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억년의 비고독

 

 

그 새벽 이리저리 뒤채는 당신의 몸을 살뜰히 짚어가며 나는 찾고 있었다. 어떤 흔적기관 같은 것들을.

 

그것은 어쩌면 백억 년 전쯤, 어느 뜨거운 별의 심장으로 내가 폭발하였을 때, 은하 반대편 또 다른 별의 표면에서 내가 텅 빈 우주로 터져나가는 모습을 응시하던 당신이 아- 탄식하듯 쏘아올린 한 알의 빛 알갱이 같은 것일 수 있다. 갓 태어나 흐물거리던 지구의 겉면을 식히기 위해 한 줄 빗방울로 내리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같은 자리에 떨어져 한 웅덩이 고인 물로 함께 뭉개지기를 바람과 구름에게 빌었던 길고 서늘한 내 기도 같은 것일 수 있다. 또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느 대륙과 대륙 사이, 표면의 거친 파도 숨소리가 차츰 녹아들다 이윽고 한 마디 웅얼거림으로 슬쩍 들렸다 말았다 하는 깊고 무겁고 빛 없는 아랫물 속에서 헤엄치던 내가 무심코 할퀴고 지나가버린, 당신 지느러미의 십억 년 전 흉터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서로 다른 줄기에서 각자 열심히 자라나, 큰 바람이 불어주면 잠깐이라도 스칠 수 있을까 하여 십만 년을 마주보고 바람만 기다렸던 두 개의 우듬지 속, 애처로운 나이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크고 위대한 새가 양 날개를 펼치고 처음 날던 날, 나는 한쪽 날개의 깃털이 되고 당신은 반대쪽 날개의 깃털이 되어, 서로가 없이는 날 수 없지만 나는 동안은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조각이 되어 열심히 할퀴어댔던, 어느 키 작은 하늘의 날카롭게 베인 자국 같은 것을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현재가 되어, 당신의 언니가 내 모교의 음악 선생이었다거나, 당신의 친한 친구가 나의 동창이었는데, 그는 나와는 친하지 않았지만 나와 친한 또 다른 누군가와 친했다거나, 그렇게 만나 어울렸던 무리 가운데 오직 나만 당신이 찻길 가까이에서 걷지 못하도록 당신과 찻길 사이에서 걸었다거나, 어느 날 내가 전한 안도현의 시가 당신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켰거나, 그 덕에 하루 종일 우울한 당신을 보며 덩달아 우울해진 스스로를 발견하고 내가 놀랐다거나, 당신의 언니 집과 우리 집이 가까웠으므로 그날의 술자리에 우리들 가운데 오직 나만이 나올 수 있었다거나, 당신이 울었다거나, 나도 울었다거나 하는 그 모든 것들을, 흔적이 되었든 흉터나 문신이 되었든, 어쨌든 그 안에서 어떤 뜻 같은 것을, 이유 같은 것을, 진부하게 말하자면 운명 같은 것들을, 나는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뒤채는 밤이면, 나는 끝없이 당신을 뒤적거려 그것을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사실은 그런 것들이 없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우주는 137억 살과 138억 살 사이의 어디만큼 나이를 먹었고, 그 우주의 빽빽한 나이테를 뒤지는 데는 우주의 나이만큼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정답이 나오건 말건, 나는 아무래도 우주의 나이만큼은 당신의 옆에 누워 보고, 듣고, 만지게 될 것 같다.

 

 


우리는 우리가 우연히 만드는 새로운 관계를 기존의 범주에 집어넣는 경향이 있다우리는 거기에서 일반적이거나 공통적인 것을 본다반면 당사자들은 개별적이고 자신들에게 특수한 것만 본다-느낀다우리는 말한다얼마나 뻔한가그들은 말한다얼마나 놀라운가!

줄리언 반스연애의 기억


모든 사람은 지금까지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랑을 연주하기 위해 태어난다.

신용목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그때 애인의 시선이 생화 팔찌가 느슨하게 걸려 있는 내 왼쪽 팔목에 가닿는다그건 왠 꽃이냐고 묻는 듯한 의아한 눈빛이다나는 순간 기지를 발휘해 팔찌를 애인의 손목으로 옮긴 다음선물입니다하고 능청을 떤다애인을 생각하면서 산 꽃은 아니지만사실 이건 꽃이라기보단 방향제에 가깝지만어쨌든 꽃은 꽃이니까.

 와오늘 이건 뭐... 완전히 룸서비스인데?

 애인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이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꽃향기를 확인한다그러고는 눈가에 주름이 가득해지는 특유의 눈웃음을 짓는다진심으로 기분이 좋을 때만 튀어나오는아마도 본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게 분명한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표정이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애인의 얼굴을 천천히 눈에 담는다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고피부는 푸석푸석하고눈가에는 눈곱이입가에는 음식 양념이 묻어 있지만그러니까 이보다 더 꾀죄죄할 수가 없고 이보다 더 생활적일 수가 없지만바로 이 장면을 만나려고 내가 방콕에 온 게 아닐까 싶다나는 환한 빛이 마음 한쪽을 간질이는 것 같은 지금 이 순간을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리라 예감하면서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든다.

 오늘 점심은 이렇게 방 안에서 때운다.

김병운아무튼방콕


 

 

-- 읽은 책들 --


 

나쓰메 소세키, 갱부

서정욱, 철학의 고전들

박정자, 플라톤의 몸 이야기

박정자, 플라톤의 예술노트

 

 


-- 읽는 책들 --



빌 브라이슨, 나를 부르는 숲

정재승, 열두 발자국

줄리언 반스, 연애의 기억

플라톤, 국가

버르런드 러셀,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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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10-06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아무튼, 방콕 좋아요?

syo 2018-10-06 15:22   좋아요 0 | URL
괜찮아요. 소소하고 달달한 것 같애

다락방 2018-10-06 15:23   좋아요 0 | URL
응 인용문 보니까 읽고싶어졌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