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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궁전 안개 3부작 3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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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소설을 제대로 읽는 방법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해내는 안목일터다. 여기서 보이지 않음이란 베일 속의 인물이거나 거대한 조직이거나 하는 막강한 힘을 발견해 내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안개에 드리운 한밤의 기운처럼 작가가 이야기 저변에 깔아놓은 음산한 키를 찾는 일에 가깝다. 말하자면 그것은 시대의 역사적 불운일 수도, 개인에 닥친 불가항력의 운명일수도 있는 어두운 이면의 암호를 푸는 일이다. 보다 근원의 자극을 감지하고 자각하는 힘, 그것은 참으로 풀기 어려운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켜있다. 이 소설은 판타지 요소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러한 복잡한 설계에 의해 동시대의 삶의 맥락 차원에서 살펴보지 않으면 절대적인 공감을 이끌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여지의 과정들을 이해시키는 일은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라지만 이를 잘 포착해내는 일 또한 묘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오랜 세월 참고 인내한 악마의 불쾌하고 공포스러운 입김의 여운이 차갑게 각인되는 소설이다.
그러나 가끔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기대치’라는 장애물에 전면적 제동이 걸리게 되는 건 참으로 아쉽다. 어마어마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전의 워밍업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정작 사연이 밝혀졌을 때의 충격은 그리 신선하지도 못하고 진부함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큰 반전과 같은 보다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졌더라면 하는 바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성공할 확률이 낮은 지경까지 왔다면 반전만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예감대로의 스토리가 나왔어도 그 전개방식이 세련되기만 했더라면 문제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큰 이야기의 흐름을 쫓다 보니 작은 요소들의 반응에 숙고하지 못한 것이 아쉽게 드러난다. 전체적인 역사를 구성하고 어느 지점에서 폭발할 것인가에 대한 고심의 흔적이 부족했거나 혹은 적절하지 못한 탓이다. 판타지라는 긴 호흡을 전개해 나가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서사가 돋보이지는 않은 오류는 결국 허상의 문턱에서 간신히 모면을 한 정도이다.
만약 8명의 아이들이 보다 디테일한 성격묘사로 어필되었다면 소소한 말투에서부터 그 개성이 드러났어야 했고, 서사에 중점을 두고 싶었다면 선이 굵은 지적인 전개를 펼쳐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회화적인 이미지뿐인 소설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인물들은 그들의 언행에서 자연스럽게 가공되기보다 애초에 ‘용감한’ ‘영리한’이라는 수식어로써 드러내는 촌스러운 방식을 구현했다. 특히 할머니가 과거를 한꺼번에 고백해내는 장면은 황당할 정도로 엉성하다. 서사 역시도 한권의 소설 안에 모두 담아내기에 그 역사와 배경이 부실하게만 펼쳐지고, ‘불’이 상징하는 지옥불이나 레드의 색감과 이미지들은 그리 인상적인 대치를 이루지 못하고 끝난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이런 소설을 읽어 낼 때 어느 정도 예감에 적중하거나 빗나가는 것을 큰 문제로 삼지는 않아 보인다. 다만 그것을 구현해 내는 서사의 장중함이나 아주 사소하더라도 뭔가 지적인 자극을 주는 편을 훨씬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이를 간과하고 마치 개벽과도 같은 엄청난 반전만을 향해 달려갈 때 자칫 그 흐름이 망쳐질 수가 있다는 걸 이 소설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의미를 찾아낸다면 이런 것이 있겠다. 역사적 맥락에서 짚어지는 몇몇의 상흔들이 그것이다. 이는 작가가 제대로 구축했지만 우리에게 실패로 읽혀진 인물의 묘사 방식에서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령 영웅의 존재이다. 미약한 성격 탓에 처음에는 비범성을 모르겠다가도 주위 사람들의 믿음과 자신의 잠재된 힘이 폭발적으로 보태지면서 종국에는 영웅이 됐더라하는 전형적인 영웅담이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그러나 주인공 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사 속 영웅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인물이다. 벤은 사실 끝끝내 영웅다운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나약한 소년에 불과할 뿐이고 심지어 이언이 늙어서 고백하는 부분에서도 영웅이 된 흔적은 없다. 오히려 용기를 낸 것은 그의 여동생 쉬어의 몫이었고, 주위 친구들의 도움과 희생을 통해서 난관을 겨우 극복해 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단순히 캐릭터의 부실이었을까? 그렇게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끝까지 나약한 벤의 모습에서 우리는 악마적 기질의 찬드라 혹은 자와할의 불멸시대가 끝났음을 목도할 수 있는 것이다. 찬드라가 킬리안의 마음과 지혜로움으로 운명을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듯, 벤은 쉬어의 희생으로 저주의 고리를 끊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우리가 믿었던 실체적 영웅은 영웅이 아니라 악마였고 불멸하며 이어질 저주의 사신이었다. 그 지겨운 운명의 고리를 단번에 끊어버린 힘은 단 한명의 영웅이 아니라 시간을 공유하는 모두의 힘 때문이며, 이는 우정과 사랑이라는 단단한 믿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을 이렇게 강인함으로 무장하게 한 원인은 바로 인도의 사악한 도시 캘커타에서 자행된 끔찍하고 불편한 역사때문이다. 자와할이라는 이중적 악마를 생산하고, 그 죗값을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의 죽음으로써 치러지는 역설의 아픈 역사를 상기하게 한다. 그러고 보면 참 불행한 시대였고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이 당연시되던 한 많은 역사였다.


다시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감각으로 돌아보자. 이제는 이언이 어려서부터 희미하게 목격했다던 ‘흰 것’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벤의 곁을 맴도는 천사의 기운 엄마의 손길, 아니 어쩌면 아버지의 손길은 아닐까. 지옥불 속을 헤치며 달리는 기차의 아우성, 수백 명의 아이들이 벤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고통의 질주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한꺼번에 읽어낸다.
이제 그들이 돌아가야 할 자리는 각자의 무궁무진하게 펼쳐진 레일 위 기차의 기장이 되는 일이다. 차표는 이곳에서의 비밀을 영원히 숨기고 ‘평범함 삶’을 꿈꾸는 소박함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제목이 ‘지터스 게이트’가 왜 ‘한밤의 궁전’일까의 의문도 이와 맞물려 생각해보면 그 실마리를 찾게 된다. 지터스 게이트에서 모든 사건이 펼쳐지긴 했지만 이들을 이렇게 만든건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누고 마음껏 상상하며 꿈과 배려를 키우게 한 ‘한밤의 궁전’이라는 요람 때문에 가능했다. 영원한 순수가 잉태된 궁전이야말로 모든 악과 두려움을 이기는 열쇠였다.
 


한 뼘은 더 크게 자랐을 아이들의 건강하고 순수한 악수, 희미한 안개의 도시에 희석되어 모든 두려움의 음험함이 사라지고 맑은 눈으로 돌아보게 되길 기대해본다. 마치 세상 어딘가에 ‘차우바 소사이어티’라는 명패를 단 ‘한밤의 궁전’이 존재할 것만 같은, 그래서 그곳의 문을 빼꼼히 열어보게 될 용기가 얻어질것 같은, 참 맑은 안개가 떠도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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