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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 쓸개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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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단편들을 읽어내며 나는 새삼 그냥 그 상태에 놓여있는 무심함의 미학을 엿본다. 꽉 차있는 분명함 보다는 뭔가 충분한 여백이 느껴지는 내밀함이 돋보이는 소설을 오랜만에 읽어낸 기분이랄까. 소설 안에서의 질서와 규칙들이 사회 안으로 포섭될 만한 경계를 흐리고, 더러는 모호하게 아주 자연스럽게 여닫아져서 조용한 문을 바라보는 기분이 내내 새로웠다. 이는 김숨 글이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권능과도 같아서 마치 한낮의 나른한 오후,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인 감정이 살아나는 듯 하다. 

여기 각각의 인물들은 거의 소외라는 이름의 특권을 행사하는 기묘한 목소리를 아우른다. 그런데도 아무런 의심과 거부감 없이 잘 연출되어서 소외를 마치 독특하고 돋보이는 재치의 기술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의 강점들을 주류적으로 읽어낸다라면 일반 대중들에게 낯설고 신선한 느낌을 선사해줄만 하다. 그리고 그것은 김숨이라는 작가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거의 전작에서 그러한) 기묘하고 진중한 인상들을 만드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의 나열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상과 환상이 교묘하게 맞닿은 소설을 많이 봐온 독자라면 어쩌면 이 소설들은 그저 무난하게 무심한 소설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간과 쓸개>가 보여주는 여백은 독자가 어떤 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신선함과 무난함을 오가는 간극의 소설쯤이 될 것 같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설을 어느 편에서 바라보느냐가 아니라, 그 어느 편에서도 설득력을 얻기에 충분하다는데 있다. 낯섦 속에서 일상을 바라보는 요소들이 흥미롭게 다가온 독자라면 그 자체로서 큰 의미를 가지겠고, 무난한 이야기라고 느낀 독자에게도 이 소설들은 진부함이 아닌 하나같이 매우 일정하고 잘 다듬어진 정교한 완제품으로서의 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런 독특한 시선을 던지는 소설일수록 처음의 인상이 중요한 것이어서 눈으로 따르는 여정에 호기심과 온갖 낯설음쯤을 선사해주어도 벅찬 일이다. 비록 카프카의 <벌레>를 읽어 낸 인상만큼이나 기묘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일상 속에서 일탈을 꿈꿔본 독자라면 분명 이 소설을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할 것이다. 읽을수록 감칠맛나는 글을 좋아함에도 <간과 쓸개>는 이 시간 이후에 더 이상 보지 못한다해도 좋을 깊은 여운의 소설임에 틀림없다. 
 

여기 9편의 단편들은 각각 독립적인 형태를 이루지만, 한편한편의 파편적 단서들을 주어 담다 보면 보편적으로 흐르는 정서를 발견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 정서의 흐름이 과잉되거나 부족함 없이 아주 일정하고도 정확한 시점에서 투여된다는 점이다. 이는 이 소설이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가장 큰 맥락인, 구성의 힘이 적재적소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어떤 사건을 불러일으킬지 한 치 앞의 상상도 어려운 서사를 선사하는 점도 큰 매력이다. 빠르게 읽히지만 그만큼 자주 정지하게 만들어서 상상의 여지를 주는 여백의 힘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메시지가 강하거나 혹은 없는 듯 보이는 가장의 기교이거나 그 어떤 의도에 치우침이 없는 무심함이 선선한 바람처럼 인다. 이는 전적으로 작가가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지독한 탐색과 탐닉의 흔적들일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소설이라는 그릇 안에 아주 평범한 얼굴을 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 속으로 약간의 틈과 파문을 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너무 이상하고 엉뚱해서 자꾸 어안이 벙벙해지는 순수한 매력 속으로 자꾸만 빠져들고 싶어진다.

단편 모두에서 어느 누구하나 가족과 이웃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도 하나같이 그들이 낯설기만 하다. 처절한 태도로 심각한 반응을 유도하기 보다는 ‘저러다 어쩌려고?’ 정도의 감흥만 일으켜서 솜씨 있게 사건을 이끌어가는 면도 세련돼 보인다. 사실 살아가는 우리 일상의 이야기만큼 우리의 마음을 진동시킬 수 있는 게 있나 싶다. 순간의 틈을 언제라도 돌아보게 하는 것, 그 힘이 이 작가의 눈에서 명석하게 빛난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처럼 우리를 들뜨게 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단편들은 상처 난 과일만 모아둔 옹색한 바구니처럼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리고 그 안의 곪거나 지나치게 익은 과일들이 ‘당신과 나’로 오롯이 남아있다. 그러니 이 바구니 안의 일그러진 형상들은 꼭 우리를 닮아있다. 평화로운 시간과 공간의 이면에는 우리가 만들거나 혹은 의도치 않게 남겨진 기묘한 사건들로 넘쳐난다. 그것이 당신과 내가 맞닿은 또 다른 현실이며 진실일 수도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마치 <육의 시간>에서 말하는 박물관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상상했을 때 더욱 명확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어쩌면 이들처럼 박제된 군중들의 다중적인 집합인 박물관은 아닐까. 어쨌든 이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나면 삶에 별다른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된다. 희망과 꿈을 지닌 사람일수록 본인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옹색함과 초라함을 버텨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불운한 순간과 무료함, 지나친 광풍이 이는 순간에도 이 시기를 관통한 사람이라면 분명 제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정도로의 위안이어도 우리에게 무료한 일상을 살아갈 이유는 분명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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