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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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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권의 소설은 작가의 '과업'처럼 다가와 꽂힌다. 전쟁을 체험한 작가들에게서 느껴지는 공통적인 것, 말하자면 시대를 이야기할 때 결코 그 때 그 사람들을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는 처절한 고발로 이어진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목도한 사실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같은 것이 깃들 것이다. 시대를 살아간 자만이 알 수 있는 아우성을 토로하듯이 전쟁을 겪어 낸 소설가의 이야기는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역사의 허리를 담담히 관통하며 지나간다. 그래서 이분들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감정이 솟는 일이다. 이제 전쟁을 겪은 1세대들이 점점 떠나가고 이런 식으로 기억되는 일조차 귀한 일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르 클레지오 작가의 소설은 언제나 고증 위에 아름다운 상상력이 얹어진 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허기의 간주곡>이란 제목만 접했을 때도 이 소설이 얼마나 완벽하고 위대한 이야기일지가 먼저 떠올랐다. 겪어보지도 못한 허기의 기운이 거대한 먹구름처럼 몰려와서 가슴을 꽉 메우는 무시무시한 함축의 언어. 이 감정이 불행인지 그저 공허함 뿐인건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할 때 마침내 들려오는 아름다운 선율같은 것은 우리가 가진 근원의 슬픔일까. 설사 이 우연이 아무것도 의미하고 있지 않아도 좋은 완벽한 조화, 그런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르 클레지오 선생이 우리나라에 머무셨을 때 꽤 많은 강연회나 낭독회에서 만나 뵐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말씀하신 것들 중 결국 이 분이 소설을 쓰신다는 건 인간의 삶 속 풍경 중에 가장 슬프고 아픈 시간들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신다는 인상을 받았다. 선생에게는 이 시간들이 바로 유년에 머물러있다. 실제로 모리셔스섬에서 자란적이 있으며 프랑스 어느 시골마을에 꼭꼭 숨어 전쟁을 피해 사셨다 들었다. 폐허의 터전, 마음 졸이고 어수선했던 유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견뎌낸 시간들이 그에게 영원히 '말하는 삶'으로 바꿔 놓는다. 전쟁은 끝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지만 이 때를 끊임없이 상기하는 이유를 작가는 너무나도 생생한 풍경과 함께 소상히 전하고 싶어 한다. 여전히 한편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전쟁들이 왜 이 아픈 이야기들을 쉬이 잊어져서는 안되는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남겨야 할 과업처럼 그렇게 오랜 세월 아픈 역사와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써냈다.


우리나라에 2년여를 머무르시게 된 연유도 본인이 몸소 겪은 역사와 우리네의 역사가 너무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셨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어느 지방 시골마을의 풍경이 사시던 고향집과 너무 비슷해서 주말이 되면 그곳을 자주 찾아가 보곤 하셨단다. 어쨌든 소설에서 발현될 정서적 고향을 우리 땅이 북돋아 준다는 우연도 그러고 보면 참 이유있는 일이다. 우리의 언어와 풍경들이 말해주는 느낌이 <허기의 간주곡>에서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공감대가 있다. 가령
우리말 중에 '情'과 '恨'이라는 말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는 고유한 언어라고 놀라워 하셨다. 우리나라의 정서적인 뿌리에 情이라 불리는 사랑, 슬픔의 감정인 恨이 공존한다는 것이 바로 작가가 공감하는 실체적 단어이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도 情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프랑스어로는 어떤 단어로 쓰셨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우리의 '情'이라는 정서적 개념을 상기하셨으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쨌든 이 책은 이대 기숙사에 머물면서 붕어빵과 알밥, 삼계탕 같은 소박한 음식을 즐겨하시며 태어난 작품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허기의 간주곡>이 정말 많이 궁금했고 보고 싶었다. 한국 땅에서 잉태되어 전 세계의 아픈 역사의 땅에 울려 퍼지게 된 아름다운 간주곡을 이제 모두가 함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유년의 에텔은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다. 깊은 사랑을 품을 줄 아는 아이, 그만큼 상처를 잘 받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 에텔의 내면은 구덩이가 커서 깊은 만큼의 세상을 볼 줄 아는 아이다. 그것은 그녀의 할아버지 솔리망의 내면과 아주 많이 닮았다.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수가 적고 잘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보이는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넓고 위대한 것이어서 에텔을 언제까지나 꿋꿋하게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역사의 소용돌이가 휩쓸기 전의 땅에서 에텔은 솔리망의 정서적인 자양분을 받았고 진짜 사랑을 배우고 자란다. 그리고 그 정서적 완벽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그 둘만이 공유하던 '연보라색집'이다. 그러나 풍요롭던 시절도 잠시 에텔은 온전히 혼자가 된 세상에서 또다른 사랑과, 시련과, 공허를 배워 나간다.

에텔이 깨닫게 되는 공허의 자락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착각의 향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온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진 친구 제니아와의 사랑 혹은 우정, 이는 소녀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이 책의 가장 돋보이는 정서적 교류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채우게 된 첫 번째 세상과의 만남이 바로 제니아와 나눈 교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녀는 처음으로 ‘다름’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 언제나 가난과 처지에 걱정이 많던 친구에게 에텔은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대의 격차와 부조리를 알게 된다. 그것은 제니아의 유난스러운 성격탓에 에텔로 하여금 자격지심을 품게 할만큼의 상처가 되고 만다. 언제나 그녀의 눈치나 보며 관계를 이어나가지 못할 걱정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이미 제니아의 존재가 그녀에게 공허를 주리라는 예감을 들게 한다. 소소한 질투나 사랑, 이런 감정들과 맞물려 세상을 좀 더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에텔의 성장을 목도하는 일은 싱그럽지만 쌉싸름한 풋과일의 맛처럼 아리고 슬프다.  

에텔은 어려서부터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던 부모의 슬하에서 외톨이로 성장했다. 그녀가 바람하던 연보라색집의 실현이란 것도 결국 이런 부모라서 실현되지 못했다. 에텔에게 연보라색집이 있었다면 평생 그녀의 공허와 방황도 조금은 낫지 않았을까. 그녀에게 집은 내면의 큰 구멍을 메워줄 실현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자신도 고백하듯 애초에 그런 것이 지어지지 않을 거라고 예감했던 것 같다. 에텔이 바람하는 방향대로 흘러가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솔리망의 부재, 허세욕만이 가득한 딱한 부모, 차갑고 냉소적인 제니아의 배신, 그리고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로랑을 향한 마음, 모든 관계라는 것이 공허를 메우는 일이었다기 보단 더 큰 구덩이를 파는 일이었다. 그녀 곁의 그 누구에게서도 채울 수 없는 허기였기에 연보라색집의 존재는 내면에서 점점 커지는 노릇이다. 언제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삐걱거릴 때마다 그만큼씩의 구멍이 더 생기고 그녀가 균형을 잃고 헤맬때는 자신의 정신적 뿌리인 솔리망을 상기한다. 이렇게 겪어내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단순히 성장이라 이름 한다면 얼마나 잔인하고 허망한 일인가. 어른이 된다는 건 아픔을 감내하는 일, 텅 빈 공허의 구덩이를 점점 커지게 방관하는 과정일까. 에텔의 연보라색의 집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대지 위가 아닌 에텔의 내면 구덩이에서 터를 잡고 증축된다. 
 

새삼 작가의 시선이 얼마나 차분하고 담담한 고백인지가 인상깊게 느껴진다. 전쟁의 피폐함과 고통의 아우성을 이 책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들은 연보라색집이 가져다주는 이미지처럼 뿌연 안개 속, 허상의 집에서나 흘러 나올법한 아름다운 소녀의 노래처럼 들린다. 에텔 개인의 아픈 성장은 시대의 아픔과 맞물려 아름다운 허기의 멜로디로 대치된다. 역사가 한 개인의 삶에 얼마만큼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오는지 그 안타까운 과정을 말해준다. 작가는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허기로운 역사를 한 편의 악보로 남기고 싶었던건 아닐까. 
그러니 우리는 여기 이렇게 연보라색 집에서 풍겨 나오는 허기의 소리를 듣고, 상상하며 기억해내는 일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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