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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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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들만의 진실이다. 지겹도록 가정하고, 의심하고, 분열하고, 구애하고, 의존하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이어도 이들에게는 이들만의 방식이란게 있다.

멀리 달려가는 기차를 보고 있으면 마치 고향길을 향해 내달리는 사람의 마음처럼 서정적이고 풍요로운 배경이 선사될 것이다.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그 고요한 그림을, 정적을, 정서를 사랑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그러나 바로 옆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실은 몸을 휘청이게 할 만큼의 위협적이고 형체를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을 속도감으로 눈을 질끈 감게 되는게 가까운 그것의 실체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시대를, 그 삶을 살아 본 사람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것, 가까이 겪어내는 진실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실이다.
이 책은 식민지땅의 억압과 모순과, 혼란을 멀리 불길을 응시하는 자리로 데려다 놓는다. 그것이 우리의 사색적인 성향의 기원이 될거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방식과 사고로 그들의 격렬한 불길과 소용돌이가 있는 그 밖의 세상을 상상한다. 여기 이들이 이질적이고 설사 미쳐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냥 그대로를 지켜볼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런 식으로 멀리 보는 우리에게 너무 아름다운 불길의 배경을 선사해주고 또 사색할 수 있는 고요함을 주기 때문이다.

<나라의 심장부에서>는 소설이긴 하지만 시처럼의 분위기를 내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녀의 언어는 내내 짧은 편린의 조각들처럼 붕붕 떠다닌다. 주인공인 마그다의 조각난 생각의 반영인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 딴지를 걸고 의심하고 가정하는 인물이다.
평소에 과거를 가정하는 일처럼 할 일 없는 것도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면서도 '만약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안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어쩌면 의식 밖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사람은 일어난 일에 대한 후회를 이런 식으로도 풀지 않으면 도저히 불안을 잠식시킬 수 없는 게 아닐까? 가정은 반성을 돕고, 비전에 대한 계획도 세우게 하는 인간의 과제처럼 의미롭기도 하다. 이러면서 내면의 고요함을 되찾게 된다면야.
변화의 욕망이란 건 어차피 사그라질 수 있는 성질도 아니다. 진보의 역사도 이로부터 출발함을 인정하듯이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다. 마그다가 하는 짓이라고는 매일 과거를 가정하는 일 뿐이지만 고립된 마을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일로 서서히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축복의 씨앗이 되지 못한 죄, 부모에 대한 원죄,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죄, 아름답지 못한 죄, 나이 많은 죄, 위엄있는 상전이 되지 못한 죄 모든 현실이 그녀를 억누르고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녀는 과거 속을 헤엄치게 되고 일시적으로 바꾸어 놓거나 아니면 더 엉망으로 만든 악동이 되고 만다. 어차피 그녀는 세상속으로 과감히 뛰어들 행위를 알지 못하고 처지를 인정하고 있다. 우주 속 소리의 여울 뿐으로 신음하는 가여운 껍데기임을 숙명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정과 착각의 말은 그녀만의 특권의 역사다. 다시말하면 그녀가 하는 말이 사실이든 가정이든 착각이든 상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좀 더 확실하고 내밀한 준거들을 발견해야 그 책을 이해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이 책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만으로 더 이상을 요구하지 않게 태어났다. 모호함의 그대로도 좋은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성분을 이해하려면 멀리서 바라 볼 것, 마그다의 특기인 착각의 작동을 켜놓고 응시할 것. 그러면 이 여자의 답답한 행동과 분열된 심경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녀라는 성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로 이루어진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부재에 의해 만들어 졌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이 부재하고 어둡고 먼 실재라고 믿는다. 특히 아버지는 그녀에게 부재하는 존재인 동시에 그녀 삶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바람을 가르는 칼날이나 탑으로 묘사하고 본인은 구멍으로 세상을 돌아다닌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아버지에대한 심각한 집착을 말해준다.
구멍은 완전해질 수 없는 영원한 공허의 상징이다.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건 아버지만이 유일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 새삼 오이디푸스컴플렉스로 환원해 보는 일은 안하고 싶다. 사람이라면 그 허공의 욕망을 그 무엇으로도 채우고 싶은 심경이라고 믿어 두고 싶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는 그녀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아버지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이미 구멍을 통해 모든 세상을 본 게 틀림없다. 그래서 그녀가 미래의 목구멍 속에 '그 다음은 뭐지?'라는 암호를 넣고 용감히 돌진하는 건지도 모른다. 미련없이, 아무도 채워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제거하고, 채우고, 또다시 비우고,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이것이 영원한 삶의 원리임을 아는 듯이 말이다. 이 고백은 그래서 그녀의 생이 위대한 목격자로서 완성된 삶을 살고자 했음을 알게 해준다.  


재미난것은 책의 여기 저기서 구멍, 열쇠구멍, 목구멍, 방, 땅 속의 구멍 등 많은 부재의 공간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나온다는 점이다. 마그다에게 구멍은 그녀만의 요람인 동시에 두 번째 집이며, 회귀하고자 하는 몸부림의 놀이터고, 태초로의 회복이며, 도피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녀의 살인은 아버지를 구멍에 메우고서야 얻게 된 그녀만의 혁명이다. 아버지에 대한 보복으로도, 헨드릭이란 남자에게서 일말의 욕망을 채울 수 없게 된 걸 알게 된 이후로도 그녀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느낀다. 같은 여자인 클라인 안나에게서 애정을 느낀다거나 하는 몸부림은 그래서 더 슬퍼 보인다. 이는 성적인 욕망이 아니다. 공허에 존재에 대한 또하나의 발견이며, 동질감이며, 위안이다. 안나에게서 그녀는 두 개의 구멍을 보고, 두 개의 공허를 느끼고 비로소 이 관계만이 이상적이고 희망적이란 걸 깨닫는다. 그녀를 구원하는 것은 채우는 일이 아닌 그 구멍 속을 향해 돌진하는 바로 그 행위 자체인 것이다.
현실은 그녀에게서 모두 달아나 버리지만 마그다는 당당히 자신만의 목소리로 이야기했음을 자랑스러워 하고 세상에 외쳐댄다. 그리고 너무 쉬워서 말하기도 민망한 지긋지긋한 버려진 땅의 이야기들을 돌아 보며 아름다운 죽음을 생각한다.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할 별의 심장부로 떠나는 마그다의 그 길고 차가운 여행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싶다. 물론 멀리서, 바로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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