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황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불안의 황홀 - 김도언 문학일기
김도언 지음 / 멜론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불안의 황홀>을 읽으면서 호흡이 긴 일기를 써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김도언작가처럼 풍부한 물음을 던지는 글은 못되겠지만 적어도 마음 하나 다스리는데는 더할 나위없이 좋을 것 같다. 제 안의 운율을 모은 악보처럼 좋은 소리가 들리고 곧 황홀한 습관에 자진해서 중독되고 싶어진다.  

 
여기 일기들이 작가에게 일어난 재연인 채였다면 고인물을 들이키는 것처럼 탁할 뿐 다른 맛을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안의 황홀>은 일기라 한들 긍지를 품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글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시'처럼 고민의 흔적이 응축된 글, 그래서 그의 일기는 잡념이라도 근사하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겠거니와 문학작품을 읽고 그때 그때 제 몸이 그려낸 감수성의 곡선을 제대로 표현해 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나역시 이 고유의 시간을 좋아하고, 될 수 있으면 날 더 괴롭히는 물음일수록 기꺼이 사랑하고 싶어진다. 이 사유의 시간은 오래 유지될수록 깊어지므로 곡선의 놀이를 즐기는자가 되고 싶다. 그러니 내가 가진 여운들을 온전히 체득하고 써낸 글쓰기는 작가가 의도한 미완에 대한 완성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자만이 아니라 문학이 결국 독자의 몫으로 넘겨지는 자연스런 생산이리라.  


<불안의 황홀>을 읽고서야 비로소 발현하고픈 욕망에 대한 형체에 살이 보태지게 되었다. 일기도 훌륭한 문학일 수 있는 것, 이는 좀 더 내밀한 상상의 무게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책의 출발도 이런 차분한 의문과 고민의 흔들림에서 시작된 모양이다. 온 무게를 덜어낸듯 군더더기 없는 솜씨,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진중함이 은은히 배어난다. 책을 읽고 느낀 바든, 사람들과의 관계든, 혼자만의 사유든 이런 자신을 끊임없이 수상하다고 여기며 온전히 솔직하지 못했다 말하는 것은 당혹스러우면서 가벼운 배신을 느끼게한다.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정체에 의심이 솟고 끊임없이 유랑하는 유목민처럼 떠돈다. 그런 그를 보면 <불안의 황홀>이 만들어 낸 무늬가 왜 불확실과 역설의 물음표를 찍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단정짓고 표상화하는 말대신 언어의 그림자를 응시하도록 살아온 불안의 자취 때문이다. 당연하게 생각해온 것을 거부하고 옆과 뒤를 의심해보라 말하는 작가의 설득이 고마워진다.   
문득 예술이 바로 이런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파괴해도 좋은 의심의 산물일 것, 작가가 혐오하는 것에 대해 잊지 않으려한다는 말은 어쩌면 예술의 이면을 주시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의심을 멈추지 않고 싶어서일 것이다. 증오의 마음을 잊지않겠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 역설의 이뇨작용을 잘 여과해 낸 고뇌의 산물이기에 가능하다.  

항상 지금을 생각하는 시점의 기록, 그래서 생각은 앞에서 뒤로가는 여정을 밟도록 기획되어 있다. 줄기를 타고 뿌리로 내려가는 좀 더 날 것의 기록을 따라가도록 한다. 시간을 거스르는 순이니 작가의 섬세한 의도를 눈치챘다면 독자는 충분한 피드백을 나눠 갖을 것이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광경보다는 낯설고 의심하는 것들에 대한 수상한 기록을 자극하며 권장하는 셈이다.   

일기는 생각을 증폭시키고 실험과 전복을 일삼는 상상의 놀이터와 같다. 마음껏 뛰어놀고 온몸을 어지럽히는것을 독려하고픈 아이의 천진한 투정이다. 자유자재로 뛰놀수록에 건강함이 키워지듯 일기는 문학의 터전을 일구는 일처럼 자양분을 생산하는 유연의 샘이다. 그래서 이 책의 기록은 김도언의 다음 소설이 더욱 단단하고 풍요로울 것임을 기대하게 한다. 상상 속 운율을 기록하도록 권장하는 그 수상한 자극에 호흡을 가다듬고 조용히 그를 따르고 싶다. 
 

이 가을 날에 일기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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