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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예술은 우리가 갖는 상식과 질서, 형식들을 무너뜨리고 재설계한 또 하나의 세상이라는 면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성을 허물고 망가뜨리는 것, 온 질서와 구도를 파괴하고 왜곡하며, 뭉개고, 덩어리지게 하는 것. 엄격한 질서와 대조를 이루며 예술의 세계는 미지를 구축하는 전복적 미학을 갖추게 되었다. 인류가 발명해낸 예술의 여러 속성들 가운데서도 ‘그로테스크’적인 면모는 단연 본질에 가장 근접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볼 때 여느 작품과는 다른 강렬한 인상을 품게 되는 것은 예술의 근간에 가장 인접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원석의 모양에 가까운, 아직 아름다워지기 전의 진짜 모습을 우리는 ‘그로테스크함’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작품은 대개 좋지 않은 감정인 불쾌함, 조금은 우스꽝스러움,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인상을 품으며 이상하고도 알 수 없는 세계의 문을 열어 준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그로테스크’라는 단어로 인지해왔다. 현실과 동떨어진 매력을 주지만 이는 사실 우리가 사는 어딘가에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확신을 주는것이기도 하다. 언제라도 우리를 위협할 공포가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로테스크함’이란 세상 어느 곳에라도 존재하는 희로애락의 틈에 잠재된 개념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공포를 말할 때 그것을 둘러싼 정황이란 건 편하기 이를 데 없는 믿음의 성에서 출발함을 안다. 익숙한 계단을 오르내리고 오래 봐온 사람들과 편안한 교감을 나누는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낯섦은 시작된다. 아무런 의심의 정황이 포착되지 않을 때 공포는 어느 순간 예고 없이 찾아오게 되어있다. 이를테면 반전 영화의 최고봉으로 일컫는 <식스센스>라는 영화만 보더라도 긴장감이 깔려 있긴 하지만, 아주 익숙한 상황에서 철저하게 제외했던 인물에게 역전의 상황이 닥친다. 여기에서 느껴지는 공포란 신뢰의 바탕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에 배가 되는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에 휩싸이게 하기 위해서는 공포의 감정이 아주 가까운데 있어야 하는 불문율이 있다.
여기서의 공포란 분명 생경하고 전혀 모르는 세계를 창조해 그곳에서 발생되는 이질감의 감정을 표현하려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익숙하고 보편적 상식에서 비틀어지고 해괴하게 변모된 상태를 우리는 극대화 된 공포의 감정으로 수용한다. 이런 감정이 바로 그로테스크란 단어를 정의할 때 내려지는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이다. 생경해진 세계, 익숙하고 편안한 세상이 갑자기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 이것이 ‘그로테스크’의 본질인 셈이다. 믿고 있던 세계의 신뢰가 무너지고 갑자기 그 세상이 없던 것이 되어 버릴 때 우리는 그 안의 거대한 기둥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것을 손놓고 바라본다. 이 광경들의 전율을 고스란히 공포의 감정으로 느끼고 뭔가를 깨닫는다.
이 책에서는 공포의 궁극이 ‘죽음’을 느끼는 감정 때문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단지 죽음을 두려워해서 갖는 공포심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믿음의 세상에 등돌려진 불편한 조우, 이면을 목도하게 되는 일이 두려워서라고 말한다. 마치 악마에게 저당 잡힌 삶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영원히 내주어야 될지도 모른다는 인질의 감정과 비슷한 것이다. 공포의 대상은 분명 정체가 모호하고 미지의 무엇이며, 허상의 무엇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확연하지 않은 무엇이기 때문에 그로테스크함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거나, 대체로 불안한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질서의 붕괴는 가장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므로 그로테스크를 표현한다는 건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가련한 불사새의 질주와 같다. 그리고 이 감정은 어디에라도 도사리는 불행한 역사의 이면이 키운 씨앗에서 키워진 것이다.
그럼 여기서 그로테스크가 왜 태동하게 되었을까란 의문이 다시 움튼다. 16세기부터 낭만주의시대와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예술 장르에 도드라진 그로테스크함이 어떤 이유로 등장했고 어떠한 의미로 이해되어 흘러갔는지 이 책이 말해준다. 물론 각 작품마다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주기 보다는 작품 자체만의 설명에 더 심혈을 기울여서 각각의 특질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를 차치 해두고서라도, 그동안 막연하게 느껴오던 미술작품과 연극과 소설 등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그로테스크한 면모의 뿌리를 살펴보는 일은 애매하게 알아오던 개념의 확신을 돕는다.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말하는 역사적 진면모를 한 꺼풀씩 벗겨내 진짜 눈에 보이는 불편을 악마적으로 해석해 낼 필요가 있다.
다시말하면 그로테스크의 등장은 인간의 불행이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아주 직설적인 사고로 탄생한 것이다. 미지의 무엇이 과연 어떤 실체로 등장하는지, 사람들은 이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상상하는 재미도 있다.
비로소 그로테스크한 작품에 그 시대가 표방하는 질서와 세계관을 강력히 저항한 몸짓이 존재함을 인상 깊게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이 예술적 가치가 얼마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왔는지,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가장 멀고 위험한 벼랑 끝에 서서 말하고 있는 이유들도 알게 되었다. 비록 ‘그로테스크’한 불편함에 다시는 그 작품이 보고 싶지 않다 해도, 우리는 이 비극의 광경들을 몇 번이고 곱씹어 봐야 하는 작은 의무가 지어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