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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
데이비드 뱃스톤 지음, 나현영 옮김 / 알마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를 읽고 난 후유증을 일일이 고백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지 모르겠다. 하나의 텍스트로써 엄정히 읽어내고 진단하며 별 몇개를 얹고 말고 하는 일이 대단히 무례하고 부질없이 느껴지는, 그 어떤 여력이 생기지 않는 책이다. 다만 읽어 내는 일, 이것이 끝나면 오랜 시간 막막의 길에 덩그러니 놓이는 편이 나을 것 같은 그런 소설이다. 모두의 문제이기 이전에 내 문제임을 여실히 반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 몇 자 적어내는 글은 리뷰라기 보다 후유증에 대한 고백 정도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는 아주 간곡한 어조로 우리의 무관심에 의표를 찌른다. 아프면, 당연히 손을 내밀라고 말이다. 나도 모르게 전등을 끄고 컴퓨터 화면 빛으로만 비춰지는 내 방의 아무데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 어둠은 사뭇 제목이 말하는 떨궈진 꽃잎들, 그들이 사라진 나락의 끝일 것만 같다. 주위가 결코 밝아질 수 없는 앞날을 보는 것처럼 몸서리 쳐지는 암울의 땅. 그곳에 아직도 노예라는 이름의 그들이 산다. 온 빛을 제거하고 나서야 보이지 않던 그들의 젖은 눈과 아우성이 들리는 듯 하다.
향긋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 모양이 예쁜 핸드폰을 사고 좋아할 때 나는 이럴 때, 여기 이 꽃들을 한번쯤 상기했어야 했다. 편안함과 즐거움을 위해 어느 한편에서 일어난 강제 노역과 인권 유린 등 처참한 광경을 한번쯤 의심해 봤어야 했다. 분명 모르지는 않던 일이다.
월드컵의 축구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공정무역 커피라는 문구를 보면서 역으로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을 하고 있다. 고사리같은 손으로 축구공을 만들어내고 정작 공을 차본일이 없다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불쌍해 하거나, 하루종일 커피콩을 따내면서도 하루벌이가 그들 한 잔 값이 안된다는 것을 딱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우리 일상을 점령하다시피 한 값싼 물품들의 생산자가 막연히 제3국의 어느 노동자에 의한것이란 걸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이 살던 내가 있었다. 그저 가난한 나라의 그만한 일자리로도 살아가는게 다행아닌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는 노동자가 아닌 '노예'였다는 것은 알아주지 못했다. 그곳은 제3국이 아닌 노예의 땅이었는데도.
캄보디아와 태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의 아동 및 여성들의 인권 유린은 말도 못하게 심각한 수준이라는 걸 이 책을 보고 알게됐다. 그들의 부모와 친지가 나서서 제 자식을 팔고, 성적 노예로 전락하게 만드는 행태는 입이 다물어 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다. 결국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부모도 경찰도 나라도 신도 아니고, 오로지 그들 자신 밖에 없던 것이다. 극소수의 인원만이 이 책에 나오는 구원자를 만나 새로운 삶을 꾸릴 뿐이다. 대다수의 노예들은 끝모를 막막의 땅에서 피와 땀을 착취당하며 산다.
새삼 현대판 노예라는 말을 들먹이는 것은 잘못된 말이었다. 그 언제고 노예가 사라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곳곳에 다양한 방법으로 발목이 묶여 고통의 나날을 버텨내는 노예들이 최소한의 인권도 없이 살아간다. 많이 알려졌고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도 미비한 수준이다.
이 책은 우리를 향해 노골적인 손가락질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우리의 이중성, 무관심에 대해 말하려는 책이다. 그래서 보는내내 불편하고 끔찍하지만 무엇보다도 감내하여 같이 손을 뻗어주길 기대한다. 결코 우리의 관심과 도움의 손길없이 노예가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유를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바로 당신이 내밀라고 말한다. 어둠의 장막을 열고 노예들이 모두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 양석일작가의 <어둠의 아이들>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 성적 노예문제를 적시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