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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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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건 크게 삼아진 문제들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사실은 반복의 역사라는 것이 놀라울 것 없는 명제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진화하고 발전된 세상이 도래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삼십년 주기로 찾아오는 유행만큼이나 시시하고 비등비등하게 굴러가는게 인생사 이치인가 싶기도 하다. 다시 반복되는 감회에 젖기라도 하면 그냥 암묵적인 약속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구 안의 그저 작은 인간일 수밖에 없는 나를 돌아보면 그만 일것 같다. 많은 반복의 역사 그 가운데서도 특히 권력과 부의 줄다리기 싸움을 지켜보기란 참으로 고되고 지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순하고 언제나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어 굴어가는 싸움이지만 우리는 미해결의 창고에 계속 적재 하는 부채자의 심정이다. 권력의 반대에 선 자는 단지 없는 자라서 잘못된 시스템 때문이라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권력의 노예로 속아 주는 슬랩스틱 바보역에 열연을 도맡아야만 한다. 언제까지 그들의 주머니만 채워주는 삽질을 계속 해야만 할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나니 세상이 생각보다 참 변화하기를 싫어하는구나 싶어진다. 아니 변화를 두려워 하는 권력자들에 의해 이렇게 더디기만 반복되는지도 모르겠다. 
평생 다이아나 진주목걸이는 커녕 설거지통에서 세젯물과 씨름해야 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들으면 희망이고 뭐고 참 암담한 현실이고 미래다. 이게 다 인간의 야욕, 그 차고 넘치는 욕심 때문 아니던가. 한 번 쥐면 놓치고 싶지 않아지고, 왠만큼 쌓고 나면 또 제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준거들을 찾게 되는게 인간이다. 문제는 이를 외적 치장에 좌우된다고 보는 걸텐데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일수록 강하게 드러나는 법이어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반토흐나 본디나 이 천박한 기호에 그야말로 꽂힌 군상들로 등장한다. 정신적으로 아무런 고결함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추악한 냄새나 풍기며 사태는 생각지 못한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부와 물질로 재단되는 사회, 어떻게든 돈만 벌면 성공한 사회로 치부되는 사상의 부재, 여기서는 ‘진주’라는 기호의 버러지들이 우글대기 시작하면서 생각지 못한 도롱뇽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더한 문제는 이 고급 기호를 둘러싼 생산 자체가 권력화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소비하는 대중의 코드가 점점 어떤 계층에 속하는지를 증명해내고 싶어하다보니 자연히 사회적 코드가 혼선으로 위협되고 온갖 열패감으로 뒤돌아 볼 겨를없이 상실하게 된 것이다. 
허영은 더 큰 허영을 부르고 그 뒤에 생산자였던 도롱뇽들과의 괴리는 그만큼 더 벌어지게 된다. 이 급격한 격차가 인간의 또다른 형상을 하는 도롱뇽의 권력의지를 키우게 된 원인이다. 그러면서 서로 자신을 순결한 희생양인냥 착각하는 경박함은 추락의 끝을 모르고 밑천을 드러내는 인간들의 싸움을 닮았다. 근본적인 층위에서 자신의 삶을 들여다 볼 줄 모르면 대중과 권력을 쥔 층위간의 긴 갈등은 언제까지나 한쪽의 일방적인 상처로 휘둘려 지게 마련이다. 대중 각자가 이런 치사한 외적 요건들에 휘둘리지 않고 단단한 개인들로 거듭나지 않는 이상 이 너절한 기호 놀이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애초의 도롱뇽은 수줍음을 알고 제 분수에 맞는 충실한 손을 가진 사랑스런 동물이었다. 인간의 자본과 욕망이 쥐어 준 도구로 인해 이들의 사상은 급격히 진화하고 또 변질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손은 더이상 도롱뇽의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전염된 좀비와 같다. 그들은 성가신 존재들로 전락하게되고 위협적이며 막강한 권력의 또다른 적이 되고 만다. 도구로 표상되는 이미지는 여기서 칼이다. 날카롭고 예리한 기술을 갖게 되자 겉잡을 수 없이 발전이란 걸 해내고 권력의 불가항력이 되어 버린다. 대체 이들의 손에 무슨 짓을 한건가? 
이렇다 보니 뒷통수치는 도롱뇽의 행태에도 배신감 보다는 씁쓸한 죄책감이 앞서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쯤에서 한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일개 도롱뇽이 자기의 동물적 신념(?)을 버리고 과감히 인간이 좋아할 만한 권력을 모방하게 되었는데, 왜 인간은 도리여 배울 만큼 배워준 자신과 똑같은 짓을 하는 이 단순함마저 제대로 대처해내지 못하는가? 인간은 정말 예상치 못했던 걸까?  
새삼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거울 속 자신도 못알아 볼만큼 얕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거울을 들여다 보는 일처럼 이 똑같은 도롱뇽의 재스춰조차 인간은 감당해 내지 못하고 어쩌면 그들의 지배라도 받을 기세처럼 나약함을 드러냈다. 이를 조금 비틀어서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라고 비유해본다면, 한쪽은 일방적인 성장에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당황해서 삶의 원칙들마저 무너뜨리며 휘둘려 지친 모습은 보기 딱하더라도 한편으로 인과응보라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도 싶어진다. 이런 식으로 역사가 왜 끊임없이 반복되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렇더라도 결국, 사람만이 희망이다. 제 각자 본연의 길이 있음을 망각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질서를 존중하면서 키워나갈 것, 이 기본 토대를 상기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인간에게 과거나 지금이나 행복의 능력이란 딱히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건 인류가 다같이 행복해질 능력 같은건 없을지 모르지만 개별적 인간에게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질서라 부르는 틀에서 엉터리 군중에 섞여 억지로 함께 하는 한 우리는 불행할 것임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조금이나마 행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건 각자의 길에서 같이 걸어갈 상대를 분명히 알고 나아가는 자유일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이상, 좀 더 많은 부를 거머 쥐려는 욕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반드시 같이 걸어갈 상대의 손을 잡고 한계단 한계단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작가가 말하는 어느쪽이 양보해야 할지를 아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본주의가 종말하는 그날까지 아마도 이 지겨운 행진은 또는 싸움은 계속 될 것이다. 그래서 도롱뇽을 그림자처럼 옆에두고 항상 경계하며 희망 반 걱정 반으로 살아가는게 우리 각자의 몫이고 사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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