은 존재가 거기 있었음을 말해주니 각인의 도구로 가장 적나라한 도구이다. 이러한 면에서 사진은 다른 장르보다 구사하기 덜 어렵다는 이유로 예술 안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경계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논란의 중심에 백여년 넘는 세월 동안 서서히 '나도 철학이 있다'라는 방점을 찍고 나니, 현대예술에서의 사진은 이제 엄연한 '사진예술'이라는 명패를 달게 되었다.  


이러저러한 요소로 사진의 매력이 차고 넘치는걸 알지만 개인적으로는 각별했던 애정이 예전만큼의 크기로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사진이 누구나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예술놀이라는 건 존중하지만 역설로 누구나가 전문가용 카메라를 들고 허세를 떠는 대상이 된데는 경계를 할 필요가 있게 됐다. 이른바 ‘셀카질’을 보는 것의 지겨움도 생겨나게 되었고, 혹은 사진이 더 이상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 동요된 이유일 수도 있겠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사진’의 잘못(?)은 아니며 본질과는 동떨어진 문제임을 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해서 예술품으로 취급하지는 않듯이 말이다. 그것을 잘 알지만 사진만이 갖는 예술적 가치를 여전히 의문 없이 매력으로 느끼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머뭇거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사진의 기술적 왜곡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문제에 대한 불안함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책의 저자는 기술적 문제가 사진철학의 핵심 영역이 아니어서 의도적으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고서야 나만의 사소한 의문과 회의적 시선들이 사진예술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터부시의 태도와도 상충됨을 알 수 있었다. 사진에 대한 회의적이고 왜곡된 시선은 사실 이 책이 말하려는 ‘철학’에 대한 부재와도 결부된다. 사진은 오랜 세월 회화의 조소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다른 예술 장르가 고심해 내놓은 ‘철학’적 사유를 논하는 장이 된다라면, 사진예술은 철학 없이도 쉽게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의 경계점 위에 서 있던 셈이다. 또한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는 대중성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예술가처럼 기술적 차별화도 둘 수 없는 노릇이다. 가장 크게는 이 두 가지의 사실로써도 사진이 예술의 문턱에서 오르내리던 이유가 됐다. 물론 지금은 사진이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로 자리매김한 것이 사실이고 이 책이 설명하는 여러 철학적 사유를 충분히 읽어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또 한 세기가 오고 디지털시대의 도래가 사진의 사실적 가치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치명타로 그 이면을 장식하게 됐다. 이러한 문제에 저자의 시선은, 사진이 어떤 활용일 뿐 그것이 실재와 다를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말한다. 언제나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왜곡과 변형이 가능함을 주장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의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양면성을 가진다는 본연의 속성을 자꾸만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감각과 사실의 부분에서 작가가 전하는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나서야 사진의 진면모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런 대로라면 작가의 주장대로 사진은 ‘세상에 대한 거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언제나 양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지구라는 구체가 자전을 하는 만큼의 엎치락 뒷치락 정도는 수용해야 할 테니 말이다. 이를 읽으면서 비로소 조금 오해를 푼 계기가 된 것 같다. 역시 '사진'의 태생은 언제고 '진실'을 외친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진은 어떤 '시선'이며 그 안에 철학이 없다면 그것은 추억일 뿐 예술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사진철학의 풍경들>에서 전하는 사진의 관점은 말 그대로 ‘철학’적 사유에 대한 출발로부터 관찰된 것들이다. 인간의 감각기관에서 불러일으켜지는 감각적 풍경의 일환으로 ‘보다’의 인식의 풍경에서, 사유를 하고 표현해내며 감상과 마음의 풍경에 이르는 다섯 테마로의 풍경을 담아낸다. 각 주제에 걸맞은 충분한 문제제시와 시대적 배경, 지식의 전달을 돕는 세심함이 돋보인다. 또한 작가가 전하는 또 다른 세계인 ‘생각하는 사진’의 이미지들은 주제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깊이를 증폭시켜준다. 사진이 단순히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물이라는데서 한발 더 나아가 어떤 식으로든 예술적 가치를 찾는 자발적 사유의 세계로 초대해준다고 말한다. 이 책은 특히 사진예술의 처음을 시대가 갖는 철학적 배경과 잘 버무려 설명해주고 혹시라도 잘못 인식되어 온 시선의 오류를 바로 잡고 매무새를 가다듬는 품위를 지닌다. 어떤 식으로 발전되어왔는가에 대한 과정을 알게 되는 것은 사진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결국 <사진철학의 풍경들>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근본적인 사진철학의 관점은 두 가지 인식의 틀에서 나온다고 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의 내적인 본질을 가다듬는 일, 결국 바라본다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자아를 인식하는 최초의 출발이 ‘나를 바라 봄’이라는데에 있다. 다른 하나는 나와 마주한 세상과의 외면 세계를 인식하는 눈이다. 시선이 철학적인 성찰과 만나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어떤 물음을 던지고 나서야 방향을 찾게 된다라면 우리는 무조건 그 사진이 말하는 여러 풍경 이면의 세상을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인식의 답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에서 한낱 사소함으로도 가슴에 풍크툼을 남기게 되는 일, 이 경험을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다. 영원히 알지 못하는 세계로 날아가 버리게 되더라도 그 많은 의문들은 가슴에 남아서 내 인식의 여과를 끊임없이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들의 부지런함과 세상의 양면성을 이해하는 일이야 말로 사진예술의 ‘철학적’면모를 이해하는 좀 더 풍성한 인식의 틀이 된다. 사진 한 장이 불러오는 영혼의 무게를 버겁게 인지하면서, 세상의 온기와 향기를 상상하는 일이 사진의 철학이다. 이러한 눈으로 본다면 네 꼭짓점이 펼쳐 보이는 세상의 길이가 얼마나 더 넓게 확장될지 그 크기를 가늠하기도 어려울 만큼 멋진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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