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속의 꿈, 꿈속의 불

 

 

1

 

이곳저곳에 큰 불이 일었다. 불붙은 산, 불붙은 들, 불붙은 집. 불붙은 마음들의 까맣게 타들어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세 시간을 멍하니 앉아 있다 자리에 누웠다. 저 먼 곳에서 사람은 죽지 않고 오직 불만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억지 잠을 청했다. 불 끄는 꿈을 꾸었다. 불 끄는 꿈이 아니라 불 못 끄는 꿈을 꾸었다. 불은 컸고, 거셌고, 인정도 사정도 볼 줄을 몰랐다. 이윽고 몸에 불이 붙었다. 나는 너무 놀랐고 놀라움을 허겁지겁 휘둘러 겨우 꿈을 찢고 나왔다. 새벽은 창밖에 고요했고, 이마와 가슴이 뜨거웠다. 미지근한 자리끼를 들이켜 급한 대로 잔불을 잡았다. 잠시 불을 켤까 망설이다 포기했다. 그것도 불이었던지.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꿈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살폈는데, 누군가 네이버에 강원도 산불 사망자 수를 검색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누군가를 내가 기억 못하다니. 아직 불이 남았다. 그런데 내 좁은 세상은 안온했다. 이 모든 일이 다 꿈인 것만 같았다.

 

 

한참을 달리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아서어느 집 대문 그늘 아래수거를 기다리고 있는 쓰레기들 뒤에 앉았다나는 울지 않았다더 울 필요도 없었다나는 두 눈을 감고 창피한 마음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나는 상상 속의 경찰을 불러냈다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경찰을그는 다른 경찰들에 비해 백만 배는 더 큰 덩치에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심지어 그는 방탄차까지 몇 대씩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그와 함께라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그는 나의 안전을 보장해줄 터였다그가 책임을 져줄 것이므로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그는 아버지처럼 억센 팔로 내 어깨를 감싸주면서 내게 그렇게 여러 발의 총을 맞았는데 다치지는 않았는지 물었다나는 상처를 입었지만 병원에 가봤자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그는 한 손을 내 어깨에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그가 나의 아버지가 되어 모든 일을 처리해줄 것만 같았다그런 생각을 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그리고 내게 제일 좋은 방법은 현실이 아닌 곳에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친숙한 현실이 느닷없이 돌변할 때현실을 빚어내는 '양상', 이를테면 신의 섭리 같은 그 무엇이 깨져버렸을 때집단이 무너지고 구성원들은 제멋대로 놀며 타자들이 적의를 드러내고 살육에 취할 때우리는 흔히 '세상이 무너진 것 같다'는 표현을 쓴다그런데 정작 무너진 것은 세계도 아니요세계에 속한 그 무엇도 아니다무너진 것은 '우주적환상이다우리는 그 환상을 통해 사물의 본성을 생각해왔을 뿐이다.

프레데리크 시프테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2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제가 읽는 모든 책에서 발췌를 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마르크스는 그 뒤로 평생 이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이 시기 마르크스의 독서 목록은 그의 지적 탐사 작업의 폭을 보여준다법 철학을 쓰면서 달리 누가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예술사를 꼼꼼하게 공부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겠는가마르크스는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와 오비디우스의 트리스타니아를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혼자즉 문법책을 놓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다음 학기에는 민법 소성 절차와 교회법에 대한 교과서를 수십 권 읽으면서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번역했고프랜시스 베이컨을 읽었고, "라이마루스의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동물의 예술적 본능에 대한 그의 책에 즐겁게 마음을 빼앗겼다."

프랜시스 윈마르크스 평전, 42 

 

삶이 순순히 져주지 않을 때, 상당히 종종 맞닥뜨리는 이런 시기를 syo는 평전에 기대어 통과하곤 한다. 처방전은 보통 두 갈래 길이다. 빨간 약, 나보다 더 열정적인 인간의 생을 읽으며 열정의 불씨를 나누어 받기. 파란 약, 나보다 더 심하게 망한 인간의 고통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저렴하게 안도하기. 그러나 정말 가끔씩, 도저히 답이 없을 만큼 위급한 상황이라 두 약을 동시에 처방해야 할 때도 있다.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섞으면? 정답은 마르크스.

 

그런 이유로 하루 두 번 식후 30(syo는 두 끼 인간입니다), 마르크스 평전을 복용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효험을 보는 중이다. 저 양반도 딱 보니 젊을 때부터 크게 되긴(?) 글렀던 것이다. 저 정도 경지까지는 아니지만 syo도 비슷한 짓을 해 봐서 아는데, 저게 부인과 아이들(혹은 여자친구) 밥 굶기기 딱 좋은 독서법이다. 독서법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독서질이다. 독서짓이다. 아이고 맑선생아, 맑선생아, 철없는 맑선생아, 1818년생, 어린이날에 태어난 젊디젊은 맑선생아..... 아이고 syo......-_

 

 

 

3



  도덕을 도와 덕으로 나눴을 때 도를 이해하기란 쉽다는 길이다차나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길이니 항해길비행길이다더 나아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인생길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이나 방법이 되는 길까지 다 아우르는 길이다.

  동양 사상이나 윤리학사회학에서 정의하는 도의 개념도 길이 갖는 이런 지향성이나 반복성연결성 같은 풍부한 함의를 활용한 것이다인간 행위나 정치 조직의 올바른 진로만물 생성의 원리보편적 진리 등 이런 식으로 정의되는 도의 개념은 모두 길의 비유로써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덕은 도처럼 뜻이 선명하지 않다도에 길이 대응하듯이 그렇게 대응하는 토박이말이 없기 때문이다그래도 억지로 찾아 붙이면 힘이다그냥 힘이 아니라 인간의 존귀함을 나타낼 수 있는 힘 또는 존귀한 행위나 관계에서 드러나는 힘.

  이때 덕은 나아갈 길을 알지 못하면 획득하기 어렵다도를 깨치고 이를 반복해서 실천하는 이가 갖게 되는 힘이 덕이다그것은 무력폭력병력 같은 물리적 힘이 아니다마력괴력 같은 주술적인 힘도 아니다매력이나 영향력협력능력 같은 인간적 힘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도덕을 묻는 일은 어떤 길을 어떻게어떤 힘에 의존해서 나아갈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이 질문에는 삶이 길을 알고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그를 헤쳐 갈 바른 길을 찾고자 했던 간절함이나 절실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므로 도덕을 찾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실천하면서 생겨난 도덕규범은 구별해야 한다도덕은 삶의 매 순간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새롭게 물을 필요가 있다도덕을 묻고 찾았던 시대 상황과 처지는 그때그때 변하기 마련이다.

정춘수논어를 읽기 전, 44-45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책이 느닷없이 뒤통수를 후려칠 때, 독서가는 아픈 뒤통수를 쓰다듬으면서도 썩 기분 좋은 표정을 짓게 마련이다.

 

도덕, 그것은 똥이라고 syo는 늘 생각해왔다.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가 논의와 동의와 권력의 압력과 자발적 비자발적 순응의 과정을 모두 거쳐 도덕이 되는 데까지 필요한 시간이 너무나 길다보니, 결국 도덕으로 인정받아 인간 내면의 법전에 새겨진 시점에는 이미 옛날 물건이 되어버려 현실과는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도덕의 슬픈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도덕에 대해 더는 깊이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통용되는 도덕규범을 지키거나 말거나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도덕이 그놈자식이 어떻게 살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까지를 시시콜콜 알만큼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은데, 그냥 살아있는지 확인만 하고 살지 뭐, 이런 마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냥 내가 욕 안 먹으려고 고분고분 지키고 사는 거지, 도덕이 그놈 그거 원래 태생이 고리타분하고 반동적인 권력의 앞잡이라니까? 하는 것이 syo의 도덕관이었다.

 

정춘수 선생님이 쓰신 위의 글은, 도덕의 출생에 대한 syo의 유치하고 초보적인 마르크스적(“모든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혹은 니체적(“도덕은 얼뜨기들을 허무주의로부터 보호했다. 각자에게 어떤 무한한 가치를, 어떤 형이상학적 가치를 부여하고 이 세상의 힘이나 위계질서와 어울리지 않는 어떤 질서로 편입시키면서 말이다”) 해석을 모두 껴안으면서도, 이런 비도덕적(?) 도덕관을 가진 인간 역시 항상 자신의 을 휘두르는 일에 주의해야 함을 선선히 일깨워 준다. 사실 저 말은 유학이든 유물론이든 실존주의든 뭐든, 아니 철학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도덕과 정의에 대해 언급하는 모든 인간들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태도인 것은 아닐까. . 어쨌든 힘을 정갈하게 다루어라. 그건 단지 큰 힘을 가진 이들에게만 요구되는 폭 좁은 덕목이 아닌 듯하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한 사람이 큰 힘을 가진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그저 우리네 선량한 이웃 중 한 사람이었던 스파이더맨 삼촌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원래는 볼테르의 말이라고 하던데.

 

그나저나, 아니, 논어를 읽기 에 이래버리면, 그럼 논어를 읽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_

 

 

4




봄철 새소리는 화평하다가을철 벌레 소리는 처량하고 슬프다이것은 계절의 기운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당우(이상적인 태평 시대의 상징인 고대 중국의 임금 요와 순시대의 글은 순수하고 맑고 밝다말세의 글은 화려하나 경박하다그 기운을 어찌할 것인가. _이목구심서 2

이덕무 지음한정주 엮음문장의 온도

 

말세의 글이라굽쇼..... 이덕무 선생님 참 못된 사람. 당신의 순수하고 맑고 밝은 요순시대 글로 사람 여럿 말종 만드신다. 어찌할 것인가.....

 

화려하고 경박한 글이 말세급이면, 화려하지도 않고 경박하기만 한 글은 멸망과 멸종을 부르는 것인가요-_ㅠ 


근데 오늘 나 왜 계속 울지?-_

 

 

--- 읽은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 7 / 박시백 지음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 정성희 외 지음

 

 

--- 읽는 ---

마르크스 평전 / 프랜시스 윈 지음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 김보통 지음

문장의 온도 /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논어를 읽기 전 / 정춘수 지음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 조현준 지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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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9-04-05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진짜 무서운 불입니다.. ㅠㅠ

syo 2019-04-06 08:05   좋아요 0 | URL
정말 무서웠습니다. 전 단지 영상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랬는데 실제 열기까지 몸으로 느끼셨을 분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