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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친구 녀석이 가네시로 카즈키를 열심히 읽기에 사서 봤다. 다른 책들이 더 유명하다고 하던데, 그 책들은 서지 정보를 보니 웬지 묵직해 보여서 포기하고, 제목부터 상큼한 <연애소설>을 먼저 읽었다. 가뜩이나 요즘 고민도 많은데, 손에 잘 안 잡힐 것 같았다. 부담없이 연애담이나 함 읽어보자하는 마음에...젠장 완전히 속았다.

부담없기는 커녕, 부담 만빵이었다. 엄숙하거나 심각한 소설은 분명 아니다. 설정은 엉뚱하고, 대화는 재기발랄하다. 하지만 김난주씨의 해설대로 특유의 유머 감각은 변함이 없는데, 애뜻함이 더해진 연애담이다.

이 소설은 세 편의 연애담으로 이루어진 중단편집이다. 이 단편집의 표제인,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인 <연애소설>, 불치병 환자의 기괴한 복수극인 <영원의 환>, 노변호사의 읽어버린 사랑의 기억을 되찾는 여정을 다룬 <꽃> 세 편이다. 연애가 주된 소재이자 주제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죽음'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블로그를 꾸준히 들어오신 분들이야 나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은 익히 아실텐데, 이 소설은 계속해서 나의 마음을 쿡쿡 찌른다. 그 점이 불편하면서도 흥미로웠다.    

내가 느낀 바를 어설픈 삼단 논법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것은 죽음을 뛰어넘을 수 없다. 연애(사랑)도 모든 것에 속한다. 따라서, 연애도 죽음을 뛰어넘을 수 없다.

라는 식의 접근과 그에 대한 부정-아니다. 연애는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다.-이다. 모든 연애담은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등장인물들은 죽어가고 있거나, 혹은 사람을 죽였다. 또한 죽음은 연애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작가는 죽음과 연애를 쌍으로 묶어서 움직인다. 물론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꽃피는 순간 혹은 사랑의 실체를 깨닫는 순간은 곧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서도 사랑의 끈을 놓치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사랑했던 사람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다. 어쩌면 이 지점이 화자가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리시의 소설들이 '예정된 죽음을 피하기 위한 필사적인 질주'의 느낌이라면, 이 소설은 '예정된 죽음을 알고,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 혹은 자기 자신에게 증명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느낌이다.

책을 다 읽고, 이들은 행복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게 된다. 아니 죽음을 뛰어넘는 연애란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해본다. 난 솔직이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나의 강박관념 탓이던, 사랑밖에 난 몰라라고 말하기에는 먼지가 꼈던,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이 작품의 기이한 울림 탓에,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은 들게 되었다. 아마 예전같으면 바로 아니라고 했을텐데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단편들마다 공통적인 에피소드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세 편 모두 등장하는 특정인물의 존재라던가, 특정한 행동 내지는 사물. 어쩌면 우리 주위의 일상-사랑하고 이별하고, 결국에는 죽는 사람의 모습들은 결국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다른 무엇보다도 세 편 모두 등장하는 그 사람의 삶은 어떠했을까라는 호기심이 문득 일어났지만, 얄밉게도 작가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너무 심각하게 이야기한 것 같기도 한데, 나처럼 강박증 환자가 아니라면 가볍게 읽기에도 충분하다고 본다. 재치어린 농담은 정말 유머러스하고, 하드보일드 팬인 나로써는 얼처구니없게 하드보일드 운운하는데에서는 좀 쓴웃음도 났다. 실제로 <영원의 환>은 작가가 생각한 하드보일드에 충실한 편이기도 하다. ^^   

세 단편 다 재미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머지 두 편은 어색한 부분이 있다. <연애소설>은 화자의 전형적인 모습과 삐딱한 유머가, <영원의 환>은 작가 자신이 언급한 것처럼-나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하드보일드 소설 애독자다운 황당한 스토리 전개가 연애의 애절함을 일부분 가렸다. 그리고 <영원의 환>은 연애담이라고 보기에는 전개가 이질적이다. 하지만 <꽃>은 기본적인 설정도 좋았고, 가장 가슴 아픈 연애담이었다. 가장 있을 법한 일이니까. 특히 제목이 꽃인 이유를 알았을 때는 신파적이었지만 가슴이 아팠다. 물론 약간 튄다는 느낌을 좋아한다면 앞의 두 편도 괜찮은 듯 하다. 하지만 <꽃>이 주는 묵직함은 작가의 삐딱한 유머와 독특한 설정을 뛰어넘고도 남는다.

별 기대하지 않고 읽었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서-솔직이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지만, 고맙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한다. 다른 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데...좋은 작가 한 사람을 알게 된 느낌이다. 친구 녀석의 책을 빌려서 더 읽어봐야겠다.

추신) 이 책만 구입하시기 아까우신 분은 알라딘에서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을 사시면 같이 줍니다. OTL

추신2) 김난주씨의 해설은 설렁설렁 작성한 느낌이 들어서 약간 별로였다. 번역도 그런듯 했고. 불량용 교복이라니. 불량학생용 교복이라면 모를까...그리고 서지정보를 보니 원제는 <대화편>이였던 것 같은데, 작품의 성격에는 훨씬 어울린다. 이 소설의 형식은 두 사람이 등장해서 주고받는 대화다. 그래서 더 잘 읽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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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람은 어떻게 꿈을 이뤘을까
게오르그 포프 지음, 박의춘 옮김 / 좋은생각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박노자 교수가 지적했듯이, 서양 위인전을 보며 영웅주의의 세례를 받은 나이라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기억해보면, 내가 제알 처음으로 읽었던 책은-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부모님의 기억으로는 4살때 읽은 전화번호부이다.--;;-소년소녀한국세계사였고, 그 뒤에는 수많은 위인전을 읽었기 때문이다.

기분전환을 위해서 잠시 헌책방에 들렸다가 산 책이다. 헌책방에서는 가끔 실수를 하는데, 급한 마음에 자세히 둘러보지 않고 나와서 책을 놓치는 경우와 책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사서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을 산 게 실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책표지가 너무 깨끗해서 샀는데, 깨끗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기대했던 건 위대한 사람들은 '어떻게' 꿈을 이뤘을까였다. 결코 '위대한 사람'들은 어떻게 꿈을 이뤘을까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은 나의 기대를 산산히 쪼개버렸다. 그 흔한 교양서적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예를 들어 훔볼트의 경우 '어떻게' 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은 딱 두 문장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훔볼트는 26세였으며, 역시 재능이 많았던 형 빌헬름과 함께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 덕분에 훔볼트는 전 인생을 자신의 소망대로 살 수 있었다.

으으..천재 아니 사람의 비밀을 캐어낸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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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스 1
에릭 시걸 지음, 석은영 외 옮김 / 김영사 / 199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닥터스는 영화로 더 유명한 '러브 스토리'의 작가 에릭 시걸의 작품이다. 그 외의 유명한 책으로는 프라이즈, 하버드 동창생 등이 있다. 아쉽게도 나는 다 읽지 않았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생때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읽었을 때의 느낌은 '참 재미있다 플러스 참 아름답다."였다. 재미있다는 느낌이야 읽어본 사람들이면 대강 공감을 할 것이고, 아름답다는 우습게도 주인공 로라와 바니의 일생에 걸친 우정(을 가장한 사랑)이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런 인관관계를 동경했다.

내용은 한줄로 요약가능하다. '하버드 출신 의사들의 삶과 애환-로라와 바니를 중심으로' 머 더 이상 늘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다시 읽으면서 사소하지만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견했다.
제일 처음 느낀 것은 내가 머리 속에 늘 되새김질하는 유홍준씨의 명언. "아는 만큼 보인다." 닥터스는 일종의 성장소설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미국의 시대배경이 삽화처럼 삽입되곤 하다. 심지어 베트남전과 같은 사건은 주인공과 그 주변사람들의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의학적인 발견도 적절하게 삽입이 된다. 추측컨데, 시대상에 맞추어서 구성을 한 것 같다.

또한 친절하게도 장의 서두나 말미 부분에 그 당시의 배경을 짧게 소개한다. 친절한 설명 덕분에 이 소설은 시대적인 배경을 몰라도 소설의 재미를 느끼는 데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나서 다시 읽다 보니, 숨겨진 재미를 찾아내는 것도 쏠쏠하다.

예를 들어, 주인공 바니와 로라가 사는 곳은 브루클린이다. 브루클린에는 예전에 브루클린 다져스가 있었다.(지금 LA 다져스의 전신이다.) 이 팀은 양키스와의 라이벌로 유명했는데, 매년 월드시리즈에서 번번히 졌다. 그래서 브루클린 사람들은 양키스에 대한 미움과 월드 챔프에 대한 욕망이 간절했다. 가장 예를 들기 적절한 팀은 우리나라의 빙그레 이글스인 것 같다. 닥터스에서도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1955년은 미국인들이 두 번씩이나 거리로 뛰쳐나와 춤을 춘 유쾌한 1년이었다. 브루클린을 빛낸 대사건도 그 중에 하나였다. 도저스가 뉴욕 양키스를 박살내고 월드시리즈의 승자가 되었으니!"

이 별뜻없는 문장 속에는 그 시대를 겪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게다. 최근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대가 미국의 50~70년대다 보니, 그 시대에 대한 잡지식이 늘어났고, 이는 책을 더 맛깔스럽게 읽는데 도움이 된다. 제대로 읽으려면 영어판을 보거나, 더 알아야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외국독자들을 생각해서인지, 닥터스는 시대적 배경에 깊이 기대고 있으면서도, 배경지식 없이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는 신기한 소설이다. 어쩌면, 우리가 의학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수 있고 에릭 시걸이 정말 스토리텔러로써의 테크닉이 뛰어나서 일 수도 있다. 이도저도 아니면 우리 모두는 미국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음으로 느꼈던 것은-이 글에서 서술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제 하에-상식의 한계였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불과 몇 십년 전에, 심지어는 2~30년전까지도 통용되지 않았던 점이라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참 씁쓸해지곤 한다.

주인공 중에 베넷 랜스먼이라는 흑인이자 유태인인 인물이 있다. 그는 부유한 유태인의 양자이다. 그가 유태인의 양자가 된 것은 세계 제 2차세계대전때 군인이었던 친부가 수용소에 갖혀 있던 양부와 양모를 구해주고는 자신은 발진티푸스로 죽었기 때문이다.(양부모는 그 보답으로 베넷을 양자로 맞이했다.) 베넷은 어느 무리에도 어울리지 못한다. 흑인들에게는 돈많은 유태인이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돈많은 흑인일 뿐이다. 그는 여러 모로 훌륭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 중에서 제일 힘겨운 행보를 겪는다.(심지어 폭행으로 인해 의사를 그만두기까지 한다.) 이러한 험난한 행보에는 그가 '흑인'이라는 현실이 존재한다.

또한 야심만만한 '여자'인 로라 카스텔라노도 마찬가지이다. 여자기 때문에-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의 전공은 소아과이다.-그녀의 야심과 야심찬 행동은 늘 주위를 불안하게 만든다. 바니의 어머니가 그녀를 가리켜, '너무 똑똑하고, 너무 야심만만하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녀가 전통적인 여성의 자리를 거부하기 때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 전체적으로 볼때 초반부의 로라의 압도적인 이미지는 후반부로 갈 수록 가정과 어머니라는 존재에 매몰되어간다. 특히 바니와 우정(을 가장한 사랑)이 깨지면서 그녀의 존재감은 '바니의 부인' 이상은 아니다. 두 명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는 거의 남자주인공의 역할감이 두드러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때문이다.(다른 이유로는 남자주인공이 정신과에 있다는 점을 들을 수 있겠다. 다른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도와줌으로써 소설이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게 한다.)

'모든 인간은 성별에 관계없이, 피부색깔에 관계없이 평등하다.'라는 상식은 과연 교과서 안에서만 존재하는 상식인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아직까지 내 주위에서 직간접적으로 들리는 현실은 아직도 YES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컨데, 이 소설이 나에게 깊이 와닿았던 이유는 이 소설을 관통하는 '아버지의 부재'때문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한 날이 적었던 나는 바니와 로라의 근원적인 고통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맨 뒤에는 역자 후기가 나와 있는데, 의학적인 오류를 위주로 수정했다는데, 난 별로 차이를 못느꼈다. 이것 역시 "모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번역이 약간 순화된 느낌이고, 몇몇 문장은 생략된 것 같다. 그래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별 차이가 없다.

아, 그리고 하버드에서의 공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저정도는 해야할텐데 말이지--;;;

결론적으로 말해보자. 닥터스는 재미있는 소설이고, 그냥 읽고 치우기에는 생각할 꺼리를 많이 던져주는 소설이다. 다시 읽어도 재미있고, 이렇게 나름대로 긴 글을 쓰게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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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4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한민국은 있다
전여옥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점들을 '르뽀'형식으로 담아서 '화끈'하게 공격하고 있으며 결말에는 저자 자신이 생각하는 우리나라에 대한 희망섞인 전망과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한 제언을 제시하고 있다.

전여옥씨의 글쓰기의 장점은 일단 '화끈솔직하다'는데 있다. 그녀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은 독자들에게 정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대단히 용이한 화법인 것 같다. 이니셜로 표기하긴 하지만 분명히 아는 사람일텐데 저렇게 말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인정사정 보지 않고 펜을 휘두른다. 이러한 솔직함은 그녀 자신의 주위 사람들을 주로 소재로 잡는다는 점과, 자신의 이야기를 좋던 나쁘던 무리없이 녹여낸다는 점이 양념으로 결합하면 더욱 치명적인 매력이 된다. 특히 같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분량에 걸쳐 전업주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읽으면 묘한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화끈함'으로 일관했다면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강준만 교수를 위시하여 화끈한 필자들은 얼마든지 많다. 그러나 왜 전여옥인가? 그녀가 비판하는 대상들이 대부분 사회 권력층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즉 그녀는 '한국사회 상층부의 르뽀작가'이기 때문이다. 절대로 비아냥거리는 뜻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충분히 활용하여,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는 계층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또한 특유의 통찰력은 그 안에서 작동하는 한국사회의 매커니즘을 상당 부분 냉철하게 꿰뚫고 있다. 이러한 소재선정은 독자들에게 관음증적인 쾌감을 준다. 한국부르주아의 은밀하면서 지저분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쾌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 요즘같이 빈부격차와 계급갈등이 심한 세상에는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감동이다라고 할 수있다. 담담히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을텐데, 통쾌하게 독설을 퍼붓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있을까? 이러한 장점들 때문에 그녀의 책을 읽으면 기분이 후련해진다. 여기까지는 그녀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그녀의 다른 저서를 포함하여) 이 책은 두 번 세 번 곱씹어 읽게 되면 상당히 불편해지나 최소한 맥빠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예전에 나는 전여옥씨가 공적인 이타심이 아니라 사적인 이기심으로 비판을 하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한 적이 있다. 풀어서 말하자면, 한국 사회의 발전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한국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비판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동기 자체를 해부하겠다는 생각은 개인의 머릿속을 해부하겠다는 상당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중단해 버렸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불편한 이유 하나는 찾을 수 있었다. 이 책 전체에서 감지할 수 있는 전여옥의 자기모순, 아니 자가당착이 불편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남자를 위로하기 위해 쓰여진 '그들의 저철한 선택-종신보험'의 일부를 보자.

K씨의 마누라는 현재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유학 중이다. 명문대를 나와 방송국에서 그런대로 자리를 잡은 그의 아내는 '공부를 하겠다.'는 대책없는 지적 허영심에 사로잡혀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 엄청난 학비와 생활비를 남편에게 떠넘긴 채, 아침이고 점심이고 저녁까지 회사 식당에서 2500원짜리 식판으로 세 끼를 해결하는 그에게 마누라는 '돈이 모자라 빠듯하다.'는 이메일을 하루에 한 통씩 보낸다.

이 내용에 공감할 수도 있고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뒷표지의 저자의 약력에는 '현재 이화여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중'이라고 당당히 적혀있었다. 한참 웃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가? '대책없는 지적 허영심'과 다른 글에서 쓰여진 표현대로 '이제 벤치에 앉아 자리를 덮히고 있던, 그러나 눈부신 능력을 지니고 있는 여성 인력'을 도대체 누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만약 제3자가 '공부를 하겠다.'는 지적 허영심에 사로잡혀 이화여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중에 있다라고 그녀를 비판한다면 무어라고 대답할 건가? 나는 '이제 벤치에 앉아 자리를 덮히고 있던, 그러나 눈부신능력을 지니고 있는 여성 인력'이다라고 대답할 것인가? 게다가 전여옥씨도 이화여대라는 '명문대를 나와서' KBS라는 '방송국에서' 일본전문특파원으로 '그런대로 자리를' 잡았던 사람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와 전여옥씨의 차이점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해외유학을 갔기 때문에, 유학비를 남편에게 부담했기 때문에 나쁜 여자라는 것인가? 냉정하게 전업주부였던 기혼여성이 재취업 내지는 공부를 함에 있어서 자기 돈 가지고 시작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된단 말인가. 전여옥씨 같이 '선택밭은 소수'나 남편에게 손 안 벌리고 공부하는 것이 가능하지, 일반여성이라면 시댁이던, 친정이던, 남편이던 손을 벌려야 할 것이 아닌가. 누누이 이야기하는 여성의 사회진출을 격려하고 싶었다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균형감각을 갖추고 이야기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한다.

다른 예. '엽기적인' 그녀의 '염치없는' 초대장 에피소드. 한국의 전업주부를 비판하기 위해 어떤 사장 부인의 어처구니 없는 출판기념회의 풍경을 재미있게 묘사한다. 내용 자체는 의미가 있고 설득력도 상당히 있다. (개인적으로는 위에서 이야기한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는걸까 싶은 초강력 에피소드의 한 편이다.)  그런데, 내가 의아한 것은 그 자리에 전여옥 본인도 있었다는 점이다.

책의 상당수의 지면에서 온갖 종류의 '연'에 대해서 엄청난 독설을 퍼붓는 그녀는 왜 출판기념회에 참석했을까? 설마 저자로써 책의 소재를 찾기기 위해서 방문한 것일까? 그 날의 출판기념회가 우스꽝스러울 것을 미리 알고? 그녀는 사장과의 '인간적 정의' 운운하며 대충 얼버무렸지만,  이 표현 자체가 참석 동기가 사장과의 연 때문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여기서 또다시 의문이 생긴다. 그녀 자신의 '~연'은 건전한 네트워크인가? 인간적 교분은 학연, 혈연, 지연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비이타적인 따뜻함이란 말인가? 그걸 누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학연, 혈연, 지연을 타파하자고 할때는 이런 류의 '인간적 정의'가 다른 가치를 누르니까 학연, 혈연, 지연 등을 극복하자고 하는 게 아닌가. '선배님' 운운하면서 책 갈피에 써넣은 이야기는 학연이 개입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의 화끈함만큼이나 이상한 장면이었다. 차라리 '여성들이여 테러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더럽고 아니꼬와도 기존의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라라고.' 충고를 했더라면,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다른 책에서는 이렇게 충고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안난다.)실제로 김지룡씨의 책에는 이런 류의 글이 있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책과 그녀의 관계도 모순적이다. 책 전반에 걸쳐 엄청난 독설을 늘어놓으면서도 다른 지면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은 비판과 비난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물론 악의적인 비난까지 일일히 듣는 적극적인 자세를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하자. 그러나 최소한의 귀기울임도 필요없을 정도로 그녀는 완전무결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더 나아가 여성잡지처럼 읽히기 위해서 이 책을 썼는가라고 묻고 싶다.

그녀도 우리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 이러한 책을 쓰는 게 아닐까? 단지 책 많이 팔아 돈 벌자고 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도 남의 말에 무관심하면서 한국사회가 그녀의 화끈한 충고를 받아들여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자기모순이다. 생각해 보면, 이 책의 출발부터가 모순이다. 책 제목은 '대한민국은 있다.'인데, 전체적인 내용은 '대한민국은 없다.'에 할애하고 있으니 말이다.

몇 가지 에피소드를 예를 들었지만 그녀의 이상한 모순은 책 전반에 걸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책 말미에 등장하는 대한민국의 긍정적인 모습과 그녀가 제시한 우리나라 살리기를 위한 제언이 상당히 가치가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분량이 짧아서만은 아니다. 그녀의 텍스트를 꼼꼼이 되새김질하면, 형용할 수 없는 이중적인 모습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모순 속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전여옥씨의 지나친 자신감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텍스트에서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맨 처음에 언급한 에피소드에서도 내가 느꼈던 것은 '유학간 그녀'에 대한 '전여옥 그녀'의 경멸감이었다. 어떨 때는 자신감이 지나쳐, 균형감각을 잃어가는 것 같다. 그녀의 독설이 독자에게 쾌감을 주는 데는 분명 성공하고 있지만, 자기중심적인 논리의 모순이 최소한 나는 불편하게 한다. 이 점이 처음에 언급했던 그녀의 비판의 진위여부보다는 비판의 순수성을 의심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녀에 대한 불편함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은 내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전여옥씨는 훌륭한 르뽀작가이긴 하지만 훌륭한 사상가는 아니다. 

'대한민국은 있다'는 현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탁월하게 유추해내고 대안 제시도 깔끔하지만, 문제의식에 비해 대안제시에 힘이 실리지 못하고 문제의식 자체도 약간은 갈팡질팡하는 그녀. 조금 안타깝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회의 모습들을, 특히 우리나라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호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거기까지라는 것이 문제이다. 그 이상으로 나갈수록 그녀의 단점들이 이 책의 가치를 흐릿하게 만든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오히려 전여옥에 대한 반감은 가신 편이다. 그래도 그녀처럼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라고 생각하면 우울해진다. 개인적으로 바램을 가진다면, 그녀가 현상 파악과 비판에만 몰두하지 않고, 대안제시와 약간의 균형감각을 갖춘 논리에 시간을 할애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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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VS 사람 - 정혜신의 심리평전 2
정혜신 지음 / 개마고원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4년 전에 <남자 vs 남자>라는 책으로 잔잔한 재미를 안겨줬던 정신과 의사 정혜신씨의 인물탐구 속편입니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유명인 16명에 대한 심리분석보고서입니다. 16인을 무작위로 나열하지 않고, 특정 정신과 카테고리로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두 인물을 배치시켜 심리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16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명박-박찬욱, 정몽준-이창동, 박근혜-문성근, 심은하-김민기, 이인화-김근태, 나훈아-김중배, 김수현-손석희, 김대중-김훈

일단, 정혜신씨의 글을 읽으면 늘 두 가지에 감탄하게 됩니다. 우선 정신과의사라는 전문직종에 종사하면서도 쉽게 읽을 수 있게 풀어쓰는 '대중적 글쓰기' 능력이 부럽습니다. 어려운 의학적 용어 없이도, 심리분석적인 내용이 쉽게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은 그녀의 탁월한 글쓰기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정 부분은 탁월한 기획력 덕분이기도 하구요. 어떻게 보면 심리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이 남의 머릿속을 헤집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감정적으로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는데, 이 책은 몇 번 읽어도 그런 느낌이 없습니다. 이는 그녀의 글쓰기 탓이 아닐까 합니다.

다음으로는 지은이의 철저한 조사입니다. 이 책은 인물평전임에도 불구하고 흔하디 흔한 인터뷰 하나 없이 쓰여져 있습니다. 분석대상과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함인 것 같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일부러 어렵게 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외부에 공개된 자료 내부에 숨겨진 대상인물들의 면면을 찾아서 조각 맞추듯이 맞춘 책입니다. 조각들을 최대한 맞추기 위해서 방대한 량의 자료를 읽고 고민한 흔적이 책 여기저기에 남아있습니다.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강준만 교수에 대한 존경심을 무색하게라도 하듯이 말이죠. 글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지은이의 노력-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을 분석하기 위해 80년대 초부터의 사설을 모두 읽었다던가, 심은하의 결혼설을 다룬 8700여매 분량의 기사를 모두 읽었다던가-은 정말 살인적인 감동을 줍니다.(물론 이렇게 하는게 '당연'한 걸 수도 있겠습니다. ^^)

정혜신씨의 필력과 철저한 조사에만 촛점을 맞추다보니 다른 부분이 미흡한게 아닐가 하는 의심을 하실 법도 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과의사 답게 그녀의 분석력은 일반 논객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대상 인물을 분석하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책의 기획의도도 책의 내용과 적절히 부합하는 편입니다.(물론 전작에서도 똑같은 기획이었기 때문에 덜 참신할 수는 있습니다. ^^) 두루두루 모난데 없이 만족스러운 편입니다.

굳이 흠을 잡자면, 우선 전작과 동일한 기획이다보니, 조금은 내성이 생겼다는 점. 이 분의 '은밀한' 정치적 성향-전작에서도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사람들의 다수는 강준만, 유시민, 정동영으로 대표되는 열린우리당 계열의 사람이 많았습니다.-에 반 노무현-열린우리당 지지자께서는 상당히 불편함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고도의 프로파간다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정혜신씨가 <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 - 우리 시대의 인물읽기 2>에도 필자로 참여했다는 사실까지 떠올리면 의심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만약에 한나라당을 지지하시거나, 혹은 노무현-열린우리당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면 거북한 이야기들일 수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전작을 읽을 떄와 지금, 정치적인 성향에 변화가 있어서 열광하는 정도가 수그러든 케이스에 속합니다만, 분석 자체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분석은 최소한의 공정성과 합리성을 답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취향이 들어나는 것은 인간으로써 가지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박근혜나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편할 수 있는 부분들을 다 잡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만 너그러워도 충분히 읽힐만한 좋은 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두루두루 장점을 갖춘 책을 만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추리소설에 비유하면, 트릭, 등장인물, 번역상태, 해설, 표지, 책 상태 모든 면에서 맘에 드는 추리소설을 읽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간만에 좋은 책을 본 느낌입니다.

추신) 정혜신씨가 이 남자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특이하다면 특이한데, 아버지의 죽음때문이라고 합니다. 외교관이 꿈이셨던 정혜신씨의 아버지는 그 시대의 아버지들이 다 그렇듯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사셨답니다. 나이가 들어, 우울증에 걸린 채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그 때서야 자신이 정신과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삶에 진정한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때서부터 남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답니다. 참 특이하죠?

정혜신씨의 인터뷰 중에 제가 공감하는 한 대목

“남성들에 대한 심리 서비스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제까지 전무했거든요. 남자들 자신도 더 이상 ‘남자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가부장적인 의미의 ‘남자다움’은 더 이상 대우받지 못하는 세상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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